최근 마셨던 편의점 커피 중 가장 특이하다

오크통에 숙성한 럼주 같은 향이 나는데

제주 서귀포에 있는 코데인커피로스터스에서 마셨던 커피 같다.
다른 어떤 유명 강남 성수 까페에서도 마셔보지 못했던 감각경험이다

물론 TOP 배럴 에이지드는 조금 톤 다운 되었고 향료가 시간이 지나면 조금 사라지는 반면 실제 추출한 코데인온더락은 가일층 짙고 강한 맛이다. 역시 공장생산, 피지컬 에이아이시대에 핸드추출이 답이다.

커피를 내려 다시 숙성시켜 만드는 기법이 흡사
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을 증류하고 다시 오크통에서 장기간 숙성시키는 꼬냑 레시피를 닮았다

향을 가미해 대량양산해 편의점에 보급했다
가향커피 바샤에서도 못 낸 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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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출시된 프랭크버거 정호영에디션 먹었다. 완성도가 괜찮다.


프랭크버거는 신중하고 영리한 F&B다.


30-40대 와퍼의 제왕은 버거킹,

감튀의 완성도와 전용 콜라와 인지도는 맥날,

가성비 치킨의 제왕은 맘터,

컨셉과 실험도는 롯데리아(과거엔 10-20대 중심이었지만 그 충성세대가 그대로 나이가 들어가는 듯 보인다)인 상황에서


치킨 승부수를 조심스럽게 띄웠다.


치킨으로 시작해 비프를 추가한 맘터보다는 운용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비프메뉴 출시 위해 비프 굽는 설비를 추가하고 LAB매장을 신설해야했다. 프로모션는 동시에 발신했으나 소비자경험에서는 매장별로 시차가 있었다. 당장 제공되는 업장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지도를 보고 복잡하게 찾아가야했었다.


프랭크버거는 가성비와 완성도를 모두 잡은 높은 수제패티를 직접 구워주는 기획에서 시작해 치킨을 추가했다. 감튀때문에 이미 모든 매장에 튀김기가 마련되어있어 치킨 메뉴를 더하는 것은 쉽다.


문제는 어떻게 차별화를 둘 것인가에 있었다. 


치킨버거의 경쟁자는 시장에 널렸다. 잘못 진출하면 감도 높은 소비자들에게 멍석말이 당할 수도 있다.


매장 수는 현저히 적지만 번, 튀김, 소스 모든 면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파파이스가 있다.

폭풍 할인전술로 박리다매를 추구하면서 오리지널치킨 하나의 시그니쳐는 가져가고 켄치밥 등으로 라인업을 다변화하는 KFC도 있다.

싸이버거는 치킨버거의 레전드다.

버거킹도 BHC에 밴드왜거닝해 콰삭한 치킨버거 라인업을 넣었다.

이에 발끈한 BHC는 자체 양념치킨버거도 출시하기도 했다.

전통적인 롯데리아의 분쇄육 가성비 치킨버거도 무시할 수 없다. 이 소스에 유년시절부터 어린왕자의 여우처럼 길들여진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 치킨버거로 포인트를 줄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일식까츠버거였다. 

그런데 모스버거가 이미 그 맛은 길들였다. 매장 수가 급감하긴 했어도 일본 원조 프랜차이즈다.

과연 가능할까?


먹어보니 일식까츠풍의 오코노미야키는 쉬림프로 배치하고

치킨은 일식튀김으로 하되 치폴레소스로 킥을 주어 일식에서 살짝 미국적 감성을 넣었다.


바삭하되 딱딱하지 않다. 추천할만하다. 버거킹 유용욱 와퍼처럼 자기주장이 강한 복합풍미의 소스가 점성의 저항도를 과하게 올리지도 않고 맘터 김풍처럼 아삭한 피클과 액젓풍 소스, 시래기와 누룽지와 버터도우, 파인애플과 코코넛과 매콤한 삼발소스라는 기이한 조합도 아닌, 일식의 중심을 확고히하며 완성도와 밸런스있는 버거다.


기본적으로 수제비프패티는 그대로 가져가고 연구개발 완료해 공장에서 조리해 냉동한 일식튀김치킨패티를 공수해 튀김기에 넣고 조리한다는 일련의 과정이 비프+치킨을 양립가능하게 한다.


양말 100원으로 눈길을 끌지만 사실 더 비싼 가격을 제시하는 미끼상품기법, 유인가격전략에 특화된 프랭크버거답게, 치킨버거 기본은 3900원이라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 윗 라인업은 4900원, 5500원이고 둘이 합하면 10400원인데다가

세트메뉴는 조금 비싼 만 원대다. 


신제품의 경우 단품과 세트 가격차이가 4700원인데 4700원이 결국 감튀콜라 가격이다.

3900원->8600원 4900원->9600원, 5500원->10200원


프랭크버거는 일단 3900원 미끼(베이트)에 끌려 매장에 들어오면 여러 비싼 버거의 라인업이 있어서 이것저것 시키면 돈이 조금 든다. 그만큼 가격 다변화를 잘 시켰다.


감튀콜라의 가격을 할인하지 않고 표면화시킨다는 점이


버거킹 맥날 등이 기본가격을 올리고 그 안에 경상비를 포함시킨 후 감튀콜라 세트 가격을 대폭할인해주는 전략과 반대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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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엄의 접근성에 관한 글에 영국 내셔널갤러리 일화가 재밌어서 채선생에게 번역해달라했다.


19세기 중반, 박물관은 공원처럼 공공공간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개방성은 곧 많은 방문객의 유입으로 이어졌고 그에 따라 예술 작품을 보존하고 감상하는 본래의 기능에는 일정한 마찰이 발생했다. (...)


“나는 많은 사람들이 국립미술관에서 식사를 하거나 더위를 식히거나 모임공간으로 쓰는걸 보았다… 나는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림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는 여러 장면을 목격했다.


한 번은 시골에서 온 듯한 사람들이 식료품 바구니를 들고 왔다. 의자를 꺼내 앉았는데 매우 편안해 보였으며 음식과 음료를 즐겼다. 내가 그들에게 이런 장소에서 그런 행동이 부적절하다는 점을 조심스럽게 알리자, 그들은 유쾌하게 응수했고, 한 여성은 나에게 진 한 잔을 권하며 자신들이 가져온 것을 함께 나누자고 했다. 나는 이러한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라켈 프리에라의 퍼포먼스 작업의 기반이 된 1850년 「국립미술관 특별위원회 보고 및 회의록」에서, 한 박물관 관리자가 설명한 내용


https://blog.museunacional.cat/en/museums-and-res-publica-from-the-crowded-museums-performance-by-raquel-friera/


In the mid-19 th century, the museum was understood as a public space in the same way that a park was. This accessibility meant that it soon experienced a notable influx of visitors with the friction that this entails in its work of preserving and contemplating works of art. As the museum manager explains in the Report and Minutes from the Select Committee on the National Gallery (1850), which forms the basis of work for Raquel Friera’s performance:


“I have seen that many people use it [the National Gallery] as a space for eating, for cooling off and for meetings… I have observed many things that show that many people who come, do not really come to see the paintings. On one occasion, I saw some people, who seemed to be people from the countryside, with a basket of provisions. They pulled out chairs and sat down, and they seemed to be very comfortable, they had food and drink, and when I suggested to them the inappropriateness of such behaviour in a place like this, they responded with good humour, and a lady offered me a glass of gin and wanted to share what they had brought. I explained to them that these things could not be toler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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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에 관한 24가지 질문 - 돈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김지찬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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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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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ailynous.com/wp-content/uploads/2022/09/sprague-must-philosophers-be-obscure.pdf



사우스 캐롤라이나 명예교수 Rosamond Kent  SPRAGUE의 글


독자가 아니라 주제에 맞춰서 쉽고 명료하게 쓰라

독자에 대한 고려를 주제에 대한 고려에 종속시켜라


요컨대 철학자가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체상의 요점은 세 가지다


첫째, 표현을 사유와 동등한 수준에 두고 장황함과 난해함이 반드시 위대한 정신의 표지라는 생각을 버리기


둘째, 특정 주제에 적합한 구조와 용어의 명료성을 얻기 위해 의식적이고 지속적인 자기비판을 수행하기


셋째, 은유와 예시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다음은 앞 부분 일부


좋은 문체는 진지한 철학적 글쓰기에서 언제나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철학자가 글을 잘 쓴다고 말하는 것은 종종 그가 그다지 훌륭한 철학자는 아니라는 뜻을 암시하기도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읽기 쉬움을 깎아내리려는 경향이 있고, 윌리엄 제임스의 명료함을 철학적 경박함의 증거로 보려는 태도도 있다. 앙리 베르그송의 우아함은 칭찬받기보다는 용서받아야 할 것으로 취급되며,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한편으로는 문체가 뛰어나다는 찬사를 받으면서도 곧바로 이류 형이상학자로 분류되기도 한다. 실제로 난해함은 심오함과, 명료함은 피상성과 연결 짓는 관습이 존재한다.


그러나 철학은 결국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 무엇인가를 전달하려는 작업인 만큼, 다른 문학 예술과 마찬가지로 문체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모든 인간 가운데서 가장 일관되고 진지하게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이 철학자라면, 그들은 표현의 명료함과 적절성을 위해 누구보다 부지런히 애써야 한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비틀거리는 문장과 사전식 낱말로 자신의 사유를 기꺼이 꾸미려는 글쓴이는 자신의 생각을 거의 존중하지 않는 셈이다.


다행히도 진정으로 위대한 철학자들은 문체의 기이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대하게 남는다. 문제는 그러한 결함이 끼치는 영향이다. 제자는 스승의 사고 방식은 따르지 못하면서 말투만 쉽게 흉내 내기 마련이다. 참된 철학자에게서는 단지 불행한 버릇에 불과한 구조의 뒤틀림이나 무미건조한 표현이, 추종자들에게서는 적극적인 해악으로 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지식 탐구는 기존의 언어로는 담아낼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사유를 낳는다는 인상이 지속되는 한, 난해함은 여전히 존중받는 철학적 글쓰기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어쩌면 철학자들 스스로가 이러한 신화를 퍼뜨리는 데 일조했는지도 모른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난해한 그리스어로 글을 썼고, 그 대가로 무시가 아니라 ‘어둠의 철학자’라는 경외의 칭호를 얻었다. 추상적 사유의 활동은 많은 이들에게 신비롭고 두려운 것으로 보이며, 신비한 기술을 다루는 장인의 역할은 대부분의 철학자에게 그리 불쾌한 일이 아니다. 마치 전문 저글러가 때때로 접시를 떨어뜨리며 자신의 기교를 과시하듯, 철학자는 때로 우리를 자신의 생각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애쓰는 듯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깊은 사람인지를 상기시킨다. 우리는 종종 그 애쓰는 모습에 감탄하며 철학이란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가를 스스로 납득한다. 그러니 철학자가 모호함이라는 마법의 망토를 붙들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직업에는 비밀이 있는 법이며, 철학자의 비밀은 어쩌면 때때로 의도적으로 흐릿하게 말하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철학자가 실제로 언어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발견을 한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전달하려는 순간, 그는 문법의 규율 아래 놓이게 된다. 철학적 사유의 언표 불가능성 문제는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우리는 표현의 내용이 아니라 표현의 방식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철학자가 본질적으로 표현 불가능한 사유를 자신이 지니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적어도 그것이 표현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플라톤의 신화들은 논증의 흐름 속에서 설명적 언어가 오히려 명확하게 하기보다 혼란을 야기했을 지점에 정확히 등장한다.


따라서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문체적 미덕은 명료함이다. 설령 그 명료함이 어려운 것을 쉽게 보이게 만드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이다. 철학자들은 너무 오랫동안 이성의 빛 속에서 유희해 왔다. 이제는 동굴로 돌아갈 때다. 명료함이라는 큰 범주 아래에서 특히 중요한 두 가지는, 용어의 명료성과 구조의 명료성이다.



다음은 중간 부분 일부



지금까지 나는 문체의 명료성과 밀접하게 연결된 한 가지 문제를 의도적으로 피해 왔다. 바로 독자의 문제다. 철학자는 명확하게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 명확성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규정하지 않으면 그 주장은 큰 힘을 갖기 어렵다.


이 글 전반에 걸쳐 내가 암묵적으로 전제해 온 것은, 철학자는 진정으로 이해되기를 바라며,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되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동시에 철학과 철학자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진지한 존중은, 독자층을 넓히기 위해 수준을 낮추는 글쓰기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문제는 자신과 자신의 주제에 걸맞은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독자에 대한 예의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접근 방식이 있다. 하나는 독자에 맞추어 문체를 정하는 것으로, 이 경우 문체는 어느 정도 주제를 규정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주제에 맞추어 문체를 정하는 것으로, 이 경우 문체는 어느 정도 독자를 규정하게 된다. 다시 말해, 어린아이를 위해 고급 미적분 교과서를 쓴다면, 그 내용에 충실하지 못한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대로 문체가 진정으로 적절하다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기초 단계를 이미 익힌 사람들로 한정될 것이다.


나는 진정한 철학자라면 언제나 두 번째 길을 택하여 독자에 대한 고려를 주제에 대한 고려에 종속시킨다고 믿는다. 그는 독자에 따라 서로 다른 문체를 구사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진정으로 교양 있는 사람이 여왕에게 대할 때와 하녀에게 대할 때 태도를 달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의 구조는 단순하고, 용어는 명확하여, 해당 주제를 이해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즉각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이해 가능한 이들이 어떤 배경지식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는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을 주제를 소수만 접근할 수 있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며, 전문가의 영역에 속하는 주제를 대중에게 맞추기 위해 희석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겉보기에는 독자를 가장 덜 고려하는 듯한 글쓴이가, 사실은 독자를 가장 많이 고려하는 사람이다. 주제가 아니라 독자에 따라 문체를 바꾸는 철학자는 독자를 아직 다룰 능력이 없는 전문적 문제에 대해 반쯤 이해한 상태로 유혹하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독자에 대한 태도에 관한 이러한 주장은 비현실적이고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여론의 압력은 문체 문제에 신경 쓰게 만드는 강력한 동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적 기준을 제거하면 철학자 개인의 이상주의라는 내적 기준만 남게 된다. 이에 대해 나는 바로 그 이상주의에 호소하고자 한다. 스스로를 철학자라 부른다는 사실 자체가 철학의 주제와 그것을 전달하는 언어에 대한 존중을 전제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일정한 자기 존중을 전제하는데, 진지한 철학자는 자신의 사유를 가장 돋보이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상주의 일반에 대한 변호로서, 우리는 노력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라도 완전주의적 입장을 정식화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상이 좀처럼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것을 폐기해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높은 문체적 기준을 요구하면 적어도 두 가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철학자가 자신의 문체를 주제에 맞추라는 권고를 받더라도, 그 적합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결국 그의 취향과 양심뿐이라는 점이다. 여기에서도 외적 압력이 제거되면서 주관적 판단 기준이 강조된다. 이에 대해 나는 자기비판 능력을 가장 잘 발휘하는 사람이 생각과 언어를 가장 잘 결합시킬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 자기비판의 기술 역시 개인의 노력과 시간에 따라 충분히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 다른 반론은 미학적이다. 명료성과 표현의 적절성만을 기준으로 삼는 글은 필연적으로 황량하고 생동감 없는 문체로 흐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이를 단호히 부정한다. 은유나 예시, 심지어 매력조차도 이러한 이상과 양립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철학사 입문 강의에서 학생들이 무엇을 기억하는가? 임마누엘 칸트의 범주에 대한 선험적 연역도 아니고, 조지 버클리가 존 로크를 비판한 세부 내용도 아니다. 대신 제논의 날아가는 화살, 플라톤의 날개 달린 영혼, 르네 데카르트의 기계 인간, 그리고 데이비드 흄의 당구공 같은 이미지들이다. 이러한 것들이 상상력에 각인되어 철학에 생기와 색채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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