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의 원리
오바 와타루 외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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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의 예술: 건축, 조각, 회화, 문학, 무용, 음악

제7의 예술 : 시네마

제8의 예술 : 기술 기반 영상예술(사진/TV/라디오)

제9의 예술 : 만화


1911년 리치오토 카누도가 예술범주를 정의한 이후 외연이 종종 확장되어 왔다. 이때, 9번의 정의에 소년망가 뿐 아니라 그래픽노블, 옛 코믹, 웹툰을 모두 포괄하자


예술을 독해하는 시각적 훈련은 상호 보완적이라 느낀다.

정지된 스틸컷으로서 회화를 탐구하면서 얻게 되는 인사이트는 만화에도 사용되고, 건축과 음악을 공부했다면 그것이 시청각 영상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만화를 진지하게 접근하는 책이 있다면 찾아 읽어왔는데 특히 제작과정을 설명해주는 기술적 책이 도움 되었다. 마치 영화제작과정을 아는 것이 더 나은 영화감상에 도움이 되고 스토리작법과 미학윽 이해하면 문학연구에 도움이 되듯이.


최근에 읽은 만화의 원리가 참 좋았다. 만화의 컷은 몽타주와 같다. 시선의 이동, 주고받기의 연쇄, 정해진 폰트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이 부분도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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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픈한 리만머핀 2층 알렉스행크 드로잉 꽤 흥미로웠다.

1층엔 장욱진 서세옥 이응노의 그림이 있다. 먹의 농담으로 인물을 표현한 서세옥과 이응노의 그림은 보통 대전이응노나 평창가나에서 보곤하는데 이태원같은 힙한 이국적 동네에서 이런 옛 그림을 보리라고 생각하지 못해 신선했다. 이응노의 사람들은 늘 기세등등한 에너지가 느껴지고 그 많은 이의 포즈가 다 다르다. 먹으로 표현한 라틴 사교댄스식 손 맞잡고 있는 모습이 특히 눈에 띄는데 동양형식에 담긴 서양아이디어같아 자못 현대판 동도서기가 따로 없다.

개중 장욱진 강풍경과 농촌풍경은 자주 볼 수 없는 희소한 작품이었다. 요즘 전시장 가서 사진 안 찍어서 사진이 없고 아마 나중에 더 전문가들이 찍어서 올려주겠지 싶다

스위스 알프스 자작나무 위에 흑연으로 그린 드로잉 5점으로 선과 털묘사, 윤곽과 명암처리에 독특한 점이 있었다.

공식소개문의 일부에서 왜 이 물성에 이 형태인지 이해해볼 수 있다

˝자작나무는 초상에 분명한 무게감과 저항감을 부여하여 인물의 신체적 존재감을 강화한다. 인간의 혈관을 연상시키는 뚜렷한 나뭇결은 단순한 지지체를 넘어 능동적인 구성의 바탕으로 작용한다. 반면 흑연은 섬세함과 즉각성을 도입하여, 대형 작업임에도 종이 위 드로잉의 자발성을 유지한다. 이러한 부드러움과 구조 사이의 상호작용은 드로잉 속 인물들을 움직이게 하는 정체성, 권력, 친밀성의 미묘한 협상을 반영한다.

물질적 긴장을 통해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기 확신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취약한 존재로 드러난다. 종종 내면의 세계에 몰두한 이들은 완전히 접근되는 것을 거부한다. 작가가 대상에게 기울이는 지속적인 집중은 분명하다. 친밀성은 인물들이 드러내는 만큼 숨기기도 하는 태도에서 발생하며, 사적인 영역과 관찰하려는 예술가의 충동 사이에 긴장된 공간을 만들어낸다.˝

https://www.lehmannmaupin.com/exhibitions/alex-hank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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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서울 미술관이 오늘 을유일에 개관해서 느즈막하게 들러보았다. 금천구는 거의 처음이다. 신림-시흥-구로-가산 근방인데 나의 이미지는 성남시 태평동 같은 빌라촌이었지만 왠걸, 미사 위례급 재정비된 신도시였다. 광명 같은 베드타운 같았다. 지하철 접근성이 1호선 신창행 밖에 없다는 것만 빼면 겉모습은 재정비된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단지였다. 그 대단지 부동산 가격을 상승시켜 줄 강릉솔올급의 랜드마크로 서서울미술관이 있었다. 옆의 금나래초등학교와 금천문화체육센터, 공원과 함께 지역주민의 복지로는 최고로 보였다.

건축은 흥미로웠다. 디디피처럼 동선에 따라 보이는 광경이 달랐다. ˝이곳에서 우리는 천천히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 - 안양천˝ 같은 뒷마당 표지판이나, 지하입구에 ˝시간이 넉넉하신 분들은 이곳으로 입장할 수 있습니다˝같은 큰 폰트의 안내가이드는 예술가의 위트를 한 스푼 넣은 듯했다. 물론 개관퍼포먼스를 놓치긴 했지만 그외에 딱히 아직 볼 만한 전시는 없었다.

작년 5월 무술일에 창동 서울사진미술관 개관했을 때도 당일에 갔는데 차이점은 사진미술관은 전시라고 할 만한 것이 있고 서서울은 퍼포먼스 기반 미술관이라 지금으로서는 일반관객이 마땅히 볼 프로그램이 없었다는 점이다. 해당 시공간에 포박되었으나 휘발하는 사건중심의 행위예술은 수행하는 사람이 관건이다.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퍼포먼스라고 읽고 일종의 심리치료와 미술담론과 결합되어 리뉴얼된 예술연극로 읽을 수도 있는데 퍼포먼스든 연극이든 건물보다는 사람이 중요하다.

바로 앞에 거대한 상가가 있고 스벅 투섬 롯데마트 자본주의의 편의시설은 빠짐없이 도열해있다. 심지어 미술관 안에도 이디야가 입점했다. 그러나 본래 기획했던 기후위기는? 페미니즘은? 퍼포먼스는? 뉴미디어는? 아직 미비해보이고 그것이 채워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외면은 좋았다. 내면은? 판단중지. 아직 모르겠다.
롯데캐슬아파트 입주민의 산책코스와
마실장소가 아니라 서울 전역의 시민과 나아가 글로벌 뮤지엄러버들이 먼 길을 마다하고 방문할 콘텐츠 중심의 장소가 되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서울사진미술관은 개관전도 알차고 좋았고 앞으로도 보여줄 콘텐츠가 가득해 차려놓은 것은 없지만 많이 먹어의 느낌이었다. 그리고 최초사진전문 뮤지엄으로써 뚜벅뚜벅 걸어 나가고 있다. 함께 걸어가주었으면 좋겠다. 모쪼록 잘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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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23글
대충 생각해보는 메가서울권 전시장 특징

예쁘고 비싼 것을 무료로 보고 싶다면: 북촌, 서촌, 성북, 청담, 한남, 청담의 갤러리
예쁘고 비싼 것을 유료로 보고 싶다면: 예전 한가람, 리움, 롯데

우리 것을 보고 싶다면: 국중박, 예전서예, 국현미 덕수궁, 민속

지역의 강자: 강동의 소마, 성북의 석파정, 은평의 사비나, 파주의 미메시스+헤이리, 광화문의 세화/성곡, 기흥의 백남준, 안산의 경기도미술관

인스타그래머블한 힙한 전시: 그라운드시소, 푸투라, 성수

서울시립미술관 SeMA 분관특징
1) 북서울: 매년 타이틀매치 흥미로움, 아래층 어린이전시는 매우순한맛, 윗층 성인?용 현대예술 전시는 매우매운맛
2) 본관: 걍 믿고 봄(2층 늘 천경자 선생님)
3) 남서울: 건축(1층 권진규 상설조각, 2층 대체로 건축)
4) 평창아카이브: 작가연구. 전시를 보러가서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나옴
-여의도벙커는 이제 없는 듯. 특이한 공간이었음
5) 서서울: 기후환경, 도시미디어,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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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애플을 먹었더니 입에 가시같은 이물감이 있어서 채선생에게 물어보니...(나는 과학과 영양학을 채선생에게 많이 물어보는 편이다)

웃었다

요즘 사용자들이 기분 좋아서 얘도 신났나 왜 자아가 바뀌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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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아까 까페에서 우다다 써서 비문이 많음)





리움 티노 세갈전은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미술이란 무엇인가? 모두 SNS에 전시사진을 올리는 시대에 미술관은 어떠해야하는가? 를 생각해보기 좋은 전시다.

어떤 의미에서 행위예술이 한국에 다소 늦게 메이저 전시실에 들어온 감도 있다. 리움 앞마당의 페이스갤러리와 아마도미술공간에서는 리움의 위성으로서 같은 테마를 동기화해서 70년대의 수행예술의 효시 이건용과 조영주의 행위예술 영상도 상영하고 있다. 더불어 행위예술의 반복 수행성을 데리다의 차연으로 생각해보기 좋은 동선이다.

티노 세갈은 사진영상촬영을 금지해 관객이 모두가 다른 경험을 기억 속에만 간직하도록 디자인했다. 순간의 경험은 이진법으로 구성된 디지털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뇌내 기억으로만 남고, 같은 전시를 왔더라도 저마다 다른 시간에 다른 각도와 다른 입장에서 상호작용이 구성된다. 다시 말해, 퍼포머를 보는 관객과 관객을 보며 그들의 카메라를 주시하며 관리하는 요원과 관객의 따가운 시선을 감내하며 동작을 수행하는 퍼포머들 설령 같은 시공간에 위치했더라도 다른 기억을 갖게 된다.

입구에선 컨템!폴러!리!하며 덩실덩실 춤추는 퍼포머가 맞아주어 발랄한 주토피아 분위기로 시작한다. 극I라도 두려워할만한 위협은 없다.

로비에서는 퍼포머 세 명이 기둥을 만지고 쓰다듬고 화음으로 노래하며 이들이 뭐하는거지 하는 관객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받는다.

이어, M2 입구에 있는 일본 상점의 노렌, 장지문, 한국 사찰의 하마석처럼 문지방 역할을 하는 초록색 비즈커튼(무제-시작)이 고정적이지 않은 행위예술의 시작점을 구분해주고 자전거, 축구, 바이올린 퍼포머들이 움직이는 장면을 바라본다. 언제 누가 어떤 동작을 수행하는지는 모른다. 여기서 관객은 이제 선불교의 깨달음을 제각기 추구해야하는 과업을 떠맡게 된다. 명시적 가르침 없이 각자 알아서 도를 깨쳐야할 것. 앞의 퍼포머는 열반을 지연하고 우리 앞에서 가르침을 드러내는 부처다.

가장 큰 전시장에서 하는 이 구성은 분기별로 바뀌니 그 누구도 같은 전시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주토피아에서 느릿한 북유럽 인디영화 분위기로 전환하더니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14점에 둘러싸인 방의 <키스>에선 <어바웃타임> <노트북> 같은 로코풍 진한 로맨스로 톤체인지한다. 물론 <색, 계>, <폭풍의 언덕>까지는 아니다.

남녀 두 퍼포머가 바닥에 누워 이미 정해진 안무 가이드라인에 따라 천천히 로댕과 클림트와 뭉크의 키스와 제프쿤스의 메이드인헤븐의 포즈를 수행한다.

같은 안무를 반복하지만 퍼포머-관객-시공간의 조합은 다르다. 이런 반복 수행성은 데리다의 차연을 호출해 설명함이 좋다.



엘베를 타고 1층에 올라가면 로댕 조각 포즈(아리아드네)로 바닥에 누워 천천히 움직이는 퍼포머를 권오상의 미국 백인 중년 남성풍 조각(캄보드)이 벽에 기대어, 동양 젊은 여성풍 조각(Bbd)이 누워 바라본다. 브리콜라쥬를 차용한 권오상의 조각과 그 곁으로 개념미술의 창시자 솔르윗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수행성, 차연, 구성주의와 개념적 관련성이 있어서다 자코메티, 최만린, 이우환의 관계항, 고 강서경 작가의 조각 모두 행위예슬의 의미를 톺아보기 좋은 현명한 배치다.

이런 일련의 경험을 지나 보는 이는 물질 없는 예술이란 곧 최종적으로 고정된 물성있는 작품만 미술이 아니라 순간의 행위와 일시적 상황으로만 고정되는 것도 작품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큐레이터의 논문투 전시설명이 많았던 다른 전시와 달리 설명문도 최소화되었다는 것도 발견하게 된다.

행위예술의 선구자 Marina Abramović(와 연인관계)나 광주비엔날레 감독으로 초빙된 니콜라 부리오는 우리나라에 어느정도 유통된 이름이다. 특히 부리오는 관객 사이의 관계 자체가 작품이라는 그의 관계적 미학을 판소리 마당에서 관객이 즉흥적으로 추임새를 넣는 것에 착안해 비엔날레를 기획했다.

티노 세갈은 이런 맥락 속에서 한결 더 나아가

작품은 오브제가 아니라 사건 즉 이벤트라는 점을 부각시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잠깐 발생하는 상황성에 주목한다 리움은 세갈 전시를 통해 고미술 컬렉션 소장중심 미술관이라는 기존 고착된 이미지에서 프로젝트 기반으로 변하며 라이브 경험을 생산하는 기관으로 탈피를 시도한다.

세갈은 디지털의 최전선을 달리는 서울 중심부에서 가장 비디지털적 예술을 시도하고, 초고속 통신망과 5G의 한복판, 반도체 생산의 메카에서 SNS와 클라우드와 NFT같은 디지털 아카이빙을 금지함으로써

관객을 포스트 휴먼시대의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예술이란 무엇인지 학습시키고 이와 함께 리움미술관을 물건을 전시하는 수장고에서 경험을 생산하는 맞춤형 장소로 환골탈태하게끔 한다.

이런 맥락에서 티노세갈전에 들어 온 사람이 작품을 찾고 보는 순간 작품 속에 들어와 작품의 일부로 구성됨을 경험한다. 퍼포머는 의례를 행하고 관객은 현장 공연에 참가해 기록이 아니라 기억만을 남긴다.

이런 방식의 개별사건 중심 예술은 예술을 소비하는 방법을 전환하는 실험 프로젝트다.

그러니까 세갈은 아무리 노동집약적이라도 거래가능한 최종 완성본 형태로  존재하는 캔버스, 물성있는 조각(근처 타데우스 로팍에선 김주리의 거대한 웻소일이 있다), 파일영상으로 의미를 정박시키기를 거부하고, 이런 점에서 예술의 존재론(온톨로지)를 스나이퍼철럼 겨냥해 타당하고 고정관념을 깨부시며 일갈한다.

미술은 잠깐의 대화, 매번 바뀌는 정해진 몸짓, 일시적 상황일 수도 있다고.

이런 시각에서 <키스>를 보면 바닥에서 서로 천천히 자세를 이동하며 미술사의 익숙한 연인포즈를 보여주는데 분명 정확한 동작순서를 루프 구조로 반복하는 게 보인다.

앞서 언급한 유명 키스도상을 부분적으로 인용하지만 완전히 똑같이 재현하는건 아니고 몸의 구도만 차용한다. 어차피 완벽한 재현도 없고 그를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니며, 그저 회화사에서 사랑을 표현한 몸의 문법이 벽에 붙박힌 그림과 받침대 위의 조각에서 떨어져, 완성태로서 그림이 아니라 그림이 움직이는 것을 보게된다. 사진촬영 금지라는 정언명령 속에서도 이미 이미지는 살아 있는 복제다.

그림은 신체화되고  이미지는 사건화되며 역사는 현재화 된다. 훈련된 안무 퍼포머들은 특정 포즈를 오래 유지하지 않고 다시 다른 제스쳐로 이동하는데, 몸의 연속적인 변환이라는 과정 속에 일종의 살아있는 조각같기도 하다.

자크 데리다는 차이 속에서 의미가 생기고 고정된 본질로서 의미는 없고 그저 반복 속에 계속 생성된다고 말했다. 그의 차연 개념이다. 디페항스라는 같은 음성이지만 처자를e에서 a로 바꾼 창의적인 기획이었다. 의미는 항상 반복되지만 같지 않다. 이에 감화를 받은 주디스 버틀러가 젠더와 사회적 규범으로 수행성을 확장할 때도 핵심은 반복에 있었다.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만 언어, 규범, 젠더, 의미가 존재하지만 완전하게 동일하게 반복되지는 않는다. 반복 가능성 속에 있는 미세한 차이는 맥락 때문에 생긴다. 같은 기호, 같은 문장, 같은 제스쳐, 같은 의례도 다른 시공간, 다른 화자, 다른 맥락 속에서 의미가 바뀐다. 세갈도 같은 안무, 규칙, 작품이지만 미술관 장소적 특성과 관객특성에 따라 매번 다른 의미를 낳기에 동일한 작품도 매번 다른 사건이 되는 것이다. 데리다의 차연적 반복을 적절히 설명하는 예시다.

퍼포먼스 예술의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매번 현재적인 것 같음에도 순수하게 완전한 현재가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예술이라는 점이다. 왜냐면 정확히 같은 퍼포먼스는 절대 다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복될 때마다 변하기 때문이다. 무상, 즉 반복되는 세계에서 동일한 것은 없다.

반복은 동일성을 만들지 않는다. 반복은 차이를 생성하고 그 차이가 의미를 만든다. 따라서 수행성은 차연의 실천적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은 퍼포머와 관객과 장소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펄럭이는 깃발 같은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조금 더 고전으로 들어가보자면 판타레이(πάντα ῥεῖ), 즉 모든 것은 흐른다고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유전론자(流轉, flux)가 떠오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No man ever steps in the same  river twice!"

우리는 같은 강에 들어가지만 동시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이다.

(ποταμοῖς τοῖς αὐτοῖς ἐμβαίνομεν καὶ οὐκ ἐμβαίνομεν)

강이 흐르며 물이 계속 바뀌므로 같은 성분의 물에 담그지 못한다. 그러니 같은 강이 아닌데, 강 이름(로고스)는 동일하니 동일성은 유지된다. 전시의 이름은 무제인데, 무제라는 이름만 동일하고 그 안의 변화하는 퍼포먼스는 퍼포머의 상태와 분위기와 관객의 응시에 따라 매번 다른 것과 같다.

헤라클레이토스가 강은 동일하지만 동시에 동일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나 데리다가

기호는 반복되지만 동일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나 같다는 말이다.

공통분모는 동일성은 반복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

그런데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고 싶다. 헤라클레이토스 더 급진적인 유전론자였던 크라튈로스(Cratylus)와 세갈이 닮아 보인다. 이미 벤야민적 디지털 영상 복제시대에 유전론은 테스트되었고, 사진촬영, 기록금지라는 


세갈의 아이디어는 극단적인 유전론자 크라튈로스에 가깝다고 본다. 애초에 동일성도 없다. 기록된 것도 없다. 같은 전시도 아니다.

플라톤의 대화편과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인용문에서 단독저서없이 발언으로만 간접 언급되는 크라튈로스는 같은 강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 자다.

헤라클레이토스를 더 밀어붙여 단 한 번도 같은 강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디지털 영상시대 반복수행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기록금지를 요구한 오직 순간의 차연으로만 존재하는 티노 세갈의 생각이 크라튈로스와 맥을 같이한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헤라클레이토스는 강은 계속 변하더래도 강이라는 동일성은 유지된다고 생각했는데(변하지만 로고스는 존재)

크라튈로스는 변화가 너무 급진적이어 동일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강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았던 리움 티노세갈전의 이벤트들이 과연 같은 전시인가? 개별적으로 관객은 관람했다는 일, 퍼포머는 수행했다는 일, 관리요원은 감시했다는 일만 있고, 애초에 동일성이 있다고 조차 말할 수 없다.

같은 시공간에서 같은 사건을 본 무리조차도 같은 혀를 공유하며 대화를 나눌 수 없다 .그만큼 설명텍스트도 결여되어있고 오직 퍼포먼스를 보는 나만 명징하고 나머지는 다 가변적이다.

단어를 말하는 순간 대상은 이미 변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처럼 관측하는 순간 위치가 바뀐다. 그래서 말도 않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했다. 동일성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전시장을 나와 까페에 앉아 서로 느끼고 본 것을 말하는 순간 의미가 미끄러진다.

데리다의 차연에서 기호는 대상을 고정하지 못하기에 의미는 계속 미뤄진다. 언어의 불안정성

기호와 대상의 간극.. 의미의 지연. 아 화장실 가야해서 여기까지만. 아메리카노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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