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하게 나는 어제 브뤼셀 프라이를 갔었다. 청주 길가에 있는 랜덤한 가게였다. 러시아어를 하는 다문화 가족이 키오스크 ㅅ용에 애를 먹고 있었고 무슨 메뉴를 시킬지 토론하고 있었다. 줄이 너무 길어지자 매니저가 앞쪽에서 도와준다고 해서 앞서 가서 주문했다. 한국사람의 시스템 활용에서 융통성이 엿보인다. 외국 어느 공항에서 연착된 비행기의 짐들이 섞였는데 직원들이 우왕자왕하자 한국 아줌마 아저씨들이 적극 나서서 이름표보고 김사장님 최사모님 하면서 대신 나서서 짐 분배하고 시간 세이브해서 일처리를 했다는 어느 소감을 읽었던 적이 있다. 일본인은 이런 상황에서 매뉴얼이 없고 아마 무작정 기다릴 것이다. 외국인들은 음식 앞에서 오랫동안 무엇을 먹을지 토론하는 과정 자체도 하나의 문화다. 너는 무엇을 좋아하니까 이것을 먹고 나는 이것을 좋아하니까 이것을 먹고, 그럼 이렇게 시킬까? 이런 조합은 어때? 너 저번에 이거 먹었잖아. 이게 뭐야? 이 메뉴는 무슨 음식이야? 이건 이거야 아 그럼 이거 먹을래 아냐 저게 나아 잠깐 여기 사이드가 있다는데? 이건 뭐지? 그런데 키오스크를 설치한 매장의 의도는 회전율에 있었을테니 뒷 주문을 먼저 받기 위해 인터셉트했다. 중앙아시아에서 왔을 법한 가족의 이해할 수 없는 러시아어를 다 들어줄 여유가 당장 오늘 매출을 걱정해야하는 한국의 자영업자에게는 없다. 내가 주문을 받고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어의 어려움과 키오스크 구동의 어려움이라는 이중 문제에 고초를 겪고 있던 가족이 어렵사리 주문을 마치었는데 직원이 소스를 선택하셔야한다고 하니 어눌한 한국어로 "꼭 해야 돼요?"라고 답했다. 직원이 "안 하셔도 돼요"라고 하자. "오 네 좋아요 감사해요"하고 답했다. 십 종 이상의 소스의 다양함이 아니면 브뤼셀 프라이라는 브랜드의 매력이 없다. 그냥 프랜차이즈 버거집의 감자튀김을 시키는 것이 더 싸다. 감자튀김 하나의 매력으로 승부하는 브뤼셀 프라이 가게에 가는 이유는 튀긴 감자 자체의 퀄리티도 있지만 다양한 소스를 고르고 맛보는 미각적 경험에 있다. 그런데 그러한 브랜드가 의도한 온전한 소비자 경험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한국인 전체가 코로나 이후 몇 년간에 거쳐 자연스럽게 학습한 키오스크 주문이라는 프로세스에 대한 몰이해 및 미숙함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유럽의 어느 파인다이닝이나 일본의 어느 료칸에서 얻는 경험의 불완전성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인이면 당연히 알고 있는 레스토랑에서의 당연히 요구하고 즐길 수 있는 서비스 같은 것들을 현지언어와 현지문화에 대한 경험족으로 인해 즐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스타에 유럽 어느 레스토랑 사진을 올릴 뿐인데, 냉동 레토로트 음식을 댑혀놓은 음식을 배경으로 사진 찍으며 행복해하는 외국인에게 누구도 아무 말 안하는 것은 굳이 현지인이 일일이 다 알려주고 시간과 에너지를 뺏기지 않고 싶은 것일뿐이다. 


브뤼셀 프라이라고 하니 6년 전 교수님 따라 국제 학회 참석차 갔던 암스테르담에서 이 가게에서 프라이를 먹어본적 있다. 2000년부터 유럽을 가고 싶었는데 거의 20년만에 갔다. 특이한 소스를 골랐는데 소스보다는 그걸 먹고 있는 더치들의 키가 채 썬 감자처럼 길었다는 인상이었다. 튀긴 감자는 상타치는 맛이다. 갈릭 디핑 소스를 골랐는데 피자집에서 먹을 것 같은 대량생산된 소스였다. 이 역시 어느정도 균질한 맛을 보장한다. 


오늘 오감자 신메뉴 나왔는데 이름이 브뤼셀 프라이라고 해서 GS25에서 구매했다. 약간의 매콤한 맛이 있다. 먹방에서는 이야 맛있다 이야 매콤하다 정도로 탄성만 지르고 끝나는데, 그 이상으로 감각적으로 표현해서 한국어 글쓰기의 외연을 확장하고 싶은 것이 목표다. 


오감자의 감자는 프링글스처럼 감자를 반죽해서 만든 과자류와는 달리 감자 자체의 탄성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여러 개를 동시에 먹고 씹으면 입안에서 새로 감자를 반죽하는 것 같다. 찍먹하는 소스로 차별화를 둔 오감자의 이번 신메뉴는 시즈닝의 풍성함과 칼칼함이다. 두툼한 감자와 두터운 시즈닝이 중무장한 보병과도 닮았다.


칠리는 한국적으로 맵다. 칼칼하고 찌르는 듯한 화끈함이다. 중미가 원산지인 칠리를 한국적으로 맵게 만들었다. 한국의 매운맛의 특징은 무엇이냐? ‘확 치솟았다가, 싹 가시는’ 느낌이다. 미각세포에 닿는 순간 칼칼한 불길과 같은 통증이 확 올라왔다가, 깔끔하게 사그라드는 기묘한 리듬이 있다. 어리석은 스테레오타입이지만 소위 말하는 한국인의 냄비근성처럼, 순간 욱하지만 뒤끝 없이 정리되는 느낌이다. 어느 외항사 승무원이 한국인 승객에게 물을 실수로 쏟으면 욱하지만 진심으로 사과하면 받아주고 잘 마무리된다고 했다. 그런 느낌의 욱한 매운 맛이다. 고추장처럼 매우면서도 달달한, 매운데도 묘하게 끌리는 중독성이 있다. 얼큰하다는 표현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뜨끈하고 보드라운 사골국물 속에서도 매운맛이 퍼지며, 속을 확 풀어주면서도 한방 맞은 듯한 개운함을 남긴다. 그 매운 맛은 식사 종료 후에는 지속되지 않는다. 스파링 대전 이후에 신사답게 인사하고 헤어지는 선수처럼 한국의 매운 맛은 음식 이후까지 뒤끝을 남기지 않는다.


일본적 매운 맛이라고 한다면 첫 인상에 알 수 없으나, 스며들듯 은근하게 찌르는 얼얼한 향기와 그 후속타라고 하겠다. 와사비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공포영화와도 닮았다. 당장 스크린을 볼 때는 안 무서운데 일상생활에서 자꾸 기억이 나서 이불 아래나 침대 밑을 살펴보게 만드는 후속형 음산한 공포다. 그러한 일본식 공포처럼 일본의 매운맛은 겉으로 티를 안 낸다. 향에서부터도 알싸하지 않다. 처음엔 별거 아닌 듯하다가, 코에서 P파로 처럼 훅 올라오며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은 기습 공격을 가하고, 혀에서는 서서히 S파로 올라오는 얼얼한 파동이 있다. 지진과 후속 쓰나미와도 같다. 마치 일본인 특유의 예의 바른 미소 뒤에서 뒤늦게 느껴지는 차가운 거리감처럼. 외항사 승무원 왈 일본인에게 물을 쏟으면 앞에서는 웃고 일주일 후 본사에 컴플레인 레터를 보낸다고 한다. 쓰나미와 같은 후속공격이 있다. 그러나 그 레터도 정식 접수하고 사과하면 없던 일이 된다. 일본식 매운맛은 설령 후속타가 있을 지언정 끈적이지 않고, 바람처럼 스쳐간다.


반면 중국적 매운 맛은 시각적 선명성, 진동하는 마비감과 지속되는 뜨거움이 특징이다. 강렬한 채도의 빨간색이 시각적으로 일단 맵다고 화려하게 광고, 아니 통보한다. 일본의 푸르른 벌판을 닮은 와사비는 매운지 아닌지 색채 상징으로는 알 수 없다. 한국의 다대기는 돼지국밥 국물에 섞어 파스텔톤이 되고, 일단 단맛이 함께 있는 맵단이다. 중국적 매운 맛은 아주 선명하고 확실하다. 중국의 선이 굵은 매운맛은 혀에 꽂히는 순간, 진동수가 느껴진다. 마라(麻辣)라는 단어 그대로, 혀를 찌릿찌릿 울리면서 미각을 무디게만든다. 단순히 혀가 불타는 게 아니라, 입 안 전체가 알싸한 전류에 감전된 듯한 마비감에 휩싸인다. 향이나 열이 아니라 전기와 같은 찌릿한 매운 맛이다. 불덩이가 입 안을 떠돌며 계속 재점화하는 느낌을 준다. 한 번 매운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몰려오는 매움의 고문이다. 그 맵기 고문의 끝에 한국적 매운 맛은 단맛으로 혀를 다독여준다면, 중국적 매운 맛은 기름기로 혀를 다독여준다. 그러나 그 기름은 또한 매운맛을 입천장에 찰싹 달라붙게 만들며 오래도록 남게 하는 역할도 하여, 제국적 주권의 힘을 보여준다. 중국음식 특유의 강렬하고 묵직하고 선명한 느낌은 몽골의 사막에서 직선으로 세차게 달려오는 유목민 보병과도 같다. 질주하는 보병을 성에서 육안으로 관찰했다면 일단 퇴로는 없다. 그 기병대는 달려온다고 모래바람으로 광고하고, 자신의 존재목적에 따라 단일한 방향성으로 쉬지 않고 달려오고, 방어군은 이미 대피는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30분간의 시간 동안 공격대도 방어군도 임박한 종말과 파괴에 대해 알고 있다. 바울의 종말론적 수행성처럼, 다가오는 멸망의 날을 알고 있음에도 남은 날을 살고 있는 그런 감각과도 같다. 시뻘건 중국 음식점에서 새빨간 메뉴를 골라 기다리는 순간이 바로 그렇다. 미각세포에 고통이 임박하였다. 음식을 기다리는 30분은 그 고통의 도래를 알고 지연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불닭볶음면은 주목할 만하다. 나에게는 너무 매워서 수 년 전 한 번만 먹어보았다. 그 안에는 어떤 직선적인 강렬함이 있었다. 남한산성에서 근왕군을 기다리는,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9회말 2아웃의 역전을 기다리는, 짧고 강한 한 방의 구원 같은 것이다. 돌직구처럼 직선적인 불닭 소스는 강렬한 타격이 먼저 오고, 끝은 심플하다. 중국의 매운 맛처럼 계속 빙빙 돌며 타격하지 않는다. 펑하고 터지는 매운 맛은 포탄과도 같아 원하던 소원이 해결된 이후에는 여운이 길게 남거나 리듬감이 있지는 않는다. 씹을 때마다 베스킨라빈스 슈팅스타처럼 톡톡하고 터지지만 자체로 깊게 스며들지는 않는 할라피뇨와는 달리, 불닭 바베큐 소스 속의 달달한 맛과 함께 어울려서, 지금 이 순간 현세에는 맵지만 내세는 금방 잊히는 스타일이다. 강한 임팩트는 있지만 오래 곱씹게 되지는 않는, 냄비근성의 장점, 뒤끝없는 여운을 제거한 매운맛이다.


오감자의 두터운 시즈닝과 함께 있는 소스의 매운 맛은 한국적 매운 맛을 잘 살렸다. 강한 임팩트, 여운없는 뒷맛은 깔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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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명카피 핸드북 - 家族は、面倒くさい幸せだ。 가족은 귀찮은 행복이다 일본어 명카피
정규영 지음, 오가타 요시히로 감수 / 길벗이지톡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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滋賀県立美術館


”みかた”のちょっと多い常設展 

2024年7月6日(土)〜9月23日(月・休)


日本画って何だろう? 

2024年7月6日(土)〜9月23日(月・休)


滋賀の家展 

2024年7月13日(土)〜9月23日(月・休)












1. 시가는 교토 오른쪽에 있는 소도시다. 교토 국박을 들렀다가 냉큼 다녀왔다. 상설전, 일본화란 무엇일까, 시가의 가옥들 같은 여러 전시가 있가 있었다. 소도시 미술관의 소장품전인데도 기획전시만큼 놀라운 퀄리티의 콜렉션이 있었다.


콜렉션보다 더 놀라운 것은 큐레이터의 아주 감각적이고 명확하며, 시각적 분석에 충실한 캡션이었다.


작품과 관객을 독대하게 도와주는, 불필요한 곁가지 이야기를 뺀, 캡션 설명이었다. 아래 몇 개만 우리 말로 풀어두었다.




2. 교토 국박에서 보다가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마감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서 택시 타고 갔다. 거의 처음 타 본 일본 택시였다. 7-8만원 남짓 나왔는데 택시비가 상당히 비쌌지만 그래도 시간을 세이브한 값으로 치면 괜찮았다.


공원에는 함께 의지하며 늙어가는 노부부가 산책하고 있었다. 잘 가꿔진 큰 공원과 함께 있는 미술관이다.




3. 돌아올 때는 지하철을 타고 갔다. 목가적인 나무 가옥 너머로 이글거리듯 타오르는 태양이 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루야마 겐지의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석양이 아름다울리 없다" 에세이집이 생각났다.



나도 이렇게 한 번 써보자. 시각적 분석의 예제.


철제 장치로 구축된 역사 창밖으로,

붉게 달궈진 저녁 해가 용광로에서 용융된 철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며 산마루를 넘어간다.

하늘은 온통 주홍빛으로 물들고

육첩방 남의 나라 목가적 목제 지붕들이 

그 아래서 까무룩한 실루엣으로 누워있다 비스듬히


지붕 너머로 둥근 해가 서서히 삭아드는 순간,

사위가 후끈후끈 달아오른 듯하지만

동시에 싸늘한 어둠이 슬그머니 내려앉는다. 

전깃줄은 차가운 열기를 가로지르며 팽팽하게 뻗어 나가고

그 선을 따라 매서운 바람도 번쩍번쩍 찢기듯 스쳐 지나간다.


지붕 위로 번진 햇살은 어느새 스르르 사라지고,

도시는 후두둑, 석양을 추모하는 인공 불빛을 하나둘 켜기 시작하니

덜컹덜컹 흔들리는 지하철은 무심히 다른 역으로 달려나가고

나는 저 타오르는 해를 기억 속에 고스란히 담아두리라

뜨겁게 타올랐던 순간들이 저녁 노을처럼

천천히 식어가오니




4. 전시는 이런 저런 것이 있었는데 다 좋았다.




5. 전시 캡션 설명 3개만 우리 말로 풀어본다




하얀 꽃을 피우는 제라늄 화분을 그리고 있다.

배경은 생략되어 있고

화분은 두툼한 질감을(厚ぼったい質感を) 간략하게 나타낼 뿐이며(表すのみで)

제라늄이 풍부하게 자라는 잎과 흰 꽃에 눈이 간다.

가는 선을 이용해 제라늄의 모습을 붙잡고(파악하고)(とらえ)

섬세하게 색을 겹쳐(細やかに色を重ねて) 요철(오목함과 볼록함)이나 음영, 깊이(奥行)를 표현하고 있다

날실과 씨실의 짜임새(織り目)에 틈이 있는 생견(동양화 그리는 비단)에 그리는 것을 활용한, 빛에 녹아드는 것 같은 작품이다.


시각적 분석에 충실한 훌륭한 설명이다. 대단하다.


1) 대상은 하얀 꽃과 제라늄 화분. 제라늄은 식물의 한 종류이고, 몰라도 대략 아래 있는 초록색 무엇이겠거니 짐작이 가능하다.

2) 배경이 생략되어 있음

3) 화분은 두툼한데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음

4) 제라늄이 많고, 꽃이 흼

5) 제라늄은 가는 선으로 표현했고, 색이 겹쳐 있어서 오목 볼록 그림자 깊이감을 표현하고 있음

6) 비단은 올과 올 사이에 틈이 있고, 그 틈을 활용한 작품이다. 빛에 녹아드는 것 같다


6.




금박을 깔아 놓은 바탕에 군청색을 듬뿍 겹쳐 후지산을 그리고 있다.

산기슭(麓=ふもと)을 천천히 걷는 소떼를 한 마리가 뒤늦게 따라간다.

군청색 사이로 비치는 금빛이 햇살의 힘(日差しの力強さ)도 느끼게 한다.

파란색과 금색 두 가지 색으로 생명력이 넘치는 웅대한 풍경이 표현되어있다.


깔끔하다.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1) 금박, 군청색, 후지산

2) 소떼는 산기슭을 걷고 있고 한 마리가 뒤에

3) 금빛은 햇살

4) 생명력 넘친다



7.




마치 음악이 들려올 것 같은 자유로운 선과 선명한 색채로 이루어져있다.

출품된 작품은 석판화(リトグラフ 영어의 lithograph에서 유래. lithos는 그리스어로 돌을 의미한다), 목판, 드라이포인트 등각기 다른 판화기법이 사용되었으며, 

그 질감의 차이에 의해서도, 연주되는 하모니가 변화하고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고

모스크바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한 뒤

1896년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위해 독일 뮌헨으로 여행을 떠났다.

1900년대 후반부터 모양과 색이 공명하는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만약 우리나라 같았으면 칸딘스키에 대한 설명이 먼저 나왔을 것이다.

그러니 시각적 분석이 먼저다.

그리고 인물 설명이 나오고 그 인물 설명은 시각적 분석이나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정도로 간략해야만 한다.


충분하면서 깔끔한 설명이다.


1) 자유로운 선과 선명한 색채를 음악이 들려올 것 같다고 감각적으로 은유함.

2) 다양한 판화 기법이 사용되었음을 설명 ->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어디가 다른 판화기법인지 볼 수 있게 궁금증 유발

3) 판화기법이 다양하다, 로 설명이 끝난게 아니라 그 기법이 결국 어떠한 시각적 요소에 기여했는지 설명: 

판화기법이 다르므로 질감이 다르고 따라서 연주되는 하모니가 변화하는 것 같다고 설명

4) 칸딘스키의 일반적인 인물설명 후 190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모양'과 '색'이 공명하는 추상적 그림이 나온다고 설명. 

->관객으로 하여금 이 그림이 추상적인가라는 궁금증부터 시작해 어디에 모양과 색이 공명하는지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동기부여

+독일의 영향에 대한 일부 암시


8.




폐관하며 나가는 발걸음에 저녁 하늘을 보았다. 이렇게 한 번 써보자. 시각적 분석의 예제.


어스름이 내려앉은 하늘

태양은 구름 뒤로 몸을 숨겼지만

낭중지추의 존재감을 숨길 수 없다

빛은 이제 막 기지개를 키며 일어난

어둠 속에서도 퍼져나간다.


검푸른 구름은 저무는 태양을 머금고

그 가장자리는 파스텔톤의 황금빛으로 물든다.

빛줄기는 하늘을 가로지르며

마치 시간의 틈새로 스며드는 기억처럼

부드럽게 번져간다.


나무 실루엣이 고요한 그림자처럼 서있고

세상은 서서히 어둠과 빛 사이에서

하루의 마지막 숨결을 내쉰다.


하늘은 오래 달이고 묵힌 장처럼 깊은 색을 띠었다.

해는 구름 뒤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다가,

슬며시 가장자리를 타고 흘러내리며 빛을 퍼뜨린다.

노을빛이 구름 속으로 스며들어 퍼질 때,

그 자락은 노릇노릇 익어가는 듯하다.


둥실둥실 떠 있는 구름은 한껏 부풀었다가

서서히 바람에 녹아들며 사그라지고,

햇살은 그 틈새를 비집고 나와

줄줄이 흩어지다 이내 하늘에 길게 번진다.

나무들은 까끄라기처럼 어둠 속에 스며들고,

세상은 점점 서늘한 숨을 내쉬며 하루를 접는다.


저 멀리서, 빛과 어둠이 뒤섞이는 하늘 아래

누군가는 문득 지나온 날들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달이 뜨기 전, 해가 남긴 미련 같은

이 순간의 빛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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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개관 20주년 기념 아카이브전

 《세 개의 호: 미래로 항해》

2024-11-28 ~ 2025-03-16





1. 가는 것이 쉽지 않다 청주까지 2시간 청주에서 대청호까지 1시간. 청주 시내에서 문의면 읍내와 시골 동네를 다 통과하고 1000원 내고 공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처음에 갔을 때는 이름이 청주시립대 + 청호 미술관인줄 알았는데, 청주 시립 '대청호' 미술관이다. 크게 맑은 호수다. 



2. 문의면 시골 마을 안쪽 깊숙히. 살풍경한 동네를 거쳐가야한다.



깊은 물인 임수와 해수의 기운을 품고 사람들의 시각에서 숨겨져있다. 무덤의 부장품 마냥. 고요한 적막한 곳. 일부러 누군가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은 듯한 느낌의 공간이다. 도시의 분주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숫자상으로는 같은 7시지만 아침의 7시는 특정 시각을 기한으로 어느 지점까지 가야하는 마음으로 조급하고 저녁의 7시는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까지 쌓인 여러 남겨진 일들을 쳐내야하는 마음으로 분주하다. 등교 혹은 출근이라는 단일한 지상과제나 투-두-리스트라는 복수의 자잘한 일을 해야하는 주중의 마음을 품고는 한적한 곳에 호젓히 있는 이런 소규모 미술관을 방문하기 어렵다. 


메이저 전시관과 비교했을 때 별 반 볼거리가 없는데 시간과 품을 들여 느슨한 감정과 느릿한 리듬으로 마실 나와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양껏 시간을 사치하기 위해 지방의 어느 소규모 미술관을 오는 것이다. 돈이 없어도 자유로운 소박하지만 풍성한 영혼은 현금 대신 시간을 풍성히 소비하기 때문이다. 버스비라는 저렴한 비용으로 만끽할 수 있는 시골 마을 감상을 겸한 나들이다.





3. 들어가면서 고양이와 인사하고 궁디팡팡 가려운 곳도 긁어주고 집사서비스 제공후 입장. 어째서인지 고양이들이 나를 좋아하고 따른다는 걸 느낀다. 무작위의 공간에서 처음 만나는 고양이들도 내게 호의를 보낸다. 


식빵 굽던 냥냥이들과 잠시 즐거운 시간.






4. 메이저한 전시는 물론이거니와 잘 알려지지 않은 미술관 박물관 까지 다 가보는 것이 목표다.



3층에서는 청주대, 서원대, 충북대 등 지역 회화과를 나온 현업 작가들이 10년, 20년 전에 이곳에서 전시를 했던 소감을 공유하고 있다. 서울대 홍익대가 아닌 지방 작가로서 고뇌와 회한이 느껴진다. 상급 대학원 진학이나 외국 유학을 통해 학벌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으면 보수적 예술업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힘들어서 제주로 떠나 소박하게 사는 삶을 선택하기도 한다. 


5. 아카이브전을 보면 시대별 변천사가 보인다 각 시대별로 무엇이 화두고 시대정신이었는지 보인다 한국인은 남들이 하는 거 다 따라하고 잘 나간다고 하면 자기 필드에도 적용해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 전통이나 관습이나 기존 전시 스케쥴이 중요한 일본에 비해 조금 더 유연하고 대중에 니즈에 빨리 빨리 반영하는 맛이 있다 도쿄나 교토의 전시에서는 서양 불교 하는 식으로 순환하는 것 같은데 비해 한국의 전시는 최근 트렌드를 반영하는 듯 하다 심지어 벽지의 이 소규모 미술관에서조차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6. 작가들은 대청호라는 호수로부터 수몰민이나 생태나 기후변화나 여러 함의를 이끌어내서 작품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7. 아래는 이은영의 사직동(2024)이다. 린넨 위에 목판으로 드로잉했다. 작가는 시적 서사의 시각화를, 평면인 드로잉과 입체인 도자조각으로 어떻게 결합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평면을 입체로 옮겨오면서 설치작품으로 만들었다.


장충동 신라호텔 지하에 조현화랑 서울지점에서 작년 여름에 했던 전시가 생각난다.


아래는 이은영의 4시와 6시 사이의 OO이다.  2023년 작품이다.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을 모티브로 삼아 도자나 점토로 만든 듯하다.


8. 96년 도록에서 도판도 만듦새도 디자인도 폰트까지 모두 그 시절분위기가 난다




다소 영어에 보완점이 있다. Welcoming...  I congratulate.. Today must be the time.. 같은 부분에서 번역투가 느껴진다.


아마 당시에는 세련된 디자인과 폰트였겠지만 시간이 지나자 레트로하게 느껴진다. 


아마 지금 생각하기에 세련된 UX를 자랑하는 SeMA 미술관 인터페이스도 나중에 이렇게 레트로하게 느껴지리라.


 


9. 서양인들의 눈매는 매섭다. 먹잇감을 탐색하는 상위 포식자의 눈처럼 사람을 골똘히 응시한다. 사람들의 눈을 마주치지 않는 동양인들은 그 눈길을 피해 도망다닌다. 서양인들의 부리부리한 눈은 딱히 해칠 의도를 품고있지 않다. 그들은 미술관에서 사물을 응시하는 훈련을 받은 것일 뿐이다.


미술가가 자신의 미학을 언어로 유려하게 해설할 수 있다면 조형적 언어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 미술가는 그저 예술로 말한다. 결과에 가지런히 정련된 노력으로 증명할 뿐이다. 작품의 의도나 맥락을 작가나 비평가처럼 표현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고 지속되는 유명세를 얻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작가는 작품 자체로서 말하고자 할 뿐이다. 관객에게 원하는 것도 작품 자체를 느끼는 것이다. 설명은 해석을 잘 하는 이들에게 아웃소싱하면 그만이다. 


미술사학자는 숭고하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은 미세한 디테일을 위해 평생을 바친다. 도슨트는 소중하다. 예술의 저변을 넓히고 허들을 낮추는 데 큰 역할을 기여한다. 큐레이터는 고귀하다. 그들이 없었다면 작품의 보존과 정리, 전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떤 관객은 역사적 사실이나 작품에 대한 잡다한 설명이나 전시의 기획의도 같은 것이 관람에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관객은 심지어 제목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보는 관객에게 바란 바처럼 어떤 이들은 작품과 자신의 독대를 원한다.


그러한 관객은 작품을 볼 때 무엇을 보고 생각하는가? 작품을 보고 의뭉스럽게 떠오르는 생각, 봄 밤의 흩날리는 따스한 바람 한 줄기 잡아보듯 작품에 대한 스쳐지나가는 막연한 느낌 같은 것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작품의 옆에 있는 작가의 말이나 큐레이터의 정형화된 글쓰기는 시각적 분석의 풀이예시다. 이과가 수학문제로 논리적 사고연습을 해야하듯, 창작자도 예술로 시각적 분석 훈련을 해야한다. 수학문제에 풀이와 정답이 있다면 예술작품에는 캡션의 설명이 있다. 그러나 지적 훈련의 예제로서 예술작품에는 정답이 없고 수많은 해석만 있는데, 캡션은 하나의 해석 방식을 제시할 뿐이다. 나도 이렇게 접근해보고 캡션의 접근도 이해하고 내 생각과 비교해보는 그런 생각의 시간을 갖느라 유럽인들이 미술관에서 그렇게 작품 앞에서 오래 있는 것이다. 이과는 정답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만 창작자에게는 설득력이 있는 설명이냐 아니냐만 중요하다. 이과는 맞다 vs 아니다의 이분법으로 말하지만 창작자는 설득력이 있다 vs 설득력이 없다, 이런 점에서는 설득되고 이런 점에서는 설득되지 않는다의 다중 접근을 취한다.


미국 수능인 AP 미술사에서 채점 기준에 역사적 사실에 얼마나 들어맞느냐에 대한 부분은 거의 없었다. 몇 년도 작품이냐를 정확히 모르면 대략 몇 세기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게 설령 약간씩 어긋나도 전체적으로 만점을 받는데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물론 20세기 작품을 선사시대라고 말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전한길 강사가 소리치며 비판한 공무원 한국사 시험 만큼 도표를 달달 외워야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시각적 분석을 잘 했는가, 큰 역사적 배경과 의의와 설득력있게 잘 서술 했는가에 있었다. 나는 이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고, 선진국 미술교육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시험의 형태로 탬플릿화 되어 교육 받기 이전에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관에 자주 다니며 작품을 보는 훈련을 자연스럽게 했고, 그 훈련의 결과 매의 눈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미술사 책은 대부분 작품을 누가 만들었고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떤 사람과 교류했고 작품을 왜 만들었으며 하는 이야기로 가득차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게 예술을 감상하는 핵심은 아니다.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를 자기의 언어로 말해볼 수 있어야하고, 큐레이터의 캡션을 풀이예제 삼아 자기 생각과 비교해볼 수 있어야하고, 시각적 조형적 요소가 작가의 메시지를 어떻게 드러내는지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볼 수 있어야한다. 나는 이러한 지적 훈련이 앞으로 백제형 문화 네트워크 제국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선진국 시민들이 기본적으로 자연스럽게 탑재하고 있는 '보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이 작가가 원래 의도한, 작품과 관객이 직접 대면하게 하는 것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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