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개관 20주년 기념 아카이브전
《세 개의 호: 미래로 항해》
2024-11-28 ~ 2025-03-16



1. 가는 것이 쉽지 않다 청주까지 2시간 청주에서 대청호까지 1시간. 청주 시내에서 문의면 읍내와 시골 동네를 다 통과하고 1000원 내고 공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처음에 갔을 때는 이름이 청주시립대 + 청호 미술관인줄 알았는데, 청주 시립 '대청호' 미술관이다. 크게 맑은 호수다.

2. 문의면 시골 마을 안쪽 깊숙히. 살풍경한 동네를 거쳐가야한다.

깊은 물인 임수와 해수의 기운을 품고 사람들의 시각에서 숨겨져있다. 무덤의 부장품 마냥. 고요한 적막한 곳. 일부러 누군가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은 듯한 느낌의 공간이다. 도시의 분주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숫자상으로는 같은 7시지만 아침의 7시는 특정 시각을 기한으로 어느 지점까지 가야하는 마음으로 조급하고 저녁의 7시는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까지 쌓인 여러 남겨진 일들을 쳐내야하는 마음으로 분주하다. 등교 혹은 출근이라는 단일한 지상과제나 투-두-리스트라는 복수의 자잘한 일을 해야하는 주중의 마음을 품고는 한적한 곳에 호젓히 있는 이런 소규모 미술관을 방문하기 어렵다.
메이저 전시관과 비교했을 때 별 반 볼거리가 없는데 시간과 품을 들여 느슨한 감정과 느릿한 리듬으로 마실 나와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양껏 시간을 사치하기 위해 지방의 어느 소규모 미술관을 오는 것이다. 돈이 없어도 자유로운 소박하지만 풍성한 영혼은 현금 대신 시간을 풍성히 소비하기 때문이다. 버스비라는 저렴한 비용으로 만끽할 수 있는 시골 마을 감상을 겸한 나들이다.



3. 들어가면서 고양이와 인사하고 궁디팡팡 가려운 곳도 긁어주고 집사서비스 제공후 입장. 어째서인지 고양이들이 나를 좋아하고 따른다는 걸 느낀다. 무작위의 공간에서 처음 만나는 고양이들도 내게 호의를 보낸다.
식빵 굽던 냥냥이들과 잠시 즐거운 시간.




4. 메이저한 전시는 물론이거니와 잘 알려지지 않은 미술관 박물관 까지 다 가보는 것이 목표다.

3층에서는 청주대, 서원대, 충북대 등 지역 회화과를 나온 현업 작가들이 10년, 20년 전에 이곳에서 전시를 했던 소감을 공유하고 있다. 서울대 홍익대가 아닌 지방 작가로서 고뇌와 회한이 느껴진다. 상급 대학원 진학이나 외국 유학을 통해 학벌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으면 보수적 예술업계에서 이름을 알리기 힘들어서 제주로 떠나 소박하게 사는 삶을 선택하기도 한다.
5. 아카이브전을 보면 시대별 변천사가 보인다 각 시대별로 무엇이 화두고 시대정신이었는지 보인다 한국인은 남들이 하는 거 다 따라하고 잘 나간다고 하면 자기 필드에도 적용해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 전통이나 관습이나 기존 전시 스케쥴이 중요한 일본에 비해 조금 더 유연하고 대중에 니즈에 빨리 빨리 반영하는 맛이 있다 도쿄나 교토의 전시에서는 서양 불교 하는 식으로 순환하는 것 같은데 비해 한국의 전시는 최근 트렌드를 반영하는 듯 하다 심지어 벽지의 이 소규모 미술관에서조차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6. 작가들은 대청호라는 호수로부터 수몰민이나 생태나 기후변화나 여러 함의를 이끌어내서 작품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7. 아래는 이은영의 사직동(2024)이다. 린넨 위에 목판으로 드로잉했다. 작가는 시적 서사의 시각화를, 평면인 드로잉과 입체인 도자조각으로 어떻게 결합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평면을 입체로 옮겨오면서 설치작품으로 만들었다.

장충동 신라호텔 지하에 조현화랑 서울지점에서 작년 여름에 했던 전시가 생각난다.

아래는 이은영의 4시와 6시 사이의 OO이다. 2023년 작품이다.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을 모티브로 삼아 도자나 점토로 만든 듯하다.

8. 96년 도록에서 도판도 만듦새도 디자인도 폰트까지 모두 그 시절분위기가 난다


다소 영어에 보완점이 있다. Welcoming... I congratulate.. Today must be the time.. 같은 부분에서 번역투가 느껴진다.
아마 당시에는 세련된 디자인과 폰트였겠지만 시간이 지나자 레트로하게 느껴진다.
아마 지금 생각하기에 세련된 UX를 자랑하는 SeMA 미술관 인터페이스도 나중에 이렇게 레트로하게 느껴지리라.

9. 서양인들의 눈매는 매섭다. 먹잇감을 탐색하는 상위 포식자의 눈처럼 사람을 골똘히 응시한다. 사람들의 눈을 마주치지 않는 동양인들은 그 눈길을 피해 도망다닌다. 서양인들의 부리부리한 눈은 딱히 해칠 의도를 품고있지 않다. 그들은 미술관에서 사물을 응시하는 훈련을 받은 것일 뿐이다.
미술가가 자신의 미학을 언어로 유려하게 해설할 수 있다면 조형적 언어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 미술가는 그저 예술로 말한다. 결과에 가지런히 정련된 노력으로 증명할 뿐이다. 작품의 의도나 맥락을 작가나 비평가처럼 표현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고 지속되는 유명세를 얻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작가는 작품 자체로서 말하고자 할 뿐이다. 관객에게 원하는 것도 작품 자체를 느끼는 것이다. 설명은 해석을 잘 하는 이들에게 아웃소싱하면 그만이다.
미술사학자는 숭고하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은 미세한 디테일을 위해 평생을 바친다. 도슨트는 소중하다. 예술의 저변을 넓히고 허들을 낮추는 데 큰 역할을 기여한다. 큐레이터는 고귀하다. 그들이 없었다면 작품의 보존과 정리, 전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떤 관객은 역사적 사실이나 작품에 대한 잡다한 설명이나 전시의 기획의도 같은 것이 관람에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관객은 심지어 제목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보는 관객에게 바란 바처럼 어떤 이들은 작품과 자신의 독대를 원한다.
그러한 관객은 작품을 볼 때 무엇을 보고 생각하는가? 작품을 보고 의뭉스럽게 떠오르는 생각, 봄 밤의 흩날리는 따스한 바람 한 줄기 잡아보듯 작품에 대한 스쳐지나가는 막연한 느낌 같은 것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작품의 옆에 있는 작가의 말이나 큐레이터의 정형화된 글쓰기는 시각적 분석의 풀이예시다. 이과가 수학문제로 논리적 사고연습을 해야하듯, 창작자도 예술로 시각적 분석 훈련을 해야한다. 수학문제에 풀이와 정답이 있다면 예술작품에는 캡션의 설명이 있다. 그러나 지적 훈련의 예제로서 예술작품에는 정답이 없고 수많은 해석만 있는데, 캡션은 하나의 해석 방식을 제시할 뿐이다. 나도 이렇게 접근해보고 캡션의 접근도 이해하고 내 생각과 비교해보는 그런 생각의 시간을 갖느라 유럽인들이 미술관에서 그렇게 작품 앞에서 오래 있는 것이다. 이과는 정답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만 창작자에게는 설득력이 있는 설명이냐 아니냐만 중요하다. 이과는 맞다 vs 아니다의 이분법으로 말하지만 창작자는 설득력이 있다 vs 설득력이 없다, 이런 점에서는 설득되고 이런 점에서는 설득되지 않는다의 다중 접근을 취한다.
미국 수능인 AP 미술사에서 채점 기준에 역사적 사실에 얼마나 들어맞느냐에 대한 부분은 거의 없었다. 몇 년도 작품이냐를 정확히 모르면 대략 몇 세기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게 설령 약간씩 어긋나도 전체적으로 만점을 받는데 큰 문제는 아니었다. 물론 20세기 작품을 선사시대라고 말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전한길 강사가 소리치며 비판한 공무원 한국사 시험 만큼 도표를 달달 외워야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시각적 분석을 잘 했는가, 큰 역사적 배경과 의의와 설득력있게 잘 서술 했는가에 있었다. 나는 이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고, 선진국 미술교육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시험의 형태로 탬플릿화 되어 교육 받기 이전에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관에 자주 다니며 작품을 보는 훈련을 자연스럽게 했고, 그 훈련의 결과 매의 눈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미술사 책은 대부분 작품을 누가 만들었고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떤 사람과 교류했고 작품을 왜 만들었으며 하는 이야기로 가득차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게 예술을 감상하는 핵심은 아니다.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를 자기의 언어로 말해볼 수 있어야하고, 큐레이터의 캡션을 풀이예제 삼아 자기 생각과 비교해볼 수 있어야하고, 시각적 조형적 요소가 작가의 메시지를 어떻게 드러내는지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볼 수 있어야한다. 나는 이러한 지적 훈련이 앞으로 백제형 문화 네트워크 제국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선진국 시민들이 기본적으로 자연스럽게 탑재하고 있는 '보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이 작가가 원래 의도한, 작품과 관객이 직접 대면하게 하는 것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