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전기 미술전에 다녀왔다. 오늘 오픈했고 앞으로 5일여 동안은 무료다.


새 나라 새 전시라는 제목으로 고려를 마감하고 조선으로 바뀌는 시기에 기존의 미술양식과 새로운 표현방식이 어떻게 뒤섞였는지, 후대에 만개할 예술사조의 초창기 모습은 어땠는지에 대한 전시다. 전시기획 때는 실제 정치급변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2025년 대선을 마친 지금에 생각해보면 참 적절한 제목이다. 여말선초의 사회문화적 변화를 오늘날의 흐름에 투영하면서 교훈과 통찰을 얻을 수 있다. 한국땅을 밟고 있는 사람들은 정치적 스펙트럼에 관계없이 누구나 새 부대에 새 포도주가 필요하다는데 과거와 같은 제도와 사고로는 미래를 살 수 없으므로 새 시대정신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향이 다를 뿐. 저물어가는 20세기후반의 어른이와 도래하고 있는 21세기중반의 어린이는 어떻게 다투고 포옹하며 어떻게 공존하고 대립하다 변증법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전시는 백색의 도자, 먹색의 시서화, 금빛의 불교 세 파트로 구성되어있다. 화사한 1전시실에서 단아한 푸른 빛이 감도는 유분감의 청화백자를 보며 심플한 조형성에 감탄하다가 2전시실에 이르러 빛 바랜 비단 수묵의 어두운 족자의 세밀한 필체와 작디작은 사람을 눈을 치껴뜨고 관찰하다가 다시 3전시실에 번쩍번쩍 황금빛으로 빛나는 불상을 보는 관람 동선이다.



우선 세 가지 면에서 전시는 칭찬받을만하다. 우선 앞서 말했듯 시기적으로 적절하다. 전시의 방향성과 지금 현실적 당면한 현실적 대한민국의 상황이 일치한다. 관객들은 이 전시를 통해 여말선초의 사회구조적 전환에 대해 생각해보며 오늘날에 대한 인사이트와 화두를 얻을 것이다. 


나아가 전시작품을 잘 선택했고 세 파트가 선명히 구분되어 관객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정확히 기억에 남는다. 흐름도 C-B-A로 구조적으로 명확하고 킬링멜로디도 확실한 음악과 같다. 전세계에서 빌려온 우수한 작품이 꽤 되고 일부는 지금이 아니면 다시 보기 힘든 리스트로 생각된다. 일본의 경우 국립3곳, 모리, 민예관, 이데미츠, 후쿠오카, 그리고 여러 절에서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적절한 작품을 빌려왔다. 심지어 라크마, 뉴욕멧, 클리브랜드, 독일쾰른, 하와이 등에서 온 작품도 있다. 이런 작품 중 상당수가 7월 20일이후 교체되기 때문에 그전에 방문해야하고 8월에 또 한 번 들려야할 것 같다. 국내의 경우 리움 석가여래설법도도 자주 볼 수 없던 작품이다


개중 특별한 작품은 두 개인데 개인소장의 가응도 응도권으로 조선 전기 이암이 그린 그림을 에도시대 가노 탄유가 모사한 작품이다. 원본이 아마 없고 일본화가의 스케치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마치 황룡사와 비근하다. 모리 미술관은 Mohri로 표기되는 걸 보니 도쿄 롯폰기 근처 고층빌딩에 위치한 숲 한자쓰는 모리는 아닌가본데 그곳에 소장된, 옛 구(formerly) 전할 전(attributed to), 옛날에는 송나라 미우인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사실 중국작품이 아니라 조선작품인 산수도[겨울제외3폭]도 특별. 중국풍경과 중국기법을 잘 따라했기 때문에 그렇게 전해진 것이나 연구를 통해 조선의 것임이 밝혀졌다. 중국작품이 당시 습작을 위한 모델이었기 때문에 그린 것인데 왜 중국 것을 그렸느냐라고 물어본다면 왜 그리스어 문자로 수학문제를 푸느냐 왜 콧대 높은 외국인 얼굴 아그리파 두상으로 드로잉 연습을 하느냐하고 물어보는 것과 같다. 연습문제가 그렇게 형성되면 그렇게 따라 그리는 것이고 만든 이의 스킬훈련이 중요한 것이다. 많은 역사상의 부침을 겪고 이런 추정문제가 생길지 조선 도화서 화원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21세기 대한민국의 화가가 만약 노트에 끄적인 습작과 낙서를 NFT외 블록체인에 기반한 토큰증명을 안했다면 24세기 백제퀀텀제국연맹의 아카이빙 기록에 뜨지 않을지도?!


마지막으로 박물관 학예사의 전문성이 돋보인다. 실존하는 유물을 몇 년 몇십 년 보아온 현장실무자들이 복수의 유물 가운데 엄선한 것들이다. 특히 작가를 모르는 작품이지만 감상할만한 작품도 다수 포함되었다. 만약 교수였다면 논문의 대상이 될만한 provenance, 즉 출처가 명확한 작품을 선택했거나 교수의 지위와 공감가능한 문인화가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학예실의 필드 스페셜리스트가 작품을 골랐기 때문에 작가 미상의 좋은 작품도 마음껏 택했다. 말하자면 탑다운이 아닌 다운투버텀 방식의 기획인 것이다. 도록에서도 그 흔적이 보인다. 보통 교수나 외부필자를 초빙해 글을 적는데(아모레 퍼시핏 조선 민화도록은 거의 다 교수진) 이전 국중작 조선전기미술 도록은 교수 2명 남짓을 제외하곤 7명 이상 모두 박물관 학예부장, 학예실장, 학예연구사들이 글을 적었다. 따라서 글이 이론이나 외부사료 이야기는 덜하고 작품 자체의 물성표현과 특징분별에 초점을 맞추었다. 작품을 사랑하는 이가 매우 고심해서 보여줄 것을 선별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사의 사회경제적 조건으로 미술품을 설명했다는 접근법의 한계다. 농업생산성 향상, 공납제도, 중앙정부 등등 구조적 변화로 미술품을 읽으면 미술가 개인의 자유로운 표현은 종종 무시되고 생산품목으로서 양적특징, 공예와 장식의 전형성에만 집중하게 된다. 물론 이를 타파하기 위해 약간의 트위스트를 주어 도자기 장인 이름이나 철화도자 등에서 기법상 특징을 소개했지만 그 다음 코너들과 전시 기획 자체에서 부각되는 것은 아니다. 바닐라향 우유, 오렌지향 환타같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향만 감도는 느낌이다.


이 한계는 두 번째로도 이어지는데 학예연구사 세 명이 각각 디자인한 전시라서 세 파트가 기계적으로 조립되었다. 물론 조선전기라는 큰 흐름 속에 먹색백색금색으로 이어붙이려 하였으나 시서화 유교의 절제와 불교의 화려함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가치이며, 각각의 예술사조는 별도의 진화과정 속에 있기에 정교한 일별을 요한다. 불교는 고려의 장식적으로 화려하고 티베트 등의 영향을 받은 국제적인 불교에서 숭유억불의 조선에서 산악불교로 나름의 리듬으로 바뀌고 있었고 지방 공납제도와 도자 생산이라는 조선전기경제사 속에 놓고 이해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이미 사학과에서 학술적으로 입증된 조선 전기의 특징 중 일부를 각 사조에 적용시킬 수 있으나 세 사조를 융합해 조선 전기 미술만의 특징을 도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후자가 더 미술사 본령에 가까울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조선전기의 역사를 미술을 통해 확인하는 정도의 인상이다. 물론 이는 대다수의 한국인에게 받아들이기 쉬운 익숙한 이해방식이겠지만. 어쨌든 세 파트가 너무 뚝뚝 떨어져있고 시서화에서 초서와 서예까지 설명하고 다시 불교에서 책더미를 쌓아두고 대장경출판을 설명하는데에는 반복적인 느낌마저 있었다. 마지막이 정리가 잘 안된다. 홍치가 쓰여진 청화백자가 절에서 불교재단 동국대박물관을 거쳐 전시되었는데 얕은 의미에서는 불교, 조선시서화, 도자로 세 전시테마가 다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깊은 설득력은 다소 떨어지고 세 테마를 연결할만한 작품은 이 한 점뿐이다.


마지막으로 해설이 조금 더 친절하게 베풀어졌으면 좋았을 것 같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서예의 초서인데 원문 한자와 해석이 병치되어야했다. 한자를 모르는 한국인이 많은게 현실이고 한문을 알아도 초서는 어렵다. 초서체의 멋짐을 알려면 최소란 한 자라도 왜 이 글자가 특별한지 해서와 비교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지금으로선 서예코너는 대다수 한자문맹 한국인에게 지나가는 복도같은 곳이다.


영어의 경우도 도록의 영문 해설이 부족하고, 일부 캡션의 영문 설명이 불친절하며, 1전시실과 2전시실 사이의 대략 20분짜리 동영상에서 영어자막의 편집도와 완성도가 떨어진다. 온점이 없는 문장, 띄어쓰기 안되어 있는 문장이 자막에 5개 이상 있었다. regionsand / wouldseem같이. 이런 문장편집이 미술관의 수준을 보여주는 디테일이고 부호처리가 영작의 핵심이다. Devil is in the detail. 별거 아닌게 아니다. 우리 말도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는 다른 말이지 않을까? 장녀라는 말에 점 하나 잘못찍으면 아주 큰일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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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 있는 일민미술관에 다녀왔다. 시대복장, 혹은 컨템포러리 아웃핏이라는 제목으로 패션트렌드의 최전선에서 경주하고 있는 세 스튜디오 지용킴, 포스트아카이브팩션(파프), HYEIN SEO의 아카이브전을 하고 있다. 특이한 전시다.


뮤지엄의 전통적 유물배치나 인스타그래머블한 상업전시와 청담 한류거리의 브랜드 디스플레이, 이 셋 어딘가 사이에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의 전시 디스플레이다. 스튜디오의 쇼룸처럼 옷을 진열해놓기도, 선블리칭 즉 해에 탄 자국을 남긴 옷과 회화작품을 병치시켜놓기도, 영사기를 활용해 레트로한 느낌의 사진들을 찰칵찰칵 거리며 보여주기도, 벽에 나란히 작업사진을 배치해 평행선을 따라 걸으며 그 과정을 만끽하게 해주기도, 설치예술품 같은 디스플레이 무지개다리를 보게끔 하기도 했고, 재봉할 때 신체부위 선을 따라 그린 패턴종이로 바닥을 꾸며놓기도 했다.



전시된 작품보다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더 눈길이 간다. 성수, 연남, 맥북, 노마드, 무채색 검정 재킷에 테크웨어 백팩, 유명 브랜드 신발, 타투, 높은 확률로 담배 혹은 전담, 직업은 콘텐츠 디렉터 혹은 크리에이티브 매니저 혹은 스타일리스트. 아이덴티티를 다루며 스타일이 본질이라 생각하는 이들. 브랜드의 철학을 입히고 힙한 시각언어로 풀어내고 최신 바이럴의 맥을 짚는다. 그들에게 어쩌면 패션은 몸에 걸치는 직물이 아니라 애티튜드이고 세계를 해석하는 렌즈일지도....


워라벨은 희미하고 일과 삶이 섞여있다. 협업자들과도 뒤엉켜 작업하고 섞여 지낸다. 시대의 공기를 읽는 자들. 고정된 전통대시 유동하는 액체근대를 선택한 이들. 이 힙함 뒤에는 불안정한 고용구조와 과잉노출의 피로와 늘 리뉴얼된 감각을 요구받는 압박감이 상시대기하고 있다. 자신의 삶과 삶의 방식 자체가 브랜드이기에 늘 최신버전으로 업데이트되어야만 한다.

중력과 수직하중을 다루는 건축. 몇 백톤의 철근과 콘크리트가 압력을 분산하는 방식. 오랜수련의 서예. 안료의 광도와 종이의 온도를 미세하게 감각해내는 전통예술. 이들도


예술을 하지만 완전히 다른 진영에 살고 있는, 근미래에 살고 있는 패션업계 사람들. 덧없고 빠르고 가시적이며. 감정은 옷으로, 옷과 함께 찍힌 사진으로 표현되고, 날씨의 온도는 옷감의 두께로 나타나며 존재의 정체성은 한 장의 룩북으로 고백된다. 그들의 청춘만큼이나 잠깐 존재하고 사라지는 패션트렌드에 대해 질척이는 아쉬움이나 죄책감을 갖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최대로 즐긴다.


이들의 감각은 기분과 다르다. 기분은 변덕스럽고 감각은 훈련되고 날카로우며 정련되고 정제된 감성이다.

이들의 삶은 동경을 불러일으킬만큼 세련되었다. 이 세련됨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내면의 근거를 겨냥한 균형감각이다. 불안과 기대, 피로와 몰입, 존재의 공허를 모두 음미하며 지금 이걸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이유없는 믿음 사이의 어떤 늘쩍한 바람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 누군가 묻는다면

그들은 약간 웃으며 대답한다.

"지금처럼 그냥. 계속 뭔가 만들어내고 적당히 흔들리면서 그렇게 그냥 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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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좋은 일이 생길지도
요시타케 신스케 지음, 고향옥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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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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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느에서 특별상 받은 이란감독의 신성한 나무의 씨앗을 보고왔다. 원어로는 더네예 안지레 마어바드고 دانهٔ انجیر معابد, 정확한 뜻은 사원/신전의 무화과씨앗이다. 기도하는 장소의 무화과 씨앗. 영어로는 신성한 무화과의 씨앗 The Seed of the Sacred Fig이라고 되어있다.


보통 트레일러나 정보 찾아보지 않고 영화를 보는 편이다. 끝나는 시간도 잘 확인 안 할정도. 이 영화는 3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잘 느껴지지 않았고 약간 오래한다는 순간적 기분이 있긴했지만 끝나고서 168분이네? 할정도로 몰입도가 있었다


사형집행을 서명하는 판사로서 윤리적 책임, 부모와 자녀세대 갈등, 신구 세대갈등처럼보이다가 중간에 테헤란을 떠나는 장면에서 갑자기 탈주물이자 스릴러로 바뀐다.


자막에 사나가 왜 오디오에서는 사너라고 들리냐면, 이란어에서는 단음 아와 장음 어가 있기 때문이다. 사나가 아니라 사너~가 이름에 대하 정확한 발음. 참고로 기도할 때는 아랍어를 쓰더라


영화의 엔딩은 명확히 가부장적인 가족제도를 비판한다.

초반에 드러나는 이만의 윤리적 고뇌는

가족 구성원을 의심하며 총기 훔친 범인을 심문하는 부분부터 의미가 없어지고

그의 전문적 커리어와 국법과 교리에 대한 절대복종은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비판했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한다


변호사 이만의 수사판사 임명, 모스크에서 기도하며 감사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

신변보호를 위해 총기지급됨

신권정치 반대시위 확산

가족관계 보여주는 도란도란 장면

장녀 레즈반의 친구 사다프 집방문

사형집행에 사인하는 이만의 윤리적 갈등

기숙사 입소중 사다프가 시위군중에 휩싸여 얼굴 좌측에 산탄총을 맞음

차녀 사나가 생리대 필요하다고 뻥치고 엄마 잠시 마트로 나가게 한 다음 사다프 집으로 들임

엄마 나즈메는 얼굴에 박힌 산탄총 적출하며 시위의 심각성을 깨달으나 가족의 안위가 우선

사다프는 체포. 나즈메는 친구관계 절교할 것을 종용. 그러나 장녀의 부탁을 들어주어 사다프를 수소문해줌

두 남매는 SNS를 통해 시위진압대의 폭력에 대해 충격

매일 격무에 시달리는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

정권의 꼭두각시가 된 자신의 처지에 갈등하는 남편


여기까지가 전반부인데 이만큼만 보았을 때는 가정 내부의 갈등이 사회 내부의 세대갈등(젊은이와 기득권)으로 등치되어 읽히고 부친에게도 엄마나 딸들에게도 모두의 논리에 감정이입할 여지가 있지만

총기 잃어버리고 심문하기 시작하는

이후 후반부부터는 완전히 다른 결로 읽히고 다른 영화가 된다. 여기서부터는 스포. 가족 갈등을 어떻게 잠재우는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거짓말쟁이 vs 폭군의 구도로 적을 제거하는 것이 관건


중간과 마지막에 합쳐서 세 번쯤 실제 시위 촬영한 스마트폰 풋티지를 사용한 장면이 인상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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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아트센터 제주갤러리에서 제주시 전경을 그린 수묵 병풍을 전시하고 있다. 


인사동과 제주가 무슨 관련? 의문이 들겠지만 제주뿐아니라 경남 광주+전남 부산 등도 지역정부의 보조금을 받아(5천만/년정도) 서울 도심부 인사동에 전시장을 전진배치해 지역작가를 위한 전시회장을 제공하고 있다. 충남(CN갤러리)이나 전북(분관)처럼 북촌에 별도의 빌딩에 전시장을 보유하고 있는 곳도 있다.


이번 제주갤러리 전시에선 제주도청의 커미션을 받아 제작된 호암 양창보의 북군십경(2003)이 관객의 시선을 흡입한다. 폭4.9mx높이1.9m에 달하는 거대 10폭 병풍으로 북군, 즉 북제주의 풍경을 양껏 담았다. 감상할 때는 1폭씩 위아래를 흝으며 전경 중경 원경을 감상한 다음 다시 좌우로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면 수직과 수평을 모두 만끽할 수 있다.


시선의 위치를 보면 한라산이나 중산간일텐데, 어떻게 해도 제주 북쪽 지역 전체를 한 시야각에 다 담을 수 없다. 그리하여 병풍에 그린 풍경은 기계적 축척도나 미니어쳐가 아니라, 작가가 재현한 심상을 그린 상상의 세계다. 따라서 거리를 줄이고 일부는 확대하고 어떤 것은 없애거나 부각시키는 등의 조정을 거쳤다


영역왼쪽부터 1폭 우도영일은 동쪽 끝단 세화 종달리 인근이다. 위에는 일출의 해가 그려져 있는데 오른쪽 끝 10폭의 우측상단 일몰의 해와 더불어 일월오봉도의 구도를 닮았다. 해와 달 대신 일출해와 일몰해를 각각 병풍 좌우측 최상단에 배치한 것. 다만 원래 해 뜨는 위치는 다소 아래쪽 성산일출봉이고 우도 부근이 아니지만 회화적 허용이라고 보자.


2폭 비림완교는 미점준으로 비자림숲을 그리고 후미에 지미봉을 배치했다. 제주 오름 중 가장 경사가 가파르고 100미터 남았다는 표지판이 거짓말 같은 봉우리다. 근경 중경 원경 삼단 구도에 따라 감상할 수 있는 조경이 달라진다. 근경에는 빽빽한 숲이 시선을 훔치고 중경에는 복수의 오름이 위치하며 원경은 바다이며 바다 멀리 지평선으로 시선이 소실된다.


3폭 동원기봉은 발묵법 선염법으로 다양한 농담과 음영을 표현한 오름들을 표현했고 4폭 교래석원에 이르러 돌문화공원과 토템적 느낌이 드는 액운방지 목적의 방사탑(사악함 방지 탑)이 등장해 드디어 인위적인 사람의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작가는 문명의 이기에 반하고자 의도적으로 지금은 없는 원시적 자연 그 자체를 부각시키거나 콘크리트 건물이나 시가지는 의도적으로 없앴다. 문명의 자취는 자연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만 허용했다


5폭 엄장해암은 신엄 구엄을 따라 줄지어 있는 기암괴석을 부벽준으로 찍듯 끊어 그려 붓질의 스트로크감이 느껴진다. 갈필로 마른 느낌을 주어 주상절리를 표현했고 먹의 농담을 차분히 살피며 순차적으로 쌓아 나지막한 오름의 갭직한 능선을 나타냈다.


6폭 효봉야화는 새별오름의 들불축제를 표현한 것이다. 조선도 현대도 아닌 시대가 불명확한, 허나 확실히 옛날 인물이 모여서 축제를 하고 있다. 이는 작가가 생각하는 개발주도 산업화와 소비자본주의 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제주 본연의 사람들이다. 무진기행에서처럼 이미 상실되고 없어진 고향을 그리워하며 그리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제주 앞바다를 떠다니는 바지선과 통통배는 그린 것을 보아 배는 위협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전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한 두척도 아니고 십 여척이 바다위를 통통 떠다닌다. 아마 돛을 두 개단 당도리배나 조운선을 그렸다면 조선느낌이 물씬 나서 이를 우회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7폭 추자조어는 원경의 추자도에 눈길이 간다. 낚시 그리는 인물이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은 듯 현대적 패션을 하고 있다. 인물은 축척을 무시하고 바지선과 크기가 비슷하다. 추자도는 실제로 훨씬 떨어져있어 보이지 않는데 당겨와서 표현했다. 원경의 현대느낌과 대척점에 근경에는 산업화되지 않은 선사시대 감성의 원초적 제주를 위해 초가집을 그려 대조시켰다.




8폭 팽림월대는 터치를 쌓아가는 적묵법으로 명월리의 팽나무 군락과 명월대와 명월교를 그렸는데 이런 조형이 있어야 겸재정선같은 전통 걸개그림 같아보인다

9폭 비양탐경은 한림읍 비양도, 10폭 차귀낙조는 수월봉이며 하단은 여백으로 남겼다


이제는 다시 만나지 못할 옛 마음으로 그린 제주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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