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 화이트큐브에 다녀왔다. 후난성출신으로 광저우미대졸업 후 프랑스에서 8년 활동하다가 다시 광저우로 귀국해 활동하는 저우리 작가의 전시가 그저께 열렸다. 전시는 보기 편하고 직관적인 추상계열인데, 둔황의 석굴과 폼페이의 프레스코화가 묻어나는 벽화풍이라 특이하다. 바랜 꽃 그림을 통해 시간의 변화와 메타모포시스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참고로 화이트로 시작하는 갤러리는 이렇게 외우자. 

서울역 ㅅ→화이트스톤 ㅅ, 청담의 ㅁ(네모)→화이트큐브(cube), 헤이리 화이트블럭(예술인마을=커뮤니티블럭)


급변하는 시대에 회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회화는 다른 리듬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해준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무한한 양의 이미지와 텍스트를 소비하는 우리들. 정보가 경이로운 속도로 눈앞을 스쳐 지나가지만 대부분은 무용지물이다. 우리의 몸속으로 스며들지도 못하고, 기억 속에 자리잡지도 못하고, 감정과도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회화는 다르다. 그것은 느린 예술이다. 그 평면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 걸어야하고, 걷다가 멈추어야 하고, 온전히 응시해야 하며, 느끼고 체험해야 한다. 회화는 다시금 우리에게 신체의 존재를 자각하게 하고 정신의 질서를 회복하게 한다.


화이트큐브의 전시장을 거닐며 저우리의 작품을 보는 경험은 마치 봄의 흐드러진 벚꽃축제, 한여름밤을 수놓는 불꽃놀이, 가을의 애잔한 단풍과 어둑한 겨울하늘에 빛나는 LED 드론쇼를 보는 경험과 닮았다. 춤추는 듯 흩날리는 화면을 볼 때의 흥분, 경탄과 바로 이어지는 무상함. 한순간의 시각적 향연에 눈에 멀다가 이내 집에 돌아가면 망막에 맺힌 그 장면이 잊혀지는 것 같은 화려함의 무상함. 각양각색의 불빛과 다채로운 꽃잎이 하늘을 가르며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지만 눈부신 순간을 남긴 뒤엔 아무것도 머무르지 않는다. 특별한 감흥은 분명히 있으나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는 젊음, 첫사랑의 짜릿함과도 같은 것. 어떤 아름다운 광경을 볼 때는 심지어 카메라를 꺼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완전히 몰입해 주변의 환호는 백색소음이 되고 눈은 붙박이마냥 좀처럼 떼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당연하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기분.


푸른 것 중 하나, 즉, 밤하늘은 형언할 수 없는 허구다. 특별한 리듬도, 서사도, 가늠할 수 없는 깊이에, 유의미한 공간관계도 없이, 마치 모든 모퉁이가 보이지 않고, 빛의 궤적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인간은 그 사이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도 없다. 밤하늘의 특별함은 고요함과 불안이 공존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저우리는 그 밤하늘의 고요한 리듬을 캐치해냈다. 우리는 그 고즈넉한 화면에서 무엇을 응시하게될까? 저우리는 우리와 함께, 혹은 우리의 이전에 무엇을 응시하고 있었을까?


날아다니는 선과 떠도는 꽃은 구체적인 조형이나 선명한 사물보다는 어떤 감정으로 연결되는 미로다. 희망, 동경, 감정, 그리고 작가가 우주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사적인 감정으로 얽힌 미로같다. 거대한 스케일은 세밀한 필치를 뒤흔들고 외향적인 구도는 내향적인 감정을 전달하며 화면은 작은데서 붕괴되어 큰 울림의 진폭으로 나아간다. 내면의 정신적인 명상이 색면의 덩어리라기보다 잘게 부서지고 다듬은 선으로 잘린다. 감정이 편린으로 절단되고 전체적인 정서는 수축하다가 어느 순간 관객에게 직설적으로 말을 건내며 대폭발한다. 안과 밖, 크고 작음, 전체와 부분은 이렇게 하나에서 만난다.


이러한 화면 속에서 추상과 비어있음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저우리의 회화는 추상적인 도식이나 일관적인 패턴을 형성하려는 시도는 아닌 것 같다. 형태를 추출하거나 조합하여 만들어진 인위적 추상도 아니고, 현실의 사물에서 분리되어 압축된 구조적 표현도 아니다. 외려 거침없는 필치로 호쾌히 그린 기운생동의 공간에서 직관적으로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외, 그리지 않음으로서 그리는 도교적 화면이다. 비어있음을 붓끝으로 밀어내고 시간성의 흐름을 만든다. 구상의 소거이고 조형의 제거라고 함직하다. 서양 추상표현주의의 부정적 공간이나 전통 산수화의 여백의 시적 공간도 아니다. 선과 조형을 그리되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에는 기운과 움직임과 펼쳐짐과 주름, 여밈과 스밈, 구름과 감정,  거대하고 만질 수 없는 격류, 말로 서술할 수는 없으나 침묵으로 감각될 수 있는 정신적 차원이 있다.


당대의 시각적언어가 보여주어야 할 하나의 상태로 저우리는 뚜벅뚜벅 나아간다. 겉으로는 빈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관객이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을 자각하게 하여 회화의 존재 방식이 부단히 변화하고 있음을 느끼도록한다. 회화의 에너지는 동기감응의 흐름이자 정신적이며 신체적인 합일, 언어이자 무언, 감정이자 이성이다. 푸른색은 흐르고, 번지고, 스며들고, 분홍색은 분출하고, 타오르고, 폭발하며, 흰색은 증발하고, 확산되고, 떠오른다. 서양적 맥락에서와 같이, 고정되어 포집할 수 있는 색의 레이어가 아니라 감각될 수 있는 존재 자체다. 하여, 회화는 시대를 관통하며 정신의 심연으로 뻗어나가 전생과 후생의 우리 모두와 대화한다.


회화가 정신적인 것이라고 믿어왔다. 회화는 쓸모 있는 것, 수익을 창출하는 것만이 아니다. 회화는 우리 존재의 증거이자 감정의 그릇이고, 의식의 투영인 한편 신체의 연장이다. 이러한 특성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저우리의 캔버스는 묘사하기보다 기록한다. 몸과 감정의 움직임이며, 그 너풀너풀 흐르는 궤적이며, 잊고있었던 호흡의 흐름과 에너지의 번뜩임같은 것들을 말이다. 우리는 터렐의 간츠필드의 중국적 현현, 오래 그 자리에 존재하며 풍화되는 벽화풍 회화를 보기 위해 저우리가 있는 화이트큐브로 발을 옮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고딩때는 입시가 지상과제였지만

대학교에서는 이제 전공가지고 무엇을 할지 막막하다

미대는 안그라픽스의 "미대 나와서 무엇을 할까"

미술사는 혜화1117의 최열 대담을 보면 좋다

솔직한 업계의 이야기

이 바닥에서 어떤 지식을 생산하고 어떻게 공부하고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이야기

즉, 입시의 허들을 넘기 위한, 확실한 목표인 자격증을 얻기위한, 한 번의 공부로 평생의 공부를 종료하기 위한 공부가 아닌

평생 살아가면서 과정으로서 공부하는 이야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레드에 올라온 이 책 리뷰.


https://www.threads.com/@galim_arch/post/DLbZV4_PLRP?xmt=AQF0NE49mFhBmu4KKfv04aj8zRb7GWIsEfauPWnLDJLMlA


나도 이 책 재밌었다.


투시도, 모델, 기계제도 있는 부분이요 저는 그보다 예시 부분에 폼페이와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 부분도 재밌었어요 서양의 투시도에 따른 원근법이전에도 중국도 나름 깊이감을 주었던 기법이 있었는데 특히 건축도에서 많이 드러났다고.. 비잔틴 말하면서 신앙의 세계가 쇠락한다는 경계심으로 모자이크가 점점 더 벽 아래로, 평민을 향해 내려온다는 통찰도 재밌었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징어게임 시즌3 보았다.

1. 10년이면 금수강산도 변하고
권불십년이라고 했으니 옛말엔 틀린 게 없어라
넷플 최대 히트작도 4년을 못 버텼다

2. 네러티브가 힘을 잃었고, 따라서 설득력이 없다. 주인공 성기훈도, 서브캐릭 두 명 황형사(외부에서 침투)와 노을(내부에서 혁파)도, VIP의 관음증과 장기말 연출의 희화화도, 임산부와 아이의 핍진성도, 결말도 모두 아쉽다. 연출, 설정과 서사에서 모두 맥아리가 없다.

우선 주인공이 힘이 없다. 구조를 바꾸고자 하는 반란(시즌2)이 실패한 결과 성기훈은 시즌3내내 침울하고 개인의 도덕만이라도 지켜보려하는데 그의 수수방관적 태도는 설득력이 없다. 특히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성기훈이 먼저 공격하지 않지만 게임법칙상 누군가는 죽어야해서 부작위로 이긴다. 성기훈은 유일하게 강대호를 공격하는데 반란 실패의 탓을 해서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을 한 사람에게 전가함으로써 희생양을 삼으면 애써 빌드업한 성기훈의 특별한 면모가 사라지고 도덕적 편리주의를 택하게 된다. 이 사람만 아니었다면 달라졌을텐데하는 남탓, 혹은 책임전가 과연 그렇게 모두를 지키려고 했던 성기훈의 마음이 지향할 바로 적절할까


모두가 서로 죽고 죽이는 아수라 속에 혼자 양심을 지키겠다고 남에게 먼저 칼을 꽃지 않아 주변이 내분을 일으키거나, 실수로 죽거나, 결과적으로 두 명은 자살하게 만든다. 이것이 과연 도덕적 성기훈의 말로가 맞을까? 심지어 마스터가 살 방법을 알려줘도 쓰지 않는데, 마스터(이병헌)와는 달리 적이라 해도 자고 있을 때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심적인 루트를 택하는 것 같지만 결국 적이든 주변인 중 누군가는 죽어야한다는 점에서 그가 선택한 방향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아무런 적극적 행동도 안하는 것 같아 무책임하고 수수방관적 자세만 취하는 것 같이 보인다.

탄창 안 갖다준 해병대 사칭범을 내란 실패의 이유를 물어 죽이고 싶은 기훈. 그를 노려보며 "너 때문이야"라고 책임전가하는데 대호를 타겟삼고 도덕적 편리주의를 택하면 시즌1,2에서 빌드업했던 성기훈의 캐릭터가 무너진다. 다른 면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도 감정의 지배를 받는 인물이었구나.


이 모든 것이 맥아리가 없는 이유는 성기훈이 주인공인 이상 게임 끝까지 데려가기 위해 그에게 덤비는 캐릭터가 모두 부작위로 죽기 때문이다. 성기훈은 손대지 않고 코를 푼다는 뜻. 남들은 다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죽고 죽이는데 성기훈에게 덤비는 인물은 모두 죽는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도덕과 양심을 지키려고 했던 성기훈이 후대(딸 성가영)에게 남기는 유산이 도덕과 양심이 아니라 돈(카드)라는 점이다. 그래서 결론도 힘이 없다. 내부개혁은 실패, 캐릭터도 힘이 없어, 도덕과 양심은 실패한 것. 그래서 주인공은 연출적으로도 설정상으로도 맥아리가 없다.

주인공이 안으로부터 개혁을 도모한다면 밖에서 지원하는 세력도 있어 양쪽에서 게임의 구조를 변혁하려는 것이 시즌2의 묘미였다. 그런데 황형사 역시 힘이 없다.

서브 캐릭 황형사 역시 시나리오면에서, 교훈적인면에서도 모두 맥아리가 없다. 일단 빙빙 돌다가 침투는 실패한다. 들어갔다가 아무 성과없이 돌아온다. 보조해주는 대원도 죽는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최이사와 프로젝트 하나 같이 했다고 불법 도박, 절도, 사기 등 전과9+1범인 자를 교도소 복역 6개월 이후 마중나간다는 점이다. 범죄도시3와 킹덤에서 활약한 전석호 배우가 서글서글한 캐릭터를 잘 연기했지만, 연기와 별도로 최이사의 범죄경력과 황형사의 경찰의 양심은 같이 가면 안된다. 그래서 황형사도 무너졌다.

또 하나의 서브 캐릭은 노을이다. 황형사가 물리적으로 밖에서 침투하려고 한다면, 노을은 관계자의 입장에서 구조를 무너뜨리려고 한다. 그러나 노을도 실패한다. 노을이 화가를 도와주는 것은 게임 바깥에서 들고 온 개인적인 친분(그것도 자기만 알고 상대는 모르는)때문이다. 그닥 잘 설득되지 않는 이유다. 딸아이가 아프다는. 그래서 그 한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다른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인다. 선택적 사랑이고 차별적인 편의주의다. 모르는 익명의 존재는 그냥 죽여도 되는가? 장기 적출 비리 요원을 포함해서 수많은 이들을?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노을에 의해 무너지는 구조가 여럿있다. 노을은 화가를 병정으로 손쉽게 둔갑해서 내부 요원 꼭두각시를 만든다. 그리고 원하는 탈출 보트를 협상을 통해 얻어낸다. 다시 돌아가 환풍기를 통해 외부에서 침투해 부대장실까지 잠입하고 손쉽게 제압한다. 내외부 침투가 모두 뜻대로 잘 이루어졌기 때문에 게임 진행 요원의 권력이 무너진다. 너무 잘 뚫려서 힘이 없어 보인다. 스타워즈 제국군, 스톰트루퍼처럼.

이에 더해 시즌1에는 그렇게도 마스크를 벗지 않던 요원들이 너무 자주 쉽게 벗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엔데믹 이후에 변화된 풍습이라고 느슨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요원의 신비주의가 너무 쉽게 무너지면 그들의 권력도 무너지기 때문이다.

VIP는 꼭 영어에 능숙한 중년 백인 남성이어야하는가? 물론 젊은 중국계 여성이 등장하긴 했지만, 여전히 중년 백인 남성이 다수이고, 그들의 단합에 금을 내는 메기라기보다는 그들에게 화이트워싱된 한 패거리같다. 굳이 그 멀리서 헬리콥터 타고 와서 참가자들이 투표하는 것을 지켜보고 15분씩 머뭇거리는 것을 루페로 관찰하는 것이 재밌을까? 그런데 그들이 관중석에서 지켜보는 장면에서 불편함이 느껴진다. 참가자들에게는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두고 하는 처절한 생존투쟁이 희화화되는 것이다. 물론 시즌1에서도 그런 면모는 있었다. 그런데 시즌3에서 사람이 죽을 때 장기말을 치는 연출을 함으로써 생명의 죽음을 너무 단순화하고 희화화하고 게임으로 축소화하는데, 조롱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결말에 이르러 딱지맨은 여전히 건재해서 게임은 지속된다.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다. 도덕과 양심이 실패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각자도생, 서바이벌 게임과 배금주의는 태평양을 건너서도 다른 나라에서도 지속된다. 딱지맨 도깨비에서 딱지우먼 갈라드리엘로 바뀌 것일 뿐. 그렇다면 구조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탈하다.

3. 감독이 어디에서 트위스트를 넣어 색다른 면모를 주려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캐릭터를 언제 창의적으로 퇴장시킬지 계산한 것이 보인다. 열쇠의 비밀, 조현주, 남규, 타노스 등장, 줄넘기 방해꾼, 새벽, 도시락과 그의 결말, 명기의 돌변 등등.

4. 배우 연기는 준수한 편. 각본도 수차례 다듬은 것 같은데 연출과 방향성이 이를 다 살리지 못했다.

노재원의 일진연기와 고소공포증연기, 이다윗의 찐따연기와 환각연기 성가영의 아파탓 대사, 최재섭의 북한억양, 강하늘의 책임회피와 분노조절장애연기 같은 훌륭한 부분이 있다. 강애심의 대사전달과 감정연기도 일품. 물론 이정재와 이병헌배우의 눈으로만 말하는 표정연기도 압권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욕을 먹을, 비겁하고 돈에 멀고 권력지향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중년 남성 5인조도 캐릭터는 잘 살렸다. 큰소리만 치는 송영창 배우나 무식하다는 말에 벌컥하는 최귀화 배우 등등.

그런데 이들의 그 중년 남성 빌런 캐릭터를 잘 살려서 의미가 있으면 연기도 칭찬을 받을텐데 전혀 아니어서 아쉽다. 이 중년 남성들의 비겁함을 부각시킨 이유는 성기훈의 도덕과 양심을 상대적으로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이들이 협잡해서 성기훈을 몰아세우는 부분은 화면에서 삼각형 위에서 몰아세우는 연출로 잘 표현이 되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성기훈은 명기를 포함한 이 꼴불견 남성 6인조의 내분과 배신 등 새옹지마로 이기게되니 빌런에게 연출의 방점을 준 이유가 없어진다. 빌런의 묘사가 많아져서 아우라를 강화하는 이유는 오직 메인 캐릭터가 그들을 깨부셨을 때의 카타르시스를 위함인데, 메인 캐릭터는 그들을 직접적으로 깨부신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고구마대사, 분노유발 꼰대대사로 관객의 불편함만 더할 뿐이다.

5. 이미 임산부가 게임에 참가했다는 점에서 예상한 것들이 있다.
임산부 캐릭터는 시놉시스상으로는 매력적이었겠지만 안 하느니만 못한 계륵이 되었다. 특히 임산부 연출은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동양인은 아이를 낳고 그렇게 빨리 움직일 수 없다. 자기 배가 아파서 난 아이라면 남에게 선뜻 넘겨줄 수 없고, 아이를 두고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없다. 먹은 것도 없는 데 모유를 줄 수도 없고, 게임을 할 수도 없다. 갓 태어난 아이가 시끄럽게 우는데 술래가 바로 와야하지 않을까? 30분 게임시간 중 10분만에 분만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2시간도 안되어 깨서 우는 갓난쟁이의 기저귀를 언제 갈아주는가? 어린 조유리 배우가 경험해보지 않은 임산부 연기를 한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어색함과 CG의 어색함은 차치하고서라도.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총 쏘아 수많은 참가자 생명을 앗아간 병정이 베이비에게 우유를 먹이는 장면이다. 이것은 용납할 수 없다. 같은 손으로 생명을 박탈하다가 다시 생명을 보살핀다는 연출은 설득이 안된다.


6. 출연료에 광고에 제다이 출연(디즈니 드라마)에 글로벌 인지도까지, 456억원 어치를 번 사람은 현생에서도 이정재 배우

7. 왜 시즌3 6시간을 함께 공개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으나 아마 VFX 후반작업때문이었을 것 같다.
베이비신, 보트추격전, 마지막 게임 기둥 브릿지 등에서 CG티가 너무 난다.

몰입감이 깨진다.

8. 시즌3은 난파했다.
전국민의 숙제(시즌1이 흥행한 작품이었으므로 평소 대화소재가 되니까), 해외거주 한국인의 필수교양(외국인과 대화에서 아이스브레이킹용 단골소재가 되니까)인데 정말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청담 G 갤러리에 다녀왔다. 글래드스톤, 청화랑, 스페이스라드 등이 위치한 삼성로 인근이다. 그 삼성로 안쪽에는 다들 잘 모르는 큰 청담공원이 있다. 꽤 괜찮은 산책로다. 서울의 미니어쳐 센트럴파크라고 말하기엔 언덕이 많다. 한국 산책로에 언덕이 없는 경우는 일산이나 송도 같은 계획도시를 제외하곤 거의 보지 못했다. 그 언덕길을 어떤 외국사람들은 등산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정도다. 산악의 민족 한국인, 메트로폴리탄 수도에도 급경사의 산맥을 품고 있어 일상이 등산이다. 신체적으로는 등산, 건물에서는 계단, 사회적으로도는 출세와 승진. 수직적 사고에 익숙한 한국인. 참고로 이제 37회차에 달하는 매일 일본어로 쓰고 있는 포스팅에서는 이에 대해 자세히 풀어설명한 적있다. 일본어로 적어서 한 번 완결된 글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다고 생각하면, 다시 한국어에 맞춰서 보정하는게 골치아파서 번역은 읽고 싶은 사람이 파파고로 돌려서 읽도록 맡기고 있다.


맑은 연못, 청담에선 전반적으로 길이 널찍하고 뭔가 사통팔달의 호쾌한 기세가 느껴진다. 이 지역에 오마카세와 파인다이닝 맛집의 핀이 더 많이 꽃혀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유명 파인다이닝 전문 더들리랄지. 그렇지만 그런 고급레스토랑은 서양과 일식 둘 중에 하나다. 밍글스처럼 모던한식다이닝을 하는 곳도 생겼지만 소수다. 한국인이 한식을 1인 한 끼에 40만원 주고 먹기엔 마음이 쉽지 않다. 그 돈이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대체재가 많기에 왠만큼 스페셜하지 않아선 욕만먹기 십상이다. 본토에서 본토요리를 가장 잘 대접해줘야하는데, 한국인만 한국에 유난히도 매섭고 잣대가 높다. 나도 송은에서 내려가다가 냉부로 유명해진 쵸이닷의 최현석 셰프를 길가에서 본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연예인은 인생에 한 번 공연장에서 만날 사람이지만, 송은 근처의 삼남매 설렁탕 직원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객으로 유명 연예인을 많이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이컬쳐는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 뒷받침하는게 현실이다. 7만9천원에 된장찌개 룸서비스를 시켜먹는 사람들은 7만900원을 7900원이기 때문에 쓴다. 물론 1300원짜리 삼각김밥을 먹는 사람들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고 열등감과 시기질투를 낳겠다. 그러기에 그런 재력가들은 돈을 함부로 자랑하지 않고 쓰임새를 굳이 드러내지 않으며 일을 한다. 돈을 많이 벌고 좋은 파인다이닝을 다니면서 섬세하게 맛을 구별하고 좋은 와인과 재료를 감별하고 세계의 다른 파인다이닝과 비교도 해보고 피드백도 주면서 하나의 미식문화를 가꿔가는 것이다. 세상에는 또한 재력가와 하이컬쳐가 담당해야하는 분야도 있는 법. 시간이 흘러 그들이 가꾼 문화가 어떤 형태로 나왔는지 그 결과물을 보고 판단할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흘러흘러 G 갤러리에 도착. 아니 이럴 수가. 안국역 금호미술관 올해 상반기에 했던 금호영아티스트의 이해반 작가의 작품이 보인다.


금호미술관 2층에서 봤던 대형 유화 원형의 이중주도 보이고, 기억이 정확하다면 소형 작품 하나도 그때 봤던 작품이다. 커튼과 함께 목제 의자 위에 있던 작품. 


금호미술관에 다녀 온 다음 다른 여러 작품과 스트로크를 비교했던 3개월 전 4월 3일 포스팅에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이해반 작가는 동양화 베이스에 네덜란드에 유학했다. 서양화의 치밀한 구도와 인도네시아적 색채감이 더해져 전통적이면서 이국적인 리듬을 만들어낸다. 일월오봉도에 열대우림의 색채감이 묘하게 조합돼있다"


"서양화의 원경과 원근법이 정확히 반영되어 있다. 색감은 동양적인데 짜임새 있는 구도."


https://blog.aladin.co.kr/797104119/16354786


지금과는 사뭇 다른 짧은 단상이다. 3개월만에 글을 매일 이렇게 길게 쓸 수 있게 되다니. 그리고 다양한 문체로도 쓸 수 있게 되다니. 읽어주시는 독자에게도 새삼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자 그럼 도착했으니 이제 문체를 바꿔서 그림 묘사를 하러 가보실까.

같은 제목의 작품 두 점이 어깨를 겨누고 배치되어 있다.


좌측 패널은 이해반, 배틀그라운드 Ⅲ Nr.01: 오, 디어, oil, acrylic on canvas, 160x120cm, 2024 이고

우측 패널은 이해반, 배틀그라운드 Ⅱ Nr.01, oil, acrylic on canvas, 160x120cm, 2024 이다.


제목이 전투지대라는 심각하고 험한 느낌인데 색감은 따뜻하고 평화롭다는.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를 통한 시각적 교란이다. 자연과 식물은 언뜻 보기엔 목가적이지만 내부에는 미생물과 생물들의 죽고 죽이는 서바이벌 경쟁이 있다는 의미이리라 생각한다.


우선 왼쪽 그림은 바닷속 초록 산맥이 일렁이며 숨을 쉬는 듯한 풍경인데, 주된 색조로 황록색이 돋보인다. 반짝이는 금사 뿌린 듯한 화면에 물감을 머금고 흘러내리는 섬유질감의 흐름이 인상적이다. 구불구불한 능선은 해조류나 산호처럼 유기적이며 곡선적인 형상을 띄고 있고 그 이음매에 연분홍 진주를 닮은 둥근 점이 꿈틀거리는 생명체처럼 산란되어있다. 좌측상단 끄트머리의 하늘은 청보라에서 연보라로 그라데이션되고 아래로 점성있는 물이 폭포처럼 튀기고 아래로 갈 수록 선이 조밀해진다.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별이 점점이 흩뿌려진 무지갯빛 구름이 하늘이 아닌 물에 구현되어있다. 전체적인 인상은 수묵담채화의 구도를 서양화식으로 재구성한듯하다. 주변을 감싸는 펄빛 바이올렛, 라일락, 담청색은 모두 한 톤이 아니라 매우 섬세한 그라데이션이 구현되어 있어 마치 한지에 서로 다른 농담의 먹물이 번지는 듯한 잔향이 느껴진다. 


같은 배틀그라운드인데 "오 디어"가 빠진 오른쪽 그림은 금가루가 화면의 중앙에 연못의 윤슬을 따라 퍼져있는 것과는 달리, 바람처럼 자유롭게 휘날리고 있다. 그 황금선의 선로를 따라 별빛이 타고 이동한다. 황금선이 흐드러지는 듯한 곡선의 장식형태는 마치 디즈니 영화 소울의 카운슬러(모두 이름이 제리)의 무심한 선으로 이루어진 캐릭터 디자인을 닮았다. 


중앙에는 폭포처럼 솟구치는 채도 높은 청록색이 진한 보라색의 하늘과 대조와 함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위로 심홍색과 자줏빛으로 뒤엉켜 뭉게뭉게 피어올라가는 퍼플버블구름. 그 너머에 청보라 밤하늘에 탱글탱글 떠오른 금황색 작은 달이 걸려있다. 양 옆으로는 생동감있는 짙은 청색 활엽수 잎맥이 있다. 


에메랄드빛을 머금은 코발트 블루의 물줄기가이 계곡에서 콸콸 흐르고 그 양측 보랏빛과 핑크빛이 감도는 비단 운무를 비집고 비취청자빛깔의 물보라가 사방으로 흩어지다 다시 일곱 블루톤의 물줄기 일곱개로 뭉텅뭉텅 모여 아래로 쏴아아 낙하하고 있다. 물살 사이사이로 노란빛 별무리가 아지랑이처럼 춤춘다.


좌우의 식물은 실루엣으로 표현된 검푸른 솔잎형 나무들. 구도는 동아시아 산수화의 수목 표현을 연상시키되, 잎의 실루엣은 열대식물의 윤곽, 예컨대 몬스테라 혹은 빅토리아 수련의 잎맥 같은 형상이다. 작가의 유학시절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풀잎에서 영감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두 그림 모두 구도상으로 중앙의 물과 계곡이 깊이감과 원근감을 만들어내고, 아득한 산맥이 안개에 묻히듯 흐릿하게 뒤로 물러나, 동양화 특유의 기운생동과 서양화적 입체감이 공존한다.


크레용팝의 빠빠빠처럼 점핑점핑하고 있는 작품 네 점도 있다. 그중 음따음따, 약강약강 박자의 2, 4번째 키 큰 아이들을 자세히 눈여겨보자.



참고로 오른쪽에서 세 번째 작품이 금호에서 보았던 작품이다. 커튼 사이 목재 의자 위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해반, 대지와 스펙트럼의 조각들 Nr.05, oil, acrylic on canvas, 91x120cm, 2025

이해반, 대지와 스펙트럼의 조각들 Nr.04, oil, acrylic on canvas, 72.8x91cm, 2025

편의상 5번, 4번이라 칭하자.


5번의 형태적 느낌은 성게나 불가사리 같은 극피동물, 개불같은 환형동물 같고, 색감은 나전칠기장이다. 소용돌이 사이로 빨려들어갈 것만같은 몽환적인 느낌과 용솟음치는 폭발적 느낌이 공존한다. 산맥의 근원, 지구의 심장부처럼 보이는 지형의 소리없는 터뜨려짐. 색채는 샛노란 황토빛을 바탕으로 하여, 진한 올리브그린과 산호빛 핑크, 부식된 쇠색과 자색의 잔결이 결정을 맺듯 얽혀 있다. 전복, 조개 등의 껍데기를 얇게 갈아 여러 가지 무늬로 오려낸 듯한 나전형 문양이 물결에 구현되었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으나 한지 위에 안료가 번지는 듯한 결이 전체를 구성한다. 작가의 동양화적 기법이 분명 보인다. 중앙에서 위와 오른쪽으로 분출하는 형태는 나무 뿌리 같기도 하고 꽃봉오리가 폭발하듯 펼쳐지는 환상 식물처럼 보이는데, 이는 열대식생을 상상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읽힌다. 동양화의 필법, 담묵으로 감아 겹겹이 겹친 산수표현을 연상시키기 때문. 허나 분명히 서양화의 시점샷, 특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항공적 시선도 보인다. 동양화 베이스에 서양적 표현을 묘하게 버무린 스페셜한 작품이다.


4번은 존재하지 않는 내면의 풍경이다. 감각적 환상의 시각적 구현에 가깝다. 작가는 동양화에서 익힌 번짐과 여백의 미를 자연의 카오스와 무질서 속의 질서를 모티프와 융합했다. 네덜란드 유학에서 익힌 명확한 구도, 빛의 각도와 색면 분할에 능숙하다. 식물을 기반으로 한 생태적 감각도 보이는데, 식생이 한반도에는 없는 과장되고 율동적인 열대성 식물이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식민지에서 도입하고 학습한 식물적 표현이다. 식민적 식생의 상흔, 혹은 기후가 기억하는 식민주의의 유령이다.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동양화와 유럽유학, 생태와 추상, 이런 것들은 양극단의 스펙트럼에 있는 말들로 서로 무관한 듯 보이지만 이해반 작가는 회화 안에서 버무려내 경계를 넘나드는 하이브리드 식물추상으로 빚어냈다.


화면 구성은 동양화에서 배우되, 동양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해체하여 새로운 시각언어로 재구성했다. 원경은 뿌옇게 흐릿하지만 동시에 광학적으로 날카롭고 산맥의 부벽준은 버블감과 점막으로, 세필화의 우점준은 필법이 아닌 색채의 그라데이션으로 재탄생했다. 산은 어쩐지 스스로 흐르고 나무는 전자적 정맥처럼 진동한다. 전통동양화가 여백과 먹으로 비어 있음의 충만함을 추구했다면 이해반 작가는 그 여백마저 미세입자로 쪼개어 떠다니는 성운 상태의 색감으로 대체해 많이 채웠으되 비어있는 감각을 보여주었다. 현명하고 정교하다. 감각의 덩어리가 생성되고 한 세대의 시각적 언어가 진화한다.


작가의 작품에서 일관된 화두가 있다. 캔버스 위에 정렬되어있는 결과물에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 오랫동안 고민한 흔적이 느껴진다. 빛은 파스텔톤으로 서서히 번지며 은하수처럼 부유하는데 형태는 자꾸 꿈틀거리고 번지는 듯하다. 특이하다. 살구빛, 연지빛, 청연색, 노을빛, 펄빛 자주, 비취빛, 바랜 철색같은 색의 조합이 익숙한 듯 낯설다. 펼쳐진 화면에 동양적 명상을 느끼기엔 조형이 너무 많아 번잡하고, 서양적 구성이라기엔 또 오브제가 너무 없고 여백의 미가 느껴진다. 이러한 동서양 융합의 실험을 하며 작가는 자신만의 환상적인 제3의 풍경을 구성하고 있다. 


4번 작품에서 물결은 산이 되었고 산은 다시 증기로 솟구친다. 기후적 회화, 회화의 호흡을 상상하게 만드는 기체적 구성물. 전통회화로 포섭할 수도 표현할 수 없다. 풍경이 아닌 풍경 되기 전의 덩어리. 무정형의 압력을 채집하고 응축시킨 시트지. 무지개가 일렁이는 수묵화, 입체적 각도의 진경산수화, 바람의 무게, 수증기의 어깻죽지, 식물의 마디마디에서 삐져나온 희귀한 생장소리. 말랑하고 느슨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반적 기법이 아닌 나만의 기법. 색채는 이질적 감각들이 경계 없이 접혀 있는 지층이다. 그 지층, 자색 바위 틈에서 솟는 전류 같은 황로색, 연보랏빛 안개 속에 가라앉은 기계적인 철록색, 뱀비늘처럼 겹쳐진 올리브색 음영 위로 톱니처럼 박힌 별빛 입자. 이런 조합은 채도가 아니라 촉각적 불협화, 아니면 지각의 무게 중심이 흐트러지는 낯선 압력이다. 꽃잎에 입맞춰본 자만이 알리라. 눈으로 보는 비유가 아닌 실제의 감각을 호명한다.


형상은 명확하지 않으나 모호하지도 않다. 뿌연 경계 안에 있는 조형은 기억을 잃기 직전의 체언, 혹은 이름 붙이기 직전의 존재다. 회화의 고정관념은 대개 "그릴 수 있어야 존재한다"거나 "형상이 있어야 감상이 가능하다"는 말로 축약가능하다. 이에 용감하게 도전한 결과 이해반의 회화는 무엇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보게 만들며 그것을 어떻게 보았는지 자신에게 다시금 질문하게 한다. 말하자면 감각기관이 이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감각기관을 휘감는 방식을 스스로 경험하게 만드는 셈이다.


그러니 이러한 그림은 사실적 재현의 회화라기보다는 하나의 기상현상, 혹은 시각적으로 관측 가능한 정서적 기후라고 표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익숙한 언어로 부를 수 없는 것들을 굳이 그리는 이 프로젝트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려는 기획이면서 아직 무엇인지 아닌지조차 규정할 수 없는 것에 색을 입히는 무모하고 용기 있는 회화의 선전포고다. 오렌지 사이렌과 함께 전쟁의 소리가 들린다. 진격하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