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담 G 갤러리에 다녀왔다. 글래드스톤, 청화랑, 스페이스라드 등이 위치한 삼성로 인근이다. 그 삼성로 안쪽에는 다들 잘 모르는 큰 청담공원이 있다. 꽤 괜찮은 산책로다. 서울의 미니어쳐 센트럴파크라고 말하기엔 언덕이 많다. 한국 산책로에 언덕이 없는 경우는 일산이나 송도 같은 계획도시를 제외하곤 거의 보지 못했다. 그 언덕길을 어떤 외국사람들은 등산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정도다. 산악의 민족 한국인, 메트로폴리탄 수도에도 급경사의 산맥을 품고 있어 일상이 등산이다. 신체적으로는 등산, 건물에서는 계단, 사회적으로도는 출세와 승진. 수직적 사고에 익숙한 한국인. 참고로 이제 37회차에 달하는 매일 일본어로 쓰고 있는 포스팅에서는 이에 대해 자세히 풀어설명한 적있다. 일본어로 적어서 한 번 완결된 글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다고 생각하면, 다시 한국어에 맞춰서 보정하는게 골치아파서 번역은 읽고 싶은 사람이 파파고로 돌려서 읽도록 맡기고 있다.
맑은 연못, 청담에선 전반적으로 길이 널찍하고 뭔가 사통팔달의 호쾌한 기세가 느껴진다. 이 지역에 오마카세와 파인다이닝 맛집의 핀이 더 많이 꽃혀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유명 파인다이닝 전문 더들리랄지. 그렇지만 그런 고급레스토랑은 서양과 일식 둘 중에 하나다. 밍글스처럼 모던한식다이닝을 하는 곳도 생겼지만 소수다. 한국인이 한식을 1인 한 끼에 40만원 주고 먹기엔 마음이 쉽지 않다. 그 돈이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대체재가 많기에 왠만큼 스페셜하지 않아선 욕만먹기 십상이다. 본토에서 본토요리를 가장 잘 대접해줘야하는데, 한국인만 한국에 유난히도 매섭고 잣대가 높다. 나도 송은에서 내려가다가 냉부로 유명해진 쵸이닷의 최현석 셰프를 길가에서 본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 연예인은 인생에 한 번 공연장에서 만날 사람이지만, 송은 근처의 삼남매 설렁탕 직원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객으로 유명 연예인을 많이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이컬쳐는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 뒷받침하는게 현실이다. 7만9천원에 된장찌개 룸서비스를 시켜먹는 사람들은 7만900원을 7900원이기 때문에 쓴다. 물론 1300원짜리 삼각김밥을 먹는 사람들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고 열등감과 시기질투를 낳겠다. 그러기에 그런 재력가들은 돈을 함부로 자랑하지 않고 쓰임새를 굳이 드러내지 않으며 일을 한다. 돈을 많이 벌고 좋은 파인다이닝을 다니면서 섬세하게 맛을 구별하고 좋은 와인과 재료를 감별하고 세계의 다른 파인다이닝과 비교도 해보고 피드백도 주면서 하나의 미식문화를 가꿔가는 것이다. 세상에는 또한 재력가와 하이컬쳐가 담당해야하는 분야도 있는 법. 시간이 흘러 그들이 가꾼 문화가 어떤 형태로 나왔는지 그 결과물을 보고 판단할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흘러흘러 G 갤러리에 도착. 아니 이럴 수가. 안국역 금호미술관 올해 상반기에 했던 금호영아티스트의 이해반 작가의 작품이 보인다.

금호미술관 2층에서 봤던 대형 유화 원형의 이중주도 보이고, 기억이 정확하다면 소형 작품 하나도 그때 봤던 작품이다. 커튼과 함께 목제 의자 위에 있던 작품.
금호미술관에 다녀 온 다음 다른 여러 작품과 스트로크를 비교했던 3개월 전 4월 3일 포스팅에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이해반 작가는 동양화 베이스에 네덜란드에 유학했다. 서양화의 치밀한 구도와 인도네시아적 색채감이 더해져 전통적이면서 이국적인 리듬을 만들어낸다. 일월오봉도에 열대우림의 색채감이 묘하게 조합돼있다"
"서양화의 원경과 원근법이 정확히 반영되어 있다. 색감은 동양적인데 짜임새 있는 구도."
https://blog.aladin.co.kr/797104119/16354786
지금과는 사뭇 다른 짧은 단상이다. 3개월만에 글을 매일 이렇게 길게 쓸 수 있게 되다니. 그리고 다양한 문체로도 쓸 수 있게 되다니. 읽어주시는 독자에게도 새삼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자 그럼 도착했으니 이제 문체를 바꿔서 그림 묘사를 하러 가보실까.
같은 제목의 작품 두 점이 어깨를 겨누고 배치되어 있다.

좌측 패널은 이해반, 배틀그라운드 Ⅲ Nr.01: 오, 디어, oil, acrylic on canvas, 160x120cm, 2024 이고
우측 패널은 이해반, 배틀그라운드 Ⅱ Nr.01, oil, acrylic on canvas, 160x120cm, 2024 이다.
제목이 전투지대라는 심각하고 험한 느낌인데 색감은 따뜻하고 평화롭다는.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를 통한 시각적 교란이다. 자연과 식물은 언뜻 보기엔 목가적이지만 내부에는 미생물과 생물들의 죽고 죽이는 서바이벌 경쟁이 있다는 의미이리라 생각한다.
우선 왼쪽 그림은 바닷속 초록 산맥이 일렁이며 숨을 쉬는 듯한 풍경인데, 주된 색조로 황록색이 돋보인다. 반짝이는 금사 뿌린 듯한 화면에 물감을 머금고 흘러내리는 섬유질감의 흐름이 인상적이다. 구불구불한 능선은 해조류나 산호처럼 유기적이며 곡선적인 형상을 띄고 있고 그 이음매에 연분홍 진주를 닮은 둥근 점이 꿈틀거리는 생명체처럼 산란되어있다. 좌측상단 끄트머리의 하늘은 청보라에서 연보라로 그라데이션되고 아래로 점성있는 물이 폭포처럼 튀기고 아래로 갈 수록 선이 조밀해진다.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별이 점점이 흩뿌려진 무지갯빛 구름이 하늘이 아닌 물에 구현되어있다. 전체적인 인상은 수묵담채화의 구도를 서양화식으로 재구성한듯하다. 주변을 감싸는 펄빛 바이올렛, 라일락, 담청색은 모두 한 톤이 아니라 매우 섬세한 그라데이션이 구현되어 있어 마치 한지에 서로 다른 농담의 먹물이 번지는 듯한 잔향이 느껴진다.
같은 배틀그라운드인데 "오 디어"가 빠진 오른쪽 그림은 금가루가 화면의 중앙에 연못의 윤슬을 따라 퍼져있는 것과는 달리, 바람처럼 자유롭게 휘날리고 있다. 그 황금선의 선로를 따라 별빛이 타고 이동한다. 황금선이 흐드러지는 듯한 곡선의 장식형태는 마치 디즈니 영화 소울의 카운슬러(모두 이름이 제리)의 무심한 선으로 이루어진 캐릭터 디자인을 닮았다.
중앙에는 폭포처럼 솟구치는 채도 높은 청록색이 진한 보라색의 하늘과 대조와 함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위로 심홍색과 자줏빛으로 뒤엉켜 뭉게뭉게 피어올라가는 퍼플버블구름. 그 너머에 청보라 밤하늘에 탱글탱글 떠오른 금황색 작은 달이 걸려있다. 양 옆으로는 생동감있는 짙은 청색 활엽수 잎맥이 있다.
에메랄드빛을 머금은 코발트 블루의 물줄기가이 계곡에서 콸콸 흐르고 그 양측 보랏빛과 핑크빛이 감도는 비단 운무를 비집고 비취청자빛깔의 물보라가 사방으로 흩어지다 다시 일곱 블루톤의 물줄기 일곱개로 뭉텅뭉텅 모여 아래로 쏴아아 낙하하고 있다. 물살 사이사이로 노란빛 별무리가 아지랑이처럼 춤춘다.
좌우의 식물은 실루엣으로 표현된 검푸른 솔잎형 나무들. 구도는 동아시아 산수화의 수목 표현을 연상시키되, 잎의 실루엣은 열대식물의 윤곽, 예컨대 몬스테라 혹은 빅토리아 수련의 잎맥 같은 형상이다. 작가의 유학시절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풀잎에서 영감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두 그림 모두 구도상으로 중앙의 물과 계곡이 깊이감과 원근감을 만들어내고, 아득한 산맥이 안개에 묻히듯 흐릿하게 뒤로 물러나, 동양화 특유의 기운생동과 서양화적 입체감이 공존한다.
크레용팝의 빠빠빠처럼 점핑점핑하고 있는 작품 네 점도 있다. 그중 음따음따, 약강약강 박자의 2, 4번째 키 큰 아이들을 자세히 눈여겨보자.

참고로 오른쪽에서 세 번째 작품이 금호에서 보았던 작품이다. 커튼 사이 목재 의자 위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해반, 대지와 스펙트럼의 조각들 Nr.05, oil, acrylic on canvas, 91x120cm, 2025
이해반, 대지와 스펙트럼의 조각들 Nr.04, oil, acrylic on canvas, 72.8x91cm, 2025
편의상 5번, 4번이라 칭하자.

5번의 형태적 느낌은 성게나 불가사리 같은 극피동물, 개불같은 환형동물 같고, 색감은 나전칠기장이다. 소용돌이 사이로 빨려들어갈 것만같은 몽환적인 느낌과 용솟음치는 폭발적 느낌이 공존한다. 산맥의 근원, 지구의 심장부처럼 보이는 지형의 소리없는 터뜨려짐. 색채는 샛노란 황토빛을 바탕으로 하여, 진한 올리브그린과 산호빛 핑크, 부식된 쇠색과 자색의 잔결이 결정을 맺듯 얽혀 있다. 전복, 조개 등의 껍데기를 얇게 갈아 여러 가지 무늬로 오려낸 듯한 나전형 문양이 물결에 구현되었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으나 한지 위에 안료가 번지는 듯한 결이 전체를 구성한다. 작가의 동양화적 기법이 분명 보인다. 중앙에서 위와 오른쪽으로 분출하는 형태는 나무 뿌리 같기도 하고 꽃봉오리가 폭발하듯 펼쳐지는 환상 식물처럼 보이는데, 이는 열대식생을 상상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읽힌다. 동양화의 필법, 담묵으로 감아 겹겹이 겹친 산수표현을 연상시키기 때문. 허나 분명히 서양화의 시점샷, 특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항공적 시선도 보인다. 동양화 베이스에 서양적 표현을 묘하게 버무린 스페셜한 작품이다.

4번은 존재하지 않는 내면의 풍경이다. 감각적 환상의 시각적 구현에 가깝다. 작가는 동양화에서 익힌 번짐과 여백의 미를 자연의 카오스와 무질서 속의 질서를 모티프와 융합했다. 네덜란드 유학에서 익힌 명확한 구도, 빛의 각도와 색면 분할에 능숙하다. 식물을 기반으로 한 생태적 감각도 보이는데, 식생이 한반도에는 없는 과장되고 율동적인 열대성 식물이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식민지에서 도입하고 학습한 식물적 표현이다. 식민적 식생의 상흔, 혹은 기후가 기억하는 식민주의의 유령이다.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동양화와 유럽유학, 생태와 추상, 이런 것들은 양극단의 스펙트럼에 있는 말들로 서로 무관한 듯 보이지만 이해반 작가는 회화 안에서 버무려내 경계를 넘나드는 하이브리드 식물추상으로 빚어냈다.
화면 구성은 동양화에서 배우되, 동양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해체하여 새로운 시각언어로 재구성했다. 원경은 뿌옇게 흐릿하지만 동시에 광학적으로 날카롭고 산맥의 부벽준은 버블감과 점막으로, 세필화의 우점준은 필법이 아닌 색채의 그라데이션으로 재탄생했다. 산은 어쩐지 스스로 흐르고 나무는 전자적 정맥처럼 진동한다. 전통동양화가 여백과 먹으로 비어 있음의 충만함을 추구했다면 이해반 작가는 그 여백마저 미세입자로 쪼개어 떠다니는 성운 상태의 색감으로 대체해 많이 채웠으되 비어있는 감각을 보여주었다. 현명하고 정교하다. 감각의 덩어리가 생성되고 한 세대의 시각적 언어가 진화한다.
작가의 작품에서 일관된 화두가 있다. 캔버스 위에 정렬되어있는 결과물에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 오랫동안 고민한 흔적이 느껴진다. 빛은 파스텔톤으로 서서히 번지며 은하수처럼 부유하는데 형태는 자꾸 꿈틀거리고 번지는 듯하다. 특이하다. 살구빛, 연지빛, 청연색, 노을빛, 펄빛 자주, 비취빛, 바랜 철색같은 색의 조합이 익숙한 듯 낯설다. 펼쳐진 화면에 동양적 명상을 느끼기엔 조형이 너무 많아 번잡하고, 서양적 구성이라기엔 또 오브제가 너무 없고 여백의 미가 느껴진다. 이러한 동서양 융합의 실험을 하며 작가는 자신만의 환상적인 제3의 풍경을 구성하고 있다.
4번 작품에서 물결은 산이 되었고 산은 다시 증기로 솟구친다. 기후적 회화, 회화의 호흡을 상상하게 만드는 기체적 구성물. 전통회화로 포섭할 수도 표현할 수 없다. 풍경이 아닌 풍경 되기 전의 덩어리. 무정형의 압력을 채집하고 응축시킨 시트지. 무지개가 일렁이는 수묵화, 입체적 각도의 진경산수화, 바람의 무게, 수증기의 어깻죽지, 식물의 마디마디에서 삐져나온 희귀한 생장소리. 말랑하고 느슨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반적 기법이 아닌 나만의 기법. 색채는 이질적 감각들이 경계 없이 접혀 있는 지층이다. 그 지층, 자색 바위 틈에서 솟는 전류 같은 황로색, 연보랏빛 안개 속에 가라앉은 기계적인 철록색, 뱀비늘처럼 겹쳐진 올리브색 음영 위로 톱니처럼 박힌 별빛 입자. 이런 조합은 채도가 아니라 촉각적 불협화, 아니면 지각의 무게 중심이 흐트러지는 낯선 압력이다. 꽃잎에 입맞춰본 자만이 알리라. 눈으로 보는 비유가 아닌 실제의 감각을 호명한다.
형상은 명확하지 않으나 모호하지도 않다. 뿌연 경계 안에 있는 조형은 기억을 잃기 직전의 체언, 혹은 이름 붙이기 직전의 존재다. 회화의 고정관념은 대개 "그릴 수 있어야 존재한다"거나 "형상이 있어야 감상이 가능하다"는 말로 축약가능하다. 이에 용감하게 도전한 결과 이해반의 회화는 무엇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보게 만들며 그것을 어떻게 보았는지 자신에게 다시금 질문하게 한다. 말하자면 감각기관이 이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감각기관을 휘감는 방식을 스스로 경험하게 만드는 셈이다.
그러니 이러한 그림은 사실적 재현의 회화라기보다는 하나의 기상현상, 혹은 시각적으로 관측 가능한 정서적 기후라고 표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익숙한 언어로 부를 수 없는 것들을 굳이 그리는 이 프로젝트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려는 기획이면서 아직 무엇인지 아닌지조차 규정할 수 없는 것에 색을 입히는 무모하고 용기 있는 회화의 선전포고다. 오렌지 사이렌과 함께 전쟁의 소리가 들린다. 진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