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수녀들 (2025)

The Priests 2: Dark Nuns



1. 원래 오컬트물을 즐기는 팬층에는 한계가 있다. <파묘>가 예외적이고, (그에 대한 분석은 수만가지가 있겠다) 그 외의 경우라면 대중적으로 호소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관객 확장에 한계가 있는 장르영화는 세계적으로 가야한다. 인구 5천만 국가에서 1천만명이 오컬트물 팬일 수는 없고, 대다수는 일생에 한두 번 <파묘>처럼 화제가 된다면 박스오피스 1위라니까 한 번쯤은 볼 사람밖에 없다. 


문득 생각나는 것. 수년 전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비리그 대학 교수가 쓴 정치철학서가 왜 갑자기 1위가 되었을까? 중요한 것은 1위가 되니 왜 1위가 되었나, 1위라면 한 번 보자하는 사람들이 계속 1위가 되도록 만들어주었다. 베스트셀러가 베스트셀러를 낳은 것이다. 가게 앞 줄 선 것을 보고 와 맛집이네 궁금하니까 한 번 보자라는 심정으로 줄 서는 자들이 다시 맛집임을 강화시켜준 것이다. 내용만으로 1위된 것은 아니다. 다만 왜 처음에 1위가 되었느냐에 대한 시장분석은 여러가지가 있겠다. 표지독서(최근yes24손민규MD의 표현)하는 사람들에게 밀리의 서재 전략(실제로 보는 사람들을 공략하기보다는 책을 보야하니까 사야한다는 죄책감으로 판매하는 전략)으로 접근한 부분도 있지 않나 싶다. 


하지만 오컬트물은 심지어 표지독서도 안된다. 제목만 보고 장르만 보고 도망가는 사람 투성이다. 이런 장르 영화가 흥행하려면(즉,제작비를 회수하려면, 제작비를 회수해서 고생한 스탭들에게 인건비도 주고, 감독도 다음 영화를 만들려면), 세계의 여러 나라의 오컬트물 팬층에게 일일이 호소해야한다. 5천만 국가에서 약 165만명(3.3%)에게 호소했다면 옆나라 1.2억 인구의 3.3%(약396만명)에게, 프랑스 6800만명의 3.3%(224만명)에게 호소해야한다. 물론 이렇게 기계적으로 계산할 수는 없고, 조국 특수를 제해야한다. 타국 영화팬에게는 외국어인 한국어로 연출한 해외영화니까 실제로는 우리 관객만큼 홍보할 수 없어서 반정도는 덜어야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촘촘하게 전세계적으로 있는 일부 장르 팬층에게 호소해야한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기존의 해외 장르물과는 무엇이 다르냐, 무엇을 차별화했냐이다. 해외관객은 그것을 중요시한다. 무엇이 새로운가. 내가 알고 익숙하던 것과는 무엇이 다른가. 너는 나에게 어떤 새로운 자극을 제공할 수 있는가.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하나의 관습화된 장르영화의 문법내에 한국문화를 얼마만큼 세련되고 적절하게 가미해서 한국형 오컬트물을 만들었느냐가 관건이다. 이것은 취할 수 있는 전략의 하나일 뿐이다. 제작사와 감독의 생각은 모두 다르고, 어느 누구는 아예 한국을 다 제외하고 정통 장르물을 만들고 싶을 수도 있고, 세계관객과는 관련없이 국내 관객을 대상으로만 제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에 한국형 오컬트물을 만들어서 세계 여러 국가에 산재되어 있는 인터네셔널 장르팬층의 네트워크에 호소하겠다면, 나는 한국민속적 요소인 무당(샤먼)을 넣는 시도는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잠>에서도 후반부에 그런 한국적 굿, 부적, 무당이 나왔었다. 감독과 제작자들이 여러 시도를 하면서 어떻게 이 민속요소를 첨가해야 보편적인 설득력있을지 고민해나가는 단계에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상영관에서 일단 내리고, 한국관객들에게 외면받은 후, 넷플릭스에 올라가 세계적으로 관람이 될 때 그 진가가 발휘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적 샤머니즘에 서양 오컬트를 더한 이 작품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 수용될 것인가?


기존 오컬트물에 없던 매력을 세계인들이 여기서 찾는다면 그것은 사실 두 수녀의 장면이 아니라 효원 (김국희 분)과 애동 (신재휘 분)의 미장센일 것이다. 그런데 효원은 샤먼의 역할을 충실히 다 전달하지 않았고, 어떤 할아버지가 죽을거야라고 예언하는 장면 하나로 캐릭터의 진정성이 엎어졌던 것 같다. 애동이 도와주러 오는 장면은 좋았으나 왜 밖에 있는지, 북은 왜 두드리는지에 대한 이해는 조금 어려울 수 있겠다 싶다.


2. <핸섬가이즈>의 불청객 5인방 중 파란색 옷을 입은 보라(박정화분)가 나중에 빙의되어 4족 보행 달리기를 하는데 그 장면에서 와.. 이렇게까지.. 했던 적이 있다. 이 영화에서 와.. 이렇게까지.. 는 2009년생(현 15세) 문우진의 대사이다. 빙의된 악마로서 쉰 소리를 크게 내야하는데 대사의 양도 상당하다. 아주 고생했을 것 같다. 쉰 목소리로 크게 화를 내야한다. 심지어 변성기 언저리의 나이에 있다. 여성 혐오적인 대사에 대한 비판이 있는 듯하다. 그 부분이 누군가에게는 거슬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그런 혐오적 표현을 더해서 상영결정을 한 제작사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대사만 가지고 여성혐오적인 영화라고 말하기에는, 작중의 주인공 둘 다 여성이고, 여성억압적 가톨릭 행정체계에 대항하며, 거대한 SUV를 몰고 담배를 피우는 수녀라는 멋지고 감각적 이미지를 보여주고 했기 때문에 영화 자체가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악마라는 빌런이 하는 대사의 핍진성을 위해 여성혐오적 표현을 채택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그 대사 중에서 걸리는 것은 다르 부분이었다. 스토리 진행상 튀고 가장 이물감이 있던, 악마가 말하지 않을 것 같은 대사가 있었다. 퇴마를 하려는 강성애 유니아 수녀(송혜교분)에게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돼"라는 탓하는 대사다. 나느 그분에서 갑자기 현대 가족 드라마 같은 것이 생각나며 이입이 깨지고 소격되었다.


전여빈이 분한 이수영 미카엘라 수녀의 어린시절 트라우마인 자살하는 친구는 <외계인1+2부> 김태리가 분한 이안의 아역배우 최유리다.


허준호(안드레아 신부 역)는 <천박사 퇴마 연구소>에서 범천으로 나왔고 <노량>에서는 등자룡으로 나왔는데 그의 주름은 나이테처럼 어떤 문화적 깊이를 나타내는데 용이한 것 같다.


신부의 이탈리아어는 적절했고, 이탈리아어 통역하는 수녀도 한국인 발음 괜찮았는데, 한국어는 천천히 설명하다가 갑자기 이탈리아어에서 너무 빨리 말하는 아쉬운 점은 있었다. 대사의 속도가 한국어를 말할 때는 천천히 공원을 산책하다가 이탈리아어에서 갑자기 300km 급발진을 하며 도로를 내달렸다.


검은사제와의 연관성은 문득 문득 드러난다. 이영신(박소담 분) 사진, 최준호 아가토(강동원 분)과의 만남, 김범신 베드로(김윤석 분)가 왜 안 오느냐에 대하 설정 설명 같은 부분. 


3. 하나의 작품을 감상하고 난 다음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이 동시에 생긴다. 그런데 책이 아니라 영화 같은 집단예술작품에 평점을 매기는 것은 복수의 창작자의 의욕을 꺾는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계량화하는 폭력성은 차치하고, 무용하다. 제작자에게도 무용하고, 자신에게도 쓸모없다. 복수의 익명대중이 내린 평점은 20대 여성 서울 저녁상영은 대략 8점, 30대 남성 지방 조조상영은 대략 9점 하는 식으로 통계화되고 지표화되어 마케팅 분석에 활용되는 효과가 있겠지만, 블로거든 전문평론가든 개인이 내린 평점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자신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외부적으로 감놔라 배놔라하는 평가들은 창작자들에게 오래 곱씹는 상처와 이걸 내가 왜했나하는 회한만 줄 뿐이다. 게다가 개인이 내린 평가도 수십 개가 되고 수백 개가 되면 그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비일관성이 발생하고 왜 이 작품은 3점인데 저 작품은 2점이냐 하는 불평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논의 끝에 무언가 생산적인게 나온다면 좋겠다. 생산적인 논의가 된다며 오히려 장려되어야한다. 그러나 그런 비일관성에 대한 코멘트와 일련의 논쟁은 방구석 키보드 파이팅에 불과하고, 실제 제작자들은 신경도 쓰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할 뿐이다. 제작 동기를 꺾는 등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별 대단한 위인도 아니지만, 어쨌든 영화 평점은 매기지 않는다. 일차적으로 창작자를 위한 것이고 부수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것이다. 영화들 사이에서 생기는 미세한 오차와 비일관성을 사후 조정이 안되기 때문이다. 다시 보니까 3점이 아니라 5점 만점이네 하는 경우도 빈번한데, 그 자기 반성에 대한 대가가 차후 평점 조작이라는 오명에 불과하다면 하지 않음만 못하다. 


오히려 내가 할 수 있고 잘 하는 것은 무엇이냐, 작품에서 얻은 인사이트나 다른 작품과의 비교 같은 것이다. 또한 디테일에 대한 매서운 포착이다. 나는 스토리 전반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유치원 초등학교 선생님들과 같은 재능)은 없다. 그런데 남이 보지 않은 부분을 아주 예리하게 본다. 내가 본 신을 남들도 보았는지 궁금했는데 책이나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없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나, 못 봤거나, 봤지만 기록으로 안 남 것이다. 그런데 아마 그런 디테일들이 창작자들은 오랜 고민의 결과였을 수 있고, 그것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으면 고맙거나 반갑게 느낄 수 있다. 어디서도 나와 같이 쓸데없는 디테일을 포착하는 글을 못봐서 내가 이제 쓰기로 했다. 왜냐면 그런 디테일을 보는 게 나는 너무 재밌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 

사전판매를 거쳐 오늘 맘스터치 신제품이 출시되었다. 다음은 제품을 소개한 신문기사 예시다. 검색해서 아무 기사나 가져왔다.


신제품은 크리스피하면서 육즙 가득한 패티에 베이컨 잼, 딜 피클과 고소한 치즈 소스의 조화로운 감칠 맛이 자아내는 압도적 풍미가 특징이다.

매일경제 2025-02-18


이번에 선보이는 '에드워드 리 버거'는 맘스터치의 대표 제품인 싸이버거와 비프버거에 에드워드 리 셰프가 개발한 특제 베이컨 잼을 더한 것이 특징이다.

비욘드 포스트 2025-02-18


신제품 2종은 크리스피하면서 육즙 가득한 패티에 ‘단짠의 정석인’ 베이컨 잼, 딜 피클과 고소한 치즈 소스의 조화로운 감칠 맛이 자아내는 압도적 풍미가 특징이다.

천지일보 2025-02-18


2

뉴스기사에서는 정석적이고 형식적인 표현을 한다. 다양한 제품에 대한 소개를 하는 기자로서는 가장 평범하고 대중적인 표현으로 기사의 메시지를 전달해야한다. 


내가 여기에 쓰고 싶은 푸드 칼럼의 목표는 조금 더 감각적인 묘사이다. 따라서 "압도적 풍미", "특제" "고소한" "크리스피하면서" 이런 일반적인 표현은 지양하고 조금 더 새로운 묘사를 시도할 것이다. 한국어 혹은 영어로 미각 표현을 어느정도까지 끌고 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개인적 글쓰기 실험이다.


가격이나 영양요소나 프로모션이나 제품 확대 사진이나 다른 블로그에 얼마든지 있다. 나보다 더 전문가들이 많다.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고 남들과 다르게 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향하는 바는 한국어와 영어의 언어적 풍부함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에 있다. 먹고 쓰기는 먹은 것에 대한 인상을 쓰는 글쓰기 표현이 중심이다.


3. 한식의 세계화로서 에드워드 리 버거


이 버거의 매력은 에드워드리가 개발한 베이컨 잼과 싸이버거의 치킨 패티와 생양파의 삼자대면에 있다. 이 삼자대면에서 소통이 원활하게 되어 온전한 트라이앵글이 만들어졌다. 만약 커뮤니케이션이 실패해서 한쪽만 승리했다면 다른 프로모션버거처럼 어느 순간 고객의 뇌리에 흩어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롯데리아의 소스는 단거리 육상선수처럼 패티를 넘어 빵까지 달려가되 뒷심이 흐느적 거리는 편인데 반해

에드워드리 버거의 베이컨잼 소스는 투포환 선수처럼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며 먼 거리까지 전분의 점성을 머금은채 점잖게 있다가 저격수처럼 적절한 타이밍에 맛의 포를 쏜다. 소스가 무례하게 패티의 영역까지 쉬이 침범하지 않는다.


수제버거의 캐러멀래이징된 기름지고 무거운 양파가 파도를 헤치는 거대한 범선처럼 육중하게 이동한다면

맘스터치 에드워드리버거의 생양파는 아삭하니 전체 균형을 맞춘다. 베이컨잼을 킬링 포인트로 가장 크게 홍보하지만 사실 메인 멜로디 위에서 보완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신디사이저나 일렉의 사운드와 같은 양파의 역할이 홍일점이다.


버거 속의 양파는 마치 건조하고 쨍쨍한 날씨의 미국 어느 스케이트장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뇌맑은 아이들처럼 가볍게 스치고 펜싱선수처럼 표푝 하고 속사포로 찔러 들어온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꽤나 부담스러운 금액을 들여 일생일대의 경험을 하고자 모처럼 온 가족을 데리고 크루즈 여행을 가는 자의 무거운 어깨와는 달리

별 생각 없이 집에서 입던 티를 입고 보드 하나만 들고 나와

산책보다는 지루하지 않게 달리기보다는 덜 숨차게 구기 스포츠보다는 풍경의 다양함을 탐닉하면서

정상에 다다르겠다는 확고한 목표 없이 뇌맑게 하루를 보내는 스케이트 타는 청소년들의 하루와 같다.


다만 그 교포 청소년은 한국계에 대한 유산은 잃지 않고 할머니가 해준 불고기를 기억하고 있다.

불고기의 핵심이 설탕을 넣어 달고 간장을 넣어 짠 단짠 불고기에 있다면 베이컨잼은 고기를 삼겹살로 설탕을 잼으로 바꾸어 한식의 세계화를 이루어내었다고 본다. 마치 같은 재료인 돼지 발로 족발을 만드느냐 슈바인학센을 만드느냐 (최근 리메이크된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도경수는 이거 족발 아니야 슈바인학센이야 하는 대사도 있었다), 이베리코 돼지나 삼겹살이냐 야키니쿠냐 고기 구워먹는 것이냐 하는 정도의 이야기다. 물론 디테일에 민감하다면 둘은 전혀 다른 카테코리겠으나 표의적으로만 말하자면 그렇다.


롯데리아 불고기 버거를 넘어설 수 있을까? 한국 폐쇄적인 전통과 서양의 확장성이 융합할 수 있을까? 몰려들어오는 서양상선에 두려워하던 20세기 말 조선이 쇄국정책을 펼친 후 120년이 넘어 이제는 우리가 문화로 제국주의 중상주의 정책을 펼치려 하는데. 불고기 버거로 전세계의 미식 시장을 개방할 수 있을까? 한 포지션 차지할 수 있을까? 군림할 수 있을까? 현지문화와 융화할 수 있을까?


불고기 버거는 키메라가 아니다. 단순한 패스트푸드 하이브리드 그 이상이다. 원래 버거란 만병통치약(panacea)같은 것이다. 누구에게도 실패할 수 없는 버거다. 홍어는 향부터 접근불가능한 오오라를 풍기고, 냉면이나 순대이나 고수는 먹는 순간 우웩과 우와로 호불호 두 진영이 나뉜다. 버거를 입에 깨문 자가 아이 맛 없어! 하고 뱉는 일은 없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탄수화물과 지방의 화학적 신호를 거부하는 미후각 세포는 유전자 조작된 좀비가 아니고서는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다. 버거는 실패하지 않지 않는다. 실패하지 않으니 상품이 되고 비즈니스가 되는 것이다. 맛있다. 이제 문제는, 맛있는 것을 어떻게 더 맛있게 만들 것인가에 있다. 90점 받은 학생이 어떻게 하면 1점을 더 올릴까, 입단한 선수가 어떻게 스코어를 더 올릴까, 좋은 평가를 받은 제품군을 가진 기업이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기술적 완벽도를 구현할 수 있을까 상품성을 더 확보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에 가깝다. 새로운 커스터머를 공략해야하는, 앞서 말한 홍어나 냉면 혹은 새로운 형태의 맛을 모르던 시장에 알려야하는 불닭볶음면과는 다른 종류의 고민이다.


한식+버거의 가장 완벽한 형태 중 하나는 불고기 버거라고 본다. 스페인식+버거, 일본식+버거, 태국식+버거처럼 각 지역의 대표적 음식을 활용해 버거로 만들 수 있겠지만 글로벌하게 나가기에는 여러 도전이 있을 것이다. 홍콩 피자헛의 뱀피자처럼 거부감있는 시도도 있을 수 있고, 재료의 수급문제도 있다. 불고기 버거는 여러 점에서 한식이라는 새로운 이국적 스타일을 홍보할 수 있으면서, 재료의 수급도 용이하고, 보편적이고 익숙한 맛인데다가, K-드라마 등의 홍보도 가능하다. 요컨대 글로벌하면서 로컬적인 글로컬 식제품이다.


오랜 한국 전통의 소고기 양념을 독일에서 유래했고 미국에서 프랜차이즈화한 버거에 버무려 독특한 풍미의 감각으로 재탄생, 리패키징할 수 있는 것이다.


소고기 양념은 지역적 차이는 있으나 공장화할 수 있는 핵심재료는 간장, 마늘, 참기름, 과일 퓌레, 설탕이다. 이 양념 덕에 옛 조선 궁중 한식이 진화되어 마리네이드 소고기에 깊고 짙고 부드러운 맛이 난다. 한 입 한 입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감칠맛과 캐러멜화된 단맛의 균형을 유지하는 이 한식 양념은 소고기의 태생을 가리지 않고 태국 소고기에도 미국 소고기에도 유럽 소고기에도 같은 한국식 콩과 마늘의 풍미를 입힐 수 있게 될 것이다. 


부드러운 탄성이 있는 번과 소고기 혹은 치킨 패티, 양파, 양상추는 버거 파티의 핵심 전력이다. 다른 배리에이션에서는 치즈김치, 볶음김치, 짜장계란 프라이가 참전하여 버거의 복잡성과 식감을 높일 수도 있겠다. 다양한 창의적 조합이 가능한 것도 불고기 버거의 범용성을 강화한다. 요컨대 불고기 버거를 디폴트로 두고 여러 실험적 시도 (때론 파격적 시도)가 가능한 것이다. 비슷하면서 살짝 열화된 버전으로는 구운 토스트에 특제소스라는 기본 세팅에, 감자, 햄 등을 올려주는 이삭토스트 가 있고, 세계의 다른 레퍼런스로는 케밥, 타코가 있겠다. 다만 불고기 버거의 특이한 점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버거라는 글로벌 플랫폼 위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점은 마치 K-pop이 팝이라는 미국발 전세계 시장위에 올라타는 것처럼, 한국 영상제작자들이 넷플릭스라는 플랫폼 위에 올라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요컨대, 케밥이나 타코는 아예 플랫폼부터 새로 개발하고 시장을 개척해야하는데, 불고기 버거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복수의 글로벌 버거 체인점 위에 한 메뉴로서 등장하되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장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흑백 요리사로 한국에서 바이럴된 에드워드 리를 선택한 것은 맘스터치의 아주 적절한 전략적 결정이었다. 세계화를 목표로 한다면 한국계 교포이자 미국 백악관, 아이언 셰프 등을 통해 네임밸류가 있는 에드워드 리만큼 상품성 있는 모델도 없다. 흑백요리사는 마지막 패를 얹었을 뿐, 이미 완성되어 있던 공인이었다.


물론 불고기 버거가 유명세를 탄 것은 1980년대 한국의 패스트푸드 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롯데리아나 맥도날드와 같은 체인점들이 현지 입맛에 맞는 메뉴를 개발하는 일환으로 등장했다. 비슷한 메뉴로는 비빔라이스버거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한국의 단색화 전통운동의 고민처럼 한국적이란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에 너무 침잠해있었기도 했고 아직 세계를 잘 모르기도 했고 양념공장의 인프라도, 한식의 세계화라는 아젠다의 대중 인식도 발전하지 못했다. K드라마의 힘을 입어 김밥이 미국의 소도시에도 전진하는 오늘날에는 타이밍이 좋다. 시기가 적절하다.


초기 불고기 버거의 홍보 포인트는 고향의 한 입이라는 데 있었다. 한식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한국적인 맛을 거의 처음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향수와 참신함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프랑스 유수의 레스토랑에 고추장 버터와 같은 누군가에게는 창의적 실험의 결정체 누군가에게는 괴식이 등장하는 시대가 되었다. 세계화도 단계가 있다면, 이제 초기 세계화는 지나가고 무르익은 세계화가 등장한다. 식문화는 사람의 미각을 길들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주 먹어서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 과즙처럼 느껴질 정도의 단맛이 풍부하고 마늘의 알싸함이 기름의 나태함에 채찍을 가하는 맛으로 국경을 초월하고 세계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간다.


4. 맘스터치에 대한 소고


한국 패스트푸드 업계에서 컬트에 가까운 위상을 얻은 버거가 있다면 바로 맘스터치의 싸이버거다. 이미 버거 시장은 포화되었고 치킨 시장도 강자가 많던 시절, 카카오나 엔비디아처럼 혜성처럼 등장해 이제 바삭한 프라이드 치킨 버거로서 온전하면서 육중한 존재감을 자랑한다.


맘스터치의 주력인 싸이버거의 핵심은 BBQ의 황올처럼 바삭한 크러스트 속 남방 샤오롱바오처럼 터지는 육즙이 풍부한 치킨 허벅지살 커틀릿이다. 신촌에서 내가 처음 먹었던 맘스터치에 대한 인상은 직원들의 앞치마에 흰색 가루가 묻어있었다는 것인데 그말인 즉슨 공장에서 가공된 패티라고 할지라도 튀김 자체는 주문 제작 방식을 채택하여 주문마다 튀겨준다는 것이다. 그점이 파파이스와는 다르다. 파파이스의 메뉴는 소스, 패티, 버거 모두 트집 잡을 점이 없으나 오직 매장이 별로 없어서 접근성이 없다는 것과, 미리 만들어져 신선한 바삭함이 없어 맛이 반감된다는 점에 있다. 레디 투 메이드가 아니라 메이드 투 오더라는 점에서 모스버거를 닮되 모스버거보다는 제작이 빠르고(성질급한 한국인들은 일본인만큼 기다려줄 수가 없다) 가격이 저렴하여 가성비 있다는 데 맘스터치의 시장성이 있었다. 대량 생산 옵션이라는 레드 오션에 대한 전략으로 부분적인 수작업이라는 대안을 제시하며 프랜차이즈업계의 베네룩스3국, 즉 강소국 자리매김했다. 저렴한 가격에 꽤 괜찮은 치킨패티, 신선하게 조리한 식품이라는 브랜드 철학이 소비자들에게 각광을 받아 싸이버거가 대표 메뉴로 자리 잡으면서 맘스터치는 국내 전역으로 빠르게 확장되었다. 이후 프라이드 치킨의 전 세계적 인기와 한류 확산의 물결을 타고 대만, 싱가포르, 미국에 지점을 여는 등 해외 시장에도 진출했다. 자 그럼 이제 후발국이 강소국은 되었는데, 중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싸이버거는 한 입 한 입, 또 한 입이 절뚝거리지 않는다. 지나치게 기름지지도 않고 신선하고 바삭하되 세 번째 식감도 물리 지않고 괜찮다. 육향 가득하고 쫄깃한 치킨 패티와, 바삭한 양상추, 은은한 마늘과 후추 향이 가미된 소스와 크리미한 마요네즈,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부드럽고 달콤한 번의 어셈블리는 간단하면서 화려하고 되직하되 가벼운 맛이 있다. 다른 화려한 경쟁 제품과 달리 싸이버거는 샐러드 전문점에 구사하는 트렌디한 토핑보법이나 손쉬운 양념검법이라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고, 과도한 향신료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 결과 치킨 패티라는 본질에 충실하면서 맛의 질감 대비와 균형 잡힌 맛이 가능하게 되었다. 


5. 에드워드리와 싸이패티의 콜라보


아이유와 박효신의 듀엣무대를 상상할 수 있을까? 유재하와 트렌디한 팝보컬-예를 들어 악뮤의 김수현-의 AI커버를 상상할 수 있을까? 싸이버거의 패티와 에드워드리 특제 베이컨잼과 비프의 콜라보는 쌓인 낙엽의 토끼 같은 느낌이다. 혹은 90년대 소년만화에서와 같이 서양기술로 만들어진 거대한 로봇에 어린아이가 탑승하는 것과 같은 인상이다. 하나는 거대하고 고졸(古拙)하며, 하나는 세련되고 날렵하다. 무엇이 육중하고 무엇이 경쾌한가?


싸이버거의 패티는 ENFP와 같이 가벼운 탄성과 질감이 있다. 고든 램지 버거나 브루클린 버거처럼 육즙과 버터를 머금고 <대부>의 배경에서 보이는 20년대 초 미국인들처럼, 가즈오 이시구로의 원작을 영화화한 <남아 있는 나날>의 영국 건축물처럼 모든 부분이 늠름하고 확실하고 듬직하고 되직한 버거가 아니라는 뜻이다. 


에드워드리버거는 싸이패티에 더해 카레와 같은 베이컨잼의 질감이 되직하여 뒷심을 잡는다. 싸이버거 치킨 패티의 의지를 덮어버리지 않고 베이턴잼이 고기향을 버무려 독립적이되 이기적이지 않은 조합을 낳았다. 저항하되 수용하고 크리미하되 바삭하여 중용의 도를 잘 살렸다. 버거팅의 풀드 와퍼나 화이트 페타는 최종적으로 어떤 하나의 감각, 어떤 하나의 재료가 승리한 상황이다.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내달린다. 에드워드리 버거는 치킨의 푸드덕 바사삭거림과 오밀조밀한 카레질감의 베이컨잼이 적절히 콜라보를 하고 있는 조합인데 최종적으로 서로 독립적인 보법을 구사하고 단독으로 씹히고 맛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어느 한 음색이 다른 음색이 묻히지 않은 조합이라고 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김인순 컬렉션 《일어서는 삶》

20240829-20250223





1. 서울 시립미술관의 영어번역은 국내 탑급이다. 예술계에 커리어가 있는 전문 번역가를 쓰고 영어권에서 교육받은 담당자가 감수하지 않으면 이정도 퀄리티가 나올 수 없다. 추측이지만. 


2.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전에 했던 전시에서도 영어설명이 좋았다. 호퍼는 그러려니 해도 스미스도 아주 좋았다. 물론 호퍼는 대중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의 미술이지만 스미스는 다소 거북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현대미술은 영어가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어 제대로 된 영어설명없이는 그 매력이 반감이 된다. 스미스의 작품을 이해하는 가늠좌로서 유려한 영어설명은 작품과 전시의 품격을 높이는 기능을 한다.


키키 스미스-자유낙하

2022/12/15-2023/03/12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2023/04/20-2023/08/20





3. 논란과 경탄이 공존하는 천경자 컬렉션과 함께 있는 김인순 컬렉션. 지난 반년간 3번쯤은 들린 것 같다. 입구 앞에 있는 영상에서는 영어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방금 시립미술관 유투브에 영어설명이 같이 있는 영상이 올라왔다. 여기서도 번역이 솜씨좋게 잘 되어있다.




4. https://www.youtube.com/watch?v=0tuGby0HIbI&list=TLPQMTgwMjIwMjWwpUL4jhqPDQ&index=10


● 0:07

1) 하게하다 요즘 용어로 prompt를 많이 쓴다. GPT 이후 거의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단어다.

이전에는 로켓공학자들을 위주로 launch(발사하다)가 start대신 쓰이다가 요즘에는 prompt를 많이 쓰는듯하다.

2) 사람들하고 친해지고 to connect with people, 사람들과 연결되고로 잘 번역했다.



 1:03 

1) '아주 이게 철두철미했었어요' 같은 간투사를 

뒷 문장에 분사화해서 연결해서 "Inspired by his convictions,"(그의 신념에 감화되어서)로 이었다. 적절하다.



 1:26 영어의 문법대로 한국어를 잘 풀어낸 좋은 예시다.

1) with Noun + ving는 라틴어의 ablative absolute에서 유래된 표현기법으로 The Korea Times같은 영자신문의 기사에서 접속사의 빈번한 활용대신 많이 쓰인다.

그냥 느슨하게 문장을 연결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해서, ~하니까, ~하되 등 거의 아무거나 다된다.

with은 ~함께라는 전치사가 아니라 연결하는 기능을 할 뿐이며,

with Noun이 주어, ving는 동명사가 아니라 그냥 동사화해서 해석하면된다.


2) "at that time, with numerous protests happening and people being detained by the police"


"그때 with numerous protests 많은 데모가 happening 일어났고(and) people사람들이 by the police경찰에 의해 being detained 잡혀들어가고 이럴 때니까(이 표현은 앞으로 옮겨 at that time으로 풀었다.)


솜씨 좋은 번역이다.


 1:59 이 부분은 공부할 점이 있다.

1) "그때는, 진정한 예술이라는 것이, 저 자신은, 사회가 요구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했어요"

"back then, I pondered what defines true art"

pondered over도 되고 pondered + object도 된다.


그러나 자막 번역은 작가가 말한 '사회가 요구하는 일'에 대한 부분은 빼놓았다. 보완한다면 이정도가 되겠다.

"back then, I pondered over what defines true art and what society demanded from artists"


하지만 원어의 뉘앙스는 문장 요소를 다 정비한 문어체가 아니라 구어체이다. 말을 하다가 중간에 생각나는 것을 더한 것이고, 작가가 하려는 말을 완전히 전달하겠다면 숨은 함의를 끄집어내야한다.


만약 작가의 구어체 그대로만 기계적으로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은데, 표현이 뭉개지고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 옮기지 않음만 못하다.

"그때는, 진정한 예술이라는 것이, 저 자신은, 사회가 요구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했어요"

'Back then, when it came to true art, I personally pondered over what society expected."



보완하자면 이렇게 되겠다.


그 시절, 저는 종종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사회가 예술가에게 요구하는 바에 대해 깊이 생각하곤 했죠.


번역하자면 

In those days, I often contemplated the true essence of art and wrestled with the expectations society placed upon artist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세계사 익스프레스 - 한 권으로 빠르게 끝내는
김영석(써에이스쇼) 지음, 김봉중 감수 / 빅피시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대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꼭두전에서 꼭두 대표의 인터뷰가 가장 감명 깊었다. 거대한 불상 도자기 그런 것은 다른 동아시아에 얼마든지 있다. 꼭두는 독특하고 처음 보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 박물관 미술관 대회에서 잠깐 15분 발표를 했는데 열광적인 반응이 있었고 뉴욕 3년 전시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그냥 청계천에 버리는 쓰레기 였다. 혹은 무덤에 묻어서 잊혀지고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꼭두에 세계의 관심이 있다. 


2. 그러나 전시 설명은 너무 아쉬웠다. 전시 개요를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번역했는데 외국인들에게는 전혀 이해가 안되는 설명방식이다. 한국어를 그냥 다른 외국어로 옮긴다고 내용이 다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외국도서를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 아무리 한국어로 읽고 있지만 뭔가 사고방식이나 설명방식이 다르다고 느낀 점이 없는가? 외국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워서 말할 때 자세히 들어보면, 원어로 생각해서 한국어로 바꾸고 있는데 네이티브 같지는 않은 이질감이 든다. 그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이나 생각 전개 방향도 우리가 원래 알고 있는 방식과는 다르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유명한, 캐나다의 사회심리학자이자 문화 비평가인 조던 피터슨의 책을 읽어보면 분명 내용은 어디선가 읽어봤던 것 같은데 논리 전개 방식 같은 부분에서 조금 이물감이 느껴진다. 


위의 꼭두전 전시 설명이 대표적이다. 나는 이 전시의 영어설명이 아쉽고, 보완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번역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꼭두를 어떻게 외국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할까에 대한 문제이다. 꼭두를, 뉴욕 Met 뮤지엄, 테이트모던, 루브르에서 전시회를 한다면 어떻게 설명할까? 그들은 무엇을 알고 싶어할까?


사진 확대하면 한국어도 보인다.


3. 영어는 대략 이렇게 쓰여있다. 

Life ends, as it does for all living things. Death, a constant stranger to the living, is something we've never truly known. Death is whispered to be the beginning of a journey into the unknown. The living may feel deep sadness inthe face of death, but they cannot join the journey to the next world. All they can do is sending someone with those who must go. The only friend on the way to the other side is Kokdu. Just as the midwife welcomes us at birth and the parents care for us in life, when we exhale our last breath here and inhale the first in the afterlife, it is Kkodu who welcomes and guides us. And this exhibition invites you to meet Kkodu, a Korean carved wooden figure. Often vibrantly painted, Kokdu figures represent various roles, helping the transition peacefully to the afterlife. Korean ancestors would say "go back" instead of "die," believin that the place we go after death is where we first came from. As we journey through the world of the dead, returning to their spritual home, surrounded by the vibrant and colorful Kokdu, and with a piece of our cherished heritage, we hope you reflect on life and death through the lens of Korean tradition.


문제점은 네 가지다.

우선, 표현이 지나치게 시적이고 철학적이다. 처음부터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로 뜬금포로 시작한다. 그러나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시 설명문은 전시회 개괄-배경-작품-의의 같이 구조적으로 작성된다. 표현하고자하는 바도 명확해야한다. 만약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싶었다면, 죽음에 대한 의미를 성찰한다는 표현으로 족하지, 이렇게 "죽음을 바라보는 산 자들의 마음은 비통하지만 그 여행길을 할 수 없다. .. 길동무를 붙여줄 뿐이다... 꼭두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여기서 하나 더 지적할 부분은 "하지만"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역접의 표현도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비통한 마음의 반대항으로는 그나마 할 수 있는 행동이나 태도에 대한 부분이 나와야한다. 

예를 들어

떠나보내는 마음은 비통하지만,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떠나보내는 마음은 비통하지만, 남겨진 자들은 망자의 여정을 돕는다.

떠나보내는 마음은 비통하지만, 장례 의식을 통해 그들을 떠나보낸다.

같은 문장이다.


'산 자들은 죽은자들과 함께 하고 싶어도 죽음의 길로 직접 떠날 수 없지만,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라고 하는 것이 전달하고자하는 바에 가깝다.


둘째, 주제의 초점이 모호하다.


글의 초반부에서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길게 이어지다가 전시의 핵심 주제인 ‘꼭두’가 늦게 등장한다. 일본의 전시 설명에는 반드시 처음부터 단어 설명이 있다. 어려운 한자라면 요미가나도 달아둔다. 왜냐? 핵심 용어에 대해 정박시키고 공유해야 탄탄한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전시 설명에서는 꼭두에 대한 개념이 낯선 방문객들에게 기본 개념이 너무 늦게 등장한다. 이런 표현 방식이 한국에는 너무 만연하다. 오랫동안 그 화두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나는 한글의 우수성 때문인 것 같다. 너무 가독성이 좋고 외국의 표현들을 원문 그대로 흡수할 수 있어서 설명 없이 지나치는 것이다. 이 점이 확대되어서 한국의 대부분의 업계에 메뉴얼도 없고 데이터베이스도 없고 사수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문화가 너무 만연하다. 이 이야기를 하면 길어지므로 일단 여기서 중단.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이방인이다." 같은 표현은 문학적으로는 흥미로울 수 있다. 그러나 전시 설명문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 명확성이 부족하고 비슷한 표현이 반복되는데 핵심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변죽만 울린다. 이 문제는 다음으로 연결된다.


셋쨰, 꼭두의 역할과 의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부족


꼭두가 사후 세계로 안내하는 존재라는 점은 언급되지만, 구체적인 역사적, 예술적, 의례적 중요성이 명확히 전달되지 않습니다. 아직 학술용어가 정비되지 않아서 그럴 수는 있으나, 서양미술에서 보이는 온갖 의복, 안료, 기법에 대한 용어들, 일본장식예술에서 보이는 온갖 부분에 대한 한자용어들이 없다. 이 전시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저 모호한 "꼭두"라는 말 하나 뿐이다.




4. 만약 나라면, 꼭두를 뉴욕이나 영국의 세계 최고의 전시회에서 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겠다면 이렇게 하겠다.

서양인들은 선진국인들은 일단 처음에 포커스를 딱 잡는다. 그래 박물관 안으로 들어왔다. 전시회의 주제는 무엇인가? 꼭두다. 그래 그럼 꼭두는 무엇인가? 그럼 이제 꼭두를 설명해야한다. 꼭두가 뭐지? 하고 들어온 외국인들에게 밑도 끝도 없이 삶은 끝이 없고.. 죽음은 우리의 곁에 있고.. 이런 애매모호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밀한 용어 제시해서 닻을 내려주듯 고정시켜줘야한다. 

1. 용어 정의 및 기능 (당신이 보고 있는 바로 그 것, 꼭두란 무엇인가?)

2. 신앙, 상징 (꼭두의 기원, 배경은 무엇인가? 왜 만들었고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 - 꼭두라는 작품 자체에 대한 이해)

3. 예술적 문학적 가치 (꼭두라는 작품을 통해 읽을 수 있는 한국 전통 사회에 대한 설명, 2단락에서 3단락으로 넘어가며 미시에서 거시로 시각이 확장된다. 마이크로에서 매크로로.)

4. 전시 의의 (그래서 이 전시의 의도는 무엇인가, 왜 꼭두를 전시했는가, 3번을 거쳐서 큰 맥락을 설명해야 확장한만큼 4번의 의의에서 전시회의 가치가 커진다.)



Kokdu: Guardians of the Afterlife

꼭두: 사후 세계의 수호자


In traditional Korean funerary rites, death was not considered the end but rather a passage—a journey requiring both guidance and protection. At the heart of this transition stands kokdu (꼭두), intricately carved and vividly painted wooden figures that accompanied the deceased on their final procession. Adorning funeral biers, these figures served a dual role: providing spiritual guardianship and offering companionship to ease the soul’s journey into the afterlife.

한국의 전통 장례 의식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의 여정이었습니다. 그 여정에는 길잡이와 보호자가 필요했으며, 바로 그 역할을 맡은 것이 꼭두(꼭두)입니다. 정교하게 조각되고 화려하게(생생하게) 채색된 이 나무 인형들은 상여에 부착되어 망자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며, 영혼이 사후 세계로 평온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영적인 수호와 동반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의 전통 장례 의식에서 사용되는 도구로서 역할을 밝히고, 꼭두에 대한 용어정의를 바로 동격(apposition)으로 넣음. 이렇게 용어를 정박시키는 순간 꼭두는 청계천과 시골 마을에서 버려지는 쓰레기가 아니라 "정교하게intricately 조각되고carved and 생생하게vividly 채색된painted 목각wooden 인형figures"로 재탄생됨. 


The origins of kokdu are deeply rooted in Korean folk beliefs, where death was seen as a return rather than an absolute departure. These wooden effigies embodied this worldview, often appearing in anthropomorphic or zoomorphic forms—jovial jesters, fierce warriors, benevolent caretakers, mythical beasts—each fulfilling a specific function. The jester alleviated sorrow through humor, the warrior warded off malevolent spirits, and the caretaker ensured the deceased did not embark on their journey alone. This fusion of solemnity and playfulness reflects the uniquely Korean approach to mortality: a reverence for the dead, tempered with a belief in the continuity of life beyond death.

꼭두의 기원은 죽음을 절대적인 이별이 아니라 ‘귀환’으로 바라보는 한국 민속 신앙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을 반영하듯, 꼭두는 인간 또는 동물의 형상으로 나타나며, 익살스러운 광대, 사나운 전사, 자애로운 시중꾼, 신화 속의 짐승 등 각각의 형상은 저마다의 고유한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광대는 유머로 슬픔을 덜어주고, 전사는 악령을 물리치며, 시중꾼은 망자가 홀로 떠나지 않도록 보살폈습니다. 이처럼 장엄함과 유쾌함이 공존하는 꼭두는 한국인 특유의 사후관을 상징합니다. 죽음을 두려운 단절이 아니라 삶의 연속으로 바라보며, 죽은 자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믿음이 이 목각상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Beyond their ritualistic function, kokdu also offer insight into Korea’s artistic traditions and social values. Their dynamic compositions, exaggerated expressions, and unrestrained use of color situate them within the broader context of Korean folk art, where spontaneity and emotional immediacy take precedence over rigid formality. The craftsmanship evident in these figures suggests not only their role as sacred objects but also their connection to popular entertainment, particularly kkokdugaksi noreum, a form of puppet theater that brought both satire and spiritual reflection to funeral rites.

의례적 기능을 넘어, 꼭두는 한국의 예술 전통과 사회적 가치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생동감 넘치는 구성, 과장된 표정, 자유분방한 색채 사용은 한국 민속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며, 이러한 자발성과 정서적 직접성은 장례 의식에서 형식적 엄숙함보다 삶의 애환을 함께 나누는 것을 중시했던 한국적 미의식을 반영합니다. 나아가 꼭두의 제작 기법과 디자인은 단순한 장례 용품을 넘어, 풍자와 영적 성찰을 담은 전통 인형극 꼭두각시 놀음과도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This exhibition presents a rare opportunity to explore kokdu not merely as funerary artifacts but as cultural symbols that encapsulate Korea’s perception of life, death, and the unseen world beyond. By engaging with these vibrant figures, visitors are invited to reflect on the ways in which art, belief, and ritual converge to shape our understanding of mortality across cultures.

이번 전시는 꼭두를 단순한 장례 공예품이 아니라 삶과 죽음,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저세상에 대한 한국인의 독특한 시각을 담은 문화적 상징으로서 조명합니다. 이 생동감 넘치는 목각상들을 통해, 예술과 신앙, 의례가 어떻게 결합하여 인간의 유한성을 초월하는 문화를 형성해왔는지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결국 하고 싶었던 죽음에 대한 성찰은 "인간의 유한성mortality"라는 명사 하나로 족하다. 서양은 명사중심의 언어이기 때문. 명사를 중심으로 형용사와 분사화된 동사로 압축해서 하나의 개념 세트를 만든다.


5. 책은 평점을 남길 수 있으나, 전시, 영화 같은 집단예술은 평점을 매기는 것은 복수의 창작자들의 노고를 폄하하고 의욕을 꺾는 일이다. 그리고 혹여 비판을 했다면 반드시 대안을 남겨야한다. 대안이 없는 비판은 비난일 뿐이기 때문. 그래서 나라면 이렇게 쓸 것이라고 대안을 남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