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실타래: 노하우


큰 일정은 J로 작은 일정은 P로

계획의 큼직한 틀은 짜되 세세한 시간은 놓아둘 것

우연한 만남을 추수하되

다음 이동이 정해진 상태이니

그 인연의 영원하지 않음에 즐겁게 안타까워할 것

그 지역의 바람과 기운을 느끼지 않은 채

컴퓨터 앞에서 제한된 정보로 미래의 시간을 과하게 디자인을 하지 말 것

less is more


예를 들어

외국여행갈 때 출도착 항공권, 숙박지

한국여행갈 때 출발편

그리고 해당 동선 안에 있는 미술관 2-3곳의 휴무,오픈시간,현재전시와 교통편만 살펴보고

현장에 가서 보되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전시가 좋을 경우 더 많은 시간을 쏟는다

다음 스케쥴 소화해야하니 허겁지겁 보고 쫄래쫄래 출구로 나가지 않는다

어차피 근시일내에 다시 오지 못할 거라면 눈앞의 만남에 충실하기

시간에 쫓겨서 제대로 보지 못한 경우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다

가지런하지만 유연한 여행일정과

무리하지 않는 효율적인 동선계획과

예상치못함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계획변경과

적절하고 충실한 시간할애

4박5일, 9박10일의 여행이 너무 빡빡하면

처음만 좋고 중간은 허둥지둥대다가 마지막에는 제풀에 지친다


현지인처럼 하는 여행

마치 국내여행하듯 하는 외국여행이란?

예를 들어 무비자 90일 범위 안의 일본 일주 계획을 짠다고 생각할 때

공간에 맞춰 시간을 정하는 게 아니라

시간흐름에 따라 공간을 정하기

베르그송이 지적한 거북이 못 따라잡는 제논의 역설 문제와 같다

거리이동과 시간은 다르다고 하였다

당연히 사전패스구매, 현금인출+이동방법, 전시일정 확인은 해야하지만

교통에 숙박까지 싹 다 정해놓으면

"그 도시 그 호텔 예약때문에 지금 가야해"하고 그림 보다가 중간에 끊게된다. 

마치 코스 요리 음미하다가 디시 중간에 떠나는 셈.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마치 똥 싸다가 중간에 끊는 셈. 시원하지 않다


대안은?

외국 무비자 가능해도 복귀 항공편이 없으면 반려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out티켓는 필요

이동계획과 루트를 정하고

in/out항공권을 끊고 첫 도착공항과 복귀공항 근처 숙박만 정하고 중간 시간은 자유롭게

그러니 현지에서 교통/숙박을 계속 구매하면서 이동한다

마치 한국에서 국내여행할 때도 고속버스는 10-30분 단위로 있어서 여행 일정을 약간 느슨하게 짤 수 있고 부득이한 경우 숙박도 해볼 수 있는 것처럼 (물론 KTX의 경우 복귀편도 미리 예약을 해야하는데 특히 주말일 경우 더더욱 매진되는 까닭. 그래서 주말에는 지방에 잘 안감)


예컨대 85일차에 OO시로 도착하는 계획. 대략 A도시 3일 B도시 1일 C도시 10일 움직인다 볼 게 없으면 하루 먼저 출발할 수 있고 볼 게 많으면 이틀 더 쓸 수 있다 그러나 85일에는 Z도시까지 도착한다.

이런게 외국여행을 국내여행처럼 하는 것

시간흐름에 맞춰 공간을 세팅하는 것


이런 스타일의 MBTI는?

아마 N을 기준으로 두고 J+P가 결합된 모델

문자를 그림으로 그려보니 I/E, J/P는 호환이 되는군

T와 P는 억지로 된다

N과 S는 호환이 안된다

그럼 그렇지

헛소리다 꿱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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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설명을 안한다. 단어의 한자나 영어의 어원이 무엇인지 설명없이 그냥 냅다 던진다

라고 했는데 그 예시를 들어보자

전시, 교과서 등 설명에서 공통으로 발견된다


5/15 한국일보 기사

냉난방공조HVAC라고 갑자기 영어와 한자를 던진다

간단하게 풀어 쓰지도 않고 어의 설명도 베풀지 않는다

물론 어려운 말은 아니다

Heating, Ventilation, and Air Conditioning 난방 환기 공기조절의 앞글자를 따서 HVAC다

그러나 영어는 그 말을 한 번 풀로 쓴 후 약자로 쓴다

한자 공조는 공기조절의 약자이고

한중일 같은 한자를 쓰고 비슷한 발음이다

空调 콩티아오 空調 쿠-쵸-

문제는 이 공조의 동의어가 많은데 한자뜻 표기 없이 한글발음만 써놓아서

조선 이호예병형공의 공조인지 공물을 바치다인지 공물로 내는 조세인지 함께 도와주다인지 알 수없다. 냉난방을 보고 추론할 뿐이다

메뉴얼 없이 설명을 각자 도생하라고 맡겨놓고 현장에선

이것도 모르냐고 무시하고 윽박지른다



물론 기사를 읽는 성인이 경제 섹션에서 공조를 모를리 없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일리가 있다

우리나라사람들은 평균적으로 똑똑하고 경제섹션을 읽는 성인의 어휘량은 충분할 것이다

혹은 설명이 없어도 스스로 검색 한 번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장에 청소년이든 성인이든 학생을 가르쳐보면

당연히 알리라고 생각하는 데 모르는 게 많다.

한 분야의 전문가는 당연히 일반인이 이정도 알리라고 생각하는데 초심자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래서 처음부터 찬찬히 알려줘야하는데 그 과정에서 답답함을 느끼기 십상이다

이것도 몰라? 

그리고 배우는 자는 주눅들기 마련

경제전문가도 과학이나 국제정세는 모를 수 있고

과학자도 음악은 모를 수 있고

음악가도 회화는 모를 수 있다


짚고 싶은 것은 용어를 간단하게라도 짚고 정의를 베풀고 넘어가는 글문화가 부족하다는 점이지

성인 개인의 지능이나 교양수준에 대한 부분은 아니다

누구라도 자기 전문 분야가 아니면 초심자다

초심자는 용어정의가 필요하다

심지어 공사판의 용어 시마이, 공구리치다, 야시바 뜯는다, 같은 말도 일본어에서 온 것인데 그런 것을 하나씩 알려주는게 아니라 경력자 선배들의 대화를 통해 정황상 이해하게 한다. 


장강명 작가가 그랬는데 사회 초년생 때 모르는게 너무 많은데 선배들이 차분하게 하나씩 알려주는게 아니라 윽박질렀다고 그런 것도 모르냐고. 앉혀놓고 하나씩 하나씩 알려주지 않았다고. 그랬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경제섹션을 매번 전문가들, 성인들만 읽지는 않지 않을까?

이제 막 20살이 된 대학생도 읽기 시작할 것이고

평생 경제에 관심없다가 관심가지기 시작한 50대도 읽기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너무 모든 용어가 낯설고, 글줄기의 맥이 되는 용어 하나라도 정확히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면 읽는 자는 무슨 말인지 확실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로 피상적인 이해에 머물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스스로 찾아본다면 더할 나위없지만, 생각보다 그런 사람이 드물다. 


앞서 지적한 일본어와 중국어의 경우는 그 나라 국민 문제가 아니라

언어 자체가 하나의 정의를 제공하고 읽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으면

아예 읽히지 않는다. 일본어에는 음독과 훈독이 다르고 성씨부터 고유명사까지 수준 높은 교양인도 헷갈리는 독음이 있어서 매번 정의를 제공하는 글문화다. 그러다보니 글에 정의로 시작하기에 내용이 기초부터 빌드업이 된다. 중국어는 말할 것도 없다. 모든 중국인이 모든 한자를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한편 이는 한글은 우수성 때문이다. 글자가 정말 과학적이고 우수한 나머지 대충 표기하고 던져놔도 음이 잘 읽혀서 이해했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지적 해상도가 매우 높지는 않은 편. 제대로 이해했는가? 그 뜻을 알고 쓰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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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상처 줄 때 똑똑하게 나를 지키는 법
이현아 지음, 서영 그림 / 한빛에듀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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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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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친 포피코의 글이 스레드에 스쳐지나가는데 스크린에 비친 스친 사진에서 세 사진가가 문득 떠오른다. 


피사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정서적 긴장을 견지하는 사진 연작이 사후 조명되어 뒤늦게 큰 반향을 얻은 미국의 무명 여류 사진가 비비안 마이어와

프레임 속 복수의 시점을 병치하여 시선을 산란시키되 그 시각적 혼돈 속에서 구조적 리듬으로 시선의 질서를 회복하는 아메리칸 사회풍경의 채집자 리 프리드랜더와

극단적인 컨트라스트와 거친 입자감이 묻어나는 흑백표면을 통해 도시의 불안과 생기를 동시에 포착하는 오사카 출신 일러스트레이터-사진가 모리야마 다이도가

떠오른다.


셋 모두 구체적인 서사보다는 감각의 인상에 천착했고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일상의 사물과 사람을 채록하며 도시의 파편을 시적으로 응시했다. 무엇보다 절제된 흑백의 음영을 통해 초점과 구도를 실험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보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해 화두를 낳는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하나의 사물을 여러 층위로 분절한 이미지로 무엇을 보는지 어떻게 담아냈는지에 대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한 꼬꼬퀘는 물론 섬세한 시적 감응이 되는 이들에게만 의미있을 것이니, 이것은 핸드폰과 신발을 찍은 사진이야, A는 A이고 B는 B야로 생각의 흐름이 멎는 사람에게는 도통 의미가 없을 것이로다


원래 스레드 2번 사진(이후 원사진)은 1-2번 사진의 비비안 마이어의 관찰자적 시선을 닮았다. 그러나 마이어는 그림자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기도 그 형태 그대로 자기 얼굴을 찍기도 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시각적으로 끊임없이 질문했다. 인물 연작도 많이 찍었다. 한편 원사진은 사람에게 마이어만큼 관심있지 않다. 오히려 마이어가 셔터 뒤에 숨은 채 사람과 도시 사이의 관계를 다양하게 실험했듯 스마트폰 뒤에 숨은 채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이모저모 궁리해보고 있다. 초점은 피사체의 정서보다는 빛의 궤적에 있다. 반사광에 의존해 주조된 포토는 중간 명도에 머무는 회색조다. 비비안 마이어의 자화상은 각도와 시점의 교체를 통해 정체성과의 긴장을 드러내곤 했는데 이와 달리 원사진은 인물의 윤곽이 배경에 손의 일부가 스며드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필름 카메라의 시대에 암실에서 명암과 채도를 실험한 마이어와 달리 스마트폰 카메라 일반 기능을 사용한 원 사진의 채도는 당연하게도 전체적으로 균등하다. 덕분에 시선은 색보다는 구조에 잔류한다. 인물과 배경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지점에서 오브제의 구분과 감정의 확인은 소거된다. 마이어처럼 인물이 살포시 드러나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중심에 두지 않고 주변 공간과 빛의 변화에 더 민감했다는 점이 비슷하다. 뭘 더 잘 쓰고 싶은데 생각이 제대로 표현이 안되어 일단 여기까지만 쓴다.


리 프리드랜더의 사진은 여럿 있는데 하나만 가져왔다. 세 번째 사진. 중저채도의 색면 안에서 필라멘트 빛 덩어리 뒤에 숨어 얼굴의 내용은 지우고 윤곽만 드러낸채 다중 초점 구조를 취하는 사진이다. 프리드랜더는 유리창, 표지판, 거울을 이용해 시선을 겹겹이 배치해서 반사와 투과를 이용해 공간을 분절하곤 했는데 가져온 세 번째 사진은 대상 간의 공간적 분리보다는 동일한 심도 안에서의 병치를 선택한 사진이다. 그러니가 그를 유명하게 만든 사진 본체보다는 그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프리드랜더의 주된 특징을 잘 보여주는 덜 유명한 사진을 업로드한 것이다. 명도 대비는 낮은 편이고 사물의 외곽선은 빛에 의해 완전히 드러나지 않으며, 배경 하늘의 구름의 궤적과 해와 달의 부재가 아직 땅거미의 시각적 특징을 주지 않으면서도 시각적 침잠을 유도해 트와일라잇 즈음의 쇠퇴하고 소멸하고 어둠이 찾아오는 관조적 여운을 부여한다. 시선이 충돌하거나 불협화음을 내도록 하는 배치를 반사각으로 실험했던 프리드랜더의 주된 특징과는 달리, 이 세 번째 사진은 하나의 장면 안에 복수의 시선 포인트를 담고 있지만 프리드랜더 특유의 복잡성보다는 정적인 병렬 구조에 가깝다는 인상이다. 그런 병치와 병렬의 관점이 포피코의 원사진에서 드러나는 표현 의도와 동일하다.


그러나 마이어와 원사진은 다중초점과 관찰자적 시각은 동일하되 인물경향성에서 차이가 있고, 프리드랜더와 원사진은 병치와 병렬은 같되 불협화음이나 침잠과 관조라는 점에서는 다르다. 무엇보다 마이어와 프리드랜더에게서는 극단적 콘트라스트나 다양한 검은 이미지의 구성이 발견되지 않는 한편, 원사진의 반사되는 검은 구두의 표면질감과 빛의 부재로 인한 스마트폰 그림자 같은 여러 흑색의 교차가 뚜렷하다. 이는 모리야마 다이도의 사진연작과 비근하다.


4-6번 사진은 다이도의 전형인 고대비 흑백사진, 극적인 명도 스펙트럼이 있다. 암부의 깊이가 시각적 구조를 지탱한다. 다만 원사진쪽이 모리야마와는 달리 강한 채도 대신 톤 간의 완만한 전이를 추구한다. 핸드폰 그림자는 선명하되 위협적이지 않으며 음영은 다층적이고 조밀하지만 인공광원의 인위성이 배제되어 있다. 빛과 어둠의 간극은 명확하지만 감정적 해석은 유예된다. 거친 입자의 표면으로 불안한 나날의 휘영청함을 나타낸 모리야마, 한편 원사진의 에칭감있는 노후된 바닥은 그저 배경으로만 기능할 뿐이다. 밟는 바닥. 무엇보다 기괴한 이미지의 아상블라주와 노이즈와 흔들림을 통해 문명의 불안을 표현한 모리야마처럼 음습하지 않다. 흑암의 중심부를 겨냥해 찌르는듯한 블랙으로 도쿄의 광기를 찍은 모리야마의 거칠고 압축된 명암과 비슷한 대비 구조이나 검은색을 통한 감정적 톤앤매치만 비슷하여 외양은 같되 의도한 바가 다르다는 말이다.


포피코의 사진은 비비안 마이어, 리 프리드랜더, 모리야마 다이도의 사진 계보를 일부 터치하면서 세 명의 차이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을 오물조물 빚어낸다. 뭔가 더 잘 쓰고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데 필력이 딸린다. 그러니까 이 사진의 소구력은 찍는 자의 존재감을 중심에서 지워낸 채 찍히는 대상의 빛과 구조가 교차하는 지점을 응시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인물은 배경 속에 스며들고 사진가는 나를 찍는 나, 내가 찍은 것, 내가 찍은 화면을 보는 너, 그리고 내가 진짜로 본 것에 대한 성찰적 질문이 스크린에 시각화된다. 다중초점, 거리의 관찰자적 시선과 함께 평면 속에 병렬적으로 정리된 명료한 레이어의 심도가 있고, 이에 다채롭고 짙은 블랙이 생성한 음영의 형체가 화면의 리듬을 조용히 지배한다. 그리고 마이어와는 달리 인물에 대한 관심이 적고, 프리드랜더와 달리 시각적 충돌이 배제되어 있으며, 모리야마와 달리 광기나 불안은 없다. 원사진 속 찍는 자의 존재는 보는 자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고, 원사진 속 레이어의 병치에는 침잠하는 회한의 덩어리가 없으며, 사진 속 오픈 스페이스에서 찍되 어둠은 치안이 부재한 도시거리의 위협이 아니라 사유와 성찰을 위한 실내 공간이다. 세 작가의 시선이 한 장의 프레임 안에서 겹쳐지지만 그 접점은 어느 누구의 정밀한 재현이 아닌 자신만의 주체적 창조물인 셈이다. 나라는 지각 주체의 흔들리는 감각은 곧, 보는 행위 자체에 대한 메타포이며 누군가를 찍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추는 어두운 거울이리라


사진이라는 것은 결국 관찰이라는 행위의 잔류물이다. 혹은 부유물이다. 그러나 예술적 사진은 구질구질한 정념이 제거된 관찰이며 채도, 명도, 음영 등 빛의 존재와 부재를 컨트롤해 동시에 감정을 조절한다. 사진은 말하지 않는다. 어떤 사진도 말하지 않는다. 단지 보는 자를 향해 동등하게 바라볼 뿐이며 그러한 침묵의 대화를 던지는 사진이 이미지의 진짜 목소리다.



사진출처

https://www.dostreetphotography.com/blog/vivian-maier

https://fraenkelgallery.com/portfolios/lee-friedlander-self-portraits#lee-friedlander-self-portraits_s-5

https://loeildelaphotographie.com/en/daido-moriyama-a-diary-pp/

https://www.polkagalerie.com/en/news-daido-moriyama-a-diary-exhibition-at-fondation-foto-colectania-barcelona..htm

https://bldmiraishokuhin.jp/user_data/t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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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사에서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검색했는데 아무리 봐도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다 (퍼온 사람은 한경이라고 했다)


분명 이번 주 일본 아마존 비지니스, 경제 카테고리 맞는데 1위에 해당하는 책이 아예 리스트에도 없을 수 있나?

계속 찾아보니 이 리스트는 킨들 전자책버전이었고

나는 상품카테고리를 하나씩 클릭해 종이책 랭킹으로 들어갔던 것


킨들버전 경영경제 베스트셀러 랭킹 : https://www.amazon.co.jp/gp/bestsellers/books/466282



종이책버전 경영경제 베스트셀러 랭킹 : https://www.amazon.co.jp/gp/bestsellers/books/4852973051?ref=snv_ranking_business


일부 겹치는 책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책도 있다. 이런 디테일에서 많은 차이가 발생한다.


1. 신문기사는 늘 팩트체크를 해야한다

2. 특히 외신은 출처를 다시 확인해야한다

3. 물론 밥벌이에 바쁜 삶에 일일이 다 확인하기엔 시간과 에너지가 들고 그래서 다들 그냥 안하고 만다



4. 아무래도 출장, 이동이 잦은 경제인은 종이책을 들고다니기 무겁고 휴대하기 불편해서 킨들버전을 선호하는 듯

5. 그런데 전자책은 끝까지 읽는 경우가 드물다. 따라서 앞에만 읽었을 가능성, 혹은 심지어 표지만 보고 구매하는 표지독서만 했을 가능성이 높다

6. 같은 경영경제 카테고리 종이책과 전자책이 다른 이유는 매체와 정보의 매칭 때문. 지도, 수험 등이 종이에 트렌드, 주장형이 킨들에 알맞다




나는 정치성향 균형, 기사내용의 스펙트럼 조절을 위해

조선, 한겨레, 한국일보만 종이로 구독하는데

하지만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가 너무 많거나

의도적으로 지우거나, 아니면 몰라서 기재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영자신문, 일본신문, 유럽신문을 보면 특히 우리나라 신문의 문제가 보여요


그 문제가 있다고 해서 신문을 안 읽을 것은 아니고, 기자님들의 본질적 문제라고 보긴 어렵다. 

마감에 쫓기고, 지면은 한정되어 있고, 모든 언어를 다하거나 모든 출처를 다 확인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우리나라 신문의 기조에서 확실하게 보이는 것은


1) 용어 설명을 안한다. 이 단어의 한자나 영어의 어원이 무엇인지 설명없이 그냥 냅다 던진다

2) 출처 표시를 안한다. 혹은 모른다.

3) 엇비슷한 기사를 논조만 바꿔서 쓴다. 제대로 취재해서 쓴 기사는 사람들이 안 읽는다. 그래서 악순환의 반복이다. 수 년-수십년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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