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서울리뷰오브북스 가을호가 출간됐다.
 
한국의 뉴욕리뷰오브북스와 같은 전문 서평지와 그를 통한 서평문화의 확산의 필요성에 대해 남다른 열심을 경주하던 홍성욱 교수가 편집장이던 초기에 비하면 최근은 다소 폼이 죽은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순항 중이다. 초반에는 미번역 영문서 추천도 더 있고 필진도 더 다양했으나 지금도 크게 나쁜 것은 아니다. (p191 이두은의 글에 China' Green Religion있음)

이번 특집 리뷰는 기후, 에너지, 식량위기에 대한 AI지만 그보다 알라딘에서 일하는 김재욱의 글꼭지가 인상적이다. 작년 알라딘 선정 21세기 최고의 책 리스트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회고글이다. (p100-103)

책의 목록을 만들기 위해 200여 명의 다양한 직군의 리스트를 뽑아 최종 106명의 청탁자를 선별했고 그들로 하여금 각기 10권을 선정하게 한 후 약25%의 복수를 제외한 최종 809권이 완성되었다.

리스트 작성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목록은 무제한이 아니기에 제한된 범위 안에서 무엇을 넣고 뺄지지 결정하는 선택의 논리와 배제의 이유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제한된 자원을 운용하면서 판단이 수반되기에 정치적인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빈번한 일인데 예컨대 아이돌 콘텐스트에서 우승자를 선택하거나 요리 대결 프로그램에서 후보군을 선정하는 방송 에피소드에서 선택과 배제의 행위가 정치적이라는 표현만 하지 않았지 정치적인 특성을 띄고 있었다.


또한 리스트에서는 선정자(들)의 의도, 그가 바라보는 시각, 사람들이 이렇게 읽었으면 하는 당위성이 엿보인다. 예컨대 같은 개신교와 카톨릭이라도 성경의 목록이 다르다. 성경은 시대와 저자와 다른 여러 서적의 합본이고 정경에 포함되냐 안되냐가 교단의 시각을 반영한다. (외경 위경 등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

종교와 무관하더라도 학창시절에 서울대 고전 100선이나 하버드 필독서 같은 정체 불명의 목록을 접한다. 이 목록도 처음부터 자연스레 존재한 게 아니라 편집되었기에 정치적인 리스트다. 이렇게 읽어야한다는 당위성만 존재하고 선정자의 편의와 권위만 돋보일 뿐, 실제 읽는 독자의 연령층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리스트다. 오히려 서울대에 진학'시키고' 싶다는 '부모'의 열망이나 하버드의 네임밸류를 차용해 있어보이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아이는 이런 것도 읽어요, 나는 이런 것도 하는 사람이야, 라는. 서울대와 하버드 독서목록은 아마 출판사 관계자가 필요에 이의해 해당학교 교수진의 전필과목 리스트를 누군가가 짜집기한 것이겠다. 이외에도 과거에 유행하던 복수의 필독 세계문학 100선의 리스트도 있는데 대개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작품로 구성되었다. 그러니 리스트 선정은 정치적인 것이고 선정자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기에 필독서 리스트는 일반적인 책의 모음이 아니라 욕망과 권위가 동작하는 무대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김재욱은 "최종적으로 구성되는 리스트에는 설문 주체의 지향과 사회적 압력이 개입된다"면서 이를 타파하기 위해 최대한 많고 다양한 사람들의 참여를 도모했다고 한다. (p103) 리스트 선정에 수반되는 "누구에게 묻고 누구에게 묻지 않는가, 어떤 껄끄러움을 피할 것인가" (p103) 같은 문제를 우회하기 위해 참여자와 답변 전체를 공개하는 결정을 했다. 인상적이다.

김재욱의 이런 정전 선정 방식은 영국영화협회에서 발행하는 매거진 <사이트 앤사운드>가 10년마다 진행하는 역대 최고의 영화설문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p104) 그에 따르면 이런 리스트의 갱신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영화 전문가들이 무엇을 훌륭한 영화로 보는지 그 관점 역시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p104)

그래서 이렇게 과거의 한계를 업그레이드한 알라딘 선정 최고의 책 목록은 "새로운 독자를 유인하고 시장을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로서 기능"을 목표로 삼는다. (p105)

이렇게 리스트가 정해졌으니 꼭 이렇게 해야만해! 라는 방식이 아니라 이러한 생각도 있으니 우리함께 탐험해볼까? 하는 권유의 방식이 특별하다. 책과 미로를 동치시킨 생각이 인상깊다. 리스트를 일단 선정은 해봤어, 시간이 지나며 바뀔 수도 있지만, 그 변화과정 마저 생각해볼만한 문제가 될거야. 아예 리스트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지 않겠어? 오늘날의 현실을 일단 정박시킬 수 있을테니까.


돌이켜보면 한기호의 <베스트셀러 30년>(2011년) 정도만 통시적으로 출판문화를 읽은 거의 유일하고 마지막 책이고, 그 이후에는 매년 FOMO에 기반한 트렌드 서적만 나왔지(김난도가 쏘아올린 작은 공, 트렌드 코리아) 선정 이유까지 있는 책 리스트가 제공된 적이 흔치 않다.

이전에는 반드시(필) 읽어야 할(독) 책(서)라는 기치 하에 강압적 특성이 있었다면 지금의 제안은 유화적이다. 21세기 최고의 책이 여기있으니 우리 함께 살펴볼까? 앗 길을 잃었네 그래도 괜찮아 다른 책을 발견했다고? 더욱 좋아 잘했어!

이런 유연한 리스트는 우연하게 책을 만나게 해주고 다른 만남으로 이어지는 세렌디피티의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며 스스로 리스트의 중첩된 미로를 돌면서 무궁무진한 세계를 조우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에게 유익이 많다. 자기만의 새로운 리스트를 만들 수 있도록 해주어 모두가 자신의 필독서를 가지게 될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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