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시립미술관에 다녀왔다


의외로 멀지 않다. 반포에 있는 서울경부고속버스터미널에서 1시간, 8900원이다. 이정도면 왠만한 서울 외곽지역 고양, 용인, 안산 가는 것과 똑같은 시간이다. 버스전용 차선으로 130km로 달려서 그런가보다. 경부고속 타고 천안아산까지 적토마처럼 우다다 내달린다.


생각보다 가까워 놀랐고, 생각보다 번화가에 사람이 많아서 놀랐다. 젊은 인구가 받춰주고 유동인구와 소비인구가 꽤 되는 중소도시의 활기참이 느껴진다. 신세계 백화점 안에는 노출콘크리트와 인더스트리얼 풍의 천장 아래 서울 유명 맛집들이 입점해있고, 참깨번에 패티퀄로 유명한 다운타우너 햄버거나 눈 앞에서 츄뤽~우쮝~촵하고 자몽을 착즙해 유기농시럽과 섞어주는 아메리칸 트레일러도, 예산사과로 왕건이가 알알이 씹히는 사과파이 매장도 눈에 띈다. 중산층이 모이는 힙한 신세계를 마주보고 도로 맞은 편에는 빌딩에는 온갖 병원부터 빵집까지 간판이 다닥다닥 붙어 업체끼리 아웅다웅 어깨를 겨누며 웅성웅성거리고 있다. 대기업과 자영업이 시장을 잘 나눠가진 좋은 예시처럼 보인다. 천안터미널과 천안역의 중심부를 약간만 벗어나도 자전거, 아시아식료품점 등 베트남 간판이 꽤 보인다. 글로벌화되는 세계에서 수도의 중심부는 선진국 중심으로 국제화하고 외곽은 개도국 중심으로 국제화한다. 충청은 조선의 지명이었으니 이제 아쉽지만 충주는 버리고 청주는 아직 건재한 편이니 놔두고 천안, 세종을 묶어서 불러야할 것 같다. 천세청? 천세도? 일산에서는 특이하게 아빠와 10대 후반 딸아이가 같이 산책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는데 천안에서는 할머니와 10대 초중반 아이들이 같이 있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띈다. 인구는 많은데 나이가 들어가는 인구이고 4-50대는 친정엄마에게 애 맡기고 돈 벌러 다른 지역에 갔는지도 모르겠다.



아라리오갤러리천안과 천안시립미술관에 들렀다. 일단 천안시립부터. 가는데 버스 405타고 35분 정도 걸린다. 시립미술관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시외곽에 위치해있다. 보는데 20분도 안 걸린다. 돌아오는 버스는 유관순사적지 종점을 찍고 귀환하기에 나를 데려다줬던 바로 그 버스가 다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타면 시간이 절약된다. 지방에서 버스는 시간당 1대 있는 경우가 많이 놓치면 노답. 캐치볼이나 릴레이 같은 감각이다. 부메랑을 던지고 그 위에 올라탔다가 중간에 내렸다가 부메랑이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다시 올라타서 원래 던진 자리로 돌아가는 셈



이번 전시는 AI에 대한 테마다. 8명의 작가 작품을 볼 수 있다. 각 작가별 특징에 대해 대충 적어보면 이렇다



노상호의 작품은 인터넷 이미지의 홍수를 편집해 네모난 화면에 살짝 어긋났는데 전체적으로 맞는 4프레임을 보여주면서 이미지의 진실성에 대해 질문하고, 어디서 본 듯한 이미지를 조합해서 불타는 눈사람 캐릭터를 다수 배치하기도 한다.



정아사란의 작품은 물결 포말을 물성으로 보여준 작품을 보여주며 부유하는 가상세계와 실제의 물질과 관계에 대해 질문한다. 정말 바다가 출렁이는면서 윤슬이 빛나는가? 아니면 작품에서 보여져서 그렇게 보이는가



김다윤은 타인과 교류, 군중 사이에서 스침을 회화로 나타내며 인터넷 시대의 소통이란 무엇인지 질문한다.



김보원은 동공이 움직이지 않는 리얼타임엔진으로 만든 3D 사람과 대화를 통해 AI 가상아바타와의 소통과 감정 교류가 가능한지 질문한다





김웅현은 엑스포와 관련된 소품을 모두 불러오고 세대별로 사람별로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이벤트를 다 다르게 기억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00년대 이후에 태어나 93 엑스포를 경험하지 못한 10대 여아에게 VR기계로 체험시킨 영상작품도 만들었다



김현주는 LLM모델, 데이터마이닝, 코퍼스와 시각화를 활용한 작품을 보여주었고




이아영은 장지에 수묵화를 그리되 정확히 무엇을 나타내지 않는 사물을 그려 관객이 이게 뭐지? 하면서 계속 들여다보게한다




임현하은 디지털 이미지의 휘발성과 알고리즘 광고에 의해 제약당한 소비자 선택권에 의문을 제기하며 온라인광고를 자수로, 천으로 엮어 노동집약적인 거대한 손바느질 설치작품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인사이트는
1) 전시나 작가가 AI라는 테마를 완전히 소화하지 않았다. 디지털, 온라인, 상품소비, 군중 속의 고독, 디지털 아바타, 사이버세계의 교류는 10-20년 전의 이슈다. 말이나 기술 일부만 AI로 치환한듯하고, 정말 AI에 대한 특별한 인사이트는 없었다

2) 아이디어가 작품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왜 그 지점을 비판하기 위해 이런 작품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득이 없다.

3) 디지털 소외는 오프라인 대면이 시작점, 벤티지 포인트라는 전제에서 출발했고, 세대 간 시선의 차이는 기억의 부재가 한계라는 전제에서 출발했고, 광고알고리즘에 의한 선택은 제한이 수동성이라는 이분법에서 출발했고, 맞춤형 콘텐츠 착취문제는 개인화는 억압이라는 프레임에서, 디지털 자아의 인간미 부족은 눈을 통한 교감이 공감이라는 프레임에서, 가상 세계 속 정서적 교류 약화는 가상현실의 관계는 가짜라는 인식에서, 피상적 소비와 이미지 과잉은 가벼움은 의미없다는 인식에서,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인식은 디지털은 덜 진실하다라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모두 다 일종의 고정관념에서 출발한 문제의식이고 그 편견은 AI가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문제의식이다. 그래서 질문과 그에 대한 해결이 고루하고 올드해보인다.

공감은 눈에만 있는가? 공감의 기준은 시대마다 바뀌고 기계와 공감하기 위해 인간이 아바타화해서 그들의 무대에서 공감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눈이 아니라 프레임, 색변화 같은 비신체적 방식으로 공감할 수는 없는가?

느린 관계만이 진짜인가? 익명기반 커뮤니티 속에 공감은 없는가?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 소비 속 짧게 모였다가 헤치는 강렬한 연대는 반드시 잘못되었나?

가벼우면 반드시 의미없는가? 단기간 소비되었다 바이럴은 그치지만 데이터화되어서 누군가의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인터넷밈도 축적되고 아카이빙되면 의미있지는 않은가? 짤 줍줍, 밈, 반복재생gif 등에 담긴 집단 무의식이나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포착하면 더 재밌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물질적 실재만 영향력있는가? 촉감이 아닌 데이터 상의 연결정도, 정서적밀도도 사회적 실재를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소외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많았는데 대안은 없었지 않았나? 과계의 깊이다 단절과 연결의 이분법으로만 설명되는가? 연결 방식의 질적 전환은 안되는가? 오래된 인연만이 연결인가? 가까이있는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지 않은가? 인간 대 인간의 연결을 넘어 인간-비인간, 비인간-인터페이스간의 새로운 관계모델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손에 닿는 물리적 거리 대신 반응성을 정서적 연결의 새로운 척도로 삼아볼 수 있지 않을까?

사용자 선택의 자유가 제한되고 능동적 주체성이 상실된다는 비판, 필터링과 알고리즘에 의해 조종당한다는 비판은 누구나할 수 있지 않은가? 억압이 아니라 예측된 선택이라는 새로운 체계로 받아들이면 안되는가? 어차피 이전의 삶도 자본의 제약, 사회적 지위의 제약 속에 조건부 자율성 안에서 움직이지는 않았나? 최대치의 자유라는 것은 상상된 개념, 허상이 아닌가?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요즘 들어

1) 노동집약적 작품

- 여기에선 바느질

2) AI, 최신 테크놀로지 활용 작품

- 여기에선 리얼 타임 엔진 3D 모델 + 공간 이동 영상작품

- 여기에선 VR기기

- 여기에선 LLM, 시각화, 데이터마이닝, 머신러닝, 드론

3) 기억의 정치학

- 여기에선 할머니 회원증, 엑스포 소품 등 당시 관련 자료 모두 소환


이런 테마가 많이 눈에 띈다.



내일도 멀리 갈거다. 그래서 나는 이제 기생수나 마저 읽다가 자야겠다. 오늘은 영화를 못 봤다. 다른 날 두 편 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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