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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오픈한 한강진역 갤러리 Bhak의 함섭 회고전에 다녀왔다. 90년대 지어진 듯한 건물의 내외관은 시청역 근처에 있었던 구 로댕갤러리 같은 느낌이 든다. 때론 어떤 추억은 공간과 함께 남는다. 과거의 향기가 언뜻 느껴진다. 오직 Bhak의 레트로퓨쳐리스틱한 공간에서만 그 느낌이 난다.


사진은 옛날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



Ham Sup, One's Hometown 2354, 2023, Hanji and mixed media, 46x53cm



고 함섭 작가의 작품. 이런 전시는 스크린으로 전해지지 않는 기운생동을 느끼기 위해 직접 방문해야한다. 발터 벤야민도 함섭의 작품을 보고 아우라를 이야기했을 것이고 루돌프 오토도 같은 작품을 누미노제의 예시로 삼았을 것이다. 우리네 초가집 황토방의 숨쉬는 한지마냥 회화작품에서 바스락 들숨과 날숨이 느껴진다. 빛의 다섯 갈래, 숨의 다섯 내쉼

얇디얇은 숨결을 품은 한지 위로 겹겹이 쌓인 색과 토박이 기운이 바람처럼 일렁인다. 명상을 유도하는 색면추상이나 물성 탐구하는 평면화를 넘어선다. 손으로 두드려 누른 한지 임파스토의 두툼한 질감은 마치 진흙을 빚어 가마에 넣기 전 물레 위에서 느끼는 촉각의 무게처럼 생생하다. 보는 회화가 시각에서 촉각으로 건너가는 일종의 감각전환의 징검다리다.


언뜻 민족적 기억이 담긴 오방색이 보이는 듯하면서 자신만의 창의적 색 배합도 넣었다. 덧입힌 한지의 두툼한 마티에르감과 꼬아 비튼 줄로 감긴 조형요소가 포커스를 주고 호방한 기세를 부여한다.



이제는 독자를 거의 잃은 한자는 풍화되어 빛 바래, 작품의 메인 포커스가 아닌 캔버스 측면에 자리한다. 누군가 낭독했을 법한 한 시대의 숨소리는 이제 읽히는 글자가 아니라 마야문자 같은 옛 문명의 기호가 되었다.

한지의 울음과 먹물의 번짐은 한민족의 고난과 생존을 함께 담는다. 울어서 뭉개지 한지는 번지는 듯 뭉개지고 뭉개지는 듯 새겨진다. 화면 안에서 시간의 울림을 만든다.

고 함섭 작가는 문인화에서처럼 여백의 싯구나 문명의 이상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민화처럼 자유분방함과 파격을 추구하지 않는다. 자신의 숨을 먹인 한지 위에 질감으로서 비움을 되새기되 색의 덩어리를 방망이질하여 토속적으로 재해석했다.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는 평면위에 장단맞춰 채우는 색의 리듬과 가락으로 공간을 다시 직조한다. 질감은 말하는 듯하다. “나는 화면 속 사물이며 동시에 사물 아닌 기운이로소이다”

나아가 아울러 함섭의 그림은 ‘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내가 아니라 그림이 나를. 그림을 보는 자가 그림을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그림이 숨쉬며 나를 바라본다. 춘천 어느 마을 호수를 굽어보는 산등성에서 울창한 나무 사이로 낙하하는 빛처럼 그림의 시선은 따사롭다. 허투루 색을 얹지 않았고 덕지덕지 범벅하지도 않았다. 전통은 단순히 모방되거나 상업적으로 복제되거나 의미없이 재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함섭의 손을 거쳐 땅에서 솟은 뿌리처럼 자생했다. 그 뿌리 깊은 그림에는 한 많은 한국 땅의 아릿하고 그윽한 슬픔이 깃들어 있다.



과연 한국적이란 것이 있는가? 7-80년대 선대 예술가들은 고민했다. 이 전시는 그 화두를 삭혀온 누군가가 제출한 하나의 해답이다. 매 세대는 한국적이란 것이 과연 무엇일지 선대의 해답을 참조하고 트렌드와 호흡해 자신의 답을 제출해야하겠다.

전통이 스스로 숨결을 틔우고 현대 속에서 다시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다. 단순한 양식적 변형이 아니라 감각 구조의 이탈과 전환 그리고 전통 의례와 상징이 새로운 시각 언어로 재창조되었다.

봄 밤의 바람결처럼 장구의 가락처럼 굿판의 장단처럼 한지 위로 스민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쩐지 응시하고 있으면 오래 묵혀 깊은 맛이 은근히 우러나는 된장국을 먹은 것처럼 속이 뜨끈해진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숨그림의 의미일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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