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이병헌이 연기한 조훈현은 마치 맞춤장으로 정교하게 짜여진 한 조각의 목재처럼 빈틈없이 끼워 맞춰진다. 이병헌의 빙의한듯한 모습은 정밀한 목조건축의 아귀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 것처럼 역사적 인물의 영혼을 그대로 담아내고 단순한 고증을 넘어 90년대의 공기 자체를 들이마신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미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이병헌의 새로운 얼굴을 봤다고 생각했지만 <승부>에서는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나무결을 따라 자연스럽게 깎여 나가는 듯한 감정선은 과장 없이 유려하게 흐르며 장면마다 시대의 결을 타고 스며든다. 얼굴뿐만 아니라 뼈와 영혼까지 조훈현이 되어버린 이병헌의 연기는 90년대 초 매캐한 담뱃향이 가득한 바둑판 앞에 앉아 있던 기억을 가진 이들에게 스크린 너머로 그 시절의 향기까지 풍겨오는 듯한 생생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2. 영화를 보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조훈현의 글 더미가 생각났다.
10주년 기념으로 새 표지로 갈아 끼운 개정판 나왔다. 내가 읽었던 것은 회색 초판이다. 초판은 절판되었다. 모든 문장에 하이라이트를 치고 싶을 정도로 글 읽는 맛이 있는 책이었다. 영양가 없는 처세술, 성공학, 힐링에세이를 읽늰 이 책을 읽는 게 낫다.
나는 세고에 선생님이 언제나 한결 같은 자세를 유지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너도 그래야 한다고 특별히 가르치신 적은 없지만, 선생님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모습을 배우게 되었다. 감정은 그저 흘러왔다 흘러가는 덧없는 것으로, 어떤 감정도 스스로를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선생님의 삶의 자세였다. 기쁨도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고, 슬픔과 분노도 아무 감정 없이 바라봐야 한다. 이겼다고 우쭐해하면 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이기기 위해서는 수천 번의 지는 경험을 쌓아야 하므로 일상의 경험으로 덤덤하게 바라봐야 한다. - 66쪽
영화에 이 부분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장면이 있다.
3. 최근 일본 여류 바둑기사가 화제가 되었다.
이름은 나카무라 스미레

1) 조훈현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갔고, 나카무라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왔다는 세렌디피티가 있다.
2) 우연히도 이름의 한자가 비슷해 보인다.
조훈현 曹薰鉉
나카무라 스미레 仲邑菫
그러나 다르다. (책에서 조훈현에게 일본인 선생님이 쿤켄! 하고 불렀다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조훈현의 가운데 훈은 향풀 훈(쿤, 카오루)이고
나카무라 스미레의 스미레는 제비꽃 근(킨, 스미레)이다.
薰 vs 菫
둘 다 풀 초 변이 붙어있고 비슷한 모양으로 생겼지만 다르다.
향풀 훈은 연화발 화에 1000+2+4이고
艹(초두머리 초) + 灬(연화발 화) + 千(일천 천) + 二(두 이) + 四(넉 사)
제비꽃 근은 가운데+왕이다.
艹(초두머리 초) + 中(가운데 중) + 王(임금 왕)
5. 영화는 배우 유아인의 마약논란으로 트레일러에서 유아인을 거의 지운 상태로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작품과 작품 참여자(감독, 작가, 배우..)의 관계에 대해 2달 전 출판된 이 책이 떠오른다.
유아인은 아마 더 이상 배우로서 한국에서 다른 영화에 출연하기 힘들겠지만 논란이 발생하기 이전에 이미 촬영해놓은 영화를 상영하지 않기에는 아까우니, 논쟁거리를 최대한 피해가려고 하는 듯한 모습이 인터뷰에서도 영화 자체의 편집에서도 보인다.
P. 91
로만 폴란스키, 페터 한트케, 그리고 다른 사례들을 둘러싼 논쟁들은 두 가지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그 사람의 행실을 이유로 작가를 검열해야 하는가? 개인의 소행이나 태도를 고려하지 않은 채 그에게 작품과 관련한 상을 줄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하이데거, 고갱 또는 놀데와 같이 과거의 현실 참여나 행동이 알려지지 않았었거나 과소 평가되었던 공인된 인물들에 대해서도 제기된다. 우리는 정전을 재평가해야 하는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로만 폴란스키 등의 작품을 꺼려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정답은 없다. 각자의 풀이과정, 즉 해답만 있을 뿐이다. 이런 문제는 스스로의 생각이 더 중요하다.
6. 이창호 특유의 짜부된 얼굴을 한 유아인의 연기만큼은 훌륭했다.
아역 이창호(09년생 김강훈 분)가 기원의 여러 선배들과 동시 대국을 두는 신에서 퀸즈갬빗을 생각나게 나게 하는 신이 있었다.




김강훈은 이전에 재벌집 막내아들에서도 진도준(송중기 분) 아역, 호텔 델루나에서도 구찬성(여진구 분)의 아역이었다.
적절한 캐스팅이다. 아역 김강훈이 자존심과 승부욕이 강한 아이로서 발랄한 톤의 연기를 보여주어야 청년 이창호의 짜부라진 얼굴의 시무룩하고 조심스러움이 대비된다.
50년대 출생 특유의 감정표현 못하고 버럭거리는 스승에게 크게 혼나 한 번 꺾이고 나서
다시는 꾸중받지 않기 위해 반드시 반집으로 이기기 위해 피할 길을 찾는 이창호의 모습이.

7. 좋은 미장센과 연출이 있었다. 위의 사진과 같이 졌을 때 흰색 바둑돌을 끝에 둔다랄지
검은색과 흰색 바둑돌을 수평으로 패닝하면서 초점을 이동시킨다랄지
현악기 베이스의 좋은 배경음악도 적절하게 긴장을 강화한다.
현봉식 같은 충무로의 훌륭한 조연을 10명 이상 총출동 시켜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편집도 걸리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단 한 컷 제외하고. 약간 초록빛 옷을 입은 이병헌이 그래 하면서 당황하는 신인데, 0.5초 정도 더 나와서 편집점이 어긋났다.
8. 초반의 이병헌의 약간 긴장한듯한 초췌한 표정 연기와
아역 이창호의 당돌한 말에 하 이 녀석이 하면서 어이없어할 때
그렇게 두는 게 아니라고 제자에게 호통칠 때
제자에게 패했을 때
제자에게 다시 이겼을 때
0.1초마다 미묘하게 변하는 얼굴표정이
압권이었다.
9. 미술팀이 열일 했다.
시청역, 광고, 신문, 헤어스타일, 의상, 기원 풍경, 담배갑, 택시, 당시 광고판 모두 90년대 초를 생각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