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88421.html




리움 2층 현대미술전에 로니 혼의 당신은 날씨다(2010-11)연작이 있다.


오늘자 신문에 그에 대한 사설이 있었다. 리움 작품 제목 → 피츠제럴드의 단편 젤리빈의 마지막 단락 "인생은 전부 날씨였다" → 날씨의 영향을 받는 제주해녀 이야기를 다룬 넷플 드라마 폭싹 삭았수다로 이어진다.


기사는 작품의 시각적 분석과 관련없는 생각의 실타래다. 아무 말이다. 그러나 생각할 거리가 많다.




전시회 초반에 갔다왔다면 전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많은 포스트와 기사는 복습이다 내 지적 해상도를 높이고 시야를 확장하는데 도움이 된다


전시회 후반에 가게 된다면 그 이전은 모두 예습이다


그러나 내 눈으로 보지 않으면 예습은 다 무용지물이다


기사에 박힌 사진과, 포스팅의 포토를 아무리 봐도 전시장 전경을 다 담아낼 수 없다. 석양 바다 도시 산 봄 밤 꽃 빛이 카메라에 다 안 담기듯이. 내가 가서 느끼고 생각해야한다
















피츠제럴드는 읽었어도 젤리빈은 몰랐다. 찾아서 읽었다. 민음사의 피츠제럴드 단편선 1,2에는 없다.


단편 소설 젤리빈은 원래 재즈 시대 이야기에 수록되어는데 우리 번역본은 그 재즈 시대 이야기가 벤자미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 있다. 미리보기에 페이지가 꽤 많이 제공되어서 읽었다. 


영어로도 찾아 읽었다. 남가주대 사이트에 39분 정도 오디오도 같이 있다. 


https://etc.usf.edu/lit2go/224/tales-of-the-jazz-age/5765/the-jelly-bean/

원문 출처를 안 알려주고 2차소스에서 주워삼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아는 척하기 위해 변죽만 두드리는 것이다.

제대로 읽었다면 원문의 디테일을 말하고 남의 지적 확장을 위해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한다. 읽었다라고 말하면서 뻐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랑은 아무런 사회적 소용이 없다.


젤리빈은 무슨 뜻이냐? 남부연합 용어로 겉은 멀쩡하고 멋을 부리지만 실제로는 빈둥거리며 사는 사람이다. 외면이 화려하지만 쓸만한 알맹이가 없는 젤리빈의 물형에서 따온 표현으로 보인다. 위대한 개츠비도 대략 그런 인물을 그렸다. 일관성있는 캐릭터 디자인이다.


Jim was a Jelly–bean. I write that again because it has such a pleasant sound—rather like the beginning of a fairy story—as if Jim were nice. It somehow gives me a picture of him with a round, appetizing face and all sort of leaves and vegetables growing out of his cap. But Jim was long and thin and bent at the waist from stooping over pool–tables, and he was what might have been known in the indiscriminating North as a corner loafer. "Jelly–bean" is the name throughout the undissolved Confederacy for one who spends his life conjugating the verb to idle in the first person singular—I am idling, I have idled, I will idle.


여기서 보면 젤리빈은 미국 남부에서 나는 빈둥거린다라는 동사를 1인칭으로만 활용하는 사람, 즉, 빈둥거리면서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 (번역에는 남부에서... 동맹이다라고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왜 해체되지 않은 연합을 미국 남부라고 했냐면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나고 미국 남부 연합이 해체되었으나 피츠제럴드(1896-1940)의 시기에도 남부의 문화와 관습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츠제럴드는 단순히 기술적인 묘사로서 남부의 문화가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아직도 해체되지 않은, 녹지 않은(undissolved) 연합(Confederecy)라고 표현하면서 다소 비꼬는 듯한 냉소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짐 파월로 대표되는 젤리빈 같은 사람들이 아직도 남부에서 활개를 치는 것을 보고 남부의 변화가 더디고 여전히 과거의 유산에 얽매여 있다는 점을 암시할 수도 있다.


맨 첫 단락.. 젤리빈의 땅, 항상 젤리빈이다고 표현하는 것도 그런 빈둥거리는 남부를 풍자하는 뜻이다. 


Jim Powell was a Jelly–bean. Much as I desire to make him an appealing character, I feel that it would be unscrupulous to deceive you on that point. He was a bred–in–the–bone, dyed–in–the–wool, ninety–nine three–quarters per cent Jelly–bean and he grew lazily all during Jelly–bean season, which is every season, down in the land of the Jelly–beans well below the Mason–Dixon line.

짐 파월은 젤리빈이었다... 뼛속 깊이 타고난 구십수 퍼센트 젤리빈이었다. 젤리빈 계절 내내, 그러니까 결국 모든 계절 내내 저 아래 젤리빈의 땅에서,... 그는 게으르게 자랐다.


맨 첫 단락 읽을 때는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다. 다 읽고 나야 그 함의가 드러난다.


영화는 영화관을 나서며 2번째로 상영되듯,


책도 다 읽고 다시 읽을 때 그 의미가 들어온다.


좋은 작품에는 한 단어에도 많은 뉘앙스가 스며있고 이런 것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책과 문학을 읽는 이유다.


















젤리, 하니 조예은의 안전가옥 오리지널 시리즈 첫 시리즈에 자리매김한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이 생각난다. 젤리의 찐득한 느낌이 글 전체를 덮고 있다. 북풍의 한설이 씽씽부는 차가운 공포가 아니라 끈적한 점성있는 미스테리 소설이다.



















다시 기사로 돌아가, 날씨하니 서동욱이 생각난다.


기왕에 기사는 날씨와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말했는데, 그런 테마라면 차라리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가 더 적합하다. 영국 독일의 우중충한 기후가 철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정설이지만, 반대로 철학이 날씨를 바꿀 수 없는가? 있다는 것.


헤라클레이토스, 니체, 삼국지를 거쳐 p9 마지막 단락부터 어떻게 그런 반대 입출력이 가능한지 설명한다.


물리적 날씨를 바꾸는 게 아니다.


생각과 태도와 해석과 기분과 웃음이 마치 날씨를 바꾸듯 인식을 바꾼다는 뜻이다.



그리고 기사는 다시 폭싹 속았수다로 생각의 실타래가 이어진다. 제주 해녀의 생계가 날씨와 관련이 많다는 것.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1화의 해녀 물질 장면



이제 리움의 작품과는 멀어진다. 작품에 충실한 시각적 분석이 아니다. 그래도 생각은 짙고 단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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