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까 콘클레이브 원서에서 영어가 맛깔지다고 했는데 뭐가 맛깔지냐?


예를 들어 맨 아랫 문단 첫 번째 구절을 보면 


the hostel had an austere, antiseptic atmosphere, 언, 어스티어, 앤티샙틱, 애트모스피어하고


a로 두운을 맞춰 라임을 살렸다.


엄격하고 살균적인 분위기의 호스텔이라는 뜻이다. 



그냥 시적 운율만 살린게 아니라 공간의 분위기를 전달하면서 소설 전체에 흐르는 엄격한 느낌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서문에 위치해 있는 압축된 표현으로 전체상을 그려내는 글이 아주 잘 쓴 글이다.



아까 쓴 글과 맥락이 같은데, 어떤 영어 원서를 읽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책에 무슨 구체적인 내용이 있었는지는 안 말하고 변죽만 울려댔다. 서평지나 다른 2차 소스에서 읽은 것을 주워섬겼다.


정말 책을 읽었으면 구체적인 소스를 대야한다. 정말 외국어를 한다면 그 외국어를 우리말로 잘 표현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한다. '읽었다'고 자랑할 게 아니라. 



2. 이 표현을 읽으니 옛날에 김훈 작가가 병원에 가면 소독약 특유의 살균적인 느낌 때문에 위압적인 분위기가 나다고 했던 것이 생각난다.



옛날에 읽었던 표현은 머리 속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어 있어서 인터넷 검색해도 안 나오는 경우가 많다. 


종이책을 읽으면 남들이 모르는 부분과 표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결국 나만의 글, 남들과 차별된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코퍼스를 모아 데이터 전처리를 고쳐 통계적 시각화를 하면 확실히 시그마6 밖에 있는 단어군을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지식과 용어의 조합이 남들이 모르는 것들을 활용해서 그만큼 유니크한 글을 쓴다는 말이다.


요약본이 아니라 직접 책을 읽는 이유다.


스크린을 통해보는 전자책이 아니라 육안으로 보는 종이책을 읽는 이유다. 그래야 몰입이 되고 내 것이 되며 검색해서 안 나오는 것들을 접할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읽었더라? 인터넷에 김훈, 병원 같은 열쇳말로 검색을 해도 안 나온다.


서점에서 김훈을 검색해 산문집 목차를 살펴봤다.

















오,,, <저만치 혼자서>에 대장 내시경 관련 부분이 있다. 여기에 병원이야기가 나올려나?


물성이 있는 실물 책을 꺼내 읽어보니 내가 기억하는 그 표현이 없다.


어쩔 수 없다. 다 뒤져보는 수밖에


어디에 내가 기억하는 그 표현이 있나,,,? 꼭꼭숨어라 머리카락보일라


얼마지나지 않아 찾았다.


검색으로도 안 나올 부분이다. <라면을 끓이며> 1부 <밥>의 <목숨2> 꼭지에 있었다.




 p133-p134


 나는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소독약 냄새에 진저리친다.

 소독약은 우월성의 냄새를 풍긴다. 병원은 환자보다 우월하다는 냄새를 소독약으 뿜어낸다. 소독약은 내 몸속의 병을 적대시하고 경멸하는 듯하 냄새를 풍긴다. 병원은 늘 살균되어 있다. 젊은 의사는...






3. 꺼낸 김에 다시 읽어보니


여전히 좋다. 메시지에 정확한 타격점이 있고, 주어와 술어 관계가 선명하며, 문체는 중후하고 간략한 한문투라 옛글을 읽는 맛이 난다. 작가 이름을 가리고 읽어도 김훈 작가의 문체는 그의 향기를 풍긴다.


슥 읽다가 재밌는 표현이 눈에 들어왔다.





p376


물렁하고 아리송한 문장으로 심령술을 전파하려는 힐러들의 책이 압도적인 판매량을 누리는 독서풍토에서 외상외과의사 이국종 교수의 저서 <골든아워>에 모이는 독자들의 호응을 나는 기쁘게 생각한다.








라는 문장을 읽었다. 이렇게 관형격에서 압축적으로 솜씨좋게 돌려까기 하는 표현이 매력적이다.


원래 하고 싶은 말은 본디 주어-술어에 있다. 나는 기쁘다. 독자들의 반응이. 이국종 교수의 저서에 대한.


그러니까 원래 메시지는 이국종 교수의 저서가 잘 팔려서 김훈 작가가 기쁘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에세이, 힐링물이 더 잘 팔리는 세태를 비판하는 말을 세련되고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본문장의 관형격은 두 문장을 합친 표현이다.


힐러들이 심령술을 전파한다. + 힐러들의 책이 압도적인 판매량을 누린다.


관형격의 수식이 너무 많지 않아 깔끔한 느낌을 준다.


이 두 문장을 솜씨좋게 조립하면서, "독서풍토 가운데"로 다음 문장에 연결했다.


~전파하려는 힐러들의

+

책이 ~판매량을 누리는 독서풍토

+

가운데

~교수의 저서가 잘 팔려서 나는 기쁘다.


'심령술'이라는 한 마디에 에세이스트들의 글이 사람의 심리를 대상으로 하는 데 맥아리가 없고 사기성이 있다는 뉘앙스를 집어넣었다.


멋진 문장이다.


4. 책을 손에 쥔 김에 흝어보다가 오늘 시대정신에 적합하지 않은 듯한 부분이 눈에 잡혔다.


공공장소에서 막무가내로 화장하는 여성에 대한 비판이나, 여성의 젖가슴에 대한 표현 같은 부분


그게 '틀렸다'기 보다는 '시대가 지나서 표현이 부적절하게 느껴진다'가 정확하다.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편견이 섞인 표현은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한다. 오늘날에도 남성향 웹소설이나 무협소설, 판타지 웹툰을 보면 중세 시대 픽션처럼 여성이 성녀, 마녀, 창녀, 어머니, 잔다르크 정도의 도식적인 캐릭터로만 묘사되어있다.


아주 어렸을 때 이원복의 먼나라이웃나라를 읽었을 때는 너무 재밌었는데


장성해서 다시 읽어보니 서구사대주의로 범벅된 책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책의 가치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유용한 지식도, 여전히 신기한 시각도 있다. 


같은 글인데 무엇이 달라졌는가? 내가 달라지고, 내가 사는 사회가 달라졌다. 하나의 대상을 맹목적으로 좋다 나쁘다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더 섬세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사회도 자란 것이다.


시대정신이 달라지면 과거의 유산은 재평가되곤 한다. 누구도 피할 수가 없다.


오늘날 미적감각으로는 뉴진스가 아름답고 SES는 촌스러워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여전히 김훈의 글은 매력적이고,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도 흥미롭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고 나니 어떤 것은 조금 부적절하다 느껴지고 어떤 것은 옛날보다 더 좋아지는 게 있다.


후자가 클래식이 되는 이유겠다. 


김훈의 글은 하얼빈, 남한산성 같은 우리 전통 역사 이야기를 김훈 문체로 적어줄 때 가장 매력적이고 빛난다.


SF, AI, 생태주의 같은 오늘날의 글보다 시련에 대면한 고독한 개인을 그리는 역사 소설을 쓸 때 실력이 발휘된다.


김훈의 역사 소설은 앞으로도 계속 읽고 싶다.


5. 


시대가 바뀌면 시대정신이 바뀐다.


비단 여성인권 뿐 아닌 몸, 젠더, 이분법에 대해 질문하는 사상으로서 페미니즘이 확산된 이후 


골대에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냐, 라는 말로 7,80년대를 살아온 나이든 남성들의 생각과 행적이 재평가받았다. 재평가는 온순한 표현이고, 거의 힐난받아 매장되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암살>에서 염석진(이정재 분)은 해방이 될지 몰랐다고 했다. 해방이 되고 민족주의가 시대정신이 된 후


과거 일본과 협력했던 모든 이들의 생각과 행적이 재평가받았다. 둘 다 당시에는 찬란한 영광을 누렸지만, 시절이 뒤집히니 자기가 살던 세상이 없어져버린 셈이다.


특정 대상에게 면죄부를 부여하거나, 특정 대상에게 만능 암행어사 패스를 발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지구는 돌고 에너지는 순환하며 사람이 바뀌고 시대가 전환된다는 것.


과거를 비판하기보다는 장래를 대비해야한다.


오늘날을 사는 사람은 지금 태어나고 있는 당신의 손자, 증손자들이


CCTV 기록과 AI로 다 찾아내서


기후변화, 환경보호, 동물권, 비인간과의 관계에 대해 잘못한 여러분의 생각과 행적을 모조리 비판하고 매장할 것이다.


플라스틱 잘못 버린 죄, 탄소배출 많이 한 죄, 반려동물 키우다가 버린 죄, 알고리즘에게 잘못된 정보를 피드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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