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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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 요코의 전작 <죽는게 뭐라고> 이후 다시는 그녀의 책을 읽게 되지 않을 줄 알았건만,  인생이라는게 원래 예상한대로는 되지 않는 법인가보다. 이렇게나 빨리 그녀의 책을 리뷰하는걸 보면 말이다. 제목부터 사노 요코답다.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간간에 나는 내 식대로 살겠습니다 라고 선언하는 듯한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맘에 든다. 이쯤되면 전작이 나를 아무리 실망시켰었더라도 일단은 한번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하여 결국은 속는 셈치고 라면서 읽어 버리게 된 책. 우선 책에 관한 정보를 말씀드려보면, 이 작품은 사노 요코의 중년시기, 즉 40대 즈음에 쓴 수필들을 모은 것이다. <사는게 뭐라고>나 <죽는게 뭐라고>가 그녀가 인생의 말년에 쓴 것이라면, 이 책은 죽음을 고찰하기 한참 전에,  삶이 한창이던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과연 그녀는 언제부터 그렇게 빙퉁맞고 삐딱했던 것일지, 70세가 되기 전까지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매우 궁금했던 나로써는 작가가 남긴 중년의 흔적을 읽는 것이 신선하고도 흥미로웠다. 나 역시도 40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써, 작가와 어떤 접점이 있을까라는 것이 궁금했었는데, 그런 의문들의 답을 찾을 수도 있어 유익했고 말이다. 사노 요코, 난 어쩌다가 그녀가 나의 맘에 들어온 분인줄 알았는데, 중년의 그녀를 읽어보니 알겠더라. 그녀가 한결같이 꾸준한 분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알고보니 그녀는 어쩌다가 말년에 그렇게 빙퉁맞아진 사람이 아니더라. 그보다는 언제나 한결같이 그런 분이셨구나 라는걸 알게 되니 뭐랄까, 깨달음같은 순간이 찾아왔다고나 할까. 어떻게 생각하면 똑같은 사람이니 아무리 연령차가 난다고 해도 같은 심성을 가지고 같은 뉘앙스로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텐데도, 그럼에도 40대의 사노 요코와 70대의 사노 요코가 비슷한 영혼을 가지고 비슷한 톤으로 비슷하게 사물을 보고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물론 둘이 똑같다고는 할 수 없어서, 재밌었던 점은 40대인 나에게는 70대의 사노 요코보다 40대인 그녀가 더 동질감을 준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같은 사람이라도 40대와 70대는 정확히 똑같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 이런걸 보면 우리는 시대 순으로 사는게 아니라 연대 순으로 삶을 사는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다시 말해 비슷한 연령대는 아무리 세대 차가 벌어진다고 해도 같은 동지애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인생이라는게 비슷한 연령대에 해야 하는 일이 있고, 해치워야 하는 일이 있기에 동일한 고통과 슬픔과 기쁨을 느끼며 산다는 뜻도 되겠지. 하여간 전작들보다 훨씬 더 공감을 하며 읽을 수 있어서 한층 사노 요코에게 다가간 듯한 기분이 들게 했던 작품이었다. 특히 재밌었던 일화는 자신이 개와 고양이를 키우는데, 딱 개와 고양이 취급을 하면서 기른다고 하는 장면과, 아들과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대화를 하며 살아가는 일상을 전해주던 장면들이었다. 글속에서 사노 요코 여사가 자신을 묘사한 것을 추측해 보면, 그녀는 자신과 관계한 사람들과는 대충 살갑게 하하 호호 하면서 지내신 분은 아니었던 듯한데, 그렇게 강팍하고 할 말 다 하면서 사시면서도 자신의 친절함을 남들이 몰라준다고 서운해하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나오더라. 글속의 그녀를 보면 살짝 존경심이 들기도 하지만, 아마도 내 주변에 그녀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녀에게 잘 대해줄 자신은 나도 없어서 말이다.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손사례를 치실지 모르지만 사실은 굉장히 까다롭고 매서운 분이지 않을까 싶다. 거기에 내 기억에 의하면 남편의 폭력에 못 이겨 이혼을 했다고 하던데, 그 고통과 억울함을 싹 감추고 이혼이라는 실패 (타인의 기준에 의한)를 겸허(그래, 나 이혼했다, 어쩔래?) 하게 포장하던 그녀가 못내 안스러웠다. 진실을 다 말하지 못하는 자의 갑갑함이란 바로 그런 것이겠지. 그러한 억울함이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결국에 가선 한 세상 사는게 별게 없구나 라고 선언하게 되는 것이겠지. 하여간 사노 요코가 죽은지 오래 되었음에도 이런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작가란 죽은 뒤에도 자신의 영혼을 이렇게 만방에 널어놓을 수 있어서 좋구나 싶다. 물론 이건 독자로써의 입장일 뿐이고, 정작 사노 요코씨는 이런걸 별로 안 좋아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싶다.  인세비가 들어오는건 물론 좋아하셨겠지만, 영혼을 부끄러움도 없이 널어놓는건 창피한 일이야,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지 않으셨을런지....20대와 30대가 정신없이 열심히 살았습니다, 라는 말이 어울리는 나이라면, 40대는 난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열심히 살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게 되는 나이다. 하여 40대의 사노 요코를 만나서 좋았던 작품. 작가의 40대가 궁금하신 분들에게 추천한다.

 

추신--그런데 이 작품, 번역이 조금 이상했다. 내가 난독증에 걸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간혹가다 아무리 독해를 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문장들이 나타나서 말이다. 어떻게 말이 이어지지 않는 문장들을 그대로 책으로 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나만 이해를 못한 것일까, 책을 읽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그러니 누가 좀 알려 주세요~~여기 나오는 문장들이 다 이해가 가셨습니까? 정말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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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마지막 말
에스터 헤리슨 지음, 김태정 옮김 / 재승출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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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길에서 만난 딸에게 자신이 암에 걸려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린 엘리자베스, 그녀의 딸 코코는 엄마가 죽을 것이란 사실보다 그 정보가 아빠와 새엄마, 자신의 애인에게 몰고 올 파장에 쾌재를 부른다. 다시 말해 자신이 엄마를 잃어가는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것이 마냥 기쁜 것이다. 이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드시, 코코는 정상적인 부모밑에서 자란 정상적인 아이라고 보긴 어려운 아이다. 그런데 그걸 딱히 뭐라 할 수 없는 것이 코코의 엄마 엘리자베스 역시 그다지 정상적인 엄마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딸과 이별을 해야 하는 엘리자베스, 하지만 그녀의 딸은 현재의 상황을 슬퍼해야 하는건지, 가슴 아파 해야 하는  건지, 위로를 해야 하는건지, 위로를 받아야 하는건지 알 수 없어 한다. 감정의 혼란속에서 코코는 엄마를 간병한다는 핑계로 엘리자베스의 집으로 들어가고, 코코가 3살 이후로 함께 살아본 적이 없는 둘의 어색하고 긴장 넘치는 동거가 시작되는데...

 

이런 저런 책들 속에서 이런 저런 모녀들을 꾸준히 많이도 봐왔지만, 이 모녀 역시 최악이라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는 그런 모녀의 모습을 보여주던 소설이었다. 딸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을 하고, 실제로 그게 사실일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행동만으로는 그걸 제대로 실천해보인 적이 없는 엄마 엘리자베스, 그런 엄마 밑에서 어딘지 많이 부족해 보이는 멘탈로 성장해버린 코코, 둘이 죽음을 앞두고 벌이는 이별 과정이 어찌나 재미가 없던지 보는 내가 다 짜증이 날 정도였다. 둘이 진정한 모녀 사이라고 할만한 모습은 하나도 보여주지 못하고, 그냥 겉만 돌다 끝이 난다고 보면 되는데, 한두달만 같이 다녀도 이보다는 더 친하게 정이 들것 같은데, 엄마와 자식이라는 천륜임에도 서로 서로가 이렇게 낯설고 거리가 있다는 것이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유럽 사람들이 차갑다고, 그래서 동양 사람들의 정을 보면 따뜻하다고 환장을 한다고 하던데, 그 말이 어느정도는 이해가 갈 정도. 거기에 왜 작가들은 엄마와 비틀어진 관계는 늘 섹스중독으로 끝을 맺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인지, 거기에 정당성이나 개연성이 있다고 믿는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엄마의 기나긴 부재에서 오는 허전함을 이 남자 저 남자와 헤프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풀어내는 점이 참 마음에 안 들었다. 처음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하도 난리를 처대니 어쩌면 그건 코코 네가 성욕이 강한게 아닐까, 다른건 그저 핑계가 아니고? 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책임은 안지고, 핑계만 한가득인 사람들의 이야기. 뭔가 뭉클한 감동 비슷한 것을 원하신 분이라면 들지 마시길. 당신이 원하는 것은 전혀 나오지 않으니 말이다. 드문드문 작가의 통찰력이나 문장에 빛을 발할 때고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열심히 날아오르려 애를 많이 쓰는데, 결국엔 추락하고 마는 어린 아가새를 보는 듯했다. 뭐...이렇게 애를 쓰다보면 언젠가는 날아 오를 때가 있겠지. 그게 이 책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이지만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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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기회 - 민주당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런 자서전
엘리자베스 워런 지음, 박산호 옮김 / 에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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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상원의원인 엘리자베스 워렌의 자서전. 별 생각없이 집어 들었다가 흥분해서 계속 읽게 된 책이 되겠다. 상원의원이 되기 전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파산법을 가르치시던 교수셨다고 하던데, 자신의 전공을 살려 서민들과 약자들을 위한 십자군 기사가 되어 정치계에 뛰어 들었다는 점이 특이한 이력. 한국인들은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하면서 못살겠다고 난리를 피는데, 그것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런 책을 읽어보면 미국도 헤븐어메리카는 아니지 싶다. 무엇보다 금융계의 도덕적 타락이 심각한 상태. 은행에서 나온 친절하고 선량한 직원의 조언에 힘입어 대출서류에 무심코 사인했다가 파산대열에 들어선 서민들이 많다는 것을 이 책을 보고 알았는데, 놀라운 것은 이 정도 되면 금융업이 아니라 막강한 사기대부업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구만, 그 누구도 나서서 제지나 제제를 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에서는 계약이 자유라서, 사인을 한 이상 누구도 터치를 할 수 없다고. 그렇다보니 성실하고 선량한 시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빚을 감당못해 하루아침에 파산길에 오르는 것이 부지기수라고. 이런 사태에 심각성을 느낀 워렌은 금융업계를 규제하고 소비자를 보호하는 법과 기구를 만들기 위해 발벗고 나선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실감나고 박진감있게 그려내고 있던 책으로, 미국의 선량한 지식인들이 약자를 위해 고분분투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막강한 금융업계의 로비들과 맞서 싸우는, 가히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전투에서, 이런 저런 연줄과 읍소, 악다구니와 다부진 언변으로 하나씩 하나씩 장애물을 물리쳐가며< 소비자 보호 금융국>을 설립하는 과정는 흥미진진하기 그지없었다. 이 책을 보고 나니, 미국이 오바마라는 대통령을 택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고,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의 일화를 보면서는, 케네디가 집안 사람들이 어쩌면 굉장히 선량한 사람들이겠다 싶었다. 미국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몇 개 안 되는 가문중 하나가 아닌가 싶던데, 미국인들이 그들을 존경하는 이유를 알 것 같더라. 결론은, 워렌 여사가 실천으로 보여주다시피, 돈이 없더라도 나머지 자원으로라도 피터지게 싸워야 한다는 것이고, 싸움을 하는 한, 즉, 싸울 기회가 주어지는 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조금하나마 희망이 생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약자를 변호하고 불의에 분노하며 변화시키기 위해 도전하는 그녀 같은 사람이 있어 그래도 미국이 망하지 않고 돌아가지 않는가 싶더라. 솔직히 부러웠다. 그녀의 분노와 그녀의 믿음과 그녀의 열정이. 우리나라에서도 그녀와 같은 정치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세대가 아니라면 다음 세대에서만이라도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 주기를 바라본다. 어쩌면 그건 우리 세대들의 손에 달린 것일지도. 그들을 키워내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니 말이다. 완벽한 자서전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시야의 폭을 넓혀준다는 점에서 강추천작으로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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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02-13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을 볼 때마다 우리나라가 아닌 그 나라 사람들이 부럽더라구요. 우리나라에서도 정정당당한 사람이 리더로서 자리매김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내 살아 생전에 볼 수 있기를 바라지만 … ^^;

이네사 2016-02-13 21:15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입니다. 이런 책을 읽으면 이런 사람들을 지도층으로 모시고 있는 그 나라 사람들이 넘 부럽다죠.
세상이 이기적인 사람들 투성이고, 다 자기 살길만 찾는다고 하지만서도, 이런 사람들을 보면 문득 제 시야가 좁았구나 그런걸 깨닫게 되요.
바라건데, 저도 제 살아생전 그런 일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고, 어쩌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봅니다.

yureka01 2016-02-13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남시 이재명시장님의 쥬빌리 은행이....생각나는 책이네요^^..

이네사 2016-02-15 14:37   좋아요 0 | URL
안타깝게도 제가 그 분을 잘 몰라서 무슨 말인지를 몰라 대답하기가 난감하네요.
김부선님하고 설전이 있으셨던 분이시죠? 편들려고 하는건 아니지만, 대마 운운하면서
김부선님 까는게 보기 좋진 않더라구요. 뭐, 제가 성남사는 것도 아니고 해서 별 관심도
없었지만서도 말여요.

종이달 2022-03-19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안녕, 내일 또 만나
윌리엄 맥스웰 지음, 최용준 옮김 / 한겨레출판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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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워커> 의 전설적인 편집자인 저자가 70대 무렵 자신의 10대 시절 친구에게 보내는 뒤늦은 사과 편지 같은 성격의 소설. " 안녕, 내일 또 만나." 라는 말로 무심히 헤어졌으나, 그 날 이후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다시는 이런 인사를 나눌 수 없었던 친구를 추억하면서 더불어, 그는 어떻게 됐을까, 그 슬픔속에서 살아남긴 했을까 라는 연민과 미안함, 그리고 당시 자신도 어려서 그를 잘 이해하지 못했음을 자책하는 저자의 따스한 마음이 담겨져 있던 작품이다. 비극적인 운명앞에 아무 힘없이 휩쓸려 버리고 마는 어린 시절의 초상을 담담하게 그러나 통찰력있는 시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 특징. 전직 편집자답게 군더더기 없이 상황을 묘사하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1982년 <전미도서상> 수상작품으로 아름답고 사려깊으며 신사다운 품위가 배여 있다.  60여년전에 일어난 끔찍스런 사건을 그 수많은 세월동안 잊지 않고 가슴에 품고 있다가 자신이 모든 것을 보고 들었다고 생각했을 노년에 사건의 실체를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해서 풀어놓은 점 또한 인상적이다. 70대이기에 가능한 10대 시절의 자신들--혹은 이 세상의 모든 10대들--에게 보내는 할아버지다운 위로가 담겨있는데, 그들을 향해 애잔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던 작가의 인간에 대한 연민이 내내 마음을 울렸다. 만약 당시에 저자같은 할아버지가 그들 주변에 있었다면 무지에서 비롯된 고통은 적어도 덜했을지 모르나, 나이를 먹는다고 지혜가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니, 그런 바람 자체가 허황된 것이었을 것이다. 해서 어찌보면 저자가 자신이 어린 시절에 얻지 못한 구원과 위로를 --그렇게 갈구했으나 어디에서도 얻지 못했던--오랜 시간이 흐른 뒤 할아버지가 되서 자기 자신에게  들려준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본다면 친구와 자신에게 보내는 뒤늦은 위로편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 요즘 보기 드문 감동적인 소설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추천. 한가로이 들 수 있는 얇은 중편집으로, 어렵지 않은 단어로 빚어내는 아름다운 문장의 성찬을 음미하실 수 있으실 것이다. 더불어 이 책에 담겨져 있는 19세기 미 서부의 분위기는 아마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듯. 이 책이 아직까지 영화화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시각적인 영상미가 뚜렷하다. 글을 읽다보면 눈앞에 저자의 마을이 그대로 그려진다. 주인을 기다리는 애처로운 개의 모습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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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심장 콩고로 가는 길 1
레드몬드 오한론 지음, 이재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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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왔다, 콩고의 무벰베~~~정식 이름하야 모켈레음벰베. 이 괴수의 존재에 흥미를 느끼고 진짜 실재하는지 확인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일본 와세다대학의 괴짜 외에 또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었지만, 그 사람의 기행문이 이렇게까지 잘 썼을 줄은 몰랐다. 그래, 너도 콩고에 다녀왔드나? 무벰베 보려고~~ 라는 심정으로 가볍게 읽기 시작했다가 몇 페이지 읽어 내려간 후 정자세로 고쳐앉아 보게 된 책이 되겠다. 무엇이 전세계의 글쟁이들을 무벰베로 끌어 들이는가는 모르겠으나, 한가지는 확실하다. 무벰베가 호기심과 글재주를 가진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는 것을 말이다. 것도 헉소리가 날만큼 엄청난 글재주를 가진 사람들을...하여 일본 글쟁이에 이어 영국 글쟁이까지 가세해서 들려주는, ' 과연 무벰베는 있을까요 없을까요? ' 의 결정판. 20세기에 이렇게 완벽한 모험기행서가 나왔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책이다. 왜 아직까지 이 책의 존재에 대해 한마디로 들은 적이 없을까 궁금했을 정도로. 물론 그 이유는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느정도 짐작하게 되긴 하지만서도, 적어도 1편만 봤을때는 이보다 완벽한 기행문은 없다고, 나발을 동네방네 불고 싶어지게 하던 작품이었다.

레드몬드 오한론, 우리나라에선 한없이 생소한 작가이지만, 영국에서는 꽤나 명망있는 작가라고 한다. 그 말이 믿어지는 것이 이 사람 글솜씨가 보통이 넘는다. 왠만한 글에 눈썹 하나 까딱않는 나조차도 혀를 내둘렀으니 말이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쓴단 말이냐 하면서. 거기에 어쩜 그리도 완벽하게 미치셨는지... 마흔이 넘는 나이에 전재산을 탈탈--말그대로 전재산!--털어서 콩고로 여행을 나선다. 단지 무벰베가 보고 싶다는 이유로. 혼자가면 왠지 위험할 것 같아서(?) 보험삼아 친구 하나와 같이 떠났는데, 그의 친구 역시 한가닥하시는 분이다. 첫날부터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이 여행은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잔소리를 멈추지 않는 그는 미국 동물학자 래리 섀퍼다. 콩고는 처음이고 하도 정세가 심상치 않아 현지 가이드를 붙였는데, 그는 오래전 무벰베를 실제로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콩고의 생물학자 마르셀링 아냐냐다. 사진기를 갖고 있었건만, 무벰베의 갑작스런 출현에 너무 놀라서 찍지를 못했다고 주장하는 마르셀링의 말에 레드몬드는 이번만큼은 자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된다. 꼭 사진을 찍어 보이겠다는 야심찬 결심과 함께. 하여 의기양양하게 시작할 줄 알았으나 첫발자욱부터 난항 투성이인 텔레 호수 가는 길, 래리의 표현에 의하면 " 완벽한 악몽을 꾸고 있는 듯" 하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여정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단지 악몽과 다른 점이라면  자진해서 들어갔다는 점과 깨고 싶어도 깰 수 없다는 것이겠지만서도. 하여 이성적인 문명사회에서 하루 아침에 야생의 정글속에 뚝하니 떨어진 두 백인은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아프리카를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벅차다는 수준이 아니라, 하루 하루 벌어진 일들을 소화해내는 것도 쉽지 않은, 아니 돌을 씹는 듯 삼키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그들이 알몸으로 부딪치게 된 아프리카의 모습은 과연 어떤 정경을 하고 있을까? 어느것 하나 잊지 않는 포토제닉 메모리를 가진 작가의 눈을 통해 날 것의 아프리카가 그대로 우리 앞에 펼쳐지는데, 이제 문제는 당신이 이걸 받아들 수 있겠는가 아닌가 라는 것일뿐...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의 " 엄청난 걸작" 이라는 칭송이 무색하지 않은 작품이다. 책을 읽다보면 오한론의 모험이 눈앞에 펼쳐지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그 모험이 동참하고 있는 듯하니 말이다. 하여 오한론이 느끼고 들었고 보았던 모든 것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 천재적인 기억력으로 모든 것을 하나하나 낱낱이 적어놓던데, 어제 했던 말조차 기억나지 않는 나로써는 그가 어떻게 이 책을 써 냈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상상력으로 써낸 것이라면 오히려 존경심이 덜해질 듯 싶게 생생하기 그지없는데, 문제는 도저히 상상만으로는 이런 책을 써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여 읽는 내내 오한론에 대한 경외심을 숨길 수 없었다. 아, 물론 이에는 부수적인 역효과도 있어서, 그렇게 여행 자체를 완벽하게 복사해 내다보니 작가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이 여행의 객관적인 모습을 독자들이 유추해볼 수 있게 해준다는 색다른 묘미도 있었다. 그러니까, 오한론, 이 아저씨가 다른 점에서는 완벽하게 똑똑하신데 구멍이 하나 있었으니 인간성이 너무 좋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어느순간에서도 잃지 않는 그런 양반이라고나 할까. 좋게 말하면 나이브한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사기에 취약한 호구. 그렇다보니 본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아는 진실을 끝까지 혼자만 알아차리지 못하는 어벙벙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그것이 이 책을 읽고 나면 묘한 찜찜함으로 남게 된다. 그러니까 이 책은 목적만 두고 봤을때는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아도 좋은 그런 작품이었다.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이 책을 읽고 나니 녹색 모자를 쓴 남자(오쟁이진 남자란 뜻)는 사실 오한론 같이 순진한 사람들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을 끝까지 철저히 믿는 사람들 말이다. 바로 우리네 평범한 보통 사람들처럼. 그들은 그들을 사랑하는 주변인들이 넌지시 건네준 암시를 나쁘게 해석하는 센서가 없다. 그저 주변인들의 반응에 어리둥절할 뿐이지. 그렇다보니 여행 내내 잔소리를 해대고, 불평을 하고, 냉소적인 말만 틱틱하던 래리가 책이 끝날 즈음이 되면 사실은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좋은 친구였다는 것을 독자들은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어느정도 냉소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 상처를 덜 받는 방어막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방어막 없이 여행길에 오른 오한론이 바보같다는 뜻은 아니고. 나라도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을 것 같진 않으니까. 미지의 곳에 뚝 떨어져 누군가를 믿고 의지해야만 하는 상황에 봉착한다면 누구라도 불신의 스위치를 끄게 될 것이다. 그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말이다. 해서 마지막에 가서야 레드몬드는 이 여행은 오지 말았어야 한다는 래리의 말이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쉽게 말해 무벰베는 없었다.

비록 무벰베는 없으나, 당시의 콩고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바로비터로써 이 기행문은 제 역활을 다한다. 작가의 꼼꼼하고 세심한 눈에 잡힌 콩고는 인간을 제외하면 그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다싶게 찬란하다. 완벽한 기행문이다. 그외엔 다른 말이 필요없다. 하지만 날씨와 곤충과 전염병과 미신, 그리고 무지하고 야만적인 인간들에 레드몬드가 인간 ATM인양 끊임없이 돈을 요구하는 원주민들과 더러운 위생, 그를 속이는 사람들속에서 레드몬드는 여행이 끝날 즈음 슬슬 정신줄은 놓아간다. 그의 정신에 과부하가 걸렸기 때문이다. 그의 혼동과 혼란은 방어막없이 아프리카를 접한 자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놀라운 점은 그럼에도 그가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결국 이 책을 써 냈다는 점에서 작가의 정신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전재산을 털어 무벰베를 보러 떠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포용력이자 의지가 아닐까 한다. 재밌는 것은 이 책이 출간된 후에도 친구 래리는 오랫동안 이 책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고 한다.  죽음보다도 더한, 이토록이나 끔찍한 여행을 하고 나면 누구라도 그런 심정이 되지 않을까 싶어 래리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본격적으로 몸으로 부딪히는 정통 모험서를 읽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추천. 이런 기행문은 아마도 전에도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본다. 왜냐면 이건 전적으로 무모하고 대범한 오한론, 그이기에 가능한 글이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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