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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스, 앤불린의 몰락
힐러리 멘텔 지음, 김선형 옮김 / 북플라자 / 2015년 10월
평점 :
품절
기다림에 지쳐 완전히 잊고 있던 <울프 홀>의 후속작이 드디어 출간됐다. 이름하여 <튜더스, 앤불린의 몰락>. 제목만으로도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 헷갈릴리 없는 매우 친절한 단어 선택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상상력을 발휘될 가능성이 없는 고지식한 제목이 살짝 아쉽긴 하지만, 그렇다고 원제를 가져가 쓰기가 망서려진 출판사가 이해가 안 되는건 아니다. <죄인들을 불러오라>내진 < 참수형으로의 초대> 는 좀 어색하게 들리니 말이다. 이런게 영어랑 한국어 어감의 차이겠지. 어감상으로는 물론 원제가 한층 의미심장하다는 점에서 점수를 받을만 하지만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이 무엇인지 쉽사리 캐치가 되는 것은 앤 불린의 일화를 들어면서 자라난 영국인들이고,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선 앤불린이 누군인지, 그녀가 어떻게 몰락을 했는지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테니, 그만하면 됐지 싶다. 책의 내용이 들어가보면...
<울프 홀>에서 천신만고끝에 앤 불린을 왕비로 올린 토마스 크롬웰은 권력의 핵으로 떠오르게 된다. 부와 지위와 명성까지 얻게 된 그에게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도망나온 거지꼬마를 떠올리기는 힘들다. 어린 시절부터 갖가지 고생을 해가며 오늘날의 자리에 오른 그가 여지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운도 좋았긴 하지만 그가 철저히 현실주의자였기 때문도 있다. 현실주의자라서 살아남은 것인지, 아니면 살아남았기에 현실주의자가 된 것인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라는 물음만큼이나 답하기 애매한 질문이지만서도, 어쨌거나 세습귀족이자 당대의 이상주의자였던 토마스 모어와 붙어서 처형된 것이 모어라는걸 감안하면 현실주의의 생존력을 무시하면 안 되지 싶다. 물론 이상주의자가 훨씬 더 멋있어 보일 수 있겠지만서도, 현실을 굴러가게 하는건 다분히 현실주의자의 피묻은 손이니 말이다. 앤을 왕비에 오르게 함으로써 그동안의 모든 소란이 대충 진압이 되고, 왕비가 임신을 함으로써 새로운 왕자에 대한 기대감으로 왕국이 들썩일때 과연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하는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그 기대감은 공주 엘리자베스가 태어남으로써 한차례 가라앉더니 어느날 슬금슬금 앤의 시녀 제인 시모어를 바라보는 헨리 8세의 강렬한 눈길로 인해 완전히 꺼지게 된다. 이제 헨리가 바라는 것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사랑했었는지 주문에 걸린게 틀림없다고 단언하는 앤 왕비를 "누군가 "가 신속하게 치워주는 것이고, 그 임무를 맡게 될 그 누군가가 토마스 크롬웰이라는건 묻지 않아도 뻔한 것이렸다. 앤이 왕비가 된지 3년, 왕은 그녀와의 결혼이 무효가 되길 바라고, 앤이 왕비였던 그 삼년간 누구못지 않게 앤에게 정나미가 떨어져버린 크롬웰은 서서히 그녀의 목을 옥죌 올가미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현왕의 왕비를 폐하는 역활을 맡게 된 크롬웰의 운명이라니... 참 기구하기도 하지, 앤이 캐서린때만큼 애를 먹이면 어쩌나 고민하던 크롬웰은 앤의 주변인들의 제보(?)로 어쩌면 쉽게 일이 진행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의 증언은 별별 일을 다 겪었다고 자부하던 크롬웰조차 경악하게 만드는데...
<앤 블린의 몰락>이라고 해서 그녀가 주인공이지 않을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으실텐데, 이 책의 주인공은 전적으로 토마스 크롬웰이다. 그의 시점에서 바라본 앤 불린 사태, 역시나 주인공이 바뀌고 보니 내용이 확 달라진다. 어떻게 같은 역사를 가지고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 라고 감탄스러울 정도로 전혀 다른 내용을 우리 앞에 내밀어 놓는데, 작가의 시야와 통찰력에 두손 두발 들게 된 작품이라 하겠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을 들라면 토마스 크롬웰이라는 당대의 권력자를 입체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 있다. 그저 헨리8세의 수하에 있다보니 악역을 맡게 된 하수인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권력의 중앙에 서서 현실 정치를 다이나믹하게 펼쳐 나갔는가 라는 것을 설득력있게 그려낸다. 그걸 보면 우리는 다들 각자의 무대에 서서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던 셰익스피어의 말이 맞지 싶다. 헨리 8세라는 그물하에서는이상주의자는 누구라도 살아남기가 불가능했으며, 그나마 권력의 중심에서 헨리 8세가 벌려놓은 사건을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은 크롬웰이 그만큼 눈치가 빠르고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가 산전 수전을 다 겪어본 백전 노장이고, 왠만한 일에는 눈썹하나 까딱 안하는 배포가 있었기에 말이다. 당대 영국에서 가장 똑똑한 사나이라고 불리웠다는 크롬웰이 권력의 조력자로써 정치를 조율 해나가는 모습은 경이롭더라. 악역을 맡아야 할때와 연민을 가져야 할때를 동물적인 감각으로 구분해내던 그의 모습은 현실 정치가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이상적인 정치가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 매력적이었다. 인간미를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현실에 유연할 수 있는 사고를 가진다는 것이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최상의 위치에 올라서도 결코 자신의 출발점을 잊지 않고 살았던 사내로써, 헨리8세라는 카리스마와 변덕이 넘치는 왕 아래에서 그가 어떻게 책사로, 아버지로, 정치인으로 살아갔는가를 마치 드라마를 시청하는듯 생생하게 눈앞에서 보여주던데, 작가의 필력과 상상력에 박수를 보내는 바다. 특히나 대화들이 찰지다. 이 작가가 16세기로 시간 여행을 해서 그들의 대화를 다 도청해서 소설을 만든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어떻게 이런 대화를 상상해내고, 토마스 크롬웰의 시선에서 바라봐지는 현실을 그의 성격에 투영해 모순없이 설명해 내는지, 가히 작가가 토마스 크롬웰에 빙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힐러리 맨틀이 쓴 소설이 아니라 토마스 크롬웰이 쓴 자서전이라고 해도 믿겠다. 물론 그가 이만한 필력이 있었겠는가 그게 문제지만서도... 아마도 다음 편은 앤이 처형된 뒤 4년후, 토마스 크롬웰의 몰락을 그려내지 않을까 싶은데, 것도 무척이나 기대된다. 이 매력적인 사내가 자신의 몰락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리고 그 똑똑하던 사내가 어떻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잊고 살다보면 언젠가 또 후속편이 나와 주어서 나를 흥분하게 하겠지. 그날을 기다리면서...
추신1--이 책을 보니 어쩌면 앤 블린은 소시오패스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물론 앤 블린에 대한 관점은 역사가들 마다 다 달라서 어떤 모습이 진짜인지 알길이 없지만서도....하여간 최소한 철저한 내진 일방적인 피해자는 아니었다는 것을 이 책을 보고 이해했다. 물론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녀가 청초하고 가냘픈 여인으로, 왕의 변심에 의해 목이 잘린 여인으로 기록되는 것이 더 흥미로울지 모르겠지만서도. 그게 약간은 현실성이 없단 말이지. 역사에 이런 소란을 일으킨 사람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앤블린이 그저 일방적인 피해자였다는게 안 믿어지긴 하다.
추신2-앤 블린과 그의 오빠 조지의 근친상간이야기가 여기에 나온다. 맨처음 들었을때는 앤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나온 모함인 줄 알았는데, 당시에도 그런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고. 그런데 그게 이상한 것도 아닌 것이, 당시는 귀족 자제들은 어린시절 다른 집에 보내져 양육되다가 커서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현대의 의학이 밝혀낸 바로는 인간은 자신의 유전자와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게 되어 있다고, 그럼에도 우리가 근친상간을 벌이지 않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어렸을 적 함께 자라면서 무의식속에 억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커서 만난 이복 남매나 이종 사촌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도 그때문이라고, 그걸 보면 커서 만난 앤과 조지의 근친상간이 당시 귀족들에게는 불경한 일이지만 가끔 일어나는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우리 인간은 도대체 어디까지 현실적일 수 있는 것일까.
추신3. 새 아내를 들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내 하나는 유폐 시켜 치욕속에 죽게 만들고, 나머지 하나는 목을 잘라 버린 헨리 8세.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 아니 덧붙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역사에 남을 만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어느 방에 들어서건 간에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하던데, 정신과 의사들이나 심리학자들에게는 흥미로운 케이스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