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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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0대, 인생을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기다렸던 나이가 있다. "서른" 왠지 무척이나 안정된 삶을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나이였다. 아마도 나의 10대는 굉장히 불안하고 힘이 들었나보다. 한창 도전을 바라보아야 할 나이에 벌써 안정을 꿈꾸다니. 서른이 되었을 때, 10대의 나를 떠올렸다. '그렇게 바라던 서른이 된 나는 지금 그때 바라던 삶을 살고 있나? ' 결혼을 했고, 막 아이를 낳았다. 어찌 보면 안정적일 수 있겠지만 마음 속은 언제나 동동거리는 느낌이었다. 마흔이 넘은 지금 바라보는 나의 서른은 무언가 조바심이 가득한 나이였던 것 같다.

 

이제 막 서른이 된 여자가 있다. 자신의 기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게 간섭하려는 어머니가 있고, 언제나 무뚝뚝한 아버지가 있다. 타인 같은 이 가족에게서 벗어나고 싶고, 10대의 혼란스러움을 묻고 자신을 졸라오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녀는 트렁크를 들고 출장을 간다.

 

작가의 상상력에 놀랐다. 당연히 해야 한다는 "결혼"이라는 잣대의 틀을 깨버린 NM이라는 회사가 어쩌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엄태성이라는 인물의 등장이나 반전 같은 시정의 정체성까지. 소설은 이제 좀 안정 괘도에 들어설 만하면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놓아 긴장감을 놓지 않게 한다.

 

주위에 유난히 결혼 안 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성격에 따라 누군가는 결혼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끊임없이 자책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충분히 누리며 즐기고 있다. 그들을 괴롭히는 건 공통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일 것이다. 안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못하고 있으므로 빨리 결혼시켜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걱정 아닌 간섭. 작가는 이런 세상의 잣대에 맞서는 듯하다. 당연히 해야 하는 건 없다고. 다만 내게 직면한 문제를 피하지 말고 똑바로 마주해서 풀고 넘어가야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누가 내게, 당신의 이십대는 어땠나요? 물으면, 대답이 마땅치 않다. 트렁크. 여행이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좋았겠어요. 글쎄요. 십대 때 원한 이십대가 아니었다. 벌써 서른이다. 삼십대를 마치며 또 후회하고 싶지 않다. 내 삶을 꾸역꾸역 구겨넣고 다녔던 트렁크를 버려야 한다. "...201p

 

인지는 트렁크를 들고 도망을 쳤다. 잠시 피해 있던 이십대를 지나 삼십대를 맞이하면서 인지는 또 어떤 삶을 설계하고 끌고 갈까. 조급하지 않게,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으로 이끌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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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부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45
알렉스 쉬어러 지음, 이도영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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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존재를 믿는가. 유령의 정의가 죽은 이의 영혼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 존재를 믿는 것 같다. 비록 내가 이들을 감지하거나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딘가에서 우리와 함께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령이 등장하는 드라마나 영화 등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유령부>는 "아동, 청소년 모험소설의 왕"이라고 불리는 알렉스 쉬어러의 작품이다. 그의 대표작들 상당수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고 드라마나 만화영화 등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보니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을 쓰는 작가인 것 같다. 독자를 잡아끄는 매력이 있는 책은, 언제나 읽고 싶고 흥미롭다.

 

처음 표지를 보고 많이 의아했다. 정확히 "유령부"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몰라서였는데 뒤표지의 설명("런던 변두리의  한적한 브리카브락 거리웨 위치한 유령부는 1792년 설립된 유서 깊은 정부기관이지만,)만 제대로 읽었어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부"라는 글자가 참 낯설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내가 상상한 유령부의 건물 앞모습과 책의 앞표지의 모습도 달라서 책을 집어들 때마다 약간의 낯섬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작가의 명성대로 한 번 잡은 책은 뒤쪽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유령이 등장하지만 재미있고 따뜻한 이야기!

 

프랭클린 비스턴은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사무직 공무원이다. 삭감 부서로서 과잉 인력에 대한 구조조정을 위해 유령부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이 현대에 유령부가 왜 존재해야만 하는지, 4명 뿐이라지만 이들이 아무 것도 밝힐 수 없거나 일부러 밝히지 않으려고 하면서 나라의 세금을 갉아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감시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사실로 밝혀진다면 유령부를 폐지하기 위해서.

 

1792년부터 유지되어왔던 유령부를 현재 이끌고 있는 이들은 카퍼스톤 영감님과 롤리 양, 기빙스 군, 스캔트 부인과 이들의 애완 고양이이다. 무척이나 현실적이고 경제성을 따지는 비스턴은 이들에게 3개월의 시간을 주고 3개월 안에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하면 유령부는 없어질 것이라고 선언한다. 유령부의 4인은 어떻게 해서든 유령부를 살리기 위해 유령들을 그나마 잘 감지할 수 있다는 소년, 소녀를 아르바이트로 고용하여 유령의 증거를 찾기 시작한다. 팀과 코들리는 그렇게 유령을 찾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고 이들은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야기는 일반적인 기-승-전-결을 따랐다기 보다 앞부분의 이야기가 아주 길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을 만한 구성 같은데 유령이라는 소재 때문인지 작가의 필력 때문인지 과연 유령이 어디에 있을 것인지 추리하느라 지루할 틈이 없다.

 

"유령이란 존재는 다른 초자연적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사실보다는 그렇게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여부가 더 중요한 문제다. 논리적 성향의 사람들은 그 존재를 믿지 않는 경향이 있고, 정신적인 믿음의 성향이 더 강한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 경향이 있다. "...15p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존재들에 대해 알 수 없는 무서움을 느낀다. 우리가 잘 모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일같이 일어나는 사건, 사고들을 보면 정작 가장 무서운 존재는 사람, 자신이 아닐런지. 무서운 존재를 소재로 했지만 무섭다기 보다는 재미있게 추리하면서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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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따카니 - 삐딱하게 바로 보는 현실 공감 에세이
서정욱 지음 / 마음의숲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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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하게 바로 보는 현실 공감 에세이"라는 소제목이 눈길을 끈다. 현실을 삐딱하게 바라보며 작가의 생각을 더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예측해 볼 수 있다. 비슷한 책을 알고 있다. <십시일반>이라는 책을 알고 계시는지. 열 명의 작가가 모여 사회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한 책이다. 하나의 소재로 열 명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다양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삐따카니>는 한 명의 작가가 사회에 대한 시선을 다양한 방법으로 담고 있다.

 

 

구성이 신선하다. 두 딸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이 책을 구상했다는 작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동화의 내용을 현실 속에서 찾아 풍자했다. "조금은 삐딱한 시선으로, 누구나 겪어봤을 이 시대의 이야기들을."...(프롤로그 중)

 

각 이야기의 제목은, 따라서 동화의 제목이다. 어렸을 적 많이 읽어 누구나 한 번쯤 들어서 알고 있을 만한 이야기들. <심청전>, <콩쥐 팥쥐>, <은혜 갚은 까치> 같은 우리 전래동화에서부터 <성냥팔이 소녀>, <미운 오리 새끼>, <백설공주>, <인어공주> 등의 서양의 전래 동화들, <스크루지 영감>이나 <톰 소여의 모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처럼 명작들도 있다. 그저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들이 도대체 우리 현실과 어떻게 같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야기, 책들을 읽으며 교훈을 얻지 우리의 삶이 이야기들과 같다고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책 속 "파랑새"를 들여다 보자.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다. 행복해지기 위한 필수 조건에 경제적 조건이 들어가지는 않지만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으면 행복해지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회사에서 인정 받아 연봉을 조금씩 높여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달리고, 또 달리는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찾아 헤매이던 행복은, 파랑새는 ... 사실 우리 곁에 있었다. 잘못 하다간 주객이 전도되어 잃을 수도 있었을 뻔했던 파랑새.

 

그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책이어서, 만화책이라고 쉽게 보면 안 된다.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들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이야기로만 알고 그 교훈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삐따카니> 속 이야기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작가는 그 모든 옛이야기들을 아주 잘, 자세히 파악하고 있어서 이야기의 주제와 포인트를 잘 잡고 현실과 잘 매치시키고 있다. 때문에 책을 읽다가 "하!" 하고 무릎을 치기도 하고, 실소를 금치 못하게 된다.

 

책은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들여다 보고 있다. 일자리 없어 헤매이고 있는 이 시대의 청춘들의 삶에서부터 사회에 나가 계급 속에서 버텨야 하는 우리네의 이야기들, 빈부의 차이, 낙태나 실종 아동, 성형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주제가 담겨 있다.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우선 제목을 보고 옛이야기를 떠올려 보는 것, 그 옛이야기들과 작가가 선택한 현실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 보는 것, 잊고 있었지만 작가가 제시한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함께 바라보는 것이다. 작가의 창의성과 안목에 감탄하게 된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그저 공감하고 재미있게 읽으면 그만이라고 했지만 읽다 보면 우리 문제를 직시할 수밖에 없다. 잊지 말아야 할 우리들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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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뚱보 댄서 - 외모 어린이를 위한 가치관 동화 20
조 외슬랑 지음, 까미유 주르디 그림 / 개암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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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엔 오히려 좀 통통한 것이 걸림돌이 되지 않았어요. 어른들은 통통해야 예쁘다~ 해주시고, 나중엔 다 빠진다~ 하셨으니까. 어른이 되어 사회에 나가니 뚱뚱함이 조금 문제가 되긴 했지만 그때도 나만 괜찮으면 됐지, 뭐..하는 생각으로 버텼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문제가 된 건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서예요. 어쩌면 나의 이 뚱뚱함이, 남편과 나의 나태함과 식습관이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아름답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 말이지요.

 

<행복한 뚱보 댄서>는 마치 우리 가족을 보는 듯 했어요. 가족 모두가 뚱뚱하다는 마르고. 사람들은 그냥 포동포동하다고 말하지만 학교 친구들은 마르고를 "뚱뚱한 감자'라는 둥, "똥자루"라는 둥 부르지요. 가족들은 괜찮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만 어디 그렇게 되나요?

 

 

학교 신체검사에서 담임 선생님께서 '건강을 위해서' 살을 빼길 바란다는 편지를 전해주셨고 마르고 가족들은 조금 걱정이 되어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지요. 좋은 의사 선생님께서는 마르고에게 아주 현실적인 조언을 하십니다.

 

"네 몸은 친구야. 적이 아니란다. 몸과 싸우려 하지 말고, 이기려고도 하지 마. 그리고 찾아 봐!...(중략) 네 스스로 말이야. 너한테 좋은 것, 널 가볍게 하는 것, 네 몸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길, 그걸 찾아보렴." ...26p

 

마르고가 자신의 몸을 미워하지 않고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반에서 항상 반짝반짝 빛나 보이는 춤 잘 추는 라라와 우연히 함께 하게 된 마르고는 라라에게서 춤 공연 표를 받게 되고 할머니와 함께 관람하게 돼요. 그곳에서 마르고는 행복한 느낌 때문에 배가 부른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죠. 너무너무 뚱뚱하지만 그 뚱뚱함이 아름다워보일 정도로 멋진 춤을 추는 댄서를 만났기 때문이에요.

 

자, 이제 마르고의 삶은 달라질 겁니다. 남들이 뚱뚱하다고 놀리는 몸을 가지고 있어도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은 것 같거든요. 어떻게 그런 몸으로 춤을 추느냐고 남들이 비웃더라도 이젠 용기 내어 "응, 그래. 춤을 춰! 너처럼!" 하고 말할 수 있는 당당한 마르고가 될 거예요.

 

마르고의 이모처럼 살을 빼지 못하는 건 게으르기 때문이거나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요. 실제로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타고났거나 병이 있거나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죠.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내 몸을 사랑하고 건강한 정신을 가진다면 나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죠. 내 아이들도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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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소설을 낳다 - 테마소설집
김진초 외 지음 / 케포이북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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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야 중학생 수업을 위해 <원미동 사람들> 중 한 편을 읽었다. 부천이라는 곳이 내게 아주 먼 곳이 아닌, 한동안 몸담고 있었던 곳이었기에 시대를 뛰어넘어 더욱 애착과 공감이 갔다. 마치 내 옛 고향을 들여다 보는 듯 했던 것 같다. <인천, 소설을 낳다>라는 책 제목을 보고 끌렸던 건 바로 이 <원미동 사람들>을 읽고 느꼈던 향수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부천 만큼, 더 어린 시절에 내가 살던 곳. 그 이후에도 애착을 갖고 가끔 찾아가는 곳. 한 작가가 아닌, 여섯 명의 작가가 쓴 테마 소설집이기에 더 많은 인천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으리라...하는 기대감에 말이다.

 

우선, <인천, 소설을 낳다>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인천을 소재로 한 테마 소설집이다. 여성 작가 여섯 명이 모여 "인천"을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 여덟 편을 써서 모았다. 이들끼리의 모임 "소주 한 병"이라는 소설 모임 속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구성된 책이라니 소설집이 만들어진 계기가 참 멋지다.

 

인천이라는 도시를 방문해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한 도시명에 불과할 것이다. 얼마나 크고 얼마나 다양하며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지 상상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그 다양성을 제외하면, 어쩌면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린 시절을 인천에서 보냈다. 학교 대표로 인천 부두항에도 가봤고 (단 하루 두세 시간 정도의 방문이었는데 왜 그렇게 그날의 기억이 선명한지 모르겠다.) 가정을 이루고서는 아이와 함께 차이나타운과 신포시장에도 가 봤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 배경들이 마치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기시감과 묘한 허전함, 샘솟는 애정 같은 감정들로 뒤섞였다. 나는 이 소설집이 "사람" 밖 "장소"로 보인 것이다. 특히 양진채 님의 <검은 설탕의 시간> 속 연립 주택은 내 어린 시절의 우리집과 너무나 닮아 있어 안타까움과 긴장감으로 어쩔 줄 몰랐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다들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형이 사라져서 시간이 날 때마다 형을 찾아 나서는가 하면<검은 설탕의 시간> 회사 부도로 일자리를 잃고 1년이 지난 뒤에야 환경미화원 자리를 얻었으나 가족의 냉대를 받는가 하면<2번 종점>, 어린 시절의 가정 불화로 끝없는 고뇌를 안고 있다<그물에 들다>.

 

"머리가 하얗게 쇠어도 나는 아는 게 없다. 인생이 뭔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얼 용서하고 무얼 용서받아야하는지 모르겠다. 그때그때 내 앞에 닥치는 상황은 또 무엇이고 그로 인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겠다."...<너의 중력> 중 67p

 

그래도 이들은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간다. 매일 같이 백팔배를 하고, 반신불수 환자를 간호하고, 여기저기 잃어버린 것을 찾아 나서며 자신을 버티는 것이다.

 

"문득 그때 그 검은 설탕이 물에 풀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떠다니느 부유물만 따라내면 그 아래에 녹고 있는 달디단 설탕이 있지 않은가."...<검은 설탕의 시간> 중 39p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한두가지 고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 왜 이러고 있지...하고 생각하다가도 하루하루를 버티고 살아가다 보면 또 살아지는 것이 인생이지 않을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때 참 잘 버텼다고 칭찬해주고 싶은 날이 오지 않을까. 그래서 나도 하루하루를 버텨보련다. 나이가 들면서 자꾸만 많아지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부유물처럼 걷어내고 저 아래 녹고 있는 설탕을 찾아 조금만 더 버텨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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