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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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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데모크라시

 

 

민주주의는 정말 좋은 제도일까. 위계 없이 모두가 평등한 체제 말이다. 평등의 민주주의에는 이제 대중도 집단도 연대도 없다. 개인만이 있을 뿐이다. 저자는 이를 대중민주주의에서 개인민주주의로의 이행으로 본다. 시민의 권리와 역할을 강화해 줄 것이라 믿었던 민주주의체제에서 시민들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 미국에서는 교육 수준이 높아져도 정치 참여가 늘지 않는다고 한다. 투표율은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다. 민주화된 정부는 민주적 지지를 동원하지 않고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들을 만들고 있다.

 

교육 분야에서는 학생들에게 봉사하라고 적극 권장한다. 봉사는 개인적인 만족감과 자긍심을 북돋워 줄 수 있다. 봉사는 개인적인 감정의 변화는 불러일으키지만 정치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한다. 시장 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은 고객이 되어버렸고 텔레비전은 놀이를 ‘집에서 즐기는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민영화와 바우처 제도는 공공 정책을 사적 결정으로 해체하도록 고안되었다. 집단적 목표를 위한 정치동원을 낳는 경우도 드물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봉사 활동을 할 수 있고 친환경 세제를 쓸 수 있으며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근대 시민의 시대는 조용히 사라져 가고 있다. 현대 정치 엘리트들은 ‘미국 유권자들을 주변화시키고 있으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점점 더 법원과 관료에 의지’한다. 미국인들만큼 소송을 즐기는 사람들도 없다. 미국에서 행정가들은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봉사하지 않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전문가’들이다. ‘정치에서 행정을 분리’해냄으로써 관료제는 과거에 의지했던 대중적 기반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제 사회는 사람들을 효율성으로 평가하고 능력과 급여, 근무 평가 등으로 분류하고 관리하게 되었다. 대중은 살아남기 위해 순응해야 했고 쉬지 않고 일해서 낙오자로 평가받지 않아야만 했다. 정부는 수백만 시민들로부터 그들의 납세 의지와 무관하게 세입을 거두어들였다. 소득세 원천 징수 제도를 비롯해서 정부와 시장은 합리화되었고 이러한 정책들은 정부가 국민의 능동적이고 집단적인 협력에 의존해야 할 근거를 약화시켰다. 시민권의 중요한 특성들은 사라지고 있다. ‘평범한 시민들은 점점 더 일대일로 정부를 만나고 있으며 한때 동원된 대중의 구성원으로서 누렸던 영향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이제 시민들은 시민이 아니라 구경꾼이거나 소비자일 뿐이다. 시민단체들, 공익단체들은 모든 사람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들은 특정한 누구와도 거리를 두었다. 사실 그들은 정부와 공모 관계에 있었으며 단체에 회원이 없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러한 단체들은 대중의 지지에 호소하지 않아도 연방 보조금으로 조직을 유지해나갈 수 있다.

 

시민들은 가상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현재의 정치 환경은 평범한 시민들에게 최소한 하나의 정치 공간은 남겨두었는데 바로, 여론조사에 응답하는 것이다. 시민들은 마치 실제 정치 지도자들이 직접 듣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면서 ‘가상의 정치에 참여’한다. 여론조사는 자연과학의 방법론에서 모델을 차용해 기술적으로 ‘정교하며 객관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여론조사는 문제를 스스로 제시하고 대중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때문에 그것은 가짜 질문이고 여론 조사에 실제로 인터뷰를 당한 사람이 없어도 대중은 통계적으로 가상적으로 대표된다. 또 여론조사에서는 어떤 문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과 깊이 고민한 사람의 의견이 동일하게 취급된다. 강한 의견을 가진 미국인의 목소리가 무관심한 대중의 중얼거림에 묻혀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20세기 말 미국은 가상의 시민을 가진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민주주의는 이런 식으로 시민을 배제해왔고 계급 간의 갈등이나 노사 간 갈등을 무효화시켜 왔다. 지역사회 여러 재활 프로그램은 빈곤 퇴치라기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시민권 프로그램으로 전락했고 소비자 운동은 소비가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중산 계층의 이해로 제한되었다. 사실 ‘가난과의 전쟁’이라는 지역사회 프로젝트에 재정을 지원한 것도 포드재단이었다.

 

자본과 정부는 이런 식으로 결탁되었고 그 안에서 대중은 점차 자신의 자리를 잃어갔다.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고 공공의 선을 위해 일해야 하는 정부나 시민 단체들은 공모 관계 안에서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는 결국 반민주적인 체제였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최선인가. 아니면 플라톤이 생각했던 것처럼 대중은 그저 아둔한 존재일 뿐일까. 무너져가는 민주주의의 현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체제를 상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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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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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그리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

 

 

그리스는 여러 나라들로부터 지배를 받았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지배 기간(BC 388년 ~ BC 2세기), 로마제국·동로마제국의 그리스 지배(BC 2세기 ~ AD 1453년), 오스만제국의 그리스 지배(1453년~1830년) 이후에 그리스에는 입헌군주제가 부활했지만(1949년~1967년) 곧 파파도풀로스의 군사정권(1967년 4월 ~ 1973년 11월)과 이오아니데스의 군사정권(1973년 11월 ~ 1974년 11월)이 들어섰다. 그러다가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의 사회당(PASOK) 집권(1981년~1989년)하고 이듬해는 미초타키스의 신민당이 집권(1990년 4월 ~ 1993년 10월),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총리의 사회당(PASOK) 재집권(1993년 10월 ~ 1996년 1월), 시미티스 총리의 사회당(PASOK) 집권(1996년 1월 ~ 2004년 3월),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의 신민당(ND) 집권(2004년~2009년 10월),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의 사회당(PASOK) 집권(2009년 10월~)하고 있다.

 

감상에 젖어 그리스를 여행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그리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미국발 금융위기로부터 시작된 유럽의 금융 위기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금융위기 원인에 대한 자료들을 많이 찾아보았지만 최근의 프레시안 기사가 사태 추이를 잘 파악하고 있어 길지만 인용해 본다.

 

2008년 9월 중순 리먼 브라더스(Leman Brothers)가 파산한 날로부터 벌써 4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이 거대한 투자은행의 파산으로 세계금융은 시스템 붕괴라는 현실적 위협에 직면했다. 리먼 파산 이후 세계 최대 보험회사인 에이아이지( AIG)가 파산했고 한 달이 지나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은행도산으로 기록된 워싱턴 뮤추얼(Washington Mutual)이 파산하고 그 다음에는 와코비아 은행(Wachovia Bank)이 구제 요청을 해왔다. 이후 유럽 은행들의 파산 물결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자본주의는 시계제로의 상태에 놓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리먼 사태는 2000년대 초 미국의 부동산 거품과 관련이 있다. 소득도 일자리도 자산도 없는 "NINJA(No Income No Job or Asset)에 대한 무분별한 대출," "'사기에 가까워진' 증권화"로 발생한 대폭발은 금융권과 실물부분에까지 막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 과정에서 리먼의 파산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1막"의 절정에 해당한다. 이 사태로 자본주의가 붕괴하지는 않았지만, "금융계뿐만 아니라 세계경제의 모습까지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렇다면 세계를 흔든 이 대폭발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 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된 월스트리트는 다시 활력을 찾았다.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한 '알맹이 없는' 월가 개혁은 소리만 요란했지 별 다른 소득을 내지 못했다. 오히려 "정치적인 영향력이라는 면에서 월가는 죽지 않았으며, 위기에 처했을 때 정부의 구제는 원했지만 규제는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위기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제2막'인 유럽의 재정위기와 유로존 붕괴 혹은 재편의 상황으로 전환했다. 스페인의 위기를 분석한 오스카르 구티에레스(Óscar Gutiérrez)의 말을 빌리자면, 현재 유럽은 "EU의 지시대로 GDP 3퍼센트 이내로 재정적자를 감축하기 위한 가위질로 고통 받고 있다." 긴축으로 경제 불황이 심화되어 실업률이 크게 증가하고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남미로 이주하며 사람들은 보건 의료와 교육 등 복지 부문에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유럽에 닥친 불황이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를 강타할 때만 해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스페인 사람들이 돌연 최근 몇 달 사이에 비관주의에 빠진 것이다. 복싱에 비유하자면 스페인은 아직 녹다운되지는 않았지만 연타를 당해 휘청거리고 있다. 그렇다면 미소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체념한 채 자신들에게 처한 현실에 그대로 순응하고 있을까? 물론 아니다! 반란은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의 점거운동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세계로 확산된 'Indignad@s 운동', 영국의 예산 삭감과 세금 면제에 대항하는 직접행동 'Uncut' 등 전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은 지금의 현실에 분노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렇게 외친다. "긴축에 반대한다", "부자에게 세금을",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금!" 등. 이들의 외침은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억압당하던 사람들의 분노이며 이익을 사유화하고 손실을 사회화하는 금융자본에 대한 분노이자 1퍼센트 부자만이 행복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한국의 주류 언론에서 소개된 것처럼 그리스의 국가부도위기는 그리스인들의 방만한 행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스인은 게으르다", "그리스에는 휴일이 너무 많다", "그리스는 우리 돈으로 명품연금을 지급하고 있다", "그리스인은 사리사욕이 심했다", "그리스인은 분수에 넘치게 살았다" 등 그리스인들의 행태가 이번 위기를 야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로존 위기는 유로통화체계의 구조적 불균형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이 구조적 불균형은 물론 미국발 금융위기가 유럽을 강타하면서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은행에 대한 막대한 구제금융이 재정위기를 촉발했다. 그리고 단일통화체제를 사용하면서도 부채에 대한 최종 부담을 각 국 정부가 지기했기 때문에 발생한 금리격차로 재정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나아가 경쟁력, 투자, 단위노동비용 등에서 나타난 생산력 격차로 국제수지 불균형이 나타났는데도, 단일통화체제로 인한 자국 통화평가 절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문제는 더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이다.

 

또, 긴축은 해법이 될 수 없다. 긴축으로 유로존 전체는 시체처럼 뻣뻣하게 경직되고 있다. 긴축에 따른 공공부문의 정리해고, 임금삭감과 노동조합의 약화, 퇴직연금의 감소와 퇴직연령의 증가, 공공 투자의 급격한 감소, 소비세 인상, 노동시장의 유연화 증대, 국부의 사유화 등 유럽에서는 '죽음의 한 방'이라 불리는 구타가 진행 중이다. 또한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자산 소유자들의 강도질이 긴축 정책의 도움을 받아 위기의 한복판에서도 계속 되고 있다." 특히 은행들은 공적 구제금융, 금리격차를 이용한 돈벌이로 배를 불리고 있다. 나아가 긴축은 경제성장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금융자본에 대한 통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금융자본이 이번 위기의 주범임에도 이들은 막대한 구재금융을 통해 국민전체의 부를 사유화하고 있다. 따라서 금융시장은 다시 통제되어야 하며 채권자들이 보유한 채무도 투명한 방식으로 탕감되어야 한다. 그리고 단일은행지구를 창출하고 회원국의 부채를 유럽중앙은행 부채로 전환하며 회원국의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도입되어야 한다. 그래서 대안적 경제사회 모형이 필요하다. "단순히 과거체제의 붕괴를 막거나 복구하는 것만으로는 노동 대중의 이익을 지키고 권리를 보장할 수가 없다. 이는 새로운 발전 모델, 새로운 사회모델, 새로운 노동 모델을 바탕으로 달성될 수 있다." 한마디로 긴축과 성장에 대한 대안은 '탈자본주의로의 이행'이라 할 수 있다.

 

                                       -금융 자본도, 구좌파도 믿을 수 없다! 프레시안, 201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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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시를 향하여 - 노동시와 아방가르드 다중지성총서 6
이성혁 지음 / 갈무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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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불온함에 대하여

-이성혁, <미래의 시를 향하여>를 읽고

엄진희

문학은 불온하다. 링컨은 <톰소여의 모험>을 읽고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문학에서 흑인은 노예가 아니라 사람이며 독자는 흑인 친구와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직접 흑인이 ‘된다’. 문학은 이렇게 하나의 파워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독재적이고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우리의 꿈 그 자체이다. 그것은 특수하고 대체될 수 없지만 ‘동시에’ 보편적이다. 문학 제도는 문학의 특수성을 제거하지 않으면서 그것이 가진 힘을 보존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대학에서, 문단에서 문학은 보편성, 즉 정치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대학에서도 문학의 미학성만을 얘기하지 그 정치성에 대해서는 입다물고 있다. 문학은 아름다운 세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흑인도 친구가 될 수 있고 기생의 딸이 양반 가문의 도령과 사랑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문학은 꿈이고 희망이며 삶의 반영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이다. 문학을 신성화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그저 삶일 뿐이다.

나도 대학에서 문학을 하지만 어딘지 밀려오는 답답함은 텍스트로만 문학을 읽어야 하는 데 있었다. 문학이 죽었네 살았네 하지만 상상의 공동체로서 국가가 존재하는 한 대학의 여러 나라의 문학 전공학과도 상상의 학문으로서 존속할 것이다. 대학의 제도로서의 문학이 삶에 거리를 둔 문학이라면 여기에 나오는 시인들의 문학은 ‘거리의 문학’이고 ‘삶의 문학’이다. 이들의 문학은 그저 삶을 소비하고 관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 자체이고 부르주아 사회가 사람들을 경쟁으로, 성공으로 몰아가는 한 치열한 삶, 투쟁 그 자체이다.

투쟁이고 정치가 아니라면 그것은 문학이 아니다.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전원과 유년시절을 노래한다고 시가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현실이, 세계가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얘기하지 않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 소시민적 도피일 뿐이다. 비루한 것, 남루한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그것이 그 자체로 ‘선’인 것은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가난에서, 비정규직에서 벗어나야 한다. 1프로가 아니라 99프로의 보편성을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 보편성에 우리는 어떻게 닿을 수 있을까. 문학, 특히 시의 특수한 눈으로 말이다. 노동 시인의 눈은 연장을 도구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하나로 본다(최종천의 경우). 시는, 사물과 하나가 되고 세계와 하나가 되면서 실제 현실을 떠나 사물을 상징하고 의미하고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함께 세계와 함께 그렇게 ‘존재’한다.

시인은 사물이 된다. 이러한 시적 존재들은 나아가 새로운 주체들을 예고한다. 문동만의 ‘흔들리면서’ 사는 주체, 하종오의 ‘잡종인’, ‘아무것도 아닌’ 주체, 나르시시즘을 버리고 타자와 무한히 연동하는 주체들 말이다. 이러한 주체는 상징계가 호명하지 못하는 주체 언제나 ‘과잉인 주체’, (상징계에서)‘빠져나가는 주체’이다. 이러한 주체를 보여주는 시는 그래서 과잉이고 불온하다. 여기에 자본시장, 노동시장에서 말하는 대체 가능한 주체는 없다. 이 새로운 주체들은 흔들리고 잡종이어서 특이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이러한 주체 형상은 한편으로는 참여하고 저항하는 주체 형상과도 사뭇 다르다. 라캉식으로 말하면 공백의 주체, 빗금쳐진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난 이런 주체에 오히려 기대를 걸어보고 싶다. 사회가 부당하다, 고로 저항하라, 는 명령은 ‘사회’ 자체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 것 같다. 사회를 전제, 하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문제는 사회를 전제하지 않기(사회는 없다), 혼란과 공백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토대를 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부당하고 부조리하므로 그 외부에 그렇지 않은 다른 사회, 완전하고 고결한 사회를 상상하는 것은 자칫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런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 내부에서, 외부가 아닌 바로 그곳에서 부르주아의 거짓 보편성이 아니라 절대다수인 민중의 보편성을 입법해야 한다. 폭력적으로.

벤야민은 ‘법과 폭력의 연관성’에 대해 이미 언급했고 법과 위반이라는 거짓 문제(이분법)보다 ‘정의가 어떠한 형태의 폭력을 수반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했다. 데리다 또한 ‘정의와 관계 맺는 폭력이 법적 정의의 보편화의 조건’이라고 보았다. 법의 시초적 폭력(기원적)은 ‘신적 폭력’으로서 ‘신화적 폭력’과 구분되며 최초의 이념, 즉 한 사회의 정의를 세우는 폭력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폭력적으로 세워야만 하는 사회의 정의란 무엇일까.

한 사람만 배부르고 나머지 99명은 배고픈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일까. 취업 광고판 앞에서 번번이 ‘내려앉고’ 싶게 만드는 사회가 과연 정의로운 사회일까(박영근).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는 호모사케르이다. 사회에 ‘포함되면서도 배제’되는 기이한 존재. 산것도 죽은 것도 아닌 존재. 유령 같은 존재말이다. 용산참사 때 죽어간 존재들, 그들은 죽여도 무방해서 처벌받지 않는다. 사회는 그들을 필요로 하지만 셈에 넣지는 않는다. 그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는 이에 ‘분노’한다. 인도네시아 여성 노동자들은 생리 휴가를 받자면 가랑이에서 생리대를 꺼내 흔들어대야 한다(하종오). 그녀들의 행동도 송경동의 희망버스도 말하자면 입법적 폭력이다. 하종오와 송경동의 시는 그저 한편의 시가 아니라 삶이고 투쟁이었다. 이러한 폭력(시적 폭력)을 통해서만, 어느 누구도 부당하게 대우받아서는 안된다는 우리의 보편적 꿈이 실현될 수 있었다.

이것은 삶이고 행동이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시는 오히려 스펙타클의 현대 사회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오염된 현대 사회를 부수고 나온다. 현 사회 질서를 파괴하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그 미래는 ‘현재’에 잠재적으로 (이미 여기에 와)있다. 그래서 희망은 여기서 찾아야 하지 미래, 우리 시간의 외부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고통에 대해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가난, 질병, 추한 것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그것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거짓된 겸손’이며 ‘책임 회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것들에 연민을 드러내고 무조건 동정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 그것들을 동정하면서 내가 얻는 것은 즐거움이다. 이러한 교환 체계를 넘어서 있는 것이 바로 시다. 시인(최종천)은 걸음을 배우며 춤을 내주었지만 사실 우리는, 바로 그 ‘잃어버렸던 춤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대체할 수 없는 것, 내어줄 수 없는 것을 악착같이 쥐고 있는 것이 시다. 삶은 끊임없이 강제된 노동을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춤추고 노래하는 데에 있다. 내 육체를 화폐와 교환하기 위해 내주는 게 아니라 되찾는 것, 그래서 시는 육체성(박영근)이며 논리와 의미가 아니라 ‘비논리’이다.

사회는 질서이기 때문에 시를 쓰지 않고 읽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억압된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므로 언제든 다시 되돌아 온다.

시는 상징적 권력에 의해 가로막혀 있지만 시인은 그래서 끊임없이 그 벽을 넘어서고자 한다. 시는 언제나 과잉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도배장이에게 벽은 오히려 잠재적 탈출구(강병길)이며 박영근에게 장애물처럼 보이는 ‘끊긴 길’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하는 생성의 길이다.

며칠 전, 젊은 여류 시인을 만났다. 그녀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평론가들의 혹평에 맘고생 했던 얘기들을 어렵게 꺼냈다. 실제로 동료들 중에 자살을 한 시인들도 있다고 했다. 시라는 비논리에 대해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론이 앞선 비평에는 문학이 빠져 있고 문학의 자율성만을 얘기하는 비평에는 진리가 빠져 있다. 시 비평은 차라리 이 둘을 넘어서 하나의 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 노동시의 정치적 잠재성과 가능성에 대해 천착한 이 평론집은 이미 하나의 행동이고 삶이고 정치이며 그래서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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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롤랑 바르트에 빠져있다. <애도일기>를 재밌게 읽었는데 이 책도 읽어보고 싶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회 비평 공식저널이 번역되었다고 한다. 안읽어볼 수가 없겠다.

 

 

 

 

 

 

 

 

 

 

 

 

 

 

 

아파트에 철학이 있을까. 똑같은 크기, 똑같은 배치, 똑같은 모양, 건축에도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다.

 

 

 

 

 

 

 

 

 

 

 

 

LP루틀리지 시리즈를 좋아하는데  철학예술 사상가 폴 비릴리오의 생각이 궁금하다.

 

 

 

 

 

 

 

 

 

문학 평론가 정여울의 서재를 둘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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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이즈 컬처 - 인문학과 과학의 새로운 르네상스
노엄 촘스키 & 에드워드 윌슨 & 스티븐 핑커 외 지음, 이창희 옮김 / 동아시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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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VS 컬쳐

 

 

 

 

 

 

인문학과 과학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철학의 역사를 아는 것이 곤충학자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음악이 주는 감동을 과학적으로 계산해낼 수 있을까. 컴퓨터는 피카소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인간과 과학은 도무지 만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마이클 생크스는 인류는 새벽부터 ‘사이보그’였다고 말한다. 인간은 12만년 전부터 사물을 능숙하게 다루었고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인류는 그 옛날 벌서 피라미드를 만들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완전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문화가 없었을 것이다. 문명은 인류를 무지 몽매하고 마법적인 세계에서 구제했지만 그럴수록 인간은 동시에 비합리적이고 감성적인 것들에 강하게 매혹당했다.

 

 

 

과학기술의 최첨단을 누리고 있는 오늘날에도,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심지어 종교는 나름의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어쩌면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 인류는 가장 맹목적이 되었다. 사진을 보면서 인간은 그 대상이 그 자리에 ‘없어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인간은 가상 세계에 살기 시작했고 이제 더 이상 사물의 이미지를 볼 수만 있다면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상 세계에서는 더 이상 실제 인간 관계도 중요치 않다. 사람들 살아있지만 죽은 채 가상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이것은 인류가 스스로 부른 재앙이었다.

 

 

 

대니얼 레비틴은 예술은 어쩌면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통합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음악 속에서 우리는 에고를 상실한다. 주변의 사람들과 내가 하나가 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런 의미에서 타인을 인정하고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 현대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예술이 아닐까 싶다. 윤리를 상실한 시대에, 우리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예술이 정말 이러한 작용을 한다면 윤리의식을 상실하고 야만으로 치닫는 오늘날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이다. 우리가 실제로 합리적이라면 비합리적인 것(예술)과 이렇게 함께 해야 하는지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합리적일까. 신자유주의는 모두가 부유해질 수 있다는 환상을 주입하면서 경쟁을 부추기는 등 야만적인 행보(비합리적)를 계속하고 있다. 그 안에서 개인적으로 고립된 주체들은 자신이 다른 주체들과 관계 맺음 안에서 타자화 된 채 살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즉, 혼자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히 비합리적인 생각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결정된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지금 이 방안에 물리학자와 예술가가 있다고 해 보자. 이 둘은 이 방안의 사물을 분명 다르게 볼 것이다. 이 방 안에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아가 지금과 같은 형태의 경제 시스템이 지속할 수 있는지도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누구인지 확신도 없고 확신할 필요도 없다. 나는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정 불변의 진리란 도대체가 없는 것일까. 다시 말해 아름다움도 객관적 합리성도 없는 것일까. 진리는 합의에 불과한 것일까. 변기는 화장실에 있을 때와 미술관에 있을 때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것은 우리가 미술관에 놓인 변기를 예술 작품이라고 하자는 합의라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모습이 전부인지 모른다. 진리는 결함이다.

 

 

 

이성애가 진실이고 진리일까. 동성애를 배제하는 한에서만 그것은 진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반쪽자리 진실일 수 밖에 없다. 객관적 진실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영웅적 행동의 한 형태일 수 있다. 우리는 객관 세계를 쉽게 부정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순간 우리 자신도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를 그릴 수 있는 것은 픽션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객관 세계를 파괴할 수 있고 또, 우리가 인간 이하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세상을 볼 수도 있게 된다. (문학)예술은 여기서도 일종의 윤리적 기술로서 가치가 있다. 스토리텔링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눈 뜨고 그들의 삶에 뛰어들고 공감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도덕성’이다.

 

 

 

이처럼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한 세계가 더 이상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예술이다. 과학 기술 만능 시대에 예술은 비합리적이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했지만 말이다.

 

 

 

과학 기술과 예술이 만나야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은 또 많은 점에서 닮았다. 예술가들은 사물을 거꾸로 보거나 새롭게 보려는 사람들이다.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아인슈타인은 빛을 정지시켜 보려고 했다.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지만 이런 엉뚱한 발상이 상대성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과학과 예술은 서로의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예술은 과학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예를 들면 연주하고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시간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것은 멈춰있는 것이다. 과학 기술은 시간을 잴 수 있지만 말이다. 반대로 아픈 사람은 의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물론 예술도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이 둘은 상보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이 우위에 설 수 없는 것 같다.

 

 

 

과학과 기술이 날로 발전해가는 오늘날 왜 인문학적 사유가 요청되는지 이 책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과학이 무시했던 인간의 감정, 감수성을 과학은 연구하기 시작했다. 과학 기술 문명은 인간을 편리하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재앙도 가져왔기 때문이다. 재앙을 치유하기 위해서.

 

 

 

여닫이 문이 아닌 자동문은 뒷사람을 돌보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고 그 이래로 우리는 타인을 돌보지 않게 되었다. 윤리를 상실한 것이다.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도 아니고 괴물도 아닌 우리들은 곳곳에서 흉악한 범죄를 일으키기도 하고 이러한 사태를 안방에서 티비를 통해 이미지로 보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도 진지하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미지의, 가상 세계로서 경험할 뿐인 것이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편리하게 했지만 병들게도 했다. 그리고 이제 과학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이고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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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nc 2013-02-24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 글이 신간평가단 페이퍼에 연결되어 있지 않네요.
아마 글을 수정하시면서 빠뜨리신 것 같은데, 수정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