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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완전한 비루함, 복종
내 존재가 한없이 가볍다고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무의식 중에 이끌려 읽은 책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설사의 알리바이만도 못한 국문학전공자라는 알리바이로 세계문학은 의도적이든 무의도적이든 소홀히 해왔던 게 사실이다. 5분에 한번씩 웃겨주는 밀란 쿤데라를 접하면서 국문학에서 보지 못했던 작품을 체험하게 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 미셸 우엘벡에 당도했다. 미셸 우엘벡, 이 작가, 물건이다. 세계문학 새내기가 자꾸 이렇게 처음부터 신의 한 수들을 만나게 되다니 영광이다. 국문학에서 세계문학으로 개종?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여기, 경악스러울 정도로 고독한 한 남자가 있다. 우리 현대인은 언제부터 이런 끔찍한 고독에 처해진 걸까. 고독을 즐기든 그렇지 않든 고독이란 외로움, 슬픔, 우울 등의 정서를 얼마간 동반하게 되는 것 같다. 서구문명, 기독교, 자유주의적 개인주의(혹은 자유민주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실패했다.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고립되었고 우울하며, 자살로 치닫고 있다. 자, 이제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해 이 현대 사회를 극단화 시켜 보자. 일종의 사유 실험이다. 서구의 합리적 이성주의는(이제 동양을 포함하여) 신을 죽이고 인간과 인간의 이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제 신 없이도 인간은 스스로 합리적 이성에 따라 세계를 발전적으로 계획하고 구축할 수 있다는 믿음이 광적으로 퍼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1,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참담한 결과다. 인류는 진보하는가, 아니면 퇴보하는가. 미셸 우엘벡의 소설은 이런 질문들로 시작한다. 그는 질문한다. 우리는 신 없이, 인간의 이성만으로 과연 살 수 있는가. 어떤 초월적인 근거 없이 고립되고 원자화된 개인들로만 이루어진 현대 사회는 정의로운가(- 현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자기 안녕에 대해 스스로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고독한 주체를, 자기 주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데는 무력한 주체들을 만들고 있다. 절대적으로 고독한 주체들, 사람들이 고독을 느끼는 방식은 대단히 개인적이지만 고독에 시달리는 인구를 만들어내는 열정은 슬프게도 보편적이다. 이제 누구도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 레나타 살레츨, <불안들>, 후마니타스, 2015, 1장 참조).
성공을 위해, 부를 위해, 명예를 위해 경쟁하고 타자를 앞서기 위해 일평생을 발버둥 치는 우리에게 행복은, 자유는 보장되어 있는가. 그렇게 하루도 쉬지 못하고 뛰어서 성공하고 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인가. 그때 혹시라도 우리가 사랑을 잃고 친구를 잃고 가족을 잃는다면? 혼자 앞만 보고 달리느라 친구도 사랑도 뒷전이었다면, 이제 고독사가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작가는 (기독교적)서구문명은 자멸해간다고 본다.
인류문명에서 초월적인 것(신적인 것)을 삭제한 것은 태초에 기독교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아예 인간이 된다. 하지만 이슬람에서는 다르다. 이슬람에는 알라신이 여전히 건재한다. 이슬람의 뜻 자체는 ‘복종’이다. 이슬람에서는 신에 복종하는 길 밖에는 없다. 나아가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는데 여성에게는 가임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남성은 처를 여럿 둘 수 밖에 없고 이것은 신의 섭리이지 하등 낯설고 이상한 제도도 아니다. 기독교가 세상을 경계한다면 이슬람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복종한다. 그래서 이 소설이 우리에게 이슬람을 따르고 복종하자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20세기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단순하게도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로 점철되어 있다면, 인류 전체를 통틀어 기독교냐 이슬람이냐 하는 것도 사실 우스운 노릇이다. 인류를 구원하는 것은 신일까. 이런 해결은 너무 쉽다.
신도, 아버지도 스승도 사라진 시대, 오직 나, 개인(주의)만이 절대시된 시대에 그 개인이 소설적 상상력으로 보아 자멸하는 결과만을 가져온다면, 다른 가능성이 없다면? 이 개인들을, ‘개인들 전체를 관계 맺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길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인가. 작가는 이것을 고민해야만 했다. 타인에게 관심, 연민을 갖고 동감하는 능력이 철저히 부재하는 시대, 개인만 있는 시대에 우리가 키워야 하는 능력은 바로 타자성(사랑, 우정을 동반하는)을 확보하는 능력 아닐까. 애완견이라는 타자와 연대하는 능력만 키울 게 아니라. 그런데 그 능력은 어떻게 길러지는 것일까. 어쩌면 문학이 하나의 대안은 아닐까. 음악이나 회화와 달리 문학은
‘다른 사람의 영혼과 그 영혼의 총체를 만난다는 기분, 그 영혼의 나약함과 위대함, 한계, 비루함, 편견, 믿음 요컨대 그 영혼을 감동시키고 그 영혼의 관심을 끌며, 그 영혼을 흥분시키고 그 영혼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과 만난다는 그 기분’(p. 13.)
을 준다. 이 소설은 프랑수아라는 고독하고 젊은 대학 교수의 삶에 우리를 복종하게 하고 그 영혼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독자는 타자와 ‘공감’할 수 있게 된다. 프랑수아는 비루하게 개종하고 복종하면서 직업을 되찾았다. 그 비루함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독자는 더 비루해진다. 하지만 그 반복된 비루함, 이중적으로 배가된 비루함만이 프랑수아라는 타자를 만나게 해준다. 그 타자를 이해하면서 나는 나를 초월하여(개인을 넘어)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를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