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체인가. 타자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과연 그런가. 나는 생각하는 주체인가. 끊임없이 타자의 눈치만 보면서 살아가는 무의식의 주체인가. 이 시대의 미인이 아니라면 계속 성형 하라. 는 정언명령에 따라 이젠 성형하지 않은 사람을 구경하는 것이 더 힘들다. 나는 생각하는 주체인가. 타자의 시선의 노예인가.  

 

사르트르는 완전히 물화된 레스토랑 웨이터의 미소가 구토를 일으킨다고 썼고 하이데거는 자기의 고유한 '죽음'에 직면하여 살아가라고 했다. 남의 삶을 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살지 못한다.

 

어릴땐 부모나 선생, 그리고 친구들의 뜻에 따라 살고 커서는 회사의 뜻, 직장 상사의 듯에 따라 산다. 내 뜻대로 내가 생각하는대로 나는 존재해 본 적이 없다. 현대사회에서 우울하지 않고 허무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어쩌면 데카르트는 '자기'를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데카르트의 시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갈릴레이는 종교 재판을 받아야 했고(종교 vs 과학), 종교 내에서도 종교 개혁 후 구교 vs 신교는 30년간 전쟁 중이었다. 또 신흥 세력과(부르주아) 귀족 간의 다툼도 끊이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데카르트는 '확실한'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모든 것이 거짓이라 생각하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

 

또 그는 생각하는 '나'와 함께 기하학과 수학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라고 여겼다.

 

데카르트는 이원론자로서 물질처럼 관념도 '존재'한다고 보았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생각이었다. 동시에 데카르트는 물질과 관념을 통일시키려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나는 움직일 수 있다. 왼손을 들어 올리자. 하면 나는 왼손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자유 의지'의 존재를 입증한 것이다.

 

그러나 관념(생각)은 정말 왼손을 들어올릴 만한 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훗날 스피노자의 질문이었다. 다음 시간이 스피노자 강의여서 기대된다.

 

아무튼 데카르트는 자유의지를 믿었다. 이 생각은 부르주아의 기본 관념이기도 하고 합리적 근대 과학의 출발이기도 하다.

 

'합리적 이성' 이라는 서구 사유는 이미 폐기처분 된지 오래다. 합리적 이성이 낳은 것이라곤 양차 세계 대전이었고 아우슈비츠였다. 이런 서구의 잔혹한 문화에 대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는 쓰여질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은 억압적 '이성'의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이 도한 곧 문제에 부딪쳐 버리고 만다. 인간은 결코 '이성'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병자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그렇다면 '이성'의 질서 안에서 어떻게 '야만' 상태로 전락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 내부의 카스트 제도, 인종주의(우등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이 있다는 식의, 우리 사회와 학교는 성적으로 그것을 규명하려고 애쓴다)를 넘어서는 것부터 시작하는 건 어떨까.

 

오늘 프레시안에서 데카르트 강의(동아대 명예교수 이병창)가 있었다. 데카르트의 뒷얘기까지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다음 시간에는 스피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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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04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맞을때 한번 가 들어볼 생각하는데..시간이 영 나질 않네요. 방학때는 좀 될까했더니 그것도 여의치 않고. ^^ 정보는 기억해둘께요.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