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체인가. 타자인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과연 그런가. 나는 생각하는 주체인가. 끊임없이 타자의 눈치만 보면서 살아가는 무의식의 주체인가. 이 시대의 미인이 아니라면 계속 성형 하라. 는 정언명령에 따라 이젠 성형하지 않은 사람을 구경하는 것이 더 힘들다. 나는 생각하는 주체인가. 타자의 시선의 노예인가.  

 

사르트르는 완전히 물화된 레스토랑 웨이터의 미소가 구토를 일으킨다고 썼고 하이데거는 자기의 고유한 '죽음'에 직면하여 살아가라고 했다. 남의 삶을 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살지 못한다.

 

어릴땐 부모나 선생, 그리고 친구들의 뜻에 따라 살고 커서는 회사의 뜻, 직장 상사의 듯에 따라 산다. 내 뜻대로 내가 생각하는대로 나는 존재해 본 적이 없다. 현대사회에서 우울하지 않고 허무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어쩌면 데카르트는 '자기'를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데카르트의 시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갈릴레이는 종교 재판을 받아야 했고(종교 vs 과학), 종교 내에서도 종교 개혁 후 구교 vs 신교는 30년간 전쟁 중이었다. 또 신흥 세력과(부르주아) 귀족 간의 다툼도 끊이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데카르트는 '확실한'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모든 것이 거짓이라 생각하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존재한다'

 

또 그는 생각하는 '나'와 함께 기하학과 수학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라고 여겼다.

 

데카르트는 이원론자로서 물질처럼 관념도 '존재'한다고 보았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생각이었다. 동시에 데카르트는 물질과 관념을 통일시키려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나는 움직일 수 있다. 왼손을 들어 올리자. 하면 나는 왼손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자유 의지'의 존재를 입증한 것이다.

 

그러나 관념(생각)은 정말 왼손을 들어올릴 만한 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훗날 스피노자의 질문이었다. 다음 시간이 스피노자 강의여서 기대된다.

 

아무튼 데카르트는 자유의지를 믿었다. 이 생각은 부르주아의 기본 관념이기도 하고 합리적 근대 과학의 출발이기도 하다.

 

'합리적 이성' 이라는 서구 사유는 이미 폐기처분 된지 오래다. 합리적 이성이 낳은 것이라곤 양차 세계 대전이었고 아우슈비츠였다. 이런 서구의 잔혹한 문화에 대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는 쓰여질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은 억압적 '이성'의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이 도한 곧 문제에 부딪쳐 버리고 만다. 인간은 결코 '이성'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병자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그렇다면 '이성'의 질서 안에서 어떻게 '야만' 상태로 전락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 내부의 카스트 제도, 인종주의(우등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이 있다는 식의, 우리 사회와 학교는 성적으로 그것을 규명하려고 애쓴다)를 넘어서는 것부터 시작하는 건 어떨까.

 

오늘 프레시안에서 데카르트 강의(동아대 명예교수 이병창)가 있었다. 데카르트의 뒷얘기까지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다음 시간에는 스피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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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04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맞을때 한번 가 들어볼 생각하는데..시간이 영 나질 않네요. 방학때는 좀 될까했더니 그것도 여의치 않고. ^^ 정보는 기억해둘께요. 감사해요.
 

   

근대 이전에 인간은 운명에 따라 살아야 했다. 운명을 거역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정해진 운명에 따라 사는 것은 비극이었다. 그러나 사실 비극은 운명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된다. 이런 면에서 비극은 희극과도 통한다. 희극의 주체는 운명을 거역하고 운명에 개입한다. 근대의 시작이다. 이후 포스트모던까지.

이데아의 세계로부터 비극은 탄생한다. 비극은 그런 정지된 세계, 이데아의 세계가 나의 인간적 현존과 무관하게 운행된다는 사실에서 탄생한다. 존재는 현실 세계에서 썩고 부패한다. 그러나 이데아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화이트 헤드는 이데아의 세계를 차갑고, 건조하며 색이 없는 세계라고 묘사했다. 인간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과 아픔, 고민과 우연들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비극'이라고 한다.   

베이컨은 이데아의 세계에 대항하여 그런 것은 없으며 경험적으로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은 과학을 통해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 자연 속의 숨겨진 원리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근대과학의 태동이다. 근대과학 혁명은 급속한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다. 동시에 부작용도 가져왔다. 과학은 합리적 이성을 중시했고 이런  인간주의는 지배와 피지배를 낳았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한다고 자연을 파괴해왔고 다른 인종, 국가를 지배해왔다.

인간은 온갖 이데올로기를 통해 세계를 보고 만지고 지배한다. 희극은 어쩌면 이데올로기의 해체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더이상 이데아, 본질의 세계는 의미가 없다. 이데아는 인간을 억압해 왔을 분이고 현실 세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포스트모던은 희극이고 놀이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데아의 세계 즉 형이상학의 모든 성과를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에 대한 비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경험이냐, 이성이냐의 질문은 한쪽을 배제하는 반쪽 짜리 질문일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 둘을 종합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 프레시안 강의실에서 최종덕 선생님의 '희극의 재탄생' 강의가 있었다. 비극과 희극 그리고 근대에 대해서 개괄적인 강의를 해 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다. 다음 시간에는 이병창 선생님의 데카르트가 기다리고 있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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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13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레시안 강의를 들으시는군요..강의 안내가 되어있는 블로그를 링크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시간이 맞는다면 듣고 싶군요 ^^

드보르작 2011-11-18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동대입구 2번 출구에서 가까운데,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반 입니다. 오늘은 데카르트했고 다음주엔 스피노자 합니다. http://blog.naver.com/ahxkvjavm 제 블로그에요. 쪽지 남겨주시면 약도 보내드릴께요.
 
에로티즘의 역사
조르주 바타이유 / 민음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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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자신의 동물성에 대해 혐오한다. 인간은 자신이 나온 곳, 그 자연을 부끄러워한다. 위대한 가족, 훌륭한 가족이라는 말은 우리의 더러운 태생을 교묘하게 숨긴 것 외에 달리 무엇일까. 우리는 오물들 사이에서 태어난다.

 인간은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려 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차이를 두려고 했다. 그러나 그 차이는 미미해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조건으로 차이를 둘 수 밖에 없었다. 동물과 인간은 모두 배설을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수치스러워 하고 은폐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배설물에 대한 수치심을 길러준다. 언어를 배우기 이전의 아기들은 그것을 더럽다고 여기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배설물을 먹기까지 한다. 인간은 성적 분비물 또는 배설물에 공포감까지 갖게 된다. 그리고 죽음, 시체에 대해서도 공포를 갖는다. 배설물과 시체의 성격은 유사하다. 그 둘은 모두 금기의 대상이다. 죽음은 탄생과 반대편에 있다. 하지만 죽음은 최종적으로 탄생의 조건이자 예고이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연은 거부된다. 그러나 일단 거부된 자연은 더 이상 거부할 이유가 없다. 이제 인간을 구속하는 것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니라 자신이 자연과 구분되기 위해 만들었던 ‘금기’이다. 에로티즘은 금지된 곳에서 발생한다. 역겨울 정도로 거부되었던 것은 이제 욕망된다. 이것이 에로티즘의 이중성이다. 에로티즘은 우리를 혐오감에서 욕망으로 향하게 한다. 에로티즘은 혐오스런 대상과 공포를 추구한다. 그것들로부터의 희열이다. 우리에게 희열을 주는 공포는 ‘신성한 공포’이다. 인간의 지성은 지성을 넘어서는 것을 ‘신성’하다고 이름 붙였다. 신성한 세계에는 욕망과 공포가 조화롭게 황홀의 상태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공포는 언제나 유혹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치명적 매력의 여인은 욕망의 대상이다. 욕망은 가장 큰 상실을 요구한다. 욕망은 이익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잉여를 소비하는 것이다. 소모, 소진, 죽음이다. 존재는 언제나 무모한 모든 가능성을 탐험한다. 그런 불가능에 대한 고집스런 도전, 텅 빈 것에 대한 추구. 니체가 이야기 한 것처럼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보다 ‘무’를 욕망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권능에서 무능으로, 존재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더 많이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성적 열병의 순간에 이르면 우리는 전혀 반대로 행동한다. 우리는 무턱대고 힘을 조비하며 엄청난 에너지를 아무 소득 없이 무제한적으로 낭비한다. 헛되게 낭비할 때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싶어한다. 죽음에의 충동,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찾아 나선다.

 욕망의 형태는 항상 일상적 필요성의 규칙에 예속되지 않은 형태이다. 본질적으로 욕망의 대상은 욕망에 답하는 것 외에 이 세상에서 별로 할 일이 없다. 욕망의 대상, 소유의 대상인 여자는 나태해야 한다. 공장의 노동에 매달리는 여자는 거칠며 그래서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동물들은 기관을 직접 자극하지만 인간의 자극은 이처럼 상징적 형상을 거쳐온다. 상대를 자극하는 것은  분비물이 아니라 여성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정교한 이미지다. 여성성은 에로티즘의 대상을 매혹적이고 부드러운 형태들로 환원시키는 일을 한다.

 인간의 성 생활은 합법의 영역이 아닌 저주, ‘금기’의 영역에서 비롯된다. 결혼은 일종의 위반이다. 그것을 제도화해서 위반을 은폐하는 것이다. 에로티즘은 위반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성 행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공포의 다른 이름이다.

 금기의 대상은 금지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강력한 탐욕의 대상이 된다. 성적인 것과 관련 있는 금기는 대체로 대상의 성적 가치를 강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어떤 의미에서 결혼은 금기와 관능을 결합시켜 주는 것이다. 결혼 상태는 동물적 욕구의 자연스런 충동과 대립되는 금기의 ‘존중’이라는 진정한 인간적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여자들을 사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만역 여자들이 소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욕망의 대상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여자의 사용권은 어떤 씨족의 남자들에게 배타적으로 이전, 양도되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제물의 의미와 이웃해 있었다. 여자들은 신성한, 또는 사치성 재물이었다. 희생 제의에 바쳐졌던 제물들과 마찬가지로 제물에는 위반의 요소가 있다. 제공된 대상들의 파괴나 파손, 또는 태워 없애는 것은 위반의 가장 뚜렷한 형태이며 그것들은 가장 사치스럽게 사용될 때만이 최상의 가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유용성의 규칙이 지배하는 세속적 삶은 언제나 위반을 기다린다.

 어떤 의미에서 아버지, 오빠가 위반을 위해 여자를 내줄 때 결혼은 가능한 것이다. 어떤 여자를 내가 사용하기를 포기하면(근친) 다른 사람이 그 여자를 사용하고, 그러면 다른 어딘가에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포기된 여자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근친상간의 금기는 일반적으로 열성 아이를 낳는다거나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허구적 제도로서 인간의 성 행위의 불안, 공포를 은폐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어느 부족에서 사촌 관계에 있는 아이들, 예컨대 아버지의 아이와 누이의 아이들은 어느 곳에서는 금기를 적용 받지만 다른 곳에서는 장려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혈통에 의한 친족 구조는 결혼을 금지하는 것일 수도 있고 결혼을 장려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에로티즘의 경제는 일반 경제의 틀을 깬다. 그것은 증여이다. 경제적 이득이나 혜택이 목적이 아니다. 성 행위는 에너지를 바치는 것이다. 증여는 제공된 대상을 파괴하는데 전적인 파괴는 마력이 있다. 이 사치품은 노동의 파괴라는 역설을 담고 있다. 의식적 교환에서 어떤 물건을 바치는 일은 그것을 생산 회로에서 제외시키는 행위이다.

 개인적 사랑은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그 순간에 가능해지는데 그것은 사회 질서와 대립적인 경향이 있다. 개인적 사랑의 대상은 그 자체로 소모이다. 사랑은 오직 소비를 위해서 오직 쾌락에 쾌락을 더해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기 위해서 연인들을 결합시킨다. 연인들의 사회는 소모의 사회이다. 그에 반해 국가는 취득의 사회이다.

 무제한적 에너지의 소비, 말하자면 우리는 공포, 고뇌, 슬픔, 죽음을 찾아 나선다. 인간은 무질서, 악덕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자율적인 주체는 다른 아무것과도 관계가 없는 지대, 형태도 형식도 없는 것을 추구한다. 그것은 고뇌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고뇌를 끌어안고 싶어 하며 우리 안에 간직하고 싶어 한다.

 바타이유는 인간의 성 행위를 고찰하되, 에로티즘의 세계가 지적 세계와 동등한 차원에서 서로 만나서 보충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로서 동물과 다르게 성행위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금기’이다. ‘금기’ 안에서 에로티즘은 작동하며 그것은 이중적인 양태를 띠고 있다.

 자신의 본능을 거부하면서 욕망하기.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인간적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금기가 없다면 동물과 다르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일반적으로 억압이나 금기로부터 인간은 자유롭지 않다고 여긴다. 그래서 인간은 금기로부터 해방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사실 인간은 금기가 없이는 동물에서 인간으로 등극되지 못한다. 인간은 그것을 참아낼 수 없었다. 인간은 자유롭기를 원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유로운 동물적 본성을 혐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동물적 본성을 은폐하기 위해서 ‘금기’가 필요한 것이다.

 대뜸 결론으로 들어가서,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은 과도한 에너지, 사치이며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전쟁이라고 말한다. 과도한 에너지는 전쟁이라는 재앙에 사용될 수도 있다. 에로티즘은 비록 미미하나마 그것의 역사로 보건대 아무튼 군사적, 정치적이다. 수비 측은 수비할 수 없는 입장을 지키고 공격 측은 공격할 수 없는 입장을 공격한다는 점에서 두 진영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싸워서는 우리가 딛고 설 진리를 찾을 수 없다.

 옮긴이(조한경)에 의하면 바타이유는 금기와 위반으로서의 에로티즘에 천착하고 있다. 인간을 만들어 온 것은 바로 금기와 위반으로서의 에로티즘이었다. 그에게 금기의 위반은 위반을 위한 위반이다. 금기를 위반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야말로 욕망의 욕망, 즉 허구인 것이다. 그러나 그 허구를 통해 인간은 인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설을 이해하지 않고는 인간을 제대로 알 수 없다.    

 바타이유는 훗날 푸코와 데리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바타이유는 꼭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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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12권의 책 -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변화와 혁명은 펜끝에서 시작되었다
멜빈 브래그 지음, 이원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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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은 중력이 신이라고 선언했다(<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 1687년). 뉴턴은 처음으로 운동의 법칙을 발견하고 빛의 성질을 밝혀 낸 최초의 학자였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정립하고 행성과 그들의 운동에 숨겨진 비밀을 밝혀냈다. 그가 인류에게 선사한 지식 덕분에 우리는 우주를 떠나 다른 행성을 탐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의 이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무시되기도 했지만 오늘날 누구도 그의 업적을 편하할 수 없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을 공간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항수로 여긴 뉴턴의 생각이 틀렸음을 입증했지만 그 연구의 토대는 뉴턴의 생각이었다.

 오늘날 학교에서 성교육을 실시하고, 약국에서 피임약을 파는 것은 거의 마리 스톱스의 <결혼 후의 사랑>(1918년)이란 책의 공로이다. 당시, 여자는 성적으로 수동적이라고 생각했고 또 변덕스러우며 비이성적인 존재라는 남성 중심적 환상이 팽배했다. 이런 사고 방식에 맞서 저자는 여성의 성적 권리를 주장했으며 여성이 결혼 후에도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책으로 인해 세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이 밖에도 최초의 <축구협회 규정집>(1863년)은 오늘날 스포츠를 전 세계에 퍼트리는 데 기여했다. 다윈은 <종의 기원>(1859년)에서 인간의 본질과 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인간이 특별하고 우월하며 여타의 생물체와 다른 예외적인 존재라고 확신하던 종교적 사고를 철저히 비판한 것이다. 다윈의 자연관은 전지전능한 신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이 깨달음은 19세기 중반 영국에서부터 점차 세계로 번져갔다. 현대사회의 도래를 촉진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종의 기원>에서 자신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살해위협까지 받으면서도 노예 폐지 연설을 멈추지 않았다(<노예무역 페지에 관하여>, 1789년). 그의 영향으로 1807년 영국이 노예무역을 폐지하자 도미노 현상이 시작되었다. 1808년 미국이 노예무역을 폐지했고 1886년에는 쿠바, 1888년에는 브라질에서 폐지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노예무역이 폐지된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년)은 1846년 곡물법 폐지하는 데 기여했다. 곡물법은 12세기 영국 지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곡물 수입을 규제한 법률이었다. 스미스는 폐쇄적인 중상주의를 타도하고자 했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노예, 농노 등 종속 노동의 뿌리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다고 보았다. 진정한 스미스 추종자들은 ‘공익 사업 자금이 필요해 민간 기업을 끌어들이려는 정치가는 그 어떤 위원회나 의회도 납득시키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주장은 그릇된 사상에 세뇌당한 사회주의 계획 경제 비판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죽은 뒤에도 우리의 4세기를 지배했다(<제1 작품집>, 1623년). 그의 연극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어떤 이데올로기로부터도 자유롭다. 그는 상류층은 물론 하류층의 언어도 받아들였다. 그가 사용하는 단어는 3만개에 이른다. 우리는 하루 2천개의 단어도 쓰지 못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인이 하지 못했던 비극과 희극을 조합시켰다고 평가 받고 있다. 영국의 자랑 셰익스피어는 이후 괴테, 스탕달, 위고, 도스토예프스키 등 기라성 같은 대문호들에게도 영향을 끼친 작가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물들이지만 그들에 대한 오해도 있었고 그 저작들이 익숙해서였는지 잊고 있었던 책들을 다시 접하면서 깨달았다. 이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신이 존재하던 중세에 신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화형을 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백년 후 사람들은 신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과학을 더 믿었다.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한 이 훌륭한 저작들이 사실은 이 세상을 변혁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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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광기 그리고 웃음
슬라보예 지젝.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임규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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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계몽된 주체, 자율적 주체가 ‘주인이 필요 없는 주체’라고 선언하며 근대를 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자율적 주체에게 무제한적인 자유를 주는 것을 꺼리며 훈육과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지젝은 칸트의 이 모순적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칸트적 자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헤겔을 경유해 보자. 애초에 자유로운 주체를 통제하기 위해 법과 금지가 필요했던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장애물이라고 여기는 법 질서(억압)가 자유를 낳은 뒤에, 다시 그것을 통제해야 했던 것일까. 헤겔에게는 자유보다 법이 먼저이다. 법적 규범을 알아야 인간은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문법을 알아야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듯이. 

 이 책에서 지젝은 칸트적 자유 개념의 애매성을 넘어 헤겔을 따라 지배와 예속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헤겔에세 그 둘은 대립적이지 않다. 자유는 무엇이고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자유로운 행위들은 있을지언정 그 어디에도 보편적 ‘자유’는 없다. 이 논리를 극단화 시켜보면 그 곳에는 오직 ‘예속’만 있을 뿐이다. 헤겔에게 존재는 없다. 존재자들만이 있을 뿐이고 그런 의미에서 존재는 ‘무’인 것이다. 지젝은 헤겔을 통해서 이분법의 해체와 대립의 일치를 보여주고 있다. 지배가 예속으로, 존재가 ‘무’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 둘은 대립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관계이며 서로 같은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뫼비우스 띠이다. 

 억압적 법이 외부의 장애물인가. 아니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장치인가. 법은 그 자신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대립인 위반, 범죄와 맞딱뜨리게 된다. 법 그 자신이 최초에 세워질 때 바로 위법, 위반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감추고 은폐하기 위해 자신의 대립자로서 범죄와 위반을 필요로 하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외부의 장애물이라고 여기는 억압적 제도, 장치들, 혹은 가부장적 아버지, 남성 등이 없다면 인간 세상은 어떻게 될까. 이 질문은 그 억압적 장치들을 옹호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 자체의 불가능성을 고집하는 것이 중요하다. 법 그자체의 불가능성을 인식하기. 그 불가능성에 대항해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드러내기. 저항하는 것은 오히려 그 체제를 정당화해 줄 뿐이다.

 문제는 그렇다면 그 불가능한 체제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젝은 어쩌면 랑시에르적 의미에서 무위, 곧 행동하지 않기를 역설하고 있다. 벤야민도 라캉도 중심을 갖지 않기, 행위하지 않기의 철학을 내세운 적 있다. 이러한 사유는 동양의 불교적인 사상과도 맞물린다. 불교는 모든 것을 비어 있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그 텅 비어있음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하나의 힘이기도 하다. 항아리는 비어 있기 때문에 물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지젝에게도 주체는 텅 비어 있다. 알튀세르에게도 주체는 없다. 그의 이름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며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것 뿐이다. 그들에게 특정한 위치에서 ‘나’는 존재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주체의 자기 동일성 개념은 여기서 무너져 버린다. ‘나’는 나를 외부에 이렇듯 객관화 시키고 거리를 둠으로써만 ‘나’일 수 있다. 나는 직접적으로 ‘나’에 도달할 수 없다. 이 객관화는 단순히 나에 대해 외부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 철학적 성찰들이 재미있는데 제 3항 즉 아버지, 법, 금지, 억압적 제도 등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내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오늘날 포스트모던이 삭제한 ‘억압’, ‘아버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행위하지 않기는 허무주의적이라기 보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체제를 변화시켜 보려는 의지로 읽어야 한다.

 지젝은 관념론으로써 유물론을 대체하자고 제안하는데 기존의 유물론이 물질, 외부의 실재에 고착되어 있었다면 지젝은 그 물질이라는 것이 우연적 산물이며 그 자체 공백, 텅 비어 있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 과제는 무엇보다 어려운데 관념론적 우회를 통해서 시도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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