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전에 인간은 운명에 따라 살아야 했다. 운명을 거역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정해진 운명에 따라 사는 것은 비극이었다. 그러나 사실 비극은 운명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된다. 이런 면에서 비극은 희극과도 통한다. 희극의 주체는 운명을 거역하고 운명에 개입한다. 근대의 시작이다. 이후 포스트모던까지.

이데아의 세계로부터 비극은 탄생한다. 비극은 그런 정지된 세계, 이데아의 세계가 나의 인간적 현존과 무관하게 운행된다는 사실에서 탄생한다. 존재는 현실 세계에서 썩고 부패한다. 그러나 이데아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화이트 헤드는 이데아의 세계를 차갑고, 건조하며 색이 없는 세계라고 묘사했다. 인간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과 아픔, 고민과 우연들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비극'이라고 한다.   

베이컨은 이데아의 세계에 대항하여 그런 것은 없으며 경험적으로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은 과학을 통해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 자연 속의 숨겨진 원리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근대과학의 태동이다. 근대과학 혁명은 급속한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다. 동시에 부작용도 가져왔다. 과학은 합리적 이성을 중시했고 이런  인간주의는 지배와 피지배를 낳았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한다고 자연을 파괴해왔고 다른 인종, 국가를 지배해왔다.

인간은 온갖 이데올로기를 통해 세계를 보고 만지고 지배한다. 희극은 어쩌면 이데올로기의 해체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더이상 이데아, 본질의 세계는 의미가 없다. 이데아는 인간을 억압해 왔을 분이고 현실 세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포스트모던은 희극이고 놀이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데아의 세계 즉 형이상학의 모든 성과를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에 대한 비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경험이냐, 이성이냐의 질문은 한쪽을 배제하는 반쪽 짜리 질문일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 둘을 종합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 프레시안 강의실에서 최종덕 선생님의 '희극의 재탄생' 강의가 있었다. 비극과 희극 그리고 근대에 대해서 개괄적인 강의를 해 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다. 다음 시간에는 이병창 선생님의 데카르트가 기다리고 있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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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13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레시안 강의를 들으시는군요..강의 안내가 되어있는 블로그를 링크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시간이 맞는다면 듣고 싶군요 ^^

드보르작 2011-11-18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동대입구 2번 출구에서 가까운데,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반 입니다. 오늘은 데카르트했고 다음주엔 스피노자 합니다. http://blog.naver.com/ahxkvjavm 제 블로그에요. 쪽지 남겨주시면 약도 보내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