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어바웃 러브
벨 훅스 지음, 이영기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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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about Me

-벨 훅스의『All about Love』를 읽고

 

나도 두세 번의 사랑은 해 본 것 같다. 보기 좋게 모두 실패했지만 말이다. 두 번이면 두 번이고 세 번이면 세 번이지 두세 번은 뭘까.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서 셈을 할 줄도 몰랐던 건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사랑에 관해 ‘잘못된 정의’를 가지고 있었다.

 

『All about Love』는 그저 통속적인 연애의 기술이나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저자는 우리가 사랑을 하고 싶어 하면서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랑의 정의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며 말문을 연다. 사랑은, 단지 신비한 힘이고 로맨틱하며 어느 날 갑자기 백마 탄 왕자가 눈앞에 나타나면 이루어지는 것일까. 아무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 대부분은 사랑이 그저 하나의 ‘특별한 감정’이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고 통제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책임질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애써’ 생각한다. 그게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단순히 느낌이나 감정만이 아니라 ‘책임이 따르는 행동’이다. 사랑은 상대를 배려‘하’고 애정을 표현‘하’며 존중‘하’고 충실‘하’고 헌신‘하’며 신뢰‘하’는 것이다.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지 가만히 앉아서 사랑 받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고 드라마처럼, 운명처럼, 마법처럼, 어느 날 아침에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사실은 이 모든 것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랑이란 상대를 존중하고 보살피고 신뢰해야 한다는 등등.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왜 늘 실패하는 것일까. 이 책이 이런 식상한 얘기만 하고 있다면 재미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그렇다. 우리는 다 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이런 환상에 자꾸만 빠지는 것일까.

 

저자는 우리 현실 사회가 사람들을 진실 되지 못하게 만들며 따라서 사랑에도 빠지지 못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우리는 사랑이 부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자는 과묵해야 하고 ‘필요하면 규칙을 무시하고 법을 넘어선 행동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남자다. 또 여자는 얌전해야 하고 나서서는 안 되며 외모를 가꾸어야 한다. 그리하여 여자든 남자든 우리는 모두 자기의 본 모습과는 상관없이 자기를 그렇게 ‘꾸며내야’ 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남자답거나 여자답게’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주 끔찍하다. 그렇게 우리는 거짓을 일삼으면서 우리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는 사랑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그리고 그 대신 우리는 상품을 사랑하게 되었다. 상품과 같은 물질을 중시하게 되면서 이제 인간은 등한시되었다. 이제 우리에게 찾아 온 것은 우울증과 절망감 밖에 없다. 당연한 결과였다. 사람이 더 이상 소중하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무력해져 갔다.

 

이렇게 남녀 차별적인 가부장적 사회와 소비 사회는 진실 된 사랑을 못하게 했고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것을 갈구하게 되었다. 가부장제는 남자는 당연히 강하고 이성적인 반면 여자는 약하며 감성적이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를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을 퍼트렸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권력 의지(지배하려는 의지)가 강한 곳에는 결코 사랑이 충만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성은 ‘사랑을 하면’ 되었고 여성은 그 ‘사랑을 받기만’ 하면 되었다. 여성들은 사랑받기 위해 외모를 꾸미기에만 신경 썼고 남자들은 여자와 아이를 지배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지배와 사랑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비 사회는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사랑하게 하고 개인의 성공과 행복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사람 사이의, 공동체에서의 사랑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사랑에는 커플들의 사랑만이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삶을 유지하게 해주는 것은 공동체이지 핵가족이나 커플들, 자기밖에 모르는 개인주의자들이 아니다. 핸드백도 오백만원이 넘는다는 데 88만원 세대에게 자신이 상품보다 못할 수도 있다는 절망감은 우울증만 확산시키고 있다. 이러한 난국으로부터 벗어나는 길도 공동체에 있다. 사물보다 ‘사람을 중시’하고 서로를 보살피며, 존중하는 사회는 우울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뒤바꾸어야 한다. 사랑은 주기만 하는 것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배하는 것도 아니며 꾸며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달콤한 로맨스도 아니고 어느 날 마법처럼 찾아와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성장을 위해 자아를 확장하려는 의지이다. 이러한 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매번 사랑에 실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 고난도 없는 ‘로맨틱한 사랑’이라는 환상은 우리를 사랑의 실패로 이끈다. 자신과 상대를 확장하고 성장시키려는 의지도 없이 로맨틱한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환상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 꿈이 무산되었을 때 이 나약한 주체는 쉽게 헤어지거나 이혼해 버린다.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왠지 피곤하고 쓸 데 없는 일인 것만 같다. 관계가 깨져도 다 쓴 상품을 버리듯, 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우리는 어느덧 사람이 아니라 상품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사랑이 없는 상태, 즉 죽음의 상태로 내몰린다. 결국, 우리가 사랑을 중시한다는 것은 이러한 사회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애초부터 난 사랑에 실패하게끔 되어 있었다. 상대를 존중하고 신뢰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받으려고만 했다. 티비에서 가르쳐 준대로 사랑은 이벤트로 증명받아야 하고 반드시 로맨틱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다 그 사랑이 식어갈 때 쯤이면 다른 사람에게로 눈을 돌려버렸다. 뻔하지만 그 다음 사랑도 역시 실패했다. 자아를 확장하고 성장시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의지하려고만 했고 사랑을 받으려고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게 뜻대로 되지 않으면 늘 상대를 탓했다. 이 책은 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변하지 않는 이상 로맨틱한 사랑 같은 건 없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나처럼 매번 사랑에 실패했다면 일독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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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를 최근에 깔깔거리며 보았다. 아주 재미있게 그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책이었다. 그의 저작을 하나씩 읽어나가려고 하는데 이번에<신음악의 철학>이 나왔다. 여기선 또 무슨 얘길 할까.  교수신문에 글이 있어 살짝 인용해 본다.

 

신음악의 철학, 아도르노 지음, 문병호·김방현 옮김, 세창출판사, 328쪽, 29,000원
아도르노는 이 책에서 신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인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의 중요 작품들에 대해 서구 음악이 구사하는 음악적 기법의 모든 개념을 동원하여 현미경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두 작곡가의 작품세계를 역사철학적, 인식론적, 사회이론적, 예술이론적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아도르노는 이 두 작곡가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는 쇤베르크의 음악을 진보의 음악으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복고의 음악으로 결론짓는다. 그러나 진보와 복고의 결론은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이 책은 서구 음악학사나 음악이론사에서 도달된 가장 높은 수준의 음악론이며, 동시에 역사철학이고 인식론이자 사회이론이다.

 

 

 

 

 

 

 

 

 

 

 

 

 

 

 

 

칸트야, 뭐, 근대 인식론의 전환을 가져온 장본인이니 만큼 교양인 혹은 지식인이라면 안 읽을 수 없을 것. 이성에 한계를 '확' 그어버리고 종교와 도덕의 세계는 인식의 영역이 아니라 신념의 세계라고 말해버렸다. 칸트의 스캔들을 들여다 보자.   

 

형이상학 서설 =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저서 '학문으로 등장할 수 있는, 모든 장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의 한국어판.

방대한 분량과 난해함 때문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칸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의 이해를 돕는 입문서다.

우리말로 옮기고 주석을 단 백종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순수이성비판'은 칸트의 저작 중 가장 방대한 것으로서 칸트 철학의 전모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대신에 적지 않게 난해하다"면서 "'순수이성비판'의 내용을 정리해 비교적 간명하게 서술해 낸 책이 '형이상학 서설'"이라고 소개했다.

아카넷. 454쪽. 2만7천원.

 

 

 

 

 

 

 

 

 

 

 

 

 

 

 

 

 

 하이데거는  인간이 죽음의 경험을 선취함으로써 본래적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일종의 사유의 경험이 아닐까.

 

<사유의 경험…>은 1983년에 비토리오 클로스터만 출판사에서 펴낸 하이데거의 전집 가운데 제13권을 번역한 것이다. 엮은이의 말에서 보이듯이 하이데거의 아들 헤르만 하이데거가 아버지의 작은 글들과 사유의 경험들을 모아 1910년부터 1976년까지 시대순으로 편집한 책이다. 이 책에는 예전에 출간된 하이데거의 주옥같은 글들, 즉 ‘초연함의 해명’ ‘사유의 경험으로부터’ ‘헤벨-가까운 집안친구’ ‘언어’ ‘들길’이 실려 있고, 하이데거가 직접 글을 읽은 육성을 음반에 담아 공개하기도 했던 ‘예술과 공간’ 등이 담겨 있다. ‘존재’라는 별을 향해 ‘길-사유’를 펼친 하이데거의 사유 흔적을 맘껏 느낄 수 있는 저술이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책에 수록된 작은 글들에서 하이데거가 사유한 동선을 통찰할 수 있다. 특히 그의 고향 메스키르히에서 1910년 발표된 최초의 글인 ‘아브라함 아 산크타 클라라’(1910)를 보면 한 젊은 사상가의 시대 비판을 읽을 수 있고, 또한 하이데거가 생각하는 시와 예술에 대한 단상, 언어와 고향에 대한 숙고를 엿볼 수 있다. (한겨레 2012. 11. 9)

 

 

 

 

 

 

 

 

 

 

 

 

 

 

 

 

헤겔이 절대 정신을 상정했다고 비판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의 철학으로 신자유주의 시대의 위기를 읽어낼 수 있다면 도전해봐야하지 않을까.  

 

헤겔 정치철학의 통찰과 맹목 = 나종석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가 서양의 근대를 철학적 화두로 삼은 헤겔의 철학을 분석한다. 저자는 헤겔이 사회·철학적 주제들을 통해 근대라는 시대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했고, 그 내적인 논리와 그것이 지닌 본질적 한계점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본다.
신자유주의, 시장지상주의로 인한 인간 소외와 불평등의 문제, 민주주의 문제, 생태 위기 등 현대사회가 직면한 문제도 헤겔 철학을 통해 분석을 시도한다.

에코리브르. 392쪽. 2만5천원.

 

 

 

 

 

 

 

 

 

 

 

 

 

모방의 법칙이라... 인간에게 모방은 본능이라고도 한다. 우리 인간은 대중 스타를 모방하고 롤모델을 세우기도 하며 히틀러와 박정희에게 열광하기도 한다. 왜그럴까. 이 책에서 힌트를 얻어볼 수 있을까.

 

타르드가 모방을 앞세워 던지는 질문들은 사회학이 (뒤르켐처럼) 개인들에게 외적이고 집합적 의식으로 객관화된 ‘사회적인 것’, 또는 사회 구조를 통해서 개인들의 미시적 삶과 운동, 무의식적이고 비자발적 영향 관계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지에 관한 것이다. 그는 사회가 개인들에게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모방과 암시로 조밀하게 직조된 정신적 상호관계망은 아닌지를 질문한다. 그는 사회적 규칙성을 가능하게 하는 반복(-대립-적응)의 원리를 바탕으로 삼아서 범죄심리학, 사회심리학, 사회 고고학-통계학, 여론 이론, 경제 심리학 등에 관해서 새롭게 질문한다. 또한 그는 사회학자로 변신한 라이프니츠로서 근대 과학이 발견한 무한소, 소립자의 존재론으로 왜 사회가 모방 공동체로 조직되는지, 최소 실체인 모나드와 그것들의 집합체들을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일반 원리는 없는지를 질문한다. -교수신문(양운덕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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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 이토록 곡해된 사상가가 일찍이 있었던가?
테리 이글턴 지음, 황정아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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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후쿠야마의『역사의 종언은 끝났다』

 

-테리 이글턴,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를 읽고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공산당 선언』, 유강은 역, 그린비, 2005).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등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서로 끊임없이 대립해왔다.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는 봉건 사회를 종식시키고 시민 사회를 열었지만 여전히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계급 대립은 폐지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개발과 발전으로 우리는 어쩌면 절대 빈곤에서는 벗어났는지도 모른다. 생산력도 많이 발달했고 스마트 폰 안 가진 사람이 없다. 스타벅스 커피를 테이크 아웃하면서 우쭐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공허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는 정말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정신적으로도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주택 보급률은 120%라고 한다. 그런데 아직 자기 집을 못 가진 사람이 많고 젊은이들은 스마트 폰이라는 100자 안팎의 소통 시스템 안에서 사유하기를 차단당한 채 텅빈 말들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공산주의에는 자유가 없다느니 개성이 없다느니 떠들었지만 자본주의가 만개한 서울에서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웃음도 안 나온다. 모든 여자는 김태희처럼 예뻐야 한다는 동일성의 명령에 복종하고 티비 광고에 나오는 아파트와 자동차는 행복까지 챙겨준다니 일제히 욕망할 수 밖에 없다. 이게 전체주의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마르크스주의가 죽었다고, 끝났다고 쾌재를 부른 사람들에게 테리 이글턴은 한마디 한다. 마르크스주의야말로 가장 현재적이라고. 그는 오히려 죽어가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아닌가 하고 되묻는다. 이글턴은 ‘세계 금융 시스템을 초토화 직전으로 이끈 은행업자와 금융업자들은 시민들에게 적발되어 능지처참 당하지 않으려고 줄을 서서 성형 수술을 받으려 할 것’이라고 위트를 던지기도 한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스스로 우월하고 합리적이며 과학적이라고 잘난 척 하고 있지만 그러한 믿음 자체가 이미 일종의 미신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궁극적 한계가 ‘자본 그 자체’라고 말한 적 있다. 자본주의는 주기적인 전쟁이나 공황을 야기하고 순간순간 그 위기를 모면해 가지만 결국 그 자체의 기본 모순 즉 ‘생산의 사회화와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로 인해 체제의 변혁이 불가피하다.

 

이글턴은 자본주의에서 노동 계급은 ‘배제되면서 포함되는’ 기괴한 계급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꼭 필요하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집단이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사회의 토대 자체가 자기 모순적이다. 그는 ‘자본주의가 노동 계급 없이 생존할 수 없는 반면에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없이 훨씬 더 자유롭게 번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임노동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기본 소득 운동은 노동과 소득 간의 연결 고리를 아예 끊자고 주장한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 교수 퀴퍼는 ‘임금 노동의 비인간적 본성에 대처하는 방법의 하나로 노동과 소득의 고리를 끊기 위해 모두에게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주자’(『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최광은, 박종철출판사, 2011)고 제안하고 있다.

 

마르크스에게 노동은 임금과 무관하다. 노동이란 ‘현실을 바꾸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물질적인 힘을 실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노동은 미리 정해진 잣대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인간 능력 일체의 발전’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생산이란 ‘플루트를 불거나 복숭아를 맛보거나 플라톤과 언쟁을 하거나 춤을 추거나 연설을 하거나 아이의 생일 잔치를 준비하는 것 등 자기 충족적인 활동 일체’를 포괄한다. 자본주의에서 임노동은 인간을 노동에서 소외시키고 있을 뿐이다. 노동자는 자신이 쓰려고 의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얼굴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수백 개의 의자를 만들어내야 한다. 자본주의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생산과 소비의 불일치 말이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가 자본주의에서는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자본주의에서는 개미처럼 열심히 일한 노동자는 점점 더 궁핍해 질뿐이다. 2011년 7월 한 조사에 따르면 택시 기사의 월급은 101만 5천원인데 그가 실제로 번 돈은 200만원이 넘는다. 임금 이외의 돈은 회사가 가져간 것이다. 또 최근에는 4대강 사업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무리한 야간 작업 일정에 쫓겨 쉬지도 못하고 일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한 국회의원의 조사에 따르면, 하루에 17시간을 노동하는 경우도 발견됐으며 2011년 1월~4월에만 무려 11명이 사망했다고 한다(『마르크스의 자본』, 강신준, 사계절, 2012). 이처럼 노동자들의 생활은 도무지 나아지지가 않는다.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노동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임금만을 주기 때문이다(노동자들이 자본가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

 

자본주의는 이윤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토지는 지대와 아무 상관이 없다. 또 기계도 이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박정호 외 옮김, 거름, 2005, p. 19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된다면, 이득이 된다면 윤리도 도덕도 폐기처분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아직 이윤보다 중요한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소크 박사는 특허를 포기하고 전세계에 백신을 보급했다. 그는 ‘이윤보다 생명’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도 에이즈는 약값이 없어서 치료 받지 못하고 1년에 300만명이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거꾸로 생각해봐』, 홍세와 외, 낮은산, 2008). 이 끔찍한 홀로코스트 앞에서도 제약회사는 이윤만을 따지고 있다.

 

과연 자본주의가 옳은 것인가. 감상적 휴머니즘에 빠지자는 얘기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결국 승리할 것인지 우린 아직 모른다. 양극화는 날로 심해지고 있고 2011년 월스트리트 시위를 비롯해서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시위들이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에 멕시코 억만장자는 그 나라 1천 7백만 명의 수입과 맞먹는다고 한다. 그들은 흑인도 있고 백인도 있는 것처럼 부자도 있고 빈자도 있다고 말하지만 이글턴은 빈자가 ‘있기 때문에’ 부자가 있다는 진실을 흐리지 말라고 일침을 가한다.

 

이러한 불평등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계급 없는 사회’는 그저 하나의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일까.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계급이 없는 원시공동체가 존재했고 이 공동체 내부에서 생산력의 발전에 기초하여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인간집단이 출현, 이들이 다른 인간 집단을 착취ㆍ지배할 수 있게 되어 계급이 발생하고 계급사회가 형성’(출처, 네이버 지식백과)되었다면 우선은 다시 코뮨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을 것 같다. 작은 마을 공동체를 생각해보자. 자본주의에서처럼 상품을 무정부적으로 생산해서 이윤을 추구하고, 재고가 쌓여 낭비하는 일 없이(『금융자본론』, 루돌프 힐퍼딩, 김수행 역, 비르투, 2011) 공동체 구성원의 필요에 따라 계획적으로 생산해서 쓸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지가 사적 이윤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 말이다.

 

또 우리는 진정, 토지와 같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 나온 수익(불로소득, 투기소득, 지대소득 등)을 개인이 취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하거나 국유화 할 수는 없을까. 이글턴은 이것은 ‘의지의 문제’라고 분명히 말한다. 네그리와 하트도 물, 은행, 교육 같은 것을 공통적 재화로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선언』, 조정환 역, 갈무리, 2012)한다. 공통적인 것에는 당연히 생산 수단도 포함될 것이다. 비행기나 기차도 인류가 생산해낸 공통적인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공통적인 것을 ‘재설정하고 확대’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본다.

 

이러한 일은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마오주의와 스탈린주의는 ‘서투르고 잔혹한 실험’이었다. 마르크스도 이들과 다르지 않은 유토피아주의자 아니냐는 비난에 이글턴은 이렇게 대답한다. 마르크스에게 중요한 것은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가 실현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현재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인다. 자본주의 실험의 잔혹성에 대해서 말이다. 이미 서구의 실업 인구는 수백만 명에 이르고 우울증과 자살은 감기처럼 번지고 있다고. 유감이지만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이글턴에 의하면 자유주의 사회는 난감한 문제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이 사회에서 개인들은 자유롭다고 되어 있지만(푸코식으로 근대 국가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놔두면서 통치한다. 『안전 영토 인구』, 오트르망 역, 난장, 2011) 이 자유는 끊임없이 ‘서로의 목을 겨눌 자유’에 다름 아니다. 그야말로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 상황이다. 고립된 개인들의 끊임없는 경쟁, 자기 계발, 정규직을 향한 싸움들. 사회를 유지하고 매개하는 관계들 즉 유대, 인간 관계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자본주의는 보편적 상품 형식 아래 인간의 질적 노동을 삭제하고 소외 시킨다. 그리고 사회와 그 구성원들은 병들어 간다. 하지만 공산주의에서는 ‘개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자기 실현 속에 그리고 이를 통해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삶을 조직’한다. 흔히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가 개인의 삶을 묵살한다고 여겨왔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이글턴의 지적이다. 오히려 ‘개인의 자유로운 번영이 마르크스의 정치적 사상이 갖는 목표’였다.

 

이글턴이 보기에 자본주의, 자유주의 시장이 인간 본성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주장은 터무니 없다. 그들은 인간 본성을 자본주의와 동일시하고 있는데 ‘사하라 중부 투아레그 족 사람들도 본심에서는 자본주의적 기업가들이며 투자은행을 세우고 싶어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투자 은행이라는 개념조차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 발언에 불과하다. 자본주의자들은 매사에 그들의 이런 생각을 보편화하고 획일화하려고 시도해 왔다. 전체주의와 닮은 것은 바로 이 자본주의이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완전한 전체, 완벽함을 구상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우연성, 온갖 우발적인 충돌과 사건, 비극, 예측 불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었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 질서를 만드는 것도 그에겐 가능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획일성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는 평등을 ‘부르주아적 가치’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의 상품이 다른 상품과 가치에서 균등해지는 교환가치가 정치 영역에 반영된 것이 평등’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이 평등 개념을 중간 계급 민주주의의 추상적 평등과 연관시켰는데 이것은 ‘시민으로서의 형식적 평등이 부와 계급의 실질적 불평등을 흐리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에게 평등은 ‘차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모두가 똑같아지자는 게 아니다. 그는 ‘모두의 서로 다른 필요를 고르게 돌보아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평등을 중요시 했을 뿐이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누구도 현실에서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현실은 ‘우리 자신이 만든 세계’여야 한다. 현실이 자신의 노동과 무관하게 될 때 우리는 ‘소외’된다. 그의 변증법에서는 사유와 실천의 분리, 육체와 정신의 분리도 용납되지 않았다. 우리의 생각이 실천에 토대를 둔다는 점을 망각하는 것은 ‘관념론’의 무지일 뿐이다.

 

흔히 사람들은 그가 토대와 상부 구조라는 모델을 통해 현실을 두 조각으로 분리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글턴은 마르크스에게 이들 간에 ‘쌍방향의 소통’이 중요했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인류가 물질적 생산을 통해 자신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매개, 규제, 통제하며 이는, 오만한 지배가 아니라 쌍방향의 소통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역사가 자연 역사의 일부’라고 믿었다. 이러한 점을 무시한 자본 축적의 충동은 자연 파괴로 이어지며 결국 생태적 균형도 파괴할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공산주의는 최초의 생태주의였고 더불어 여성주의의 정치 프로그램이었다. ‘부르주아지는 자기 부인을 단순한 생산 도구로 밖에 보지 못한다. 그래서 생산 도구를 공동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분개한다. 한낱 생산 도구에 불과한 여성의 지위를 타파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지향하는 바이다. 부르주아적 결혼은 사실상 부인을 공유하는 제도이다. 현재의 생산관계가 철폐된다면 그 생산 관계에서 비롯된 부인 공유제, 즉 공식적, 비공식적 매춘도 사라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낸시 홈스트롬 엮음, 유강은 역, 메이데이, 2012).'

 

물론 이글턴은 계급에서 벗어난 오늘날의 페미니즘, 젠더, 인종, 탈식민주의로의 이동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데 그들이 ‘계급이 죽었다’고 본다면 이글턴은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글턴은 지배층이 말하는 것처럼 여성이 약한 게 본능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아도르노 또한 ‘여성다움’이라는 것이 기존 체제를 재생산하는 반동이라고 이미 오래전에 언급한 바 있다. 남성이 여성을 통해 자기를 정당화하고 연약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필요로 한다면 그러한 요구에 스스로 복무하는 여성이야말로 끔찍한 순응주의자로서 이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는 것 아닌가(『미니마모랄리아』, 김유동 역, 길, 2005). 쥬디스 버틀러도 여성이라는 ‘구성된 젠더의 허구성’을 폭로한 바 있다(『젠더 트러블』, 조현준, 문학동네, 2008). 이글턴은 ‘계급’과 함께 이러한 문제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만일 계급을 이야기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은 루카치 식으로 표현하면 허위이고 가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변증법적으로 계급을 이야기하면서 계급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는 일시적인 것이었으며 그저 ‘다수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글턴에 따르면 그는 권력을 ‘물화(物化)하는 태도 즉, 그것을 사회적 환경에서 떼어내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다루기를 거부’했다.

 

이글턴은 이번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현재적’이라고 발하고 있다. 마르크스에 대한 오해와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명쾌하게 간추리고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이글턴의 지적은 내가 종종 대답하기 난감했거나 애써 외면했던 것들을 정확히 다시 바라보게 했다. 그의 특유의 날카로움과 유머 감각은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것 같았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이 충분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가 끝났다는 사람들이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얼마나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지 환기시키면서 자본주의의 오류와 범죄에 대해 소상히 밝히고 있다. 마지막까지 그의 재치는 빛난다. 피로 얼룩진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잔인했다며 마르크스주의에 등을 돌린 사람들은 히로시마 폭격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어야 할 것이다!

 

1990년 초,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동유럽과 소련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예리하게 통찰하면서 “역사는 종언하였다”고 말했다. 그에 대해 이글턴(은 이 책에서 직접 다루진 않았지만)도 동의할 거라 믿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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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영토, 인구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 난장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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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라는 거짓말

-우울한 오늘, 길 잃은 양이여 푸코를 읽어라

 

국가는 무엇일까. 그것은 실체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푸코가 말하는 것처럼 실체 없는 추상뿐일까. 푸코에 따르면 근대 국가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인구를 관리하고 조절하는 통치의 과정 그 자체이며 절차이다. ‘인구를 통치한다’는 관념은 바로 이 근대라는 시기에 나타났는데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통치 개념은 사용되지 않았다. 근대 국가는 단순히 이전 시대처럼 억압과 공포로 사람들을 통치하지 않는다. 단순히 ‘살인하지 말라, 절도하지 말라’라고 명령하는 대신 실제로 살인이나 절도를 저지르기 ‘전’에 항시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하며 주시한다. 그 과정에서 규율 장치를 비롯한 경찰, 감옥 등의 근대적 안전 장치들이 발달했다. 시민들의 생명과 보건 등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도시는 나병 환자들을 추방했고 18세기부터는 예방 접종을 실시했다. 이로써 ‘인구’가 ‘관리와 조절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일종의 자연성인 인구를 국가 권력이 개입해서 인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8세기 초부터 무역과 교역을 통해 국력을 키워야했던 근대 국가는 도시를 공간적, 법률적, 행정적, 경제적으로 틀에 갇힌 상태에서 해방시켜야 했다. 도시의 성벽을 허물지 않을 수 없었고 때문에 거지, 부랑자, 건달, 범죄자, 도둑, 살인마 등 온갖 떠돌이들이 도시로 대거 유입되었다. 도시는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도시에서는 감시와 규율 체계가 확대되었고 보건과 위생 관련 장치들도 발달했다.

 

그렇다면 과연 근대의 도시는 진정 사람들에게 사회적, 경제적으로 안전하고 평화로운 공간이었을까. 일례로 도시는 식량난과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했을까. 근대 국가는 사법적, 규율 체계 등을 통해서 풍작과 가격하락, 흉작과 가격 상승 사이의 변동을 예방하거나 막지 않는다. 예전에는 이런 변동을 피하려고 어떤 것을 막거나 강제했다. 근대 국가는 가격이 상승하는 경향이 있는 곳에서는 그 상승을 가만 놔두면 자연스럽게 가격이 하락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가격 폭등, 식량 부족 이라는 현상이 일어나고 전개되도록 방치하고 방임하자는 것이다. 이 현상 자체가 틀림없이 스스로를 억제하고 규제하리라는 것이었다. 단, 거기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 시장의 계역 전체 안에는 일정한 가격 폭등, 일정한 식량 부족, 일정한 기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일부 사람들은 굶주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구는 이제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굶주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알아서 처신해야 하는 주체이자 관리되는 대상이 되었다. 국가는 인구를 ‘방임하면서 동시에 관리’하는 것이다. 이제 국가는 과거처럼 금지하고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놔두고 방임하지만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사람들을 방임하고 사건을 일어나는 대로 놔둔다는 식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적 형식이 발전할 수 있게 해 준 중요한 요건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제 인간을 통치하려면 인간의 자유, 인간이 하고 싶어 하는 것, 인간에게 득이 되는 것, 인간이 행하고자 하는 것, 즉 인간의 욕망을 우선적으로 사유해야 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 되었다.

 

각자의 자유에 의거하고 그 자유를 통해서만 조절하고 작동할 수 있는 권력, 바로 이것이 근대 국가에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것이었다. 근대 국가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주권자의 의지에 복종해야만 하는 온순한 의지들의 집합이 아니었다. 모든 개인은 욕망을 통해 행동하고 국가는 최대의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거주하기를 갈망하는 곳에 사람들이 이주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근대 이전에는 인간의 자유를 감시하고 통제했다면 이제는 모든 것을 허락하면서 개인의 일상 생활에까지 개입하여 감시했던 것이다. 근대 인간이 왕권을 무너뜨리고 모든 권력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그들에게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도시에서 욕구와 열망의 주체인 동시에 통치의 대상이 되었다. 근대 국가는 자기애의 한계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기애의 확대를 통해 이로운 효과를 창출할 수 있을지를 관심 가져야 했는데 이것은 공리주의 철학의 모태가 되었다. 근대 국가 이전에 왕이나 군주는 군림했지만 통치하지는 않았는데 통치는 베스트팔렌 조약(독일 30년 전쟁을 끝마치기 위해 1648년에 체결된 평화조약으로 가톨릭 제국으로서의 신성로마제국을 사실상 붕괴시키고, 주권 국가들의 공동체인 근대 유럽의 정치구조가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위키피디아) 이후에 성립한 근대 국가에서 두드러진 형식이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면서(욕망하게 하면서) 그들의 안전과 생명을 관리, 조절, 통치한다는 개념은 근대 국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다.

 

왕은 신민들을 통치하고 관리한 것이 아니라 지배했을 뿐이다. 죄인을 다루는 방식도 근대에 와서 달라졌는데 감옥과 같은 공간은 근대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중세에는 죄를 지으면 추방하거나 사형시켰지만 근대 국가는 그들을 교화하고 훈육하기 위해 감금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법을 내면화하는 양심을 길러 내었고 이러한 방식은 효과적이고 경제적이었다. 이제 시민들은 스스로 법을 지키고 자기 내면에 법과 규범을 지닌 채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푸코가 말한 근대의 통치술인데 그는 이것의 유래를 그리스도의 ‘사목(목자) 권력’과 ‘양심지도(나 영혼 지도)’의 차원에서 찾고 있다.

 

사목 권력의 특징은 움직이고 있는 무리(도시의 무리)에게 행사되고 그 목표는 선행을 통한 무리의 구제이다. 그리고 개인화 하는 권력이었다. 양을 돌보는 목자는 불침번 서면서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개별적으로 감시하고 경계했다. 목자의 배려는 모두 타인을 위한 배려이지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한 배려는 아니었고 전체를 위해 한 마리의 양은 희생시킬 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양들은 전체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됐다. 서구의 인간은 자신을 양떼 속의 한 마리 양으로 여기는 법을 수천년 동안 배워왔고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줄 목자의 구원을 갈구하도록 수천 년 동안 배워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목 권력은 푸코에 따르면 그리스 로마의 사유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것이었다. 이 사목 관념이 서구 세계에 도입된 것은 그리스도교 교회를 매개로 해서였다. 그리스도교는 인류 차원에서 구원을 이룬다는 구실로 현실의 삶에서 인간들을 일상적으로 통치한다고 주장하는 종교이다. 목자로서 그리스도는 길 잃은 무리를 신에게 데려가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이며 무리 전체 뿐 아니라 각각의 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이다. 또 사목은 무리를 떠난 양들이 참회를 통해 무리에 재통합하는 권력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목은 인간을 통치하는 기술이었고 통치성이 16세기말과 18세기에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 근대 국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사목은 개인과 공동체를 구원의 길로 안내하는 것이었고 자기 양의 선행과 악행에 함께 동일시하며 기뻐하기도 했고 참회하기도 했다. 목자는 자신의 양을 구원하기 위해 죽음도 받아들였고 바로 이 메커니즘을 통해서 타인의 양심까지도 지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양들에게 늘 완전한 공덕이 있다면 목자가 필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목자는 양들의 일탈을 통해서 자신을 정당화했다.’ 목자는 자신이 올바른 삶을 통해 모범을 보임으로써 타인을 가르쳤고 그들이 미혼자인지 기혼자인지 부자인지 빈민인지에 따라 다른 가르침을 주었다. 억압적으로 단 하나의 가르침을 주었던 것이 아니었다. 목자에게는 이제 가족이나 가정의 번영과 부 뿐 아니라 ‘만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문제였다. 사목은 인간의 품행 일거수일투족을 대상으로 하는 매우 특이하고 새로운 권력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목 권력에 반대하는 세력들도 끊임없이 공존하고 있었다. 가령 성서로의 회귀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들은 성서가 사목의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목자가 아니라 ‘신’만이 무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16세기 종교의 대대적 위기, 즉 종교 개혁은 바로 이러한 배경을 지니고 등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그리스도 국가들은 목자처럼 교육의 차원에서, 일상의 차원에서 영혼을 인도하고 지도하기 시작했다. 공적인 것의 통치화, 그것은 분명 하나의 권력이었고 그 ‘이상’ 이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 근대 국가는 국가 자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참조하지 않았다. 신의 질서도 따르지 않게 되었고 국가는 국가 자체로서만 의미가 있고 정당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이유로 국가는 언제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반란이나 혁명, 즉 인간의 나약함과 인간들의 악의가 그것이었다. 그래서 근대 국가의 통치자들은 언제나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는 시민을 구원하고 관리하고 보살피지만 동시에 그들이 ‘악’할 때, 그들을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개인들은 왕이나 군주 같은 절대 권력이 무너지면서 예외 없이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서로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다. 근대 국가 또한 마찬가지로 평등하게 공존하는 이웃 근대 국가들과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지면서 보편성은 해체되었고 국가는 상호간에 일체의 종속관계와 의존 관계가 없는 절대적 단위들이었다. 각 국가는 스스로를 긍정해야 했고 스스로 보존해야했기 때문에 국력을 키워야만 했다. 국가들이 서로 균형을 유지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그만큼의 군사 장치를 가져야 했다. 바로 이 역설을 두고 푸코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이 필수적’이었다고 말한다. 결국 전쟁은 근대 국가들의 공존에 근본적이고 구성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국력은 어떻게 강화될 수 있을까. 근대 국가는 우선 국가를 부강하고 건강하게 만들어야 했다. 보건, 위생, 노동, 교역을 원활하게 해줄 도로, 운하 등의 모든 부문에 개입하고 통치해야 했다. 도시의 발달은 사람들이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 ‘잘’ 살기를 원하게 했다. 이제 국가는 개인들의 행복, 이익까지 증진하고 조절해야 했다. 국가는 더 이상 초월적이고 종합적인 원칙으로서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 안에 있었고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근대의 시민사회였다.

 

시민사회는 개인들의 자유와 자발성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안전과 치안이라는 명목으로 경찰제도를 탄생시켰다. 이 사회에서는 감시와 통제 아래, 충성이라는 봉건적 형식이 아니라 품행에 있어서 국가의 온갖 명령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사회였다. 사회의 진리, 국가의 진리는 이미 국가 자체가 독점하고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시민 전체)가 그 보유자가 되어야 했다.

 

푸코는 이 강의에서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사용되지 않았던 근대적 의미에서의 ‘통치’ 개념에 주목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이 ‘통치’ 개념이 서구에 퍼졌는데 목자의 권력이 바로 그것의 토대였다. 목자 권력은 이동하는 무리에 대해, 개개인에게 행사되었고 이러한 목자의 통치 방식은 정확히 유동하고 개인적인 시민 사회를 통치하기에 적합했다.

 

근대 국가 이전의 통치가 덕이나 지혜, 정의 등에 따라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원칙에 따라 통치했다. 근대 국가에서 ‘옳고 그름’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았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근대의 개별 국가들은 서로 경쟁 상태에 놓이게 되면서 국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는데 이때 고려되었던 것이 인구, 생산, 수출, 군대 등의 요소였다. 자연적인 인구의 출생, 사망률까지 합리적으로 관리하고 분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때 발달한 것이 ‘통계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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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 푸른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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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 재밌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단순 명료하게 설명해야 할 때가 있다. 선생님, 좌파가 뭐에여? 우파가 뭐에여? 글쎄,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마침 그때 김어준을 우연히 만났다. <닥치고 정치>. 김어준, 그에 의하면 ‘우’는 기본적으로 세계를 약육강식의 전쟁터로 이해한다. 그래서 일단은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 내가 죽고, 옆 사람이 살면 뭐하냐는 식이다. 그래서 그들이 인지하는 세계에선 자신이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게 도저히 죄가 될 수 없다. 고로, 그들에게 사유재산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결사적으로 ‘지켜야’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삶의 터전을 주셨다. 그 ‘터’는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공유지가 아니었을까. ‘터전’의 사유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혹은 언제부터? 어떤 사람이 땅을 개간하여 수확을 했다면 그것은 누가 가져야 할까. 노동을 투입한 사람이 가지는 게 맞지 않을까. 그 사람은 자기의 ‘이익’에 의해 땅을 개간했고, 그래서 그것은 ‘자기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근면, 성실하게 일하라. ‘부’를 축적할 수 있을 것이다.


개개인이 부유해지면 나아가 ‘국가’도 부강해진다. 이러한 논리는 아담스미스와 만나, <국부론>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고전 경제학에서 말하는 노동가치설(노동이 가치를 생산한다)이다. 참고로 맑스는 잉여가치설을 주창했다.


개인의 이익에 따라 노동하고 행동하라. 그리고 ‘부’를 축적하라.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마라.


이런 논리는 결국 오늘날, 신자유주의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 아닐까. 김어준이 말하는 것처럼 ‘우’가 기본적으로 세계를 전쟁터로 본다면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기는 승자독식 사회, 의자뺏기 게임을 멈추지 않는 야만 사회에서 우리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자신을 개발해라. 살아남아야 한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는 가치는 없다. 그저 ‘나’만 살면 된다. 그것은 ‘웰빙’으로 이어진다. 이 땅에 ‘잘 먹고 잘 사는 법’이 화두가 된지 오래다.


내가 잘 살면 곧 모두가 잘 사는 것이라고 대응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이건희의 재산을 쫓아갈 수 없다. 이건희가 잘 살지는 모르지만 99%의 노동자들은 잘 살고 있지 못하다. 일할수록 궁핍해지는 노동자들의 삶을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명박은 항상 나태해지지 말고 일하라고 주문한다. 열심히 살지 않고 불평만 늘어놓지 마라. 남 탓하지 마라. 정권 탓하지 마라. 


김어준에 의하면 그들에겐 노력만으론 개인이 극복할 수 없는 사회구조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청소부가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가난한 게 아닌데, 그런 건 관심 없다. 그들은 모든 문제를 개인의 무능으로 환원시킨다.


오늘, 우리는 ‘이익’에 따라 살고 모든 문제를 ‘경제’로 해결하려고 한다. 과거에 정치는 윤리적인 문제와 결합되어 있었다. 정치는 곧 ‘선’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근대 이후) 정치는 ‘이익’만 실현하면 된다. 윤리적이지 않더라도 ‘돈’이 된다면 괜찮다.


요즘 아이들에게 꿈을 물으면 열에 아홉은 ‘부자’가 되고 싶다고 대답한다. 적어도 우리 땐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설사 진심이 아니더라도 소방관이 되어서 위험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나’ 아닌) 구해주고 싶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이들은 당당하다. ‘나’만 살면 되니까. 약육강식이니까. ‘너’는 죽든 말든.


김어준에게는 이런 문제 의식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는 세계관이 아니다. 그저 동물적 ‘반응’일 뿐이다. 유아적이라는 얘기. ‘북’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서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세계를 전쟁터로 보는 ‘우’에게 북한은 말그대로 ‘불확실성’ 그 자체다. 그 공포를 가장 손쉽게 처리하는 방식 중 하나는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무섭다고 말하는 대신 나쁘다고 말하기.


그렇다면 그에게 좌는 뭘까.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시장 아주머니들은 모른다. 한마디로 혼잣말 하지 말란 얘기다.


또 진보는 대중을 상대할 때 자신들의 율법만이 절대선이라고 우긴다. 그리고 왜 너희는 그렇게 살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외친다. 회개하라. 그러면 구원받을 것이다. 이런 죄의식 마케팅이 그는 불편하다고 말한다.


‘진보도 강박이 되면 진상이 된다’


이렇게 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드물지 않을까.


과거 군사정권은 조직 폭력단이었다. 그런데 지금, 뇌에 구김살 없이 청순한 이명박은 금융사기단이다. 밥줄 끊고 생활을 망가뜨린다. 그렇다고 씨바. 쫄지말자. 말하자. 씨바. 라고.


박근혜에게도 잊지 않고 한마디 해주는 센스. 그녀에게 국가는 아버지의 유산이다. 상속받아야 할. 그녀의 국가주의는 사실, ‘아버지주의’이다, 아직 아버지와 분리되지 못한 나이 먹은 그녀에겐 또 결정적으로 ‘생활’이 없다. 취직하고 승진하고 애 낳고 지지고 볶고, 집 사고 늘이고. 이런 일상. 없다. 겪을 필요 없었다. 정치는 결국 생활이 대상이다. 생활이 관념이니 정치도 그녀에겐 관념이다.


박근혜에 대한 대중의 애착은 집단 무의식의 감성적 퇴행이다. 양친을 비명에 보내고 막대한 상속을 부여받은 엄청난 부호. 이런 이미지는 여성으로서 부와 권력을 획득하고 일상과 생활로부터의 자유, 바로 이 대중적 판타지를 그녀는 먹고 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은 것이다. 가장 유력한 대권 후보로 웬만한 정치인은 상대도 안하는 권력자.


달동네 우파, 비정규직 우파라는 웃지못할 비유가 있다. 서민들이 기업가, 자본가의 편에서 정치를 하는 정당을 찍어주는 것이다. 왜일까. 부자 만들어 준다고 하니 전부다 찍어줬다. 부자되면 가난한 자, 약자들을 다시 또 패대기쳐버리려는 심산이다.


어느 누구도 이런 비판에 자유롭지 못하다. 반성하자. 스스로. 그리고 이 책을 한번 읽어 보자.


비판적으로.


김어준은 구체적 삶이 중요하다고 한다. 271쪽. ‘진보진영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그거다. 내가 직접 겪고, 구체적으로 절박한 일상의 사람들이 애처롭거나 그들에게 미안하거나 해서 만들어진 게 진보 정당의 정책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가난하다고 규정함으로써 그 가난을 강화시키는 것은 그들이다. 가난을 전시함으로써 얻는 효과는? 사람들은 그래, 저런 사람들도 살아. 라는 일종의 위안을 얻는다. 뭔가 꺼림직한 뒷거래. 이런 논리로부터 벗어나자. 벗어나 보자.


머리가 나빠서 내겐 답이 없다. 같이 고민해 보자. 무책임하게 이렇게 글을 끝내는 사람에게 어떤 대안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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