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도시 생명의 거리 - 뉴욕, 거리, 지구에 관한 42편의 에세이 아우또노미아총서 40
이와사부로 코소 지음, 서울리다리티 옮김 / 갈무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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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도시 생명의 거리>, 이와사부로 코소

 

 

 

-바틀비의 도시, 뫼르소의 거리

 

 

 

 

 

 

 

필경사가 필사 일을 거절하고 먹는 것도 거절한 채 죽음을 향할 때, 그 주검 앞에서 먹먹함은 결국 그에게서 나를 봐야하는 현기증일 것이다. 바틀비의 수동적인 행위, 단순한 거절도 아니고 자신을 소멸로까지 밀고 나가는 이 행위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건 단순한 저항과도 다를 것 같다. 내가 아버지에게 저항 할 때, 나를 소멸시키기 위함은 아니다. 내가 부르주아에게 저항 할 때,, 페미니스트가 남성적 질서에 저항 할 때,,,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바틀비적 행위, 자기 소멸(굉장히 급진적이라고 생각됨)로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내가 소멸하면 뭐, 아무 소용 없을테니까...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건 아닐까. 나, 내것, 나의 동지, 친구. 라고 하면서 내가 잃어버리는 것은 공통적인 구역이 아닐까. 나의 적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거리, 길에 대한 감각.

 

 

 

공동의 구역, 길 위에서 나는 철저하게 수동적이다. 나는 길을 장악할 수도 없다. 그저 타자와 함께 걸을 수 밖에 없다. 이들 타자는 단순히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 한가운데 들어서 있다. 내가 말을 배우면서 잃어버린 나의 유아infans는 내 안에 말 못하는 타자로 남아 있다. 우리 안의 구멍, 익명의, 비인칭(으로서 나는 비존재이다!)의 어린아이라는 공동 경비 구역은 이중적이다. 우리는 늘 그 구멍 때문에 허전하기도 하지만 바로 이 빈 구멍(틈) 때문에 타자와 무한히 마주할 수도 있다. 그것은 구멍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가 없앨 수도 없다. 그곳에 마주하여 우리는 수동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능동적으로 타자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이 어린아이가 나와 타인 사이에 공동의 구멍이라면 우리는 이 공동의 메워지지 않는 구멍을 통해 스스로 타자화되면서 타자에게 열릴 수 있다. 이렇게 나는 이미 빗금쳐진 존재이며 타자이다. 비인칭적이고 중성적이며 말못하는 아이처럼 수동적인 행위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타자를 향해, 아니 그보다 타자와 함께 공동의 언어, 침묵의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본질이라는 이름으로,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침묵의 언어를 망각해왔다(블랑쇼 선집 8, <카오스의 글쓰기>, 2012).

 

 

 

이와사부로 코소는 현재 뉴욕이 그 거품같은 번영이 어떻게 세계 각지의 눈물과 연결되어 있는지 봐야한다고 말한다(144p). 뉴욕이 어떻게 자신의 타자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 자신 안의 타자를 보지 못하는 뉴욕에게 닥칠 것은 자신의 죽음밖에 없다. 그래서 뉴욕은 자신을 비존재로 비인칭(내부의 타자에 대한 감각)으로 감각하고 사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세계의 중심으로 착각하는 한 그들에게 공동의 안전 지대는 없다.

 

 

 

내가 비인칭적이 되지 않으면 나는 계속해서 젠더 간에, 계급 간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자유 재산과 그 바깥에, 안과 밖에 벽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국가는 벽을 세우길 좋아한다(177p). 우리의 상징 체계는 차이 체계이기 때문이다. 여자/남자, 위/아래, 낮/밤의 세계에서 중성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성적 소수자를 박해하며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문턱, 경계를 두려워하고 지우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수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문턱인지 모른다. 문턱에 앉아서 상징 질서(자본주의적)와 단절하기.

 

 

 

괜히 공부를 한다고 취직도 안하고 이러고 산지 족히 십년은 된 것 같다. 나를 비정규직이라고 이름 붙이지 말라. 나를 그렇게 호명하면서 나에 대해 평가하고 재단해서 나의 위험성을 삭제하지 말라. 난 이름 붙여지지 않은 채 차라리 유령(비존재로서)처럼 살겠다. 그래서 어디에나 아무때나 출몰하겠다. 수동적으로 조금씩 자본주의에 참여하지 않겠다. 나는 미용실에 가지 않으며 백화점에 가지 않는다. 이렇게 조금씩 자본주의를 침몰시키겠다. 음핫!!! 위안은 안되는군.

 

 

아무튼 나는 자본주의에 대립하고 투쟁하는 게 아니다. 코소가 말하는 것처럼 대립, 투쟁과 그것의 통합, 해결이라는 사고 방식은 비현실적이다(219p). 대립 투쟁은 영속하지 않고 통합되지도 않는다(푸코가 어디선가 귀뜸해 주었듯). 대립 투쟁 모델은 ‘타자 배척’에 매어 있을 수 밖에 없다. 여성운동이 외로운 건 남성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가야할 길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그 둘을 아우르는 ‘공통적인 것’(기관 없는 신체인 지구처럼-이진경 해제에서)을 토대로 하는 사고이다.

 

 

이러한 사유 방식에는 젠더 정체성도 자기 존재도 소멸시키며 그래서 휴머니즘도 없다. 들뢰즈는 자신의 소논문(「내재성」, 1995)에서 비인격적 유아의 삶을 예찬했다(270p). 이와사부로 코소는 ‘비인격적 개체화’ 그 ‘덧없음’ 자체를 힘으로 삼는 삶, ‘자기만의 삶’을 넘어서는 삶이 우리가 재구축해야 할 삶이라고 말한다.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난 ‘보통의 삶’으로서 말이다.

 

 

우리는 국가 중심주의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땅은 너의 땅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285p).

 

 

공통적인 것을 위한 감각에는 이런 익명의 혹은 액체의 무엇이 필요할 것 같다. 민중을 넘어선 세계 민중으로, 주체를 넘어선 비인칭 주체?로, 국가를 넘어, 젠더를 넘어...넘을 게 많다. 나는 코소의 이 책을 바틀비의 ‘수동성’ 즉 자기소멸적 태도에 빗대 읽어 보았다. 오독도 독서이므로, 죽음의 도시에서 독서하기(자기만의 삶을 넘어설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일 것도 같다) 또한 하나의 수동성으로서 생명의 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봄볕에 취해 책장을 넘기며 생각해 본다. 뫼르소의 태양이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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