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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 도시의 식민지. 저자는 도시를 시골의 미래형으로 보는 데 반대한다. 다시 말해서 단선적으로 나아가는 시간상의 어느 한 점에 시골이 존재하고 그것이 진화하여 도시가 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을 부정한다. 도시는 시골과 동시대에 존재하고, 시골을 약탈하고 착취하며 성장한다. 도시에서 발흥한 자본은 시골의 농지를 강압적으로 사유화한 끝에 다수의 농민들을 ‘자유로운’(노동력을 판매하는 것 외에는 다른 생계 수단이 없는) 노동자로 ‘해방’시키기에 이른다 - 알라딘

 

 

 

 

 

 

 

 

 

 

 

 

 

 

 

 

 1967년부터 1969년까지 3년에 걸쳐 미시마 유키오가 혁명과 문화에 대해 주장한 정치 논문, 정치에 대해 좌파 거장과 나눈 대담, 정치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에 대해 학생들과 나눈 대담이 담겨 있다. -알라딘

 

 

 

 

 

 

 

 

 

 

 

 

 

 

 

 

 

 

시대에 따라 어떻게 맑스주의가 변모되어왔고, 어떻게 사상이 발전해왔는지 역사적 배경과 이론의 형성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오늘의 관점으로 맑스주의를 다시 읽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왜곡되고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맑스주의 이론을 다시 한 번 재점검할 수 있는 책이며, 맑스주의 역사를 한눈에 개괄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알라딘

 

 

 

 

 

 

 

 

 

 

 

 

 

 

 

 

평화의 종교가 어떻게 전쟁 이데올로기로 변신했을까? 깨달음의 교리가 어떻게 윤리와 양심을 마비시켰을까? 미국인 승려이자 불교학자인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의 책으로, 일본 파시즘과 불교가 맺은 은밀한 유착을 파헤친다. -알라딘

 

 

 

 

 

 

 

 

 

 

 

 

 

 

유동하는 근대의 저자 지그문드 바우만의 기대되는 신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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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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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우리들의 국가

 

 

 

 

 

 

의술은 의술에 유익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유익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선장과 통솔자도 선장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선원과 통솔받는 자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고 지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치자든 그가 치자인 한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통치 대상인 피치자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고 지시해야 한다. 또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은 이 점, 피치자에게 유익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60p). 치자는 70프로 이상이 비정규직인 피치자에게 유익한 정책을 펴야한단 말이다. 우리에게 집과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을 달라. 말이다.

 

 

 

플라톤이 이 책을 쓴 게 도대체 언제냐. 소크라테스의 말을 더 들어보자. 필요 이상의 다채로운 음식은 병을 낳고 무절제는 법을 낳는다. 그래서 병원과 법정이 문을 열고 법과 의술은 으스대기 시작할 것이다. 평범한 육체노동자뿐 아니라 명색이 자유민으로서의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에게 숙련된 의사와 재판관이 필요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 주인이든 재판관이든 남들에게 정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교육이 잘못됐다는 명확한 증거다(185p). 교육을 재정비하란 말이다. 어디 교육뿐일까.

 

 

 

우리가 국가를 건설하는 목적은 한 집단을 특히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를 최대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무리하게 커져도 안 된다. 국가의 수호자들이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것은 부와 가난이다(사람들이 일단 토지와 집과 돈을 사유하기 시작하면 재산 관리인이 될 뿐이다). 부는 사치와 나태를 낳고 가난은 비열함과 기술의 퇴보를 낳기 때문이다(215p). 나를 가난에서 어서 빨리 구제하란 말이다.

 

 

 

아무튼 사유재산은 같은 목표를 추구하며 되도록 고통과 기쁨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사적으로 만들고 고립시킨다. 몸 말고 사유한 것이 없는 나라에서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까닭에 그들 사이에 소송도 고소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소한 어려움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에게 아첨하는 것,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생활비를 마련하는 어려움, 돈을 빌리는 것, 빚을 갚지 못하는 것, 학비를 마련하기 위한 대학생들의 노동, 여보게 이런 일들로 말미암아 생기는 온갖 어려움은 너무나 분명하고 ‘지저분’해서 언급할 가치도 없네(295p). 그렇다. 이 사람이 보기에 우리 현대인들의 삶은 마치 백화점 명품관처럼 깨끗하고 치안도 잘되어 있어 나름 안락하지만 ‘지저분’해서 입에 담지 못할 삶인 것이다. 내 삶이 이렇게 더러운 것일 줄이야. 급격하게 우울해진다.

 

 

 

소크라테스의 일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학문과 관련하여 이것저것 가리는 사람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문학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은 문학만 읽고 말하자면 뭐 이런 식인데...음,, 또 까인거지. 수천년 전 사람에게 말이지. 썩 기쁘진 않아. 꿈에서도 소크라테스는 금국자 가질래, 나무국자 가질래? 하고 금이 그렇게 좋으면 금국자 줄게 이런다. 그런데 문제는 무거워서 쓸모가 없다는 것!! 아오 열받아.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가, 재산 평가에 근거한 정체는 과두제인데 이런 국가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두 개의 국가를 갖게 된다. 즉, 가난한 자들의 국가와 부자들의 국가 말이다(454p). 우리 나라가 과두제란 말이다.

 

 

 

문제는 이 과두제적 인간에서 민주제적 인간이 생겨난다는 것. 민주제적 인간은 교만을 교양이라 부르고, 무질서를 자유라, 파렴치는 용기라 부른다. 이들은 아무 쾌락이나 닥치는 대로 즐기며 닥치는 대로 먹고 나서 다시 물만 마시며 살을 뺄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생활에는 아무 질서도 필연성도 없는데 그는 이런 생활을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이라 여기며 평생을 지낸다. 민주제의 자유는 예속을 싫어하고 급기야 모든 법률을 무시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지경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참주이다. 지나치고 때이른 자유가 참주를 불러들인다(490p). 지금 우리 나라와 싱크로율? 되는가.

 

 

 

덩치가 커서 1박 2일 꼼짝 못하고 읽은 것 같다. 고전이란 게 안읽었는데 읽은 것 같고 그래서 또 안 읽게 되고 늘 그랬던 거 같다. 이것도 읽다말다만 했던 것 같다. 이번 기회에 꾹참고 앉아서 읽어보겠다 다짐하고 엉덩이 욕창생길 뻔 했다. 이 오래전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 모습을 예견하고 있다는 게 놀랍기만 했다. 이래서 고전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논문 발표가 코앞이라 심장이 쫄깃해진 채 읽어야했지만 많은 걸 얻고 간다. 학교보다 알라딘이 날 더 많이 공부시키는 것 같다. 알라딘 서평 마감과 겹친 중간기말 레폿 마감이 함께 올 때 그 쓰나미에서 즐거움을 찾는 나는 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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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위한 철학]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건축을 위한 철학 - 세상에 단 하나뿐인
브랑코 미트로비치 지음, 이충호 옮김 / 컬처그라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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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건축을 해체하다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의 건축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 작품은 여러분이 집을 점유하는 방법에 대한 전통적 개념을 거부한다. 나는 침대를 놓지 못하도록 침실 가운데에 기둥을 세워두었다. 건축에서 기능의 죽음, 저자의 죽음이란 개념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배경에는 철학적 사유가 기반하고 있다.

 

 

1968년에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이란 에세이에서 문학 작품 저자의 원래 의도를 재구성하려는 문학 비평가들의 접근 방법을 비판했다. 바르트는 일반 대중의 문학 이해는 작가 개인과 그의 삶, 취향, 열정에 지나치게 집중돼 있는데 이것은 작품의 설명을 그것을 쓴 작가에게서 찾으려는 경향을 낳는다고 말한다(207p). 바르트는 이러한 이해 방법은 현대적 현상으로서 오늘날 인간의 개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널리 퍼진 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좌파 지식인들은 개인주의적 시민가치(사유 재산권 같은 개인의 권리 등)를 부정했는데, 개인의 권리가 자본주의의 기본 토대인 부르주아 사회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209p).

 

 

데리다 또한 화자의 현전을 강조하는 서양의 형이상학을 거부했다. 데리다에 따르면 서양 철학사는 텍스트나 말의 저자가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그것들을 둘러싼 지식을 더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를 좋아했다. 그는 서양의 로고스 즉, 음성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음성 언어가 원래의 저자와 저자의 의도에 더 가깝다는 믿음에서 유래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만약 우리가, 주체가 말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말한다’고 본다면 무너질 수 밖에 없다.

 

 

현전의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것에는 인간의 행동과 관련지어 건축과 건축가의 작품을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가 포함된다. 이것은 건축의 기능적 고려는 거부하는 것과 이어진다. 이러한 해체주의적 건축은 익숙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면서 맥락에 순응하기 보다 맥락을 추방해 버린다(215p).

 

 

데리다는 말과 텍스트로 표현된 개인이 존재한다는 개념이 현전의 신화에 속한다고 말한다. 데리다의 요점은, 누가 기호를 만들 때 그것은 다른 기호들을 포함한 생각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으며 모든 기호는 그래서 궁극적으로 다른 기호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생각을 설명하려면 또 다른 생각을 언급해야 하고 이런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는 것이다(219p).

해체주의 건축가는 데리가가 텍스트를 해체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일반 대중이 모더니즘 건축에 투사한 문화적 기대의 내적 모순을 노출시켰다. 해체주의 건축은 현전의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형태로 건축에서 기능과 맥락을 거부하는 것으로 지어졌다(223p).

 

 

해체주의 건축은 모더니즘의 형태적 체계에 숨겨져 있는 무질서의 가능성을 드러냈다. 건축 설계는 이제 분리, 분열, 왜곡, 중첩, 단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일관적이고 통일된 인간이 없는 것처럼 건축에도 통일, 조화, 일관성은 사라졌다.

 

 

이 책은 건축과 철학이 서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파헤치고 있다. 건축 역사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다소 어렵기도 했지만 새롭고 재미있었다.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 플라톤부터 칸트, 현상학과 해석학까지 동원되어야 했지만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설명되어 있다.

 

 

건축이나 철학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야 할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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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국가의 역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등의 해묵은 논쟁, 지루하고 감흥 없는 부정적 비판 분석, 그 결과로서의 자기 위안적 고립 등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에 대해 과감하게 메스를 들이댄다.
 

면, 한번쯤 읽어보고 싶다.

 

 

 

 

 

 

 

 

 

 

 

 

 

 

 

 

 

저자는 인간으로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부서진 이름의 파편들을 독해한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벤야민은 파편적인 글쓰기를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체계나 질서, 규범을 무시한 파편적인 글쓰기는 어떤 것일까.

 

 

 

 

 

 

 

 

 

 

 

 

 

 

 

 

출판사 서평-이성과 감성을 하나로 통합시키려던 바움가르텐의 기획을 넘어서, ‘힘의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미학사를 다시 쓴다. 지금까지 조명되지 못했던 미학사의 흐름은 ‘힘’이라는 개념을 통해 새롭게 발굴된다.

 

 

 

 

 

 

 

 

 

 

 

 

 

 

출판사 서평- 구석기인들은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이 자신만만하고, 세계가 과학적 인과율 안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릴 수 있었다. 반면 신석기인들은 과학적 가설의 오류와 예외가 되풀이될수록 삶을 통제하는 규칙이 미지의 영역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면서 ‘보이는 대로’가 아닌 ‘생각하는 대로’ 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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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도시 생명의 거리 - 뉴욕, 거리, 지구에 관한 42편의 에세이 아우또노미아총서 40
이와사부로 코소 지음, 서울리다리티 옮김 / 갈무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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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도시 생명의 거리>, 이와사부로 코소

 

 

 

-바틀비의 도시, 뫼르소의 거리

 

 

 

 

 

 

 

필경사가 필사 일을 거절하고 먹는 것도 거절한 채 죽음을 향할 때, 그 주검 앞에서 먹먹함은 결국 그에게서 나를 봐야하는 현기증일 것이다. 바틀비의 수동적인 행위, 단순한 거절도 아니고 자신을 소멸로까지 밀고 나가는 이 행위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건 단순한 저항과도 다를 것 같다. 내가 아버지에게 저항 할 때, 나를 소멸시키기 위함은 아니다. 내가 부르주아에게 저항 할 때,, 페미니스트가 남성적 질서에 저항 할 때,,,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바틀비적 행위, 자기 소멸(굉장히 급진적이라고 생각됨)로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내가 소멸하면 뭐, 아무 소용 없을테니까...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건 아닐까. 나, 내것, 나의 동지, 친구. 라고 하면서 내가 잃어버리는 것은 공통적인 구역이 아닐까. 나의 적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거리, 길에 대한 감각.

 

 

 

공동의 구역, 길 위에서 나는 철저하게 수동적이다. 나는 길을 장악할 수도 없다. 그저 타자와 함께 걸을 수 밖에 없다. 이들 타자는 단순히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 한가운데 들어서 있다. 내가 말을 배우면서 잃어버린 나의 유아infans는 내 안에 말 못하는 타자로 남아 있다. 우리 안의 구멍, 익명의, 비인칭(으로서 나는 비존재이다!)의 어린아이라는 공동 경비 구역은 이중적이다. 우리는 늘 그 구멍 때문에 허전하기도 하지만 바로 이 빈 구멍(틈) 때문에 타자와 무한히 마주할 수도 있다. 그것은 구멍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가 없앨 수도 없다. 그곳에 마주하여 우리는 수동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능동적으로 타자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이 어린아이가 나와 타인 사이에 공동의 구멍이라면 우리는 이 공동의 메워지지 않는 구멍을 통해 스스로 타자화되면서 타자에게 열릴 수 있다. 이렇게 나는 이미 빗금쳐진 존재이며 타자이다. 비인칭적이고 중성적이며 말못하는 아이처럼 수동적인 행위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타자를 향해, 아니 그보다 타자와 함께 공동의 언어, 침묵의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본질이라는 이름으로,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침묵의 언어를 망각해왔다(블랑쇼 선집 8, <카오스의 글쓰기>, 2012).

 

 

 

이와사부로 코소는 현재 뉴욕이 그 거품같은 번영이 어떻게 세계 각지의 눈물과 연결되어 있는지 봐야한다고 말한다(144p). 뉴욕이 어떻게 자신의 타자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 자신 안의 타자를 보지 못하는 뉴욕에게 닥칠 것은 자신의 죽음밖에 없다. 그래서 뉴욕은 자신을 비존재로 비인칭(내부의 타자에 대한 감각)으로 감각하고 사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세계의 중심으로 착각하는 한 그들에게 공동의 안전 지대는 없다.

 

 

 

내가 비인칭적이 되지 않으면 나는 계속해서 젠더 간에, 계급 간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자유 재산과 그 바깥에, 안과 밖에 벽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국가는 벽을 세우길 좋아한다(177p). 우리의 상징 체계는 차이 체계이기 때문이다. 여자/남자, 위/아래, 낮/밤의 세계에서 중성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성적 소수자를 박해하며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문턱, 경계를 두려워하고 지우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수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문턱인지 모른다. 문턱에 앉아서 상징 질서(자본주의적)와 단절하기.

 

 

 

괜히 공부를 한다고 취직도 안하고 이러고 산지 족히 십년은 된 것 같다. 나를 비정규직이라고 이름 붙이지 말라. 나를 그렇게 호명하면서 나에 대해 평가하고 재단해서 나의 위험성을 삭제하지 말라. 난 이름 붙여지지 않은 채 차라리 유령(비존재로서)처럼 살겠다. 그래서 어디에나 아무때나 출몰하겠다. 수동적으로 조금씩 자본주의에 참여하지 않겠다. 나는 미용실에 가지 않으며 백화점에 가지 않는다. 이렇게 조금씩 자본주의를 침몰시키겠다. 음핫!!! 위안은 안되는군.

 

 

아무튼 나는 자본주의에 대립하고 투쟁하는 게 아니다. 코소가 말하는 것처럼 대립, 투쟁과 그것의 통합, 해결이라는 사고 방식은 비현실적이다(219p). 대립 투쟁은 영속하지 않고 통합되지도 않는다(푸코가 어디선가 귀뜸해 주었듯). 대립 투쟁 모델은 ‘타자 배척’에 매어 있을 수 밖에 없다. 여성운동이 외로운 건 남성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가야할 길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그 둘을 아우르는 ‘공통적인 것’(기관 없는 신체인 지구처럼-이진경 해제에서)을 토대로 하는 사고이다.

 

 

이러한 사유 방식에는 젠더 정체성도 자기 존재도 소멸시키며 그래서 휴머니즘도 없다. 들뢰즈는 자신의 소논문(「내재성」, 1995)에서 비인격적 유아의 삶을 예찬했다(270p). 이와사부로 코소는 ‘비인격적 개체화’ 그 ‘덧없음’ 자체를 힘으로 삼는 삶, ‘자기만의 삶’을 넘어서는 삶이 우리가 재구축해야 할 삶이라고 말한다.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난 ‘보통의 삶’으로서 말이다.

 

 

우리는 국가 중심주의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땅은 너의 땅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285p).

 

 

공통적인 것을 위한 감각에는 이런 익명의 혹은 액체의 무엇이 필요할 것 같다. 민중을 넘어선 세계 민중으로, 주체를 넘어선 비인칭 주체?로, 국가를 넘어, 젠더를 넘어...넘을 게 많다. 나는 코소의 이 책을 바틀비의 ‘수동성’ 즉 자기소멸적 태도에 빗대 읽어 보았다. 오독도 독서이므로, 죽음의 도시에서 독서하기(자기만의 삶을 넘어설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일 것도 같다) 또한 하나의 수동성으로서 생명의 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봄볕에 취해 책장을 넘기며 생각해 본다. 뫼르소의 태양이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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