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자본주의의 폭력 - 부채위기를 넘어 공통으로 아우또노미아총서 41
크리스티안 마라찌 지음, 심성보 옮김 / 갈무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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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자본주의의 폭력에 맞서 자본의 사회화로

 

 

- 크리스티안 마라찌의『금융자본주의의 폭력』을 읽고

 

 

 

 

오늘날 실물 경제와 금융 경제는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금융 경제는 더 이상 실물 경제에 기생하는 것도 아니고 비생산적인 것(p.65)도 아니다. 우리는 슈퍼에서 장을 보고 신용카드를 결제할 때부터(자본주의는 이제 우리의 생명 과정 전체에 파고들어(생명자본주의) 우리의 감정, 느낌까지 파괴(p. 97)한다) 자동차 산업에 이르기까지 신용 메커니즘(금융)에 따라야 한다. 이 모든 과정에 참여하면서 이제 소비자는 소비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상품과 서비스의 공동생산자(p. 146)가 된다.

 

 

 

거의 모든 것은 자동화되거나(지하철표 판매기부터) 소비자에게 떠넘겨 지면서 기업은 그 비용을 절감하고 있다. 스웨덴의 한 가구 회사는 가구를 자동차에 싣는 과정까지 고객이 알아서 하게(p. 68) 했다. 알게 모르게 고객이 스스로 알아서 생산에 기여,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은 이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챙기지만 그 이익은 임금 인상이나 안정적인 고용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말 그대로 사적 이익으로 횡령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이러한 모든 일들은 무정부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시장은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불안정적이고 불확실하게 움직일 뿐이다. 부동산 가격이 무한히 상승하고 무한히 성장할거라는 기대는 금융 자본주의를 작동시키지만 이러한 기대는 사실이 아니라 그저 허구이며 인간의 헛된 욕망일 뿐이다. 그 거품이 꺼지는 날 시장은 불안정에 빠지지만 국가는 당분간 그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다. 은행의 구제를 책임지고 자본과 고소득에 대규모 감세혜택(p.127)을 주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근본적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국민의 혈세는 이렇게 낭비되고 이들이 지갑을 열지 않으면서 내수 시장은 다시 불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는 다시 민간 부채로 일시적인 수요를 창출하지만 이 게임이 걸고 있는 것은 '미래'이기 때문에 위기를 유예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한다고 보았던 세이의 법칙은 거짓이라는 게 입증된 셈이다. 언제나 공급의 과잉이 수요의 원인(p. 98)이었던 것이다.

 

 

 

공급의 과잉, 포드주의 모델의 위기는 결국 금융화를 가져왔는데 결국 금융화는 실물 경제에 기생하는 비생산적인 일탈이 아니라 그 초기부터 자본 축적의 형태로 발전했던 것이다. 우리 삶의 일상 속에 전 생명의 과정에 거쳐 퍼져 성장한 금융 자본주의는 점점 더 많은 공통재를 사유화하면서 식민화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시종일관 자신의 종말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고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가 처녀지를 착취하기 위해 정복하자마자, 그 처녀성을 제거해버리고 결국 자기 자신의 번영 조건을 고갈시켜 버린다(p. 150)고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아직 이 자본주의는 겉보기에 건재한 것 같다. 부채의 계속적 반복 생산은 공통적인 것을 함께 생산하고 있다. 공통적인 것 즉 지식, 정보, 이미지, 사회적 관계와 같은 모든 우리의 생명 과정 전체는 금융 자본주의 아래 종속되어 있다. 천연자원에는 한계가 있지만 이 새로운 인지적, 비물질적 공통재는 이론적으로 무제한적(p. 152)이다. 부채 관계는 이 공통재를 착취하면서 삶의 방식을 통제하고 빈곤을 강제하고 있다. 마치 16세기 인클로저 상황이 토지를 사유화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생산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위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1985년부터 지금까지 시장의 탈규제화를 통한 신자유주의는 평균 2년 반마다 금융 위기를 반복해서 일으키고 있다(p.104). 방법은 하나다. 납세자들이 쌓아 올린 금융 자본을 사회화해야 한다. 이것은 자본의 코뮤니즘(p. 142)이라 부를만한 것이다. 기본소득의 형태로 국민들에게 나누어주던지 교육과 보건, 사회복지와 도시 기반 시설의 유지, 청년 고용 프로그램과 가계에 대한 지원, 문화예술 프로젝트와 과학연구 등의 지원(p. 148)으로 돌려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인간 삶의 질을 높이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본적인 존엄을 수호해야 한다.

 

 

 

끊임없는 개발과 발전이 능사가 아니라 발전을 저지하고 분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생태계를 보호하고 공통재를 수호해야할 뿐 아니라 그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생태계를 모델로 하는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 생태적 공동체는 협조적이며 참여적으로 위계를 거부하고 경쟁도 부정한다. 또 전체의 일부에게 권력을 몰아주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전체의 이해관계를 우선시(p. 153)한다.

 

 

 

생명자본주의가 파괴한 인간 생명의 존엄과 권위를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자본의 사유화가 아니라 자본의 사회화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만성적인 신자유주의가 초래하는 불황과 실업, 비정규직으로 인한 인간의 기본권 침해는 결국 인간 사회를 병들게 하고 파괴시킬 것이다. 자본의 사회화로 인간 사회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로 새롭게 구성하지 않는 한 여러 사회 문제, 범죄를 비롯, 자살, 노동 시간 초과로 인한 삶의 질의 저하 등의 사회적 문제들은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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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 도시의 식민지. 저자는 도시를 시골의 미래형으로 보는 데 반대한다. 다시 말해서 단선적으로 나아가는 시간상의 어느 한 점에 시골이 존재하고 그것이 진화하여 도시가 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을 부정한다. 도시는 시골과 동시대에 존재하고, 시골을 약탈하고 착취하며 성장한다. 도시에서 발흥한 자본은 시골의 농지를 강압적으로 사유화한 끝에 다수의 농민들을 ‘자유로운’(노동력을 판매하는 것 외에는 다른 생계 수단이 없는) 노동자로 ‘해방’시키기에 이른다 - 알라딘

 

 

 

 

 

 

 

 

 

 

 

 

 

 

 

 

 1967년부터 1969년까지 3년에 걸쳐 미시마 유키오가 혁명과 문화에 대해 주장한 정치 논문, 정치에 대해 좌파 거장과 나눈 대담, 정치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에 대해 학생들과 나눈 대담이 담겨 있다. -알라딘

 

 

 

 

 

 

 

 

 

 

 

 

 

 

 

 

 

 

시대에 따라 어떻게 맑스주의가 변모되어왔고, 어떻게 사상이 발전해왔는지 역사적 배경과 이론의 형성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오늘의 관점으로 맑스주의를 다시 읽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왜곡되고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맑스주의 이론을 다시 한 번 재점검할 수 있는 책이며, 맑스주의 역사를 한눈에 개괄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알라딘

 

 

 

 

 

 

 

 

 

 

 

 

 

 

 

 

평화의 종교가 어떻게 전쟁 이데올로기로 변신했을까? 깨달음의 교리가 어떻게 윤리와 양심을 마비시켰을까? 미국인 승려이자 불교학자인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의 책으로, 일본 파시즘과 불교가 맺은 은밀한 유착을 파헤친다. -알라딘

 

 

 

 

 

 

 

 

 

 

 

 

 

 

유동하는 근대의 저자 지그문드 바우만의 기대되는 신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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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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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우리들의 국가

 

 

 

 

 

 

의술은 의술에 유익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유익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선장과 통솔자도 선장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선원과 통솔받는 자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고 지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치자든 그가 치자인 한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통치 대상인 피치자에게 유익한 것을 생각하고 지시해야 한다. 또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은 이 점, 피치자에게 유익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60p). 치자는 70프로 이상이 비정규직인 피치자에게 유익한 정책을 펴야한단 말이다. 우리에게 집과 먹을 음식과 입을 옷을 달라. 말이다.

 

 

 

플라톤이 이 책을 쓴 게 도대체 언제냐. 소크라테스의 말을 더 들어보자. 필요 이상의 다채로운 음식은 병을 낳고 무절제는 법을 낳는다. 그래서 병원과 법정이 문을 열고 법과 의술은 으스대기 시작할 것이다. 평범한 육체노동자뿐 아니라 명색이 자유민으로서의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에게 숙련된 의사와 재판관이 필요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어 주인이든 재판관이든 남들에게 정의를 구해야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교육이 잘못됐다는 명확한 증거다(185p). 교육을 재정비하란 말이다. 어디 교육뿐일까.

 

 

 

우리가 국가를 건설하는 목적은 한 집단을 특히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를 최대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무리하게 커져도 안 된다. 국가의 수호자들이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것은 부와 가난이다(사람들이 일단 토지와 집과 돈을 사유하기 시작하면 재산 관리인이 될 뿐이다). 부는 사치와 나태를 낳고 가난은 비열함과 기술의 퇴보를 낳기 때문이다(215p). 나를 가난에서 어서 빨리 구제하란 말이다.

 

 

 

아무튼 사유재산은 같은 목표를 추구하며 되도록 고통과 기쁨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사적으로 만들고 고립시킨다. 몸 말고 사유한 것이 없는 나라에서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까닭에 그들 사이에 소송도 고소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소한 어려움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에게 아첨하는 것,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생활비를 마련하는 어려움, 돈을 빌리는 것, 빚을 갚지 못하는 것, 학비를 마련하기 위한 대학생들의 노동, 여보게 이런 일들로 말미암아 생기는 온갖 어려움은 너무나 분명하고 ‘지저분’해서 언급할 가치도 없네(295p). 그렇다. 이 사람이 보기에 우리 현대인들의 삶은 마치 백화점 명품관처럼 깨끗하고 치안도 잘되어 있어 나름 안락하지만 ‘지저분’해서 입에 담지 못할 삶인 것이다. 내 삶이 이렇게 더러운 것일 줄이야. 급격하게 우울해진다.

 

 

 

소크라테스의 일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학문과 관련하여 이것저것 가리는 사람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문학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은 문학만 읽고 말하자면 뭐 이런 식인데...음,, 또 까인거지. 수천년 전 사람에게 말이지. 썩 기쁘진 않아. 꿈에서도 소크라테스는 금국자 가질래, 나무국자 가질래? 하고 금이 그렇게 좋으면 금국자 줄게 이런다. 그런데 문제는 무거워서 쓸모가 없다는 것!! 아오 열받아.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국가, 재산 평가에 근거한 정체는 과두제인데 이런 국가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두 개의 국가를 갖게 된다. 즉, 가난한 자들의 국가와 부자들의 국가 말이다(454p). 우리 나라가 과두제란 말이다.

 

 

 

문제는 이 과두제적 인간에서 민주제적 인간이 생겨난다는 것. 민주제적 인간은 교만을 교양이라 부르고, 무질서를 자유라, 파렴치는 용기라 부른다. 이들은 아무 쾌락이나 닥치는 대로 즐기며 닥치는 대로 먹고 나서 다시 물만 마시며 살을 뺄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생활에는 아무 질서도 필연성도 없는데 그는 이런 생활을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이라 여기며 평생을 지낸다. 민주제의 자유는 예속을 싫어하고 급기야 모든 법률을 무시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지경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참주이다. 지나치고 때이른 자유가 참주를 불러들인다(490p). 지금 우리 나라와 싱크로율? 되는가.

 

 

 

덩치가 커서 1박 2일 꼼짝 못하고 읽은 것 같다. 고전이란 게 안읽었는데 읽은 것 같고 그래서 또 안 읽게 되고 늘 그랬던 거 같다. 이것도 읽다말다만 했던 것 같다. 이번 기회에 꾹참고 앉아서 읽어보겠다 다짐하고 엉덩이 욕창생길 뻔 했다. 이 오래전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 모습을 예견하고 있다는 게 놀랍기만 했다. 이래서 고전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논문 발표가 코앞이라 심장이 쫄깃해진 채 읽어야했지만 많은 걸 얻고 간다. 학교보다 알라딘이 날 더 많이 공부시키는 것 같다. 알라딘 서평 마감과 겹친 중간기말 레폿 마감이 함께 올 때 그 쓰나미에서 즐거움을 찾는 나는 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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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위한 철학]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건축을 위한 철학 - 세상에 단 하나뿐인
브랑코 미트로비치 지음, 이충호 옮김 / 컬처그라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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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건축을 해체하다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의 건축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 작품은 여러분이 집을 점유하는 방법에 대한 전통적 개념을 거부한다. 나는 침대를 놓지 못하도록 침실 가운데에 기둥을 세워두었다. 건축에서 기능의 죽음, 저자의 죽음이란 개념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배경에는 철학적 사유가 기반하고 있다.

 

 

1968년에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이란 에세이에서 문학 작품 저자의 원래 의도를 재구성하려는 문학 비평가들의 접근 방법을 비판했다. 바르트는 일반 대중의 문학 이해는 작가 개인과 그의 삶, 취향, 열정에 지나치게 집중돼 있는데 이것은 작품의 설명을 그것을 쓴 작가에게서 찾으려는 경향을 낳는다고 말한다(207p). 바르트는 이러한 이해 방법은 현대적 현상으로서 오늘날 인간의 개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널리 퍼진 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좌파 지식인들은 개인주의적 시민가치(사유 재산권 같은 개인의 권리 등)를 부정했는데, 개인의 권리가 자본주의의 기본 토대인 부르주아 사회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209p).

 

 

데리다 또한 화자의 현전을 강조하는 서양의 형이상학을 거부했다. 데리다에 따르면 서양 철학사는 텍스트나 말의 저자가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그것들을 둘러싼 지식을 더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를 좋아했다. 그는 서양의 로고스 즉, 음성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음성 언어가 원래의 저자와 저자의 의도에 더 가깝다는 믿음에서 유래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만약 우리가, 주체가 말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말한다’고 본다면 무너질 수 밖에 없다.

 

 

현전의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것에는 인간의 행동과 관련지어 건축과 건축가의 작품을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가 포함된다. 이것은 건축의 기능적 고려는 거부하는 것과 이어진다. 이러한 해체주의적 건축은 익숙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면서 맥락에 순응하기 보다 맥락을 추방해 버린다(215p).

 

 

데리다는 말과 텍스트로 표현된 개인이 존재한다는 개념이 현전의 신화에 속한다고 말한다. 데리다의 요점은, 누가 기호를 만들 때 그것은 다른 기호들을 포함한 생각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으며 모든 기호는 그래서 궁극적으로 다른 기호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생각을 설명하려면 또 다른 생각을 언급해야 하고 이런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는 것이다(219p).

해체주의 건축가는 데리가가 텍스트를 해체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일반 대중이 모더니즘 건축에 투사한 문화적 기대의 내적 모순을 노출시켰다. 해체주의 건축은 현전의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형태로 건축에서 기능과 맥락을 거부하는 것으로 지어졌다(223p).

 

 

해체주의 건축은 모더니즘의 형태적 체계에 숨겨져 있는 무질서의 가능성을 드러냈다. 건축 설계는 이제 분리, 분열, 왜곡, 중첩, 단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일관적이고 통일된 인간이 없는 것처럼 건축에도 통일, 조화, 일관성은 사라졌다.

 

 

이 책은 건축과 철학이 서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파헤치고 있다. 건축 역사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다소 어렵기도 했지만 새롭고 재미있었다.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 플라톤부터 칸트, 현상학과 해석학까지 동원되어야 했지만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설명되어 있다.

 

 

건축이나 철학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야 할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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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국가의 역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등의 해묵은 논쟁, 지루하고 감흥 없는 부정적 비판 분석, 그 결과로서의 자기 위안적 고립 등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에 대해 과감하게 메스를 들이댄다.
 

면, 한번쯤 읽어보고 싶다.

 

 

 

 

 

 

 

 

 

 

 

 

 

 

 

 

 

저자는 인간으로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부서진 이름의 파편들을 독해한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벤야민은 파편적인 글쓰기를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체계나 질서, 규범을 무시한 파편적인 글쓰기는 어떤 것일까.

 

 

 

 

 

 

 

 

 

 

 

 

 

 

 

 

출판사 서평-이성과 감성을 하나로 통합시키려던 바움가르텐의 기획을 넘어서, ‘힘의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미학사를 다시 쓴다. 지금까지 조명되지 못했던 미학사의 흐름은 ‘힘’이라는 개념을 통해 새롭게 발굴된다.

 

 

 

 

 

 

 

 

 

 

 

 

 

 

출판사 서평- 구석기인들은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이 자신만만하고, 세계가 과학적 인과율 안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릴 수 있었다. 반면 신석기인들은 과학적 가설의 오류와 예외가 되풀이될수록 삶을 통제하는 규칙이 미지의 영역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면서 ‘보이는 대로’가 아닌 ‘생각하는 대로’ 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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