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 '전체 아님'에 대한 사유
 

지은이는 작곡가이자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글은 문체와 사유 방식이 새롭다. 리듬 있는 문체라고 할까. 다소 문법 파괴적인 측면도 보인다. 그의 문장은 무엇을 지시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그에게 근원적인 기의들이란 없다. 지은이의 진단에 따르면 우리 시대는 우울의 세기이다. 즉 주어진 쾌락 속에서 우울하고, 강요된 안정 속에서 불안하다. 사유가 중단된 시대. 우리는 사유를 소환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낡은 유물론을 소환하자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탈근대적인 사유 방식을 고집하자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그의 사유의 새로움이 돋보인다.

 

근대, 그 합리적 이성의 억압으로부터 우리는 탈근대적 사유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하지만 일찍이 바타유가 말했듯이 억압과 금지에 대한 위반은 저항이 아니라 그것을 공고하게 한다. 이것은 일종의 해방 논리에 대한 반발이다.

 

우리는 그동안 지독히도 해방을 갈구해왔다. 사회적 제도의 억압으로부터, 남성 지배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여성 해방을 우리 모두 거의 모두는 추구하고 욕망했다. 그것은 민주화의 이름으로 정당화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 잘못됐단 말일까.  

 

그는 지젝을 공부했다. 헤겔과 라캉(바타유와 동시대)을 경유한 지젝은 벤야민을 따라 상징적 질서, 체제를 무효화자고 말한다. 이것은 랑시에르적 의미의 무위, 즉 행동하지 않기 이다. 해방을 향한 행위로서 위반과 저항까지도 하지 않기이다. 다시 말해서 문제는 위반과 저항이 기존 체제를 완전한 무엇으로 전제하고 그에 대해 저항한다는 데 있다. 기존의 체제, 사회적, 상징적 체계는 정말 빈틈 없이 완전무결한 완전체인가. 아니다. 상징적 질서, 법 체계는 최초에 폭력적으로 세워졌다. 그 기원을 은폐하기 위해 법은 범죄와 위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금지와 위반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위반이란 금지를 하나의 완전한 억압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로 인해 틈과 결여로 구성된 금지의 체계는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상호 보완적 시스템을 이해해야 한다.

 

지은이는 바타유의 관점을 통해 이 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글쓰기는 새로울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단순히 탈근대주의자는 관점도 아니고 반체제주의, 반순응주의자의 관점도 아니다. 이러한 사유 방식은 이미  또 다른 고정된 관점, 다른 중심을 가정하고 있을 뿐이다.

 

중심에 대해 주변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데리다가 그랬듯이, 라캉이 그랬듯이 중심을 무효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 포스트모던한 사유 방식은 억압적 동일성의 논리보다 비동일성을 좋아했고 이성보다 신체, 하나의 진리보다 다원적, 그리고 복수의 것들을 주장했다.  하지만 지젝이 우려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다원주의, 혹은 상대주의로 결국 우리 모두가 주권자인 이 현대 사회가 보다 중요한 문제, 자본주의의 근본적 갈등과 모순을 은폐해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에 대해 항변했던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닮아 있다고 할까.

 

지은이의 책읽기는 까다롭다. 어떤 문제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독자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새로운 문제들을 던지기. 이 자체가 바로 그의 사유의 힘이다. 출판사들이 앞다퉈 찍어내는 세계문학 전집은 무엇인가. 대체 무엇을 보고 세계문학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들의 광고가 일단 불편하다. '문학'이라는 아주 작은 영역이 왜 인류 전체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규정짓는 문화사적 보편 개념이 되는지 지은이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과연 이 전집들만 완전히 독파한다면 전 인류의 보편적 사유를 곧바로 체득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지만 이것은 무슨 광기란 말인가.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세계문학인가. 한국문학인가. 세계문학이 되고 싶은 것인가. 그것은 국내용인가. 대내용인가. 그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제도적으로든 무엇으로든 '문학'이 생업인 사람들은 감히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없다. 낮에는 사교육 현장에 있으면서 밤에는 사교육 현장에서 일하는 내게 서점에 떡 올라온 <대한민국 사교육에 속고 있다>란 책은 금지되어야 할 책이다. 백번 그 저자의 뜻을 알지만 문득 문득 두려워진다. 과외하는 아이 엄마가 이 책을 보게 된다면. 그 두려움이란.

 

베버가 그랬다고 했나. 그는 한 학교에 머물지 않았고 한 학문에 매어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라는 대작을 집필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 젊은 비평가의 미래가 기대된다.

 

서평을 쓰고 책을 읽는 일을 업으로 하기 때문에 나는 나름대로 내 일에 재미도 의미도 가지고 있다. 며칠 전이었나. 요즘 젊은이들 책을 읽지 않는다고 그것이 문제라고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쉬는 내게 선배가 왜 모두가 나처럼 책을 읽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지은이처럼 질문하기 좋아하는 선배였는데 순간 아, 나의 사유 방식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을 내게 맞추려고 내게 동일시하려고 잠재적으로 폭력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나는 독서가 사유의 폭을 넓히고 깊어지게 할 수 있다는 데는 물러설 의도는 없다. 하지만 '전체는 아닌' 그것을 '실재'로 부르든 '우연'으로 부르든 타자를 내가 통제하려고 했던 것은 어리석억다.

 

그날 밤 집에 와서 이 책을 보기 시작한 것 같다. 며칠 동안 전혀 새로운 방식의 생각하는 법을 배웠고 문학의 사상의, 음악의 세상을 여행했다.

 

근대적 주체의 문제에서부터 정치적 문제까지 종횡무진 그의 독서이력은 남다르다. 열살때 군주론을 읽었다니 과연 그의  방대한 독서량도 짐작이 된다.  

 

그는 세밀하게 알튀세르의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읽는다. 자서전이란 무엇인가. 그것도 아내를 죽인 정신 착란자에게.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이 자서전을 읽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는 자서전을 쓸 수 없는 사람, 말하자면 정신병자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지은이는 알튀세르가 진정한 자서전적 글쓰기를 감행할 수 있었다고 독해한다. 정상인의 자서전이란 하나의 허구이다. 자신의 삶을 그렇게 완전하게 하나의 통일되고 유기적인 것으로 빈틈 없이 구성하기란 가능하지 않다. 알튀세르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철저하게 이름부터 타자에 의해 지어졌고 모든 것이 타자에 의해 위치지어 졌다. 이 자기 자신 되기의 불가능성. 어쩌면 이것이 알튀세르의 자서전을 가능하게 한 건 아닐까.

 

이 불가능성이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의 조건으로 발상을 전환해 보자. 상징 계 안에 균열, 불가능성, 우연성 등. 이 모든 것들을 부정적으로 보고 은폐하려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자. 불완전함을 드러내고 보여주자. 그리고 그것과 함께 머물자. 이것이 바로 과감하고 도전적인 새로운 사유다.  바로 이 상징계의 분열, 간극, 불완전함 그리고 우연성.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전체 아님'으로 실현된다. 지은이는 라캉적 의미에서 실재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정체성 정치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정체성을 강요하고 하나의 사회적 정체성을 갖지 않은 주체들, 이를테면 성 소수자들이나 빈민들을 배제한다. 근대적인 너무나 모던하고 근대적인 교양인의 도시, 서울 한 복판에서 벌어진 용산참사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나.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일 것 같은 도시에서 일어난 이 집단 학살을 우리는 과연 어떤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히틀러를 보라. 그는 합리적으로 투표로 선출된 사람이다. 


지은이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줬다.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동기부여된 책들만 수십권이다. 장바구니에 가득 담아놓고 바라만 보고 있다. 냉큼 일시불로 지를 용기는 없다. 한권씩 품에 안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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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1-05-01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불가능성이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의 조건으로 발상을 전환해 보자"는 말씀이 제게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의미하는 바의 소수, 함께하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느낌이랄까요. 몇 가지 핵심적 사유의 지점들을 정치하면서도 담담하게 분석해주신 이 서평에 제가 깊은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되는 이유입니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꼼꼼하게 독해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