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이즈 컬처 - 인문학과 과학의 새로운 르네상스
노엄 촘스키 & 에드워드 윌슨 & 스티븐 핑커 외 지음, 이창희 옮김 / 동아시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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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VS 컬쳐

 

 

 

 

 

 

인문학과 과학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철학의 역사를 아는 것이 곤충학자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음악이 주는 감동을 과학적으로 계산해낼 수 있을까. 컴퓨터는 피카소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인간과 과학은 도무지 만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마이클 생크스는 인류는 새벽부터 ‘사이보그’였다고 말한다. 인간은 12만년 전부터 사물을 능숙하게 다루었고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인류는 그 옛날 벌서 피라미드를 만들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완전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문화가 없었을 것이다. 문명은 인류를 무지 몽매하고 마법적인 세계에서 구제했지만 그럴수록 인간은 동시에 비합리적이고 감성적인 것들에 강하게 매혹당했다.

 

 

 

과학기술의 최첨단을 누리고 있는 오늘날에도,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심지어 종교는 나름의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어쩌면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 인류는 가장 맹목적이 되었다. 사진을 보면서 인간은 그 대상이 그 자리에 ‘없어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인간은 가상 세계에 살기 시작했고 이제 더 이상 사물의 이미지를 볼 수만 있다면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상 세계에서는 더 이상 실제 인간 관계도 중요치 않다. 사람들 살아있지만 죽은 채 가상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이것은 인류가 스스로 부른 재앙이었다.

 

 

 

대니얼 레비틴은 예술은 어쩌면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통합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음악 속에서 우리는 에고를 상실한다. 주변의 사람들과 내가 하나가 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런 의미에서 타인을 인정하고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 현대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예술이 아닐까 싶다. 윤리를 상실한 시대에, 우리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예술이 정말 이러한 작용을 한다면 윤리의식을 상실하고 야만으로 치닫는 오늘날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이다. 우리가 실제로 합리적이라면 비합리적인 것(예술)과 이렇게 함께 해야 하는지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합리적일까. 신자유주의는 모두가 부유해질 수 있다는 환상을 주입하면서 경쟁을 부추기는 등 야만적인 행보(비합리적)를 계속하고 있다. 그 안에서 개인적으로 고립된 주체들은 자신이 다른 주체들과 관계 맺음 안에서 타자화 된 채 살고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즉, 혼자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히 비합리적인 생각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결정된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지금 이 방안에 물리학자와 예술가가 있다고 해 보자. 이 둘은 이 방안의 사물을 분명 다르게 볼 것이다. 이 방 안에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아가 지금과 같은 형태의 경제 시스템이 지속할 수 있는지도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누구인지 확신도 없고 확신할 필요도 없다. 나는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정 불변의 진리란 도대체가 없는 것일까. 다시 말해 아름다움도 객관적 합리성도 없는 것일까. 진리는 합의에 불과한 것일까. 변기는 화장실에 있을 때와 미술관에 있을 때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것은 우리가 미술관에 놓인 변기를 예술 작품이라고 하자는 합의라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모습이 전부인지 모른다. 진리는 결함이다.

 

 

 

이성애가 진실이고 진리일까. 동성애를 배제하는 한에서만 그것은 진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반쪽자리 진실일 수 밖에 없다. 객관적 진실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영웅적 행동의 한 형태일 수 있다. 우리는 객관 세계를 쉽게 부정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순간 우리 자신도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를 그릴 수 있는 것은 픽션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객관 세계를 파괴할 수 있고 또, 우리가 인간 이하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세상을 볼 수도 있게 된다. (문학)예술은 여기서도 일종의 윤리적 기술로서 가치가 있다. 스토리텔링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눈 뜨고 그들의 삶에 뛰어들고 공감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도덕성’이다.

 

 

 

이처럼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한 세계가 더 이상 확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예술이다. 과학 기술 만능 시대에 예술은 비합리적이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했지만 말이다.

 

 

 

과학 기술과 예술이 만나야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은 또 많은 점에서 닮았다. 예술가들은 사물을 거꾸로 보거나 새롭게 보려는 사람들이다. 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아인슈타인은 빛을 정지시켜 보려고 했다.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지만 이런 엉뚱한 발상이 상대성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과학과 예술은 서로의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예술은 과학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예를 들면 연주하고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시간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것은 멈춰있는 것이다. 과학 기술은 시간을 잴 수 있지만 말이다. 반대로 아픈 사람은 의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물론 예술도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이 둘은 상보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이 우위에 설 수 없는 것 같다.

 

 

 

과학과 기술이 날로 발전해가는 오늘날 왜 인문학적 사유가 요청되는지 이 책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과학이 무시했던 인간의 감정, 감수성을 과학은 연구하기 시작했다. 과학 기술 문명은 인간을 편리하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재앙도 가져왔기 때문이다. 재앙을 치유하기 위해서.

 

 

 

여닫이 문이 아닌 자동문은 뒷사람을 돌보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고 그 이래로 우리는 타인을 돌보지 않게 되었다. 윤리를 상실한 것이다.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도 아니고 괴물도 아닌 우리들은 곳곳에서 흉악한 범죄를 일으키기도 하고 이러한 사태를 안방에서 티비를 통해 이미지로 보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도 진지하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미지의, 가상 세계로서 경험할 뿐인 것이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편리하게 했지만 병들게도 했다. 그리고 이제 과학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이고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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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nc 2013-02-24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 글이 신간평가단 페이퍼에 연결되어 있지 않네요.
아마 글을 수정하시면서 빠뜨리신 것 같은데, 수정 부탁드립니다.^^
 

 

 

 

칸트의 책은 몇권 읽어 보긴 했다. 그래도 아직 목마르다. 번역도 계속 되고 있는 중이고, 그의 인간학에 관하여 엿볼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카프카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다. 그는 어떤 책들을 읽었을까. 판사의 책상에서 포르노 책자를 발견한 그의 시선은 놀랍기만 하다. 법의 외설성. 현대의 많은 씽커들이 카프카는 즐겨 인용하기도 한다. 그가 읽었던 책들, 그 자취를 따라가고 싶다.

 

 

 

 

 

 

 

 

 

 

 

 

하이데거는 어렵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도전해보고 싶기도 하다. 마침 존재와 시간 입문책이 나왔다. 얼른 사서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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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라, 생각하라 - 지금 여기, 내용 없는 민주주의 실패한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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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라, 참여하지 말라

 

오늘날 소비주의 사회는 과도한 향락을 금지하는 것 같다. 즐겨라! 하지만 과도하지 않게. 니코틴 없는 담배, 카페인 없는 커피, 무지방 초콜릿을 즐겨라. 왠지 가상의 세계를 살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빠져있는 듯한. 커피에 카페인이 없다면 그게 커피인가. 하지만 이미 우리는 카페인 없는 커피를 마시며 전자담배를 피우고 있다. 내가 자유롭게 소비하고 즐기려할 때 조차 나는 이렇게 ‘관리’되고 있다. 신을 죽이고 아버지를 죽인 우리 현대인의 모습이다. 아이러니다.

 

니코틴과 카페인은 위험한 것으로 규정되고 나는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해야 한다. 거리에는 씨씨티비가 나를 지켜주고 도둑을 감시한다. 이제 사회는 개인의 안전, 건강에만 몰두하고 있다. 사회적, 정치적 이슈들은 더 이상 관심 거리가 아니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우리가 점점 더 ‘세계없음(worldless)’으로 경험되는 사회적 공간에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젝 또한 자본주의의 주된 위험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젝은 ‘자본주의는 세계 없는 공간을 유지하며 대다수 사람들에게서 의미 있는 인식적 지향점을 박탈’한다고 본다. 오늘날 인터넷광의 초상은 ‘혼자 스크린 앞에 앉아서, 그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조국도, 신도 없다’이다. 그는 밖에 나가서 친구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인간적 유대관계는 귀찮고 성가실 뿐이다.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고 감정 소모도 피곤하다. 인터넷으로 강의를 들을 수 있으니 학교에 갈 필요도 없다. 연애도 사이버로 하는 시대가 온다지.

 

인간적 연대, 유대관계는 깨지고 이제 남은 것은 개인주의적이고 고립된 주체들이다. 이 힘 없는 원자들은 자신의 안위에만 몰두할 수 있을 뿐이며 살아남기 위한 생존 경쟁에 내던져질 수 있을 뿐이다. 지젝은 이렇게 질문한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고도 여전히 가난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2011년 미국 월가점령 시위는 전 국민 의료보험을 요구했다. 원칙적으로 실현 가능하고 정당한 요구였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지젝은 불가능한 것은 사실 자본주의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의 추동력은 기존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수요를 계속 창출’하는 것이다. 이 허구적이고 가상적인 제스쳐는 ‘카페인 없는 커피’를 닮았다.

 

어쩌면 이 미친듯 질주하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쉬운 일인지 모른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 자본주의의 운동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무효화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대항했던 시도들은 왜 언제나 실패했던 것일까. 푸코는 ‘권력이 저항을 사전에 전유해서 권력 기제가 전 영역을 지배하게 되고 우리는 저항하는 바로 그 순간 권력에 예속된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나중에는 권력이 저항을 진압하기는 커녕 스스로 초래한 결과조차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고 보았다. 지젝은 이 딜레마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 ‘저항이라는 패러다임 전체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본다.

 

지젝에 의하면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장치 자체가 바뀔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로부터 스스로 거리두기 혹은 그것을 무시하기, 이것만이 급진적 변화의 공간을 열어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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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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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죽음이 무엇일까.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죽어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은 나쁜 것이고 두려운 것이라 여긴다. 이런 생각은 미신에 가깝다.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인 양 말하니까 말이다. 죽음이 삶보다 좋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 철학자들은 많다. 소크라테스부터 하이데거까지.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두려운 것’이라는 미신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쳤다고 고발당했다. 당시 사람들은 옳은 말만 하고 다니는 소크라테스가 싫었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플라톤과 같은 제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죽음 앞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추태를 부리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울고불고 목숨을 구걸할 것을 기대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지혜로운 사람답게 죽음은 나쁘고 두려운 것이라는 미신에 물들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다. 

 

하이데거는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천년만년 산다면 우리가 지금 이 시간에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 백년 쯤 후에 해도 될테니 말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죽음은 언제나 두렵고 불길하며 무서운 것이다. 언제 찾아올지 몰라 두렵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죽을까 두렵고 내 애완 강아지도 나와 함께 백년해로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런 행복을 주지 않는다. 나도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때는 어려서 뭐가 뭔지도 몰랐고 이제 간신히 어른이 되었지만 난 아직도 나의 죽음도, 가족의 죽음도 두렵다.

 

하지만 내가 죽는다면 그것은 이미 내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냉정하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 이후라는 것이 있을까. 이 책의 저자 셸리 케이건은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하는지 따위의 질문이 아니다. 그는 하이데거처럼 “삶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완성되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목적”이며, “죽음의 본질을 이해하면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한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항상 우리는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삶, 현재의 삶을 충만하게 하는 일종의 비타민이다. 그것은 어쩌면 부정적인 것이지만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에 함께 거주하고 있을 때 내 삶은 빛날 수 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은 유한한 존재라는 것 자체, 즉 그 부정성을 안고 태어났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곧 죽는다는 것이고 그 안에서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더 바람직해 보인다. 그리고 바로 그 유한성을 넘어 공동체에서 타자와 함께 소통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유한성을 넘어설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겐 죽음이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죽음 즉, 유한성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무한한 세상이 있다. 세상에서 죽음(이라는 한계)을 넘어서 무한히 다른 사람들과 결합하고 부딪치면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면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자유이고 즐거움이다. 자유와 즐거움을 누리고 살아가면서 자신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일 것이다. 언제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유한성에 갇혀서 부자유하게 살 수는 없다. 그곳에서 우리는 자유를 누리지도 못하고 세상을 만나지도 못한다.

 

가치 있는 삶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이라는 조건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란 것이 마냥 두려운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영혼이란 것이 있어서 죽음 이후에도 살 수 있다는 식의 허황된 생각으로 그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하기보다 당당하게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죽음 그야말로 모든 것의 끝이다(p. 245).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모든 것의 시작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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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닦고 스피노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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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늘 불안하고 우울할까

 

 

 

현대인은 늘 우울하고 불안하다. 현재도 미래도 불안정하고 친구나 동료와는 신뢰가 아니라 경쟁심만 쌓여간다. 신이 곧 자연이라 해서 동시대에는 환영받지 못했던 씽커, 스피노자. 그에게 조언을 좀 구해볼까. 그는 현대인의 우울이나 불안과 같은 질병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그가 살던 중세에도 이런 질병이 있었을까.

 

매일 밤 주인공은 고시원 화장실에서 스피노자를 만난다. 주인공은 스피노자 전공자인 모양이다. 암튼, 그는 스피노자를 만나 신세타령을 한다. 요즘 청년들이 얼마나 불안한지 아느냐고. 스피노자는 그의 불평불만에 이렇게 말한다. 당신 자신이 너무 단단한 갑옷을 입고 외부와 자연스럽게 접촉하고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라고 말이다. 그래 어쩌면 우리는 성공, 부, 행복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고 그 과정이 녹록치 않자 세상을 원망하고 자신을 비하해왔는지 모른다. 모든 것은 불안정하기 때문에 마음도 잡지 못하고 점점 나약해져만 갔다. 행복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행복한 삶이 아닐 것이다. 또 고통을 감수해도 성공은 보장되어 있지 않고 설사 성공했다 해도 영원한 행복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도 미지수다. 의사와 판검사는 자살도 하면 안 된다. 그들은 성공했으니 행복할테니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스피노자는 굳건한 자신의 목적 앞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주인공에게 조언한다. 좀 유연해질 수는 없겠냐고. ‘자신에 대한 너무나 확고한 상이 있어서 외부의 변화에 원활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우리는 공부를 왜하냐고 물으면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대학에는 왜 가냐고 물으면 성공하기 위해서라고, 다시, 성공은 왜 해야하냐고 물으면, 우리는 사실 말문이 막힌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성공이 실패보다 좋은 것이라고 말하니까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내 몸이 원하는대로 나를 좀 쉬게 할 수는 없을까. 우리는 사회를 탓하고 사회를 바궈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나 자신을 변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바뀌어야 사회도 바뀔 수 있을테니까.

 

스피노자는 우리가 유연한 마음과 신체를 가질 때 불안은 사라질거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자아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변화’한다. 그래서 불안이나 우울증을 치유하려면 ‘자아를 강건하고 굳세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과 욕망을 자연스럽게 순환’시켜야 한다.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다. 부엌 근처에도 안 가던 남자가 부엌에 가서 설거지를 하는 것도 자기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평생 노동만 했던 사람이 그림도 그리고, 시를 쓰고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도 자기를 바구는 것이고 세상과 관계 맺는 새로운 방식이다.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열려있기, 타자와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기. 자기의 지평을 이렇게 열어두고 유연해질수록 하나의 목적에 얽매인 삶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예속을 영예로 아는 희한한 존재이다. 1등을 해야 한다는 것은 1등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반에서 1등 하는 아이를 보면서 그 아이를 선망하고 동경한다. 그리고 나도 저렇게 1등을 해서 반에서 권력을 누려보고 싶기도 하다. 우리는 이렇게 초월적인 권력을 갖고 싶어하지(예외자가 되고 싶어하지) 권력에 기대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힘을 키우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사랑과 욕망의 힘은 초월적인 곳에 있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내재적으로 있다. 이 힘은 ‘권력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역에 있으며 뭐라고 단정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의 존재를 의심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 힘이 바로 진정한 힘이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 라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의미 있다고 여겨왔던 것들은 대부분 권력과 관계있는 것들이었다. 성공이나 부나 행복과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새로운 세상과 만날 수 있다.

 

그런 세상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변혁하고 새롭게 사유할 때 우리에게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유인은 아이와 동물을 만나고 노인과 광인, 여성과 장애인을 만나면서 무한히 결합된다. 그들에겐 불안도 두려움도 없다.

아무런 세균이 없는 곳에서 생명체는 살아갈 수 없다고 한다. 적절한 세균이 있어야 우리 몸도 더 단단해지고 외부와 접촉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지나치게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길에 노숙인을 만나면 더럽다고 도망가기 바쁜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그렇게 안전하고 깨끗한 공간에서 살기 위해 외부와 접촉을 끊을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더욱 고립되고 소외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우울과 고립감이다.

 

우리는 자신을 유연하게 해서 자전거를 탈 때는 자전거가 ‘되어야’ 하고 운전을 하려면 자동차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 외부와 소통하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도 생존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자기이기를 버리고 ‘상대방 되기’를 통해서 우리는 더욱 다채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고 자신을 넘어서 타자와 소통하고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삶을 거부하고 혼자 자기의 삶을 꾸리려 한다면 현대인에게는 언제나 불안과 우울이 지배하게 마련이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외부와 소통하는 신체, 유연한 정신과 신체를 가지고 우울이나 불안과 같은 현대인의 질병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한다.

 

나를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나 또한 내 이익과 목적만을 추구하느라 외부와 소통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 목적에만 예속된 채 자유로운 삶을 살지도 못했다. 그 안에서 때론 괴로웠고 또 외로웠다. 친구도 없었다. 주위의 모두가 그저 경쟁 상대에 불과했다.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친구가 되고, 성공을 향한 기차에서 내려 목적도, 나도, 버리고 유연해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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