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이후 페미니즘
한나 스타크 지음, 이혜수.한희정 옮김 / 이상북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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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나 합리성, 공적인 것은 남성의 전유물인가. 그에 반해 여성은 감성적이며 신체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인가. 이런식의 구분은 이제 더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은 여성적이고 여성다워야하는가, 이런 본질주의도 그렇다. 이건 남성에게도 해당된다. 그래서 이런식의 정체성부여하기, 동일성 부여하기는 유효한 것 같지 않다. 오히려 하나의 정체성은 분열되어 있고, 다양하며, N개 일 것이다. 성도 하나의 성만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은 이제 남근중심적이거나 이성중심적, 인간중심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우리는 존재에 접근할 때 보다 리좀적이며 민주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백인 남성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중산층 여성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도 인종차별은 존재하며, 여성은 승진하기 힘들고, 남성과 임금 격차도 엄연히 존재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이건 페미니즘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페미니즘에서 시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여러 사회, 정치적 문제들과의 교차점에서. 이 책은 그동안의 페미니즘 물결을 일별하며 들뢰즈의 되기, 다양체, 분열분석 등의 방법론을 가져와 페미니즘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버틀러나 브라이도티 등의 이론가들은 들뢰즈와 경쟁하며 또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자신의 관점을 내세운다. 새로운 페미니즘(지각불가능성의 페미니즘)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야할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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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 칸트 3대 비판서 특강 인간 3부작 1
백종현 지음 / 아카넷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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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백종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칸트를 읽기 위해선 다른 건 필요 없고 엉덩이 근육과 인내가 필요하다. 둘 다 갖지 못한 나 같은 자는 그냥 포기하는 게 맞을 거다. 하지만 좋은 책이 나와서 그러지도 못하겠다. 백종현 선생님의 칸트 3대 비판서 특강이 책 한권으로 나온 것. 요즘은 공부를 하지 않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3대 비판서라 함은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말한다. 주옥같이 어려운 책들, 우리가 인생 살면서 고민도 안하고 포기하는 책들 되겠다.

그런데 이 책을 일단 읽게 되면 없던 욕망이 생긴다. 칸트를 읽어봐야겠다는 무모한 욕망 말이다. 2백페이지 조금 넘는 작은 책이라 정신 바짝 챙기면 누구나 읽을 수 있다. 저 세 비판서는 각각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순수이성비판>,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실천이성비판>,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판단력비판>를 다룬다.

칸트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인간은 ‘이성적 동물’로 정의되는데 문제는 이성과 함께 ‘동물성’이 있다는 것이다. 동물은 어쩌면 그저 동물성만 있으니 문제될 게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성’을 놓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인간 이성의 한계다.

인간 이성은 신에 대해 논할 수 있는가. 신은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인데 말이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신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있는 것은 공간과 시간 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p. 94). 칸트는 신과 영혼 같은 것은 인간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것이라 보았다. 인간 이성, 인간의 주관이 알 수 있는 것만을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한다. 칸트 이전에는 인간 이성 밖에 대상이 그 자체로 있다고 봤지만 이제 그런 것은 인간이 알 수 없고 우리 감각 지각에 들어오는 것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세계와 잠자리나 개구리가 보는 세상은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보는 세계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단순히 인간중심적 사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거칠게 말해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이러한 인간 이성의 한계를 다룬다.

<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무엇을 다룰까. 인간 이성이 이렇게 한계가 있다면 이제 인간 이성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있는’ 것만을 보고 느끼고 알 수 있다면 세상은 참 심심하지 않겠는가. 아직 있지 않은 것을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실천’이다. 지금이야 장난감이 많지만 나 어릴적만 해도 장난감이 없으면 나뭇가지를 꺾어서 총도 만들고 지팡이도 만들며 놀았다. 하나의 ‘실천’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실천에는 ‘의지’(p. 140)가 들어간다. 그런데 칸트는 실천 중에는 인간이 마땅히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선’이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악’이다. 당연한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당연한 걸 우리가 모두 실천한다면 세상에는 사기도 악도 범죄도 없을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선’을 실천할 인간의 능력을 ‘자유’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결국 ‘악’을 행하는 자는 ‘자유’가 없는 자라는 뜻이 된다. 어릴 때 엄마 주머니에서 잔돈 훔쳐본 자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들키면 혼날텐데 하면서 하루 종일 자유롭지 못하고 안절부절했음을. 기껏해야 떢복이를 사먹기 위해서 였을 텐데 나는 그 대가로 내 자유를 빼앗긴 셈이다. 칸트는 이런 자연적 요인, 감각적 요인(경향성Neigung : inclination)에 지배받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요즘 먹방 프로그램이 많은데 인간의 감각(미각)에만 너무 치중하는 것 같다. 생각해볼 문제다. 칸트가 보기에 인간은 먹방에만 종속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런 경향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유로운 존재다. 당연히 이게 중요하다. 그러면 이 자유를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 무엇을 해야만 할까.

인간은 자기 경향성, 동물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고 이때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 수 있게 된다. 이때의 의지가 ‘선의지’이다. 칸트에게 선의지는 어떤 행위를 오로지 의무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다(p. 161). 그래서 칸트의 도덕법칙은 명령형이다.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와 같은 정언명령들이 그렇다. 이러한 도덕적 행위들의 원리를 ‘인간 존엄성의 원칙’이라 한다(p. 173).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만 대우해야 하며 존엄한 존재는 교환도 안 되고 바꿀 수도 없다(p. 175). 그런데 우리 현대 사회는 인간조차 노동력 상품으로, 자신을 팔아야 하는 존재로 자꾸만 전락시키고 있다. 문제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에게 자유가 있을 수 없고 자발성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를 희망한다. 이제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라는 문제를 다룬 것이 <판단력비판>이다. 칸트는 판단력이 이론이성(<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실천이성비판>)을 잇는 다리라고 생각했다(p. 234). 인간은 이성과 의지 둘 다를 지니고 있는 존재이지 이 둘을 칼로 자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 둘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 둘이 판단력에 의해 통일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최고선’이라는 이념에 의해서다. 칸트에게는 자연성, 경향성의 자연 세계가 도덕의 세계처럼 움직여야 한다고 보았고 그 상태가 최고선의 상태라고 보았다. 기독교 성서 중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대목이 있다. 저자는 ‘지상에 세워진 천국’이 칸트가 희망했던 ‘최고선의 상태’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세계적으로는 난민 문제를 비롯해서, 용산참사도 그렇고 일터에서 안전의 문제로 죽어나가는 젊은 노동자들의 문제도 그렇고 우리가 사는 지상에는 희망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지상에 천국은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 특별히 악하게 살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는 희망을 주고 있는가, 아니면 절망만을 주고 있는가. 생각해봐야 한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도 대등한 인격(p. 158)으로 정당하게 대우받으며 인간 존엄성을 누릴 권리가 있다. 모든 인간은 목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갑이고 너는 을이 아니다. 각자의 우리는 대체불가능하고 자유로운, ‘대등한’ 인격체이다. 그 옛날, 칸트도 알고 있었던 것을 왜 우리는 아직도 모르는 것일까. 알고 있지만 모른 척 하는 것일까.

얼마 전 모 신문사 사장의 손녀가 운전기사에게 폭언을 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칸트가 인간이 대등하다고 말한 지가 1780년대라고 치면 기암할 노릇이다. 칸트가 꿈꾸었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꾸어야 한다. 더 좋은 세상에 대해 꿈꾸지 않는다면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이라도 칸트를 꺼내 읽어야 하는 이유인지 모른다.

칸트를 읽는다는 것, 거의 고문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과 ‘다른 사유’를 하려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새로 배워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쉬운 것만 하고 사는 것도 재미없지 않은가. 어려운 것에 도전하고 깨지고 박살나는 살아있는 경험이 고프기도 하다. 새해 <순수이성비판>부터 도전해보려 한다. 무모하고 무한한 도전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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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철학자의 유쾌한 만남 감성과 이성
고명수.강응섭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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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지만 시가 아직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읽고 싶은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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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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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비루함, 복종

 

내 존재가 한없이 가볍다고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무의식 중에 이끌려 읽은 책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설사의 알리바이만도 못한 국문학전공자라는 알리바이로 세계문학은 의도적이든 무의도적이든 소홀히 해왔던 게 사실이다. 5분에 한번씩 웃겨주는 밀란 쿤데라를 접하면서 국문학에서 보지 못했던 작품을 체험하게 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 미셸 우엘벡에 당도했다.  미셸 우엘벡, 이 작가, 물건이다. 세계문학 새내기가 자꾸 이렇게 처음부터 신의 한 수들을 만나게 되다니 영광이다. 국문학에서 세계문학으로 개종?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여기, 경악스러울 정도로 고독한 한 남자가 있다. 우리 현대인은 언제부터 이런 끔찍한 고독에 처해진 걸까. 고독을 즐기든 그렇지 않든 고독이란 외로움, 슬픔, 우울 등의 정서를 얼마간 동반하게 되는 것 같다. 서구문명, 기독교, 자유주의적 개인주의(혹은 자유민주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실패했다.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고립되었고 우울하며, 자살로 치닫고 있다. 자, 이제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해 이 현대 사회를 극단화 시켜 보자. 일종의 사유 실험이다. 서구의 합리적 이성주의는(이제 동양을 포함하여) 신을 죽이고 인간과 인간의 이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제 신 없이도 인간은 스스로 합리적 이성에 따라 세계를 발전적으로 계획하고 구축할 수 있다는 믿음이 광적으로 퍼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1,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참담한 결과다. 인류는 진보하는가, 아니면 퇴보하는가. 미셸 우엘벡의 소설은 이런 질문들로 시작한다. 그는 질문한다. 우리는 신 없이, 인간의 이성만으로 과연 살 수 있는가. 어떤 초월적인 근거 없이 고립되고 원자화된 개인들로만 이루어진 현대 사회는 정의로운가(- 현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자기 안녕에 대해 스스로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고독한 주체를, 자기 주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데는 무력한 주체들을 만들고 있다. 절대적으로 고독한 주체들, 사람들이 고독을 느끼는 방식은 대단히 개인적이지만 고독에 시달리는 인구를 만들어내는 열정은 슬프게도 보편적이다. 이제 누구도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 레나타 살레츨, <불안들>, 후마니타스, 2015, 1장 참조).

 

성공을 위해, 부를 위해, 명예를 위해 경쟁하고 타자를 앞서기 위해 일평생을 발버둥 치는 우리에게 행복은, 자유는 보장되어 있는가. 그렇게 하루도 쉬지 못하고 뛰어서 성공하고 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인가. 그때 혹시라도 우리가 사랑을 잃고 친구를 잃고 가족을 잃는다면? 혼자 앞만 보고 달리느라 친구도 사랑도 뒷전이었다면, 이제 고독사가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작가는 (기독교적)서구문명은 자멸해간다고 본다.

 

인류문명에서 초월적인 것(신적인 것)을 삭제한 것은 태초에 기독교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아예 인간이 된다. 하지만 이슬람에서는 다르다. 이슬람에는 알라신이 여전히 건재한다. 이슬람의 뜻 자체는 ‘복종’이다. 이슬람에서는 신에 복종하는 길 밖에는 없다. 나아가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는데 여성에게는 가임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남성은 처를 여럿 둘 수 밖에 없고 이것은 신의 섭리이지 하등 낯설고 이상한 제도도 아니다. 기독교가 세상을 경계한다면 이슬람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복종한다. 그래서 이 소설이 우리에게 이슬람을 따르고 복종하자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20세기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단순하게도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로 점철되어 있다면, 인류 전체를 통틀어 기독교냐 이슬람이냐 하는 것도 사실 우스운 노릇이다. 인류를 구원하는 것은 신일까. 이런 해결은 너무 쉽다.

 

신도, 아버지도 스승도 사라진 시대, 오직 나, 개인(주의)만이 절대시된 시대에 그 개인이 소설적 상상력으로 보아 자멸하는 결과만을 가져온다면, 다른 가능성이 없다면? 이 개인들을, ‘개인들 전체를 관계 맺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길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인가. 작가는 이것을 고민해야만 했다. 타인에게 관심, 연민을 갖고 동감하는 능력이 철저히 부재하는 시대, 개인만 있는 시대에 우리가 키워야 하는 능력은 바로 타자성(사랑, 우정을 동반하는)을 확보하는 능력 아닐까. 애완견이라는 타자와 연대하는 능력만 키울 게 아니라. 그런데 그 능력은 어떻게 길러지는 것일까. 어쩌면 문학이 하나의 대안은 아닐까. 음악이나 회화와 달리 문학은

 

‘다른 사람의 영혼과 그 영혼의 총체를 만난다는 기분, 그 영혼의 나약함과 위대함, 한계, 비루함, 편견, 믿음 요컨대 그 영혼을 감동시키고 그 영혼의 관심을 끌며, 그 영혼을 흥분시키고 그 영혼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과 만난다는 그 기분’(p. 13.)

 

을 준다. 이 소설은 프랑수아라는 고독하고 젊은 대학 교수의 삶에 우리를 복종하게 하고 그 영혼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독자는 타자와 ‘공감’할 수 있게 된다. 프랑수아는 비루하게 개종하고 복종하면서 직업을 되찾았다. 그 비루함에 복종할 수 밖에 없는 독자는 더 비루해진다. 하지만 그 반복된 비루함, 이중적으로 배가된 비루함만이 프랑수아라는 타자를 만나게 해준다. 그 타자를 이해하면서 나는 나를 초월하여(개인을 넘어)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자’를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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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 또 한권을 고르라면....

 

 

 

 

 

 

 

 

 

 

 

 

 

 

 

 

 

신간평가단 활동 하면서 책도 많이 읽었고 도움도 많이 받았어요. 또 지원할거구요 ㅎㅎ

 

이번엔 소설이나 시 문학 파트로 지원하고 싶네요. 아무튼 활동하면서 느꼈던 것은

 

제 의지(선택)와 상관 없는 책이 오기도 하는데 그럴땐 가끔 아쉽기도 했어요.

 

아무튼 항상 수고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또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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