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의 역사 - 부정부패의 뿌리, 조선을 국문한다
박성수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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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꽤 오랜 시간 우리의 역사를 공부하는데에 투자한다. 학창시절 정해진 정규수업시간만해도 무시할 수 없을만큼의 많은 시간이며, 그 양 또한 적지 않아 시험기간이면 가장 많은 공부시간을 잡아먹곤 하던 역사. 그 역사는 한 나라의 기록이라는 이름의 국사라는 명칭을 달고 학창시절 내내 학생들을 꽤나 괴롭히던 과목 중 하나였다. 꼭 학창시절뿐이 아닐것이다. 대부분의 취업시험이나 공직에 나가기 위한 시험들에도 국사는 항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정통하지는 않더라고 어느 정도의 상식선의 내용들은 알고 있어야 하는 교양과목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바로 국사이기도 하다. 외우기에 벅차고 막상 외워서 써먹을데도 없는 국사라는 과목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뒤를 오랜 시간 졸졸 따라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한 사람의 과거이 그 사람의 현재를 만들었듯이 한 나라의 과거 역시 한 나라의 현재이자 미래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를 살고 있는 일원으로써 자신의 나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 그것은 어찌보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 그 화려하고도 긴 영광의 시간.
그렇다면 사람들이 국사라는 이름의 학문에게 기대하는 것은 어떤 것들일까? 물론 그저 자신의 과거를 상기하듯 자신의 나라가 걸어온 길을 기억해야 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 외에 국사라는 한 나라의 역사가 개인에게 그리고 그 민족에게 끼치는 여러가지 영향이 상당히 크고 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한민족임을 내세우며 민족의 정체성과 주체성에 대해 오랜시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의 경우 역사는 우리 민족 특유의 국민성이자 조금은 보수적이고 국수적이다 싶은 분위기를 이해하는 스스로에 대한 이해이기도 한것이다.자.. 그렇다면 국사가 해야하는 가장 큰 역할이 어느 정도 드러난 것은 아닐까 싶다. 바로 민족에 대한 자긍심 고취와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는 것. 그리고 그 민족의 일원인 나 자신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 말이다.

기록되었으나 잊고자 하는, 그래서 더욱 되새기게 되는 역사의 잘못들.
역사를 배우고 가르치는 목적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 민족적 자긍심의 고취라고 한다면, 다시 우리는 한가지 의문과 맞딱드리게 된다. 우리의 역사가 저질렀던 수 많은 잘못과 실수, 그리고 그 결과였던 실패들은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일까? 후대의 우리는 그저 이런 잘못과 오류들을 외면하고 오로지 민족적 자긍심만을 기억하며 우리 선조의 잘난점만을 배우고 기억해야 하는 것일까? 바로 이 질문에 대답하는 한권의 책이 <부패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잘못에서 현재와 미래를 보라.
<부패의 역사>는 선정을 베풀었던 조선왕조의 성군들에 대한 치적을 그리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도 분명 존재했던 관리들의 부정과 부패, 그리고 그 부정과 부패에 잘못대처하여 이러한 잘못들을 제때 바로잡지 못한 권력자의 무능함과 정치인들의 탐욕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 역사의 치부를 들춰내는 책인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이렇게 잘났으니 우리는 잘난 조상을 둔 잘난 사람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선조들 중에도 부정과 부패한 이들은 분명 존재했으며 그 부정과 부패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 우유부단함이 우리 역사의 발목을 잡고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과거에 대한 후회이자 현재에 대한 질타인 것이다. 책 속에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몇가지 사화와 반정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수없이 일어났던 민란의 배경이 들어있음은 물론이고, 조선이라는 길고도 화려한 한 왕조의 역사속에 부정과 부패가 어찌 시작되었으며 왜 끊어지지 않고 도리어 거대하고 두터운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에 대한 통찰이 저자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과 함께 잘 버무려져 있다.

잘라내야 하는 역사의 고리를 잘라내는 시작.
모든 것에는 시작이 존재한다. 광영의 역사도, 외면하고픈 실패의 잔재도 모두가 그 시작이 있었기에 현재에 이른 것이다. 옳고 바른 것은 유지하고 키워나감이 마땅하고, 그렇지 못한 실패와 잘못의 고리는 과감하게 잘나내어야 더 나은, 더 위대한 새로운 역사가 기록될 것임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당연한 것일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재 부정과 부패가 끊이지 않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거대한 권력집단의 압박에 굴복하고, 때로는 시대의 흐름이라 진실을 외면하면서 말이다. 부패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뿌리를 박고 있음을 개탄하는 것 보다 지금이라도 이런 고리들을 과감하게 끊어버리는 것이 가장 우선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가 존재하기에 역사 속에는 영광된 순간만이 아닌 실패와 좌절의 역사 또한 포함되어야 한다. 잘라내야 하는 썩은 뿌리가 있다는 것을, 최소한 인식은 하고 있어야만 그 뿌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말이다. <부패의 역사>라는 한권의 책만으로 그 일이 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부패의 역사 또한 공부하고 바로 보아야 하는 우리의 역사임을 인정한 <부패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도 이 한권의 책이 가지는 의미는 충분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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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유쾌한 과일 - 나오키 문학상 수상작가 하야시 마리코 대표작
하야시 마리코 지음, 정회성 옮김 / 큰나무 / 2009년 9월
절판


여자들은 가끔 결혼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결혼을 한 사람이든, 앞둔 사람이든, 결혼은 아직 멀고 먼 남의 이야기라 생각하는 사람이든, 결혼에 대한 입장에는 모두 조금씩 차이가 존재하지만, 존재하는 입장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대한 몇번의 고민은 여자들에게는 남자들과는 또 다른 무게로 느껴지기에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열정적이지 않던 사랑, 무난한 결혼, 지루해진 생활

<불유쾌한 과일>의 주인공 마야코는 30대초반의 주부이다. 그녀는 몇번의 연애를 하고 그중 그럭저럭 자신이 세운 조건에 가장 가깝다고 느껴지는 한 남자를 골라 결혼을 했다. 결혼생활은 이제 익숙한 그녀의 일상이 되었고, 신혼초의 아기자기한 즐거움도, 연애시절의 뜨거운 열정도 모두 사그라들고 지루한 일상만을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이러한 지루한 일상에 염증을 느끼고 탈출구를 만드는 방법으로 외도를 선택한다. 자신을 지루해 하는 남편의 무관심과 권태에 대한 항변이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그녀의 첫번째 외도상대는 그녀의 남편을 만나기 전 만나던 노리오이다. 뛰어난 엘리트이지만 외모의 조건이 한참 떨어진다고 판단하여 헤어짐을 선택했던 노리오를 만나 잠시의 외도를 꿈꾸던 그녀는 노리오가 자신보다 어리고 뛰어난 여성과 결혼을 약속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노리오와의 만남에서 시작된 마야코의 알 수 없는 갈증은 점점 대담해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결혼전 만났던 유부남인 노무라와의 만남을 시작하고, 노무라와 마야코의 관계는 남편인 고이치와의 부부생활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격정에 휩싸이게 된다. 마야코와 노무라의 불륜은 노무라에게 제3의 여인이 또 존재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완벽한 불륜이 되고, 노무라를 독점하지 못했다는 미묘한 질투심은 그녀를 또 다른 관계에 대한 목마름으로 몰아간다. 마야코의 외도는 그 목마름을 해결해줄 감정적 교류가 존재하는 관계를 원하게 되고 그녀는 다시 이 관계를, 새로운 남자 마치히코를 통해 이루려 한다. 그녀는 결국 남편인 고이치와 이혼하고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리게 한 마치히코와 재혼한다. 새로운 남자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갈구하고 그것을 얻었다고 생각한 마야코, 그녀는 마치히코의 관계에 과연 만족했을까? 아마도 아닌 모양이다. 그녀는 다시 노무라와 만나기 시작하니 말이다.

누구에게나 한번은 찾아온다는 권태라는 이름의 함정.

결혼을 하고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꼭 한번 권태라는 이름의 위기가 찾아온다고 한다. 어떤 부부는 현명하게 이 시기를 이겨내고 혼인서약에 맹세한대로 백년해로를 해내기도 하고, 어떤 부부는 이 시기의 위기를 부부생활의 끝이라는 결코 행복하지 못한 결말로 마무리하기도 한다. 모든 부부가 이 위기를 지혜롭게 이겨내는 것도, 모든 부부가 이혼이라는 헤어짐을 선택하는 것도 아닌 것은 아마도 각 부부들이 처한 상황들이 모두 다른것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부부가 아닌 아내와 남편이라는 위치가 아닌 남자와 여자, 혹은 한명의 사람으로서 상대를 이해하는 관점과 스스로를 합리화 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헤어짐은 결국 상대방의 일방적인 잘못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며, 두 사람 모두의 잘못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유쾌하고도 불쾌한, 불유쾌한 과일. 결혼.

결혼은 행복하고도 유쾌하게 시작하여 때로는 유쾌하지는 않은 불유쾌한 시기를 맞이한다. (불유쾌하다는 말이 불쾌하다는 의미는 아닐것이다.) 하지만 그 끝은 유쾌할 수도, 불쾌할 수도 있다. 바로 그 불유쾌한 시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지나가게 하느냐에 따라서 말이다. 결국 결혼생활을 유쾌하게, 혹은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몹시도 지루하고 힘들지 모를 그 불유쾌한 시기에 달려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유쾌한 과일>의 마야코는 불유쾌한 결혼의 시기를 불쾌하다와 동의어로 받아들인 나머지 결국에는 그 불쾌한 상태로 결혼을 마무리 지어버린다. 선택은 그녀 자신이 했으나 그녀는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불유쾌한 결혼을 불쾌하게 끝내버림으로서 그 시기를 현명하게 이겨내고 다시 유쾌한 결혼으로 돌릴 기회를 가지지 못했으니 말이다. <불유쾌한 과일>에서 말하고자 하는 결혼은 아마도 바로 그 유쾌한 결혼으로 가는 불유쾌한 시기의 과정이 어쩌면 유쾌한 과일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점은 아닐까? 혹독한 가뭄을 이겨낸 과일일수록 높은 당도의 품질좋은 과일로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잊으면 안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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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일상에서 리더십을 읽다 - 원칙과 소신의 리더, 이순신의 삶과 꿈
김헌식 지음 / 평민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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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한참 책 읽기에 빠져있던 나에게, 책의 장르란 의미가 없었다. 각각의 책이 장르라는 개념으로 구분되어진다는 사실도 몰랐고 알았더라도 아마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책은 그저 내가 알지 못하는 신기하고도 재미난 이야기를 한가득 담고 있는 이야기보따리, 그 한 장르만이 존재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이를 점점 먹어가며, 책에도 장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것은 소설, 저것은 시집, 그것은 위인전하는 식의 개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어느 틈엔가 소설은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장르로, 시집은 나와는 다소 잘 어울리지 않은 어려운 글들의 모음이라는 장르로, 위인전은 본받고 싶거나 본받아야 하는 역사속 인물의 일대기를 담아놓은 장르로 자연스레 구역을 나누어 가지기 시작했다. 그 시절 내가 특히 좋아하던 장르는 위인전이었는데 국내의 위인보다는 해외의 인물들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와 다른 문화, 우리와 다른 역사를 가진 전혀 새로운 환경의 인물들이 위대한 인물로 재탄생 되는 과정은 내가 살고 있고 내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나라의 인물들 보다 환상적이고 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결국 나는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현실적인 근거와 내가 경험하지 못한 배경이라는 환상이 적절히 뒤섞인 나만의 선호 장르를 찾아낸 것이었다. 그토록 외국의 위인전들만을 편애하던 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역사속 인물 중에도 특히 인상에 남는 위인들의 이름이 존재하기는 했다. 그리고 이 책 <이순신의 일상에서 리더십을 읽다>는 내가 어린 시절 강한 인상을 받았던 우리나라의 위인들 중 한명인 충무공 이순신에 관련한 책이다.

충무공 이순신, 그에 대한 이야기.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인지 어떤 위치의 인물인지도 정확한 역사연대까지를 암기하지는 못하더라도 대강의 내용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학익진, 거북선, "내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말라."등의 말들 역시 귀에 익은 말들일 것이다. 한 나라의 전체 국민에게 결코 낯설지 않고, 많은 이들이 국가적 영웅 또는 위인으로 떠받들다시피 하는 인물 이순신. 이 정도의 전 국민적인 사랑과 추앙을 받는 인물이라면 그 인물의 인생과 업적에는 뭔가 특별하고도 거대한 것들이 있는 것은 굳이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닐까?

이순신, 현대적 리더로 다시 기억되다.

<이순신의 일상에서 리더십을 읽다>는 그러나 그의 영웅적 일대기와 업적을 기리기 위한 단순한 위인전은 아니다. 한 시대를 아우르고 역사를 관통하여 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그가 가지는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조명해보고, 그가 가진 리더로서의 가치를 현대적 의미로 다시 살려보고자 하는 이야기가 <이순신의 일상에서 리더십을 읽다>라고 하면 간략한 설명이 될까?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업적을 기술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행보중 리더로서의 역할이나 자질에 대한 것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순신의 일상에서 리더십을 읽다>에서는, 때문에 영웅 이순신 보다는 조직을 이끌어가는 리더로서의 그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숙제라고 할 수 있다.

한가지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리더, 이순신을 통해 진정한 리더쉽에 대해 생각해보다.

<이순신의 일상에서 리더십을 읽다>에서 보여지는 리더로서의 이순신은 단순히 한가지 특성만을 강화하여 만들어진 특수화된 리더가 아니다. 그는 조직의 질서와 규율을 중시하고 원칙과 소신이라는 리더로서의 기준을 가진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보이기도 하고, 조직의 내부와 외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실천형 리더이기도 하며,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내세우는 권력추구형 리더이기 보다는 때로는 스스로 뒤로 물러나 실리를 얻기를 망설이지 않는 실리추구형 리더이기도 하다.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이용하여 조직의 사기를 고양시키는 방법을 골몰하고, 그 자신이 인간적인 번민에 시달림을 부정하지 않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소탈한 모습도 동시에 갖추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순신의 일상에서 리더십을 읽다>의 이순신은 자신 스스로가 강점이라 내세울 수 있는 일면의 모습으로 조직을 이끈것이 아니라 뛰어난 상황판단 능력과 이를 뒷받침 하는 정보를 가지고 매 순간 달라지는 상황에 가장 적절한 자신의 일면을 극대화하여 조직을 이끈 균형잡히고 총체적인 안목을 가진 리더였던 것이다. 또한 <이순신의 일상에서 리더십을 읽다>에서 보여지는 영웅이자 성공한 리더인 이순신의 모습속에 늘 고민하고 번민했던 인간적인 이순신의 모습을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성공적인 조직의 리더로서 성공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고뇌와 힘겨움이 자연스레 동반하는 것이며 이에 대한 구성원의 이해도 같이 더해졌을때 최종적으로 성공적인 조직의 역할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순신, 성공적인 조직의 리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필요로 하는 조직의 리더가 무엇인가를 이순신이라는 역사적 인물에서 찾는 것 또한 이러한 이유가 아닐까? 다변화된 사회에서 한가지 면만을 강조하여 일방통행식으로 조직을 이끄는 독불장군 리더가 아닌, 모든 상황을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고 각 상황에 맞는 적절한 리더십을 적절하게 발휘할 줄 아는 다양한 모습을 갖춘, 그리고 이를 위해 스스로도 부족함을 인정하고 끝없이 노력해나가는 리더 말이다. 시대가 변하듯, 시대가 요구하는 성공적인 리더의 모습도 조금씩은 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시대를 불문하고 인정받는 영웅이 존재하는 것처럼 시대를 불문하고 요구되는 리더의 모습 또한 어느정도는 존재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을 찾기 위해 시대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웅이란 이름을 아낌없이 받는 이순신이라는 리더를 한권의 책으로 연구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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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없다 절대 말하지 말라 - 잘되는 나를 위한 제1의 법칙
안관호 지음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09년 6월
절판


꿈을 이루며 살아가기에, 당당하게 살아가기에, 무엇인가를 책임지고 살아가기에, 먹고 살기에 힘든 세상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세상은 점점 험하고 고통스러워만지는 것 같고, 내가 이룰 수 있는 일들은 거의 없어만 보인다. 갈수록 힘들어져갈 것만 같은 세상은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그래서 언제나 버겁고 힘겨운 짐들만 한가득 올려놓은 것 같기만 하다. 힘겨운 한 세상. 그럼에도 살아가야하는 이 세상에서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힘들다고 지겹도록 우는 소리만 하며 하루하루 오늘처럼 힘들게만 살아가다 한세상 마무리 하란 것인가? 그렇게 살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스스로가 안쓰럽지 않은가! 그래도 아직은 젊고 무언가를 해볼 힘을 가지고 있는 창창한 청춘인데 말이다.



만만치 않은 삶, 그것을 살아가기 위한 노력의 시작.

인생은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닐것이다. 나날이 발전하는 사회의 속도를 맞추어 나가는 것 또한 녹녹치 않으며,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는 나의 동료 누군가가 호시탐탐 나보다 잘난 사람이 되기 위해 기회를 엿보며 노력하는 것이 세상이니 말이다. 누군가를 뛰어넘는 유능한 사람이 되거나 최소한 내가 속한 그룹에서 뒤떨어지는 낙오자가 아니되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렇게 남들보다 더 많이, 최소한 남들만큼의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누구나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물집이 잡히고 피가나는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기왕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삶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스스로 만족하고픈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어쩌면 더 잘 살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목표를 세우고 잘 살기 위해 뛰어다니는 것은 만만치 않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작은 시작일지도 모를 일이다.

더 잘살기 위해 자신의 가치부터 믿어라.

<자신없다 절대 말하지 말라>라는 제목의 이 한 권의 책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 시작에서도 가장 처음에 위치해야 하는 스스로에 대한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질문과 답으로 채워져 있다. 힘겨움을 맞딱드렸을때, 그리고 무엇인가를 시작해야할 때, 잠시 정체된 시간속에 외로움을 느낄때, 자신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될때 누군가에게 꾸짖듯 할 수 있는 한 마디. 그것이 바로 자신없다 절대 말하지 말라인 것이다. 스스로의 가치를 믿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며, 가능성과 희망, 그리고 성공으로 이어지는 길의 첫 걸음이라는 것을 짤막하지만 다채로운 여러가지 단편적인 이야기들로 조금은 신랄하고 조금은 유쾌하게 그리고 조금은 기발한 방법으로 전하는 책이랄까?

약간은 거칠지만 분명히 약이 되는 많은 이야기들.

<자신없다 절대 말하지 말라>의 이야기는 많은 자기계발서드에 공통적으로 나와있는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믿어라 또는 자신을 믿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며 자신감이 그 초석이 된다라는 내용으로 압축할 수 있을것 같은 한권의 책. 어찌보면 당연하고 구태의연한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을지 모를 이 책이 조금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한 권의 책이 모두 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고양시키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잘되는 나를 위한 제1의 법칙으로 스스로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을 위치시키고 한권의 책을 모두 같은 내용으로 엮어낸 저자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일까? 각 장에 설명되어 있는 모든 부분이 결국에는 너 자신을 믿어야만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이 한권의 책. 그 안에는 단지 막연한 내용의 너 자신을 믿으라가 아닌 조금은 특별하고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약간은 신랄하게 느껴지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때로는 사회의, 때로는 조직의, 때로는 종교의 이야기들이... 가끔은 너무 구체적이고 콕 찝어 이야기 하는 그 특유의 느낌이 약간은 거칠게 느껴질지라도, 한가지는 분명하다. 그 이야기들이 모두 약이 되는 이야기들이라는 점 말이다.

알지만 자꾸 머뭇대기만 하는 그대에게...

<자신없다 절대 말하지 말라>는 새로운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렇기에 무시하게 되어버리는 이야기들의 한 대목을 조목조목 짚어내는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을 잡는 순간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뜨끔한 생각을 버릴 순 없을 것이다. 너무 구체적이고 너무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머뭇대고 있던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아마도 친한 선배나 부모님의 꾸짖음처럼 다가올 것이다. 너는 왜 아직도 머뭇대고 있냐고 질책하며 너를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선배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너를 믿어야 하는 것은 바로 너 자신이라고 호된 야단을 맞은 기분이랄까? 어렴풋이 알고만 있던 사실을 누군가의 입을 빌어 확인하고 머뭇거린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워지게 하는 책. <자신없다 절대 말하지 말라>의 가장 큰 매력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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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니
펄 벅 지음, 이지오 옮김 / 길산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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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 벅이라는 작가의 이름앞에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특정 작가의 작품을 선호하거나 한 작가의 작품을 모두 읽을 만큼의 작가주의적인 성향이 없는 편이지만, 펄벅이라는 작가의 이름앞에서는 언제나 막연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한 개인일 뿐인 한명의 작가가 담아내기에는 너무나 포괄적이고 다양한 문화들, 그리고 그것을 무리없이 담아내는 자연스러운 문체들, 이것들을 모두 가능하게 하는 전체를 아우르는 통찰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책 피오니 역시 그녀의 작품들이 가지는 그 풍부하고도 깊은 통찰을 종교와 민족의 정체성, 그리고 한 개인의 행복이라는 입장에서 모두 만날 수 있다.


민족과 종교, 그리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만들어가야 하는 개인의 이야기.

종교나 민족의 정체성은 때로는 한 사람의 행복이나 일신의 안위보다 높은 가치로 평가되기도 한다. 나를 넘어서는 한 민족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대변함을 넘어 그것을 넘어서는 궁극의 이상을 의미하기도 하는 종교는 이런 이유로 때로는 개인의 희생과 고통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래서 수 많은 이들이 순교의 이름으로 목숨을 버리고, 애국의 이름으로 인생을 헌납하기도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피오니>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인공들이 겪고 있는 개인적 차원 혹은 민족과 종교적 차원의 갈등 역시 이런 희생과 고통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각각의 사연, 각각의 가치.

<피오니>에는 책의 제목인 피오니 뿐 아니라 이야기를 끌어가는 수 많은 등장인물들이 있다. 그리고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가치와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끝없이 자신의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싸워나가며 변화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에는 <피오니>의 주인공이 피오니였다는 사실을 잊고 한명한명의 사연과 고뇌를 하나하나 이해하게 된다. 먼저 <피오니>의 주인공은 중국땅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살아가고 있으나 그 자신은 유대인의 가족에 속해있는 다소 복잡한 위치의 인물이다. 먼 타국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에즈라 가족에 속한 하녀이기 때문에 그녀자신은 조국에서 살아가면서도 끝없이 소외감을 느끼고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그래서 그 어떤 곳에서도 자신의 고립감을 이해받을 수 없으리라는 또다른 외로움을 지닌 여인. 자신과 어린시절을 함께 보낸 에즈라의 아들 데이빗을 사랑하지만 자신이 하녀라는 위치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 그의 옆자리는 꿈꾸치 못하는 여인으로서도 행복하지 못한 인생을 살아간다. 피오니가 일생을 사랑한 남자인 데이빗은 정통 유대인의 혈통인 어머니와 중국인의 피가 섞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자유를 쫓고 스스로 좀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며 살지만 어느새인가 점점 어머니의 뿌리를 찾게 되는, 끝없는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하는 남성이다. 데이빗의 어머니는 유대인의 전통을 내려받아 그녀자신도 민족적 전통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열망을 잊지 못하는 여인이고, 남편인 에즈라는 반반이 섞인 자신의 혈통처럼 현실과 민족의 전통을 오가며 실리를 추구하는 실리주의자에 가깝다. 여기에 어린시절 데이빗과 결혼을 약속한 랍비의 딸 리아와 데이빗이 사랑이라 확신한 중국상인의 딸 쿠에일란. 랍비의 망나니 아들 애런등이 크고 작은 사건들을 더하며 이들의 삶을 흔들어놓는다.

혼란과 갈등, 그리고 화해의 대서사시.

<피오니>의 등장인물들은 크게는 유대인과 중국인이라는 두 민족의 이야기이지만 사실 안을 들여다보면 모두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갈등과 가치관의 충돌에 대한 이야기이다. 각각의 인물들은 유대인이라는 스스로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서 모두 다른 이해를 하고 있으며 여기에 그들이 살고 있는 중국이라는 배경이 더해짐으로써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이민족 혹은 이방인이라 불리울 타민족과의 갈등에 모두 다른 해결방법과 입장을 취해 유대인 내부적으로도 갈등하고 내분하는 것이다. 결국 <피오니>에는 하나의 문제에 대해서도 모두 다른 이해와 입장을 취하는 개인이 존재하고 이 개인들을 아슬아슬하게 묶고 있는 민족 혹은 종교라는 끈이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힘있게 사람들을 묶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모두에게 동일한 절대적인 단 하나의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움직이고 조금씩 달라지는 어찌할 수 없는 변화와 화해로 마무리 된다.

영원히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피오니>는 데이빗과의 사랑을 결국 이루지 못한다. 그녀는 비구니가 되고 데이빗과 쿠에일란이 이룬 가정의 충실한 조언자로 어느결엔가 그들에겐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더이상 데이빗의 하녀가 아닌 한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그들과 대등한 의견을 교환하는 하나의 사람으로 존재하게 된다. 피오니는 하녀에서 존중받는 한명의 인격체가 되어서야 그들과 충분한 행복을 나눈다. 데이빗은 피오니를 놓아준 다음에야 그녀와 평등한 인격체로 마주앉아 편안한 웃음을 주고 받는다. 쿠에일란은 피오니에 대한 불편한 시선을 거두고 마음을 연 다음에야 그녀에게서 진정한 지혜와 위안을 얻는다. 결국 세월이 가져다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변화들을 그들이 받아들임으로서 그들에게 진정한 평화가 주어진 것이다. 민족의 전통도, 종교적 가치도, 그리고 시대를 아우르는 신념도, 모두가 무시할 수 없는 것들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찾아드는 변화에도 나름의 가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 변화가 때로는 전통을 위협하고 종교적 가치를 희생하게 하는 듯 보이더라도 사람들은 그 안에서 나름의 행복을 소유하는 방법을 늘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이었으나 유대인의 가족속에서 평생을 보낸 피오니와, 반반의 혈통이 섞이 데이빗, 그리고 오랫동안 중국의 전통에 길이 들었던 쿠에일란이 모두 조금의 변화를 받아들임으로서 행복을 찾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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