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오니
펄 벅 지음, 이지오 옮김 / 길산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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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 벅이라는 작가의 이름앞에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특정 작가의 작품을 선호하거나 한 작가의 작품을 모두 읽을 만큼의 작가주의적인 성향이 없는 편이지만, 펄벅이라는 작가의 이름앞에서는 언제나 막연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한 개인일 뿐인 한명의 작가가 담아내기에는 너무나 포괄적이고 다양한 문화들, 그리고 그것을 무리없이 담아내는 자연스러운 문체들, 이것들을 모두 가능하게 하는 전체를 아우르는 통찰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책 피오니 역시 그녀의 작품들이 가지는 그 풍부하고도 깊은 통찰을 종교와 민족의 정체성, 그리고 한 개인의 행복이라는 입장에서 모두 만날 수 있다.


민족과 종교, 그리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만들어가야 하는 개인의 이야기.

종교나 민족의 정체성은 때로는 한 사람의 행복이나 일신의 안위보다 높은 가치로 평가되기도 한다. 나를 넘어서는 한 민족의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대변함을 넘어 그것을 넘어서는 궁극의 이상을 의미하기도 하는 종교는 이런 이유로 때로는 개인의 희생과 고통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래서 수 많은 이들이 순교의 이름으로 목숨을 버리고, 애국의 이름으로 인생을 헌납하기도 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피오니>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인공들이 겪고 있는 개인적 차원 혹은 민족과 종교적 차원의 갈등 역시 이런 희생과 고통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각각의 사연, 각각의 가치.

<피오니>에는 책의 제목인 피오니 뿐 아니라 이야기를 끌어가는 수 많은 등장인물들이 있다. 그리고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가치와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끝없이 자신의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싸워나가며 변화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에는 <피오니>의 주인공이 피오니였다는 사실을 잊고 한명한명의 사연과 고뇌를 하나하나 이해하게 된다. 먼저 <피오니>의 주인공은 중국땅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살아가고 있으나 그 자신은 유대인의 가족에 속해있는 다소 복잡한 위치의 인물이다. 먼 타국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에즈라 가족에 속한 하녀이기 때문에 그녀자신은 조국에서 살아가면서도 끝없이 소외감을 느끼고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그래서 그 어떤 곳에서도 자신의 고립감을 이해받을 수 없으리라는 또다른 외로움을 지닌 여인. 자신과 어린시절을 함께 보낸 에즈라의 아들 데이빗을 사랑하지만 자신이 하녀라는 위치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 그의 옆자리는 꿈꾸치 못하는 여인으로서도 행복하지 못한 인생을 살아간다. 피오니가 일생을 사랑한 남자인 데이빗은 정통 유대인의 혈통인 어머니와 중국인의 피가 섞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자유를 쫓고 스스로 좀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며 살지만 어느새인가 점점 어머니의 뿌리를 찾게 되는, 끝없는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하는 남성이다. 데이빗의 어머니는 유대인의 전통을 내려받아 그녀자신도 민족적 전통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열망을 잊지 못하는 여인이고, 남편인 에즈라는 반반이 섞인 자신의 혈통처럼 현실과 민족의 전통을 오가며 실리를 추구하는 실리주의자에 가깝다. 여기에 어린시절 데이빗과 결혼을 약속한 랍비의 딸 리아와 데이빗이 사랑이라 확신한 중국상인의 딸 쿠에일란. 랍비의 망나니 아들 애런등이 크고 작은 사건들을 더하며 이들의 삶을 흔들어놓는다.

혼란과 갈등, 그리고 화해의 대서사시.

<피오니>의 등장인물들은 크게는 유대인과 중국인이라는 두 민족의 이야기이지만 사실 안을 들여다보면 모두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갈등과 가치관의 충돌에 대한 이야기이다. 각각의 인물들은 유대인이라는 스스로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서 모두 다른 이해를 하고 있으며 여기에 그들이 살고 있는 중국이라는 배경이 더해짐으로써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이민족 혹은 이방인이라 불리울 타민족과의 갈등에 모두 다른 해결방법과 입장을 취해 유대인 내부적으로도 갈등하고 내분하는 것이다. 결국 <피오니>에는 하나의 문제에 대해서도 모두 다른 이해와 입장을 취하는 개인이 존재하고 이 개인들을 아슬아슬하게 묶고 있는 민족 혹은 종교라는 끈이 때로는 느슨하게 때로는 힘있게 사람들을 묶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모두에게 동일한 절대적인 단 하나의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움직이고 조금씩 달라지는 어찌할 수 없는 변화와 화해로 마무리 된다.

영원히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피오니>는 데이빗과의 사랑을 결국 이루지 못한다. 그녀는 비구니가 되고 데이빗과 쿠에일란이 이룬 가정의 충실한 조언자로 어느결엔가 그들에겐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더이상 데이빗의 하녀가 아닌 한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그들과 대등한 의견을 교환하는 하나의 사람으로 존재하게 된다. 피오니는 하녀에서 존중받는 한명의 인격체가 되어서야 그들과 충분한 행복을 나눈다. 데이빗은 피오니를 놓아준 다음에야 그녀와 평등한 인격체로 마주앉아 편안한 웃음을 주고 받는다. 쿠에일란은 피오니에 대한 불편한 시선을 거두고 마음을 연 다음에야 그녀에게서 진정한 지혜와 위안을 얻는다. 결국 세월이 가져다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변화들을 그들이 받아들임으로서 그들에게 진정한 평화가 주어진 것이다. 민족의 전통도, 종교적 가치도, 그리고 시대를 아우르는 신념도, 모두가 무시할 수 없는 것들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찾아드는 변화에도 나름의 가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 변화가 때로는 전통을 위협하고 종교적 가치를 희생하게 하는 듯 보이더라도 사람들은 그 안에서 나름의 행복을 소유하는 방법을 늘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이었으나 유대인의 가족속에서 평생을 보낸 피오니와, 반반의 혈통이 섞이 데이빗, 그리고 오랫동안 중국의 전통에 길이 들었던 쿠에일란이 모두 조금의 변화를 받아들임으로서 행복을 찾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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