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ㅣ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거의 6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 정독을 하며 읽자니 다루고픈 주제가 너무 많다. 저자 정민 교수는 정약용과 황상의 ‘만남’을 대주제로 하고 그 속에 두 인물을 비롯해 주변인들의 다양한 발걸음을 추적하였는데, 그들을 다루는 소재가 ‘시’와 ‘편지’다.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가 소통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서 구시대의 색채가 물씬 풍기는 소통의 수단이 나는 왜 그리 아름다워 보이는 걸까? <미쳐야 미친다>이래 정민 교수와 주인공들에 대한 호감도가 높은 상태에서 출발한 이 책. 감동의 물결 속에 나를 던져 본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의 삶. 그렇기에 그 속에는 채우고 가꿔나가야 할 내용들이 많다. 지식은 자신의 노력으로 필요한 만큼 채울 수 있지만, 타인과의 만남은 순간적 재치와 무조건적인 노력만으로 채우기 힘들다. 좋은 만남을 위해 나를 가꾸고 준비해야 함은 물론 상대의 장점을 배우기 위한 노력도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세상에는 많은 만남들이 있지만 그 속내를 자세히 살펴보면 만남이라기보다 ‘마주침’이 더 많은 것이다. 곁눈질하거나 흉금을 털어 놓지 않는 관계에서 좋은 만남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만남에는 이처럼 마음의 교류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여기 다산 정약용과 치원 황상의 만남을 살펴보자. 저자는 이들의 만남을 맛남 만남이라 평했다.
정약용은 신유박해(1801년)로 인해 형들과 함께 유배의 길을 떠난다. 그가 당도한 곳은 땅 끝에 위치한 강진. 멀리 한성에서 이곳으로 누군가 유배를 온다고 하니 사람들이 다 피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마도 당시 강진 사람들은 무슨 괴물이라도 오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정약용은 이런 상황에서도 묵묵히 학문에 전념하고 자신에게 집중한다. 물론 마음 한켠에는 두고 온 가족에 대한 미안함 가득했다(이는 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난다). 오랫동안 정약용을 지켜보던 아전들이 서서히 경계의 눈초리를 풀고 제 자식들을 가르쳐 주십사하고 나타났다. 강진이라는 궁벽한 시골 마을에 제대로 학문적 기초를 닦은 이가 얼마나 되었겠는가. 큰 기대를 않던 정약용에게 한 더벅머리 소년이 묻는다.
“선생님! 제게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꼭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합니다. 저 같은 아이도 정말 공부할 수 있나요?”
“그렇구나. 내 이야기를 좀 들어보렴. 배우는 사람은 보통 세 가지 큰 문제가 있다. 너는 그 세 가지 중 하나도 없구나.”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민첩하게 금세 외우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을 가르치면 한 번만 읽고 바로 외우지. 정작 문제는 제 머리를 믿고 대충 소홀히 넘어가는 데 있다.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지. 둘째, 예리하게 글을 잘 짓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질문의 의도와 문제의 핵심을 금새 파악해낸다. 바로 알아듣고 글을 빨리 짓는 것은 좋은데, 다만 재주를 못 이겨 들떠 날리는 게 문제다. 자꾸 튀려고만 하고, 진중하고 듬직한 맛이 없다. 셋째, 깨달음이 재빠른 것이다. 대번에 깨닫지만 투철하지 않고 대충 하고 마니까 오래가지 못한다.
내 생각을 말해줄까? 공부는 꼭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둔하다고 했지? 송곳은 구멍을 쉬 뚫어도 곧 다시 막히고 만다. 둔탁한 끝으로는 구멍을 뚫기가 쉽지 않지만, 계속 들이파면 구멍이 뚫리게 되지. 뚫기가 어려워 그렇지 한번 구멍이 뻥 뚫리면 절대로 막히는 법이 없다. 앞뒤가 꼭 막혔다고? 융통성이 없다고 했지? 여름 장마철의 봇물을 보렴. 막힌 물은 답답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빙빙 돈다. 그러다가 농부가 삽을 들어 막힌 봇물을 터뜨리면 그 성대한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단다. 얼마나 통쾌하냐? 어근버근 답답하다고 했지? 처음에는 누구나 공부가 익지 않아 힘들고 버벅거리고, 들쭉날쭉하게 마련이다. 그럴수록 꾸준히 연마하면 나중에는 튀어나와 울퉁불퉁하던 것이 반질반질 반반해졋 마침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구멍을 어떻게 뚫어야 할까? 부지런히 하면 된다. 막힌 것을 틔우는 것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연마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어찌해야 부지런히 할 수 있겠니?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으면 된다. 그렇게 할 수 있겠지? 어기지 않고 할 수 있겠지?” (본문 34~36쪽에서)
제법 긴 글을 인용해보았다. 질문을 한 소년이 바로 당시 15세의 황상이다. 그 소년에게 정약용은 삼근계(三勤戒), 즉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히 공부할 것은 당부한다. 황상은 이때부터 삶이 바뀌게 된다. 시골 아전의 아들이었던 그는 정약용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가업을 이어받아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는 스승의 지도아래 배우고 익힌 것을 무한히 반복하는 삶을 살아간다. 정약용 이런 제자를 가르치며 유배지에서의 곤난함을 극복해간다. 이후 두 사람은 마치 바늘과 실 같은 인연을 이어가며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로서 살아간다. 당시 강진에는 정약용 문하에 여러 제자들이 있었지만 다산의 해배(解配) 후까지 그 연을 이어가는 사람은 황상 뿐이었다. 대체 그는 왜 그랬을까?
황상은 스승 정약용을 만남으로써 자신 안에 있던 능력의 싹 같은 것을 발견한다. 특히 그는 시 분야에 탁월함을 보이게 된다. 스승의 지독한(정약용은 상당히 깐깐하고 어려웠던 스승이었던 듯하다) 조련에도 게을리 행치 않고 수 십 년간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또한 스승이 꿈꾸던 유학자로서의 이상적 삶을 그대로 실천하며 산속(일속산방)에서 살아간다. 이런 그에게 다산은 오래 전부터 과거 응시를 권하지만 듣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런 꿈이 없었기 때문이다. 외진 곳에서 농사지으며 책 읽고 시를 짓는 삶에 그는 만족해한다. 이런 젲의 삶에 스승도 결국 만족해 한다. 오히려 다산이 과거를 치지 않았으면 하는 제자들은 결국 다산을 배신해가면서까지 응시하지만 줄줄이 낙방의 고배를 마신다.
황상에게 놀라운 점은 나이가 들어도 스승이 그에게 남긴 삼근계의 명령을 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려운 가정 사정에도 서책을 놓지 않고 시를 지으며 스승의 분부를 십계명처럼 지킨다. 이런 그의 정성은 황상의 말년에 그를 꽃 피게 한다. 정약용의 아들들과의 교류, 김정희 형제들과의 교류 등을 통해 강진 촌구석의 황상은 중앙 문단의 명사로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정약용과의 만남과 황상의 지독한 노력(삼근계 실천)의 결과물이다. 여기에 대비해 보잘 것 없이 쇠락해진 스승을 배신하며 다른 이들에게 붙은 제자들과 그 말년의 몰락은 좋은 비교를 이룬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세 차례 눈시울을 붉혔다. 위의 삼근계를 받는 장면에서, 정약용 해배 후 10년이 흘러 스승과 제자의 만남에서, 정약용 사후 노구(老軀)를 이끌고 강진에서 마재(현 남양주 소재)까지 걸어가 정약용의 아들들과 재회하는 모습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드라마다. 특히 그토록 그리던 제자와의 재회는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죽음을 목전에 둔 노스승마저 일어나게 한다. 스승께 울며 절하고 그의 손을 잡는 제자, 그 제자를 위해 자신의 일부를 기꺼이 내주는 스승. 눈물겹게 아름다운 만남이다. 나를 알아주고 나를 위해 애써주는 사람을 위한 헌신적인 자세는 인간사 최고의 장면이 아닐까 싶다.
정약용과 황상의 만남을 둘의 관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유명 인사들에게까지 연쇄 파급효과를 낳는다. 혜장 스님, 초의 선사, 정양전, 권돈인, 허련, 추사 형제들 등 당대의 쟁쟁한 인사들이 만나고 헤어진다. 이는 인위적인 만남이라기보다 다산과 황사의 만남에서 출발해 그 아름다운 향기가 다른 이에게 파급된 결과다. 향기란 바로 ‘시’다. 시를 통해 이야기 하고 시를 통해 삶을 즐기는 그들은 결국 시를 통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간다. 그리하여 강진과 경기의 먼 거리를 오가며 정을 나누고 의리를 쌓게 된다. 여기에 편지의 역할 또한 빼놓을 수 없겠다. 지금은 거의 폐기물 단계에 있는 손편지는 쓰는 이의 절절한 마음과 정이 녹아 있으니 받는 이 역시 그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덧붙여 그들이 시를 통해 교유함으로써 마음은 더 넉넉해지게 된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만남인가. 스승은 제자를 사랑하고 제자는 평생 스승의 가르침을 놓지 않고 실천하며, 이 만남은 대를 이어 지속되니. 서로를 아끼지 못해 안달이 나는 모습은 주위가 초라한 나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대부 양반들과 중인 아전의 신분을 초월한 교류 역시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강고한 신분제가 유지되던 당시에 ‘시’를 통한 이 만남이 정말 r자신에게 매몰되어 주위를 돌아보지 못한지 오래다. 벗들이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않은 게다. 새로운 만남도 많지만 계속 이어지지 않는 것은 나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다산과 황상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짧은 지면에 다산의 새로운 모습과 황상의 일생을 보여줄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이 독후감을 통해 스승의 제자의 훌륭한 만남이 이후 인생에 얼마나 큰 파급을 미치는 말하고 싶을 뿐이다. 아마도 교학상장(敎學相長)이 최고로 구현된 모습이 아닐까 싶다.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으며 나도 그처럼 가슴이 따뜻한 스승이 되어보자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정민 교수의 <삶을 바꾼 만남>을 읽고서는 그런 스승을 넘어 제자들과 인생의 교류를 해야 한다는 느낌이 든다. 다시 말하지만 나만 바라본 삶에 대한 본질적 전환이 요구되는 것이다.
두꺼운 책이지만 손에서 떼지 못하고 조금조금이라도 읽으며 일주일을 보냈다. 마음에 찡한 감동을 넘어 깊은 울림은 주는 이 책은 근래 읽은 책 가운데 최고가 아닐까 싶다. 사제의 정을 넘어 인간적 만남과 교류를 원하는 이들은 반드시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 봄에 감동을 느끼고 싶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