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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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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6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 정독을 하며 읽자니 다루고픈 주제가 너무 많다. 저자 정민 교수는 정약용과 황상의 만남을 대주제로 하고 그 속에 두 인물을 비롯해 주변인들의 다양한 발걸음을 추적하였는데, 그들을 다루는 소재가 편지.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가 소통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서 구시대의 색채가 물씬 풍기는 소통의 수단이 나는 왜 그리 아름다워 보이는 걸까? <미쳐야 미친다>이래 정민 교수와 주인공들에 대한 호감도가 높은 상태에서 출발한 이 책. 감동의 물결 속에 나를 던져 본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의 삶. 그렇기에 그 속에는 채우고 가꿔나가야 할 내용들이 많다. 지식은 자신의 노력으로 필요한 만큼 채울 수 있지만, 타인과의 만남은 순간적 재치와 무조건적인 노력만으로 채우기 힘들다. 좋은 만남을 위해 나를 가꾸고 준비해야 함은 물론 상대의 장점을 배우기 위한 노력도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세상에는 많은 만남들이 있지만 그 속내를 자세히 살펴보면 만남이라기보다 마주침이 더 많은 것이다. 곁눈질하거나 흉금을 털어 놓지 않는 관계에서 좋은 만남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만남에는 이처럼 마음의 교류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여기 다산 정약용과 치원 황상의 만남을 살펴보자. 저자는 이들의 만남을 맛남 만남이라 평했다.

 

정약용은 신유박해(1801)로 인해 형들과 함께 유배의 길을 떠난다. 그가 당도한 곳은 땅 끝에 위치한 강진. 멀리 한성에서 이곳으로 누군가 유배를 온다고 하니 사람들이 다 피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마도 당시 강진 사람들은 무슨 괴물이라도 오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정약용은 이런 상황에서도 묵묵히 학문에 전념하고 자신에게 집중한다. 물론 마음 한켠에는 두고 온 가족에 대한 미안함 가득했다(이는 그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난다). 오랫동안 정약용을 지켜보던 아전들이 서서히 경계의 눈초리를 풀고 제 자식들을 가르쳐 주십사하고 나타났다. 강진이라는 궁벽한 시골 마을에 제대로 학문적 기초를 닦은 이가 얼마나 되었겠는가. 큰 기대를 않던 정약용에게 한 더벅머리 소년이 묻는다.

 

선생님! 제게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꼭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합니다. 저 같은 아이도 정말 공부할 수 있나요?”

그렇구나. 내 이야기를 좀 들어보렴. 배우는 사람은 보통 세 가지 큰 문제가 있다. 너는 그 세 가지 중 하나도 없구나.”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민첩하게 금세 외우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을 가르치면 한 번만 읽고 바로 외우지. 정작 문제는 제 머리를 믿고 대충 소홀히 넘어가는 데 있다.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지. 둘째, 예리하게 글을 잘 짓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질문의 의도와 문제의 핵심을 금새 파악해낸다. 바로 알아듣고 글을 빨리 짓는 것은 좋은데, 다만 재주를 못 이겨 들떠 날리는 게 문제다. 자꾸 튀려고만 하고, 진중하고 듬직한 맛이 없다. 셋째, 깨달음이 재빠른 것이다. 대번에 깨닫지만 투철하지 않고 대충 하고 마니까 오래가지 못한다.

내 생각을 말해줄까? 공부는 꼭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둔하다고 했지? 송곳은 구멍을 쉬 뚫어도 곧 다시 막히고 만다. 둔탁한 끝으로는 구멍을 뚫기가 쉽지 않지만, 계속 들이파면 구멍이 뚫리게 되지. 뚫기가 어려워 그렇지 한번 구멍이 뻥 뚫리면 절대로 막히는 법이 없다. 앞뒤가 꼭 막혔다고? 융통성이 없다고 했지? 여름 장마철의 봇물을 보렴. 막힌 물은 답답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빙빙 돈다. 그러다가 농부가 삽을 들어 막힌 봇물을 터뜨리면 그 성대한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단다. 얼마나 통쾌하냐? 어근버근 답답하다고 했지? 처음에는 누구나 공부가 익지 않아 힘들고 버벅거리고, 들쭉날쭉하게 마련이다. 그럴수록 꾸준히 연마하면 나중에는 튀어나와 울퉁불퉁하던 것이 반질반질 반반해졋 마침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구멍을 어떻게 뚫어야 할까? 부지런히 하면 된다. 막힌 것을 틔우는 것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연마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어찌해야 부지런히 할 수 있겠니?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으면 된다. 그렇게 할 수 있겠지? 어기지 않고 할 수 있겠지?” (본문 34~36쪽에서)

 

제법 긴 글을 인용해보았다. 질문을 한 소년이 바로 당시 15세의 황상이다. 그 소년에게 정약용은 삼근계(三勤戒), 즉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히 공부할 것은 당부한다. 황상은 이때부터 삶이 바뀌게 된다. 시골 아전의 아들이었던 그는 정약용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가업을 이어받아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는 스승의 지도아래 배우고 익힌 것을 무한히 반복하는 삶을 살아간다. 정약용 이런 제자를 가르치며 유배지에서의 곤난함을 극복해간다. 이후 두 사람은 마치 바늘과 실 같은 인연을 이어가며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로서 살아간다. 당시 강진에는 정약용 문하에 여러 제자들이 있었지만 다산의 해배(解配) 후까지 그 연을 이어가는 사람은 황상 뿐이었다. 대체 그는 왜 그랬을까?

 

황상은 스승 정약용을 만남으로써 자신 안에 있던 능력의 싹 같은 것을 발견한다. 특히 그는 시 분야에 탁월함을 보이게 된다. 스승의 지독한(정약용은 상당히 깐깐하고 어려웠던 스승이었던 듯하다) 조련에도 게을리 행치 않고 수 십 년간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또한 스승이 꿈꾸던 유학자로서의 이상적 삶을 그대로 실천하며 산속(일속산방)에서 살아간다. 이런 그에게 다산은 오래 전부터 과거 응시를 권하지만 듣지 않는다. 그에게는 그런 꿈이 없었기 때문이다. 외진 곳에서 농사지으며 책 읽고 시를 짓는 삶에 그는 만족해한다. 이런 젲의 삶에 스승도 결국 만족해 한다. 오히려 다산이 과거를 치지 않았으면 하는 제자들은 결국 다산을 배신해가면서까지 응시하지만 줄줄이 낙방의 고배를 마신다.

 

황상에게 놀라운 점은 나이가 들어도 스승이 그에게 남긴 삼근계의 명령을 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려운 가정 사정에도 서책을 놓지 않고 시를 지으며 스승의 분부를 십계명처럼 지킨다. 이런 그의 정성은 황상의 말년에 그를 꽃 피게 한다. 정약용의 아들들과의 교류, 김정희 형제들과의 교류 등을 통해 강진 촌구석의 황상은 중앙 문단의 명사로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정약용과의 만남과 황상의 지독한 노력(삼근계 실천)의 결과물이다. 여기에 대비해 보잘 것 없이 쇠락해진 스승을 배신하며 다른 이들에게 붙은 제자들과 그 말년의 몰락은 좋은 비교를 이룬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세 차례 눈시울을 붉혔다. 위의 삼근계를 받는 장면에서, 정약용 해배 후 10년이 흘러 스승과 제자의 만남에서, 정약용 사후 노구(老軀)를 이끌고 강진에서 마재(현 남양주 소재)까지 걸어가 정약용의 아들들과 재회하는 모습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드라마다. 특히 그토록 그리던 제자와의 재회는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죽음을 목전에 둔 노스승마저 일어나게 한다. 스승께 울며 절하고 그의 손을 잡는 제자, 그 제자를 위해 자신의 일부를 기꺼이 내주는 스승. 눈물겹게 아름다운 만남이다. 나를 알아주고 나를 위해 애써주는 사람을 위한 헌신적인 자세는 인간사 최고의 장면이 아닐까 싶다.

 

정약용과 황상의 만남을 둘의 관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유명 인사들에게까지 연쇄 파급효과를 낳는다. 혜장 스님, 초의 선사, 정양전, 권돈인, 허련, 추사 형제들 등 당대의 쟁쟁한 인사들이 만나고 헤어진다. 이는 인위적인 만남이라기보다 다산과 황사의 만남에서 출발해 그 아름다운 향기가 다른 이에게 파급된 결과다. 향기란 바로 . 시를 통해 이야기 하고 시를 통해 삶을 즐기는 그들은 결국 시를 통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간다. 그리하여 강진과 경기의 먼 거리를 오가며 정을 나누고 의리를 쌓게 된다. 여기에 편지의 역할 또한 빼놓을 수 없겠다. 지금은 거의 폐기물 단계에 있는 손편지는 쓰는 이의 절절한 마음과 정이 녹아 있으니 받는 이 역시 그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덧붙여 그들이 시를 통해 교유함으로써 마음은 더 넉넉해지게 된다.

 

~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만남인가. 스승은 제자를 사랑하고 제자는 평생 스승의 가르침을 놓지 않고 실천하며, 이 만남은 대를 이어 지속되니. 서로를 아끼지 못해 안달이 나는 모습은 주위가 초라한 나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대부 양반들과 중인 아전의 신분을 초월한 교류 역시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강고한 신분제가 유지되던 당시에 를 통한 이 만남이 정말 r자신에게 매몰되어 주위를 돌아보지 못한지 오래다. 벗들이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않은 게다. 새로운 만남도 많지만 계속 이어지지 않는 것은 나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다산과 황상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짧은 지면에 다산의 새로운 모습과 황상의 일생을 보여줄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이 독후감을 통해 스승의 제자의 훌륭한 만남이 이후 인생에 얼마나 큰 파급을 미치는 말하고 싶을 뿐이다. 아마도 교학상장(敎學相長)이 최고로 구현된 모습이 아닐까 싶다.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으며 나도 그처럼 가슴이 따뜻한 스승이 되어보자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정민 교수의 <삶을 바꾼 만남>을 읽고서는 그런 스승을 넘어 제자들과 인생의 교류를 해야 한다는 느낌이 든다. 다시 말하지만 나만 바라본 삶에 대한 본질적 전환이 요구되는 것이다.

 

두꺼운 책이지만 손에서 떼지 못하고 조금조금이라도 읽으며 일주일을 보냈다. 마음에 찡한 감동을 넘어 깊은 울림은 주는 이 책은 근래 읽은 책 가운데 최고가 아닐까 싶다. 사제의 정을 넘어 인간적 만남과 교류를 원하는 이들은 반드시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 봄에 감동을 느끼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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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식의 문화 읽기 두란노 목회와신학 총서 8
이문식 지음 / 두란노아카데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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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식은 광교산울교회의 담임목사다. 그의 설교를 여러번 듣기도 했지만 그와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다. 그저 제법 거리가 있는 목사와 성도의 사이랄까? 그렇기에 그의 책을 객관적으로 읽고 공부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를 달변가로 칭하면 실례가 될지 모르겠으나 그는 일반인의 수준을 뛰어넘는 언변과 지식의 소유자로 보인다. 그것도 한 교회의 목사지만 자신의 전공 분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대한 관심(특히 통일 문제), 역사, 전통, 문화의 영역에도 광범위한 독서와 연구를 하는 목사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책장을 넘기면 우선 '영화 읽기'가 나온다. 아바다, 밀양, 벰파이어,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기독교식으로 읽고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이런 영화를 사탄이라거나 반기독교 영화라고 매도하지 않는다. 그 속에 숨겨진 감독의 의도와 사회 의식을 읽고 이를 이떻게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여햐 할지 제안해준다. 특히 사랑과 치유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밀양'에 대한 평가는 압권이라 생각된다. 이는 당연히 일반인의 영화관과는 다르다.

 

  이문식 목사의 이 책에는 '성 문제'도 다룬다. 내 눈길을 끈 대목은 코엘류의 <11분>을 평가하는 대목이다. 이 소설 속에서 고대 중동의 이단적 속성을 찾아내 비판하는 대목은 그의 높은 안목을 알게끔 해준다. 심지어 대체 '이 사람은 어디까지 공부해서 알고 있는거야?'라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여기에 성전환자들을 악마라고 비난만하지 말고 먼저 인권의 차원에서 그들에게 접근해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고까지 한다. 대표적 보수파라 할 수 있는 기독교계에서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여기에 한국의 전통문화를 기독교식으로 이해하는 법과 21세기 사회에 교회의 역할 등에 대해 이 책은 상세히 설명해준다. 즉 이 책은 원래 일반 대중을 위해 쓴 책이 아니라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국 기독교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긴밀하고 날카로운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일반 기독교인들이 읽어서 안될 책도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식 사회 이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기독교에 관심 있는 이라면 누구나 읽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문제점도 있다. 워낙 방대한 주제를 다루다보디 역사 고증에 어느 정도의 문제가 보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지중해 문명의 평민이 문자를 자유롭게 해독한 것이 기원후 1세기라고 하는데, 인류 역사에서 평민들이 문자를 해독하고 책을 자유로이 보게 된 것이 인쇄술 발달 이후라고 본다면 이는 정정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글쓰는 내가 기독교인이라 기독교의 입장에서 사회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늘 갈급했다. 하지만 이땅의 많은 목사들은 지나치게 협소한 주장만을 내세우기에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런 점에서 이문식 목사의 <이문식의 문화읽기>라는 책은 내게 적잖은 방향점과 생각거리를 안겨주었다. 좋은 책을 읽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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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3
이나미 지음 / 책세상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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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자유라고 주장한 박영효는 친일인사가 되었고, 민권을 소리 높여 주장한 독립협회는 외국 군대를 불러서라도 동학을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단지 자유롭고 싶다는 '소박한' 신념이 친제국주의로 발전했으며 반민중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러한 귀결은 자유주의의 본질 자체에서도 도출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아나키즘, 포스트모던적 자유주의는,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극우 이념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 이념은 그것을 강제할 근거가 없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이미 자유주의가 아닌 것이다."

이나미,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책세상, 2001, 145쪽에서 인용함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하지만 현실에서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타인에게 간섭하고 강요한다. 가수 신중현이 '미인'이란 노래를 발표한 후 큰 인기를 끌었지만 알지 못할 이유로 금지곡이 된 이후 그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정부는 물론 외세와도 싸워야 했다(본문 참조).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그때를 추종하는 세력들은 소위 (신)자유주의자들 아닌가. 이게 바로 자유주의의 아이러니이자 문제점이다.

 

얇은 책이지만 꽤 공부가 많이 되었다. 자유주의가 무엇인지, 이 사상이 어떻게 태동해 이땅에 전해지게 되었는지 친절하고 자세히 설명해준다. 그리고 짧지만 자유주의가 현실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결국 저자는 이 자유주의에게 대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조금은 놀라운 주장이었다. 내 머리 속에 민주주의만큼이나 자유주의도 당연한 것이었기에 말이다.

 

나는 이런 책이 좋다.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상식나 사실들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책들 말이다. 가령 백승종 선생님이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에서 정조가 신세계를 추구한 혁신군주가 아니라 성리학 체계를 공고하고자 한 보수주의자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데서 어리둥절함을 느끼지만 이것이야 말로 책읽는 재미 아닐까?

 

이나미의 이 책을 읽으며 온통 밑줄을 치고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몇 번이나 되돌아가 다시 읽었다. 내겐 소설만큼이나 흥미를 안겨준 책이다. 그의 다음이 기대된다. 다시 자유주의에게 뒤통수를 맞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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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와 역사 쓰기 이제이북스 아이콘북스 15
셸리 월리아 지음, 김수철 외 옮김 / 이제이북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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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와 역사 쓰기

 

주지하다시피 에드워드 사이드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분쟁지역인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1947년 무렵 유엔이 팔레스타인을 아랍지구와 유대지구로 분할하자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사이드는 빼앗긴 문화에 대한 깊은 귀속감을 가슴 속에 묻은 채 고향을 떠나 삶의 대부분을 타향에서 보냈다. 그렇기에 그는 어느 문화에 귀속되기 보다는 주변인이나 경계인 비슷한 삶을 살게 된다. 사이드는 영어식 이름에 아랍식 성을 가지고 미국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계 기독교인의 감정을 소유한 양면적이고 모순적인 위치를 지닌 사람이었던 것이다. 미국의 우익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사무실이 불타는 등 인종주의자들의 폭력에 시달리면서 사이드는 적대 세력에 대항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세상에 만연해 있는 불의에 맞서는 글쓰기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런 사이드를 대변하는 단어가 있다. 그는 비평을 할 때 시종일관 한 단어만 사용해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저항이라는 단어일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평범치 않은 인생들을 걸은 그에게 문학과 문화비평마저도 사회와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이자, 서구 중심주의로 경도된 세계를 저항하는 강력한 무기였던 것이다. 이런 그의 생각을 담은 글이 바로 오리엔탈리즘문화와 제국주의. 오늘 읽은 이 책은 작은 소책자지만 에드워드 사이드의 삶과 글쓰기에 대해 잘 정리하고 있다.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어렵다. 그것은 사이드를 분석하는 틀로 현대 철학을 이용하고 있어서인데, 그람시, 푸코, 데리다,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난해한 철학이 책을 이해하기 힘들게 한다. 적어도 내게는.

 

어느 역사학도가 말했듯이 오리엔탈리즘을 읽고 나서 입가심정도로 읽으면 괜찮을 법한 책이다. 따라서 사이드를 처음 접하는 이에게는 이 책을 권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내공을 쌓은 이에게 적합한 책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몸으로 부딪힌 지식인, 에드워드 사이드를 존경한다. 어디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큰 권력 집단(특히 서구)에 저항하면서 자신을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그를 동정하면서도 그의 용기에 박수치지 않을 수 없다. 내게 없는 용기와 실천 의지를 가진 인물이기에. 다시금 사이드를 생각하게 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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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의 여왕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9
조범환 지음 / 책세상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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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좋은 책이었다. 다소간 학술적 냄새가 풍기긴 하지만 쉽게 접할 수 없는 역사 지식들을 알게 되어 제법 유익한 책이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알게 된 잘못된 정보들을 정리하여 체계적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출간된지 제법 된 책인데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외에는 변변한 자료가 없는 우리의 고대사. 그 속에 남겨진 작고작은 사료들을 확인 또 확인한여 겨우겨우 사실들을 발견해낸다는 사실에 안타까움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낀다. 그리하여 가끔은 고대사는 잘 짜여진 소설일지 모른다는 착각마저 든다. 우리에게 없는 자료가 중국과 일본에 풍부하게 남아 있을리도 없고. 안타까운 대목이다. 이 책에도 이런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즉 사료의 부족분을 대부분 저자의 합리적(?) 추론에 의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선 선덕여왕을 보자. 그녀가 기혼자인지 몰랐다. 그것도 자신의 친삼촌과 결혼했을 확률이 높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녀는 없었던 듯하다. 더구나 드라마에서 멋있게 그려진 비담이 실은 선덕여왕의 치세 마지막에 반란을 일으켜 그녀가 그 와중에 죽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다음에 즉위한 진덕여왕은 남겨진 기록이 더 없는 여왕이다. 결혼 여부와 자식 유무는 확인할 길이 없단다. 그렇지만 불교에 많이 의지한 선덕에 달리 진덕은 한화정책(당나라를 배우려는 정책)을 펼쳤다는 점에서 신선함 마저도 느껴졌다. 여기에 색녀라고 알려진 진성여왕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주장에 고개가 잠시 끄덕여 진다. 즉 당시 신라 사회의 여건상 그녀의 역할은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제법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물론 미남자를 불러들여 그들에게 정치를 맡긴 점은 비판 받을 수 있겠지만, 삼촌과의 애정행각 같은 이들이 어쩌면 유교적 논리에 치우친 후대인들의 외눈박이식 비판일 수 있다는 얘기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이 혹은 지식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마저 느끼지만 그렇기에 새로운 사실을 알고자 진력하는 일에 더욱 흥미가 느껴진다. 나 같은 이의 경우 역사에서 더욱 그렇다. 비록 책을 덮음과 동시에 많은 사실들을 잊어버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시 펼칠 때마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되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ㅎㅎㅎ 자화자찬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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