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주인공은 모두 길을 떠날까? - 옛이야기 속 집 떠난 소년들이 말하는 나 자신으로 살기 아우름 3
신동흔 지음 / 샘터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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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눈여겨 읽는 책이 동화, 전설, 민담 같은 류들을 재해석한 것들이다. 이야기들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도 재밌지만 그것을 다르게 읽으면 이전엔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나처럼 고지식하게 지면에 드러난 바만 취하는 사람은 쉽게 눈치 채지 못지만 곱씹어 읽어 이야기를 내면화한 이들에겐 드러내지 않은 속살이 보이는 것이다. 저자의 그런 능력을 부러워하며 책장을 넘겼다.

왜 주인공들은 길을 떠나야했을까? 어느 지인이 그랬다. 당연하지 않냐고. 그는 그래야만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강변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너무 단순하고 모범적인 정답이다. 그렇다고 나는 이 주제를 그리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주인공의 험난한 경험과 그 의미만 눈여겨 보았지 그들의 길떠남은 주목하지 못했다. 이를 저자는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길떠남이란 물리적으로 집 밖을 나서는 일일수도 있지만 이것은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주저앉지 말고 길을 찾아 움직이라는 것, 이리저리 재거나 눈치를 보지말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삶을 찾아 나서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예로 백설공주와 바리데기를 들고 있다. 나는 무릎을 쳤다.

백설공주는 위험하고 무서운 숲 속에 버려졌지만 혼자 힘으로 개척해 나갔다. 바리데기 역시 온갖 고난과 역경을 거쳐가며 서천서역국에 도착하여 자신을 버린 부모를 살리기 위한 약수를 떠간다.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한 그들은 이미 동화 속 어린 공주의 이미지를 벗고 있다. 어떻게 동화와 민담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한편 장화와 홍련에 대해서는 큰 비판을 가한다. 그들은 길떠남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의 품에 안겨 자란 장화와 홍련은 위기에 직면해서도 수동적이었다. 이런 비판은 아버지가 고이고이 키운 여우 누이에게도 적용된다. 아들을 불신한 아버지의 오판과 무한한 딸 사랑은 누이를 구미호처럼 키워낸 것이다. 이점에서 저자는 현대 부모들의 유별난 자식 사랑에도 문제가 있으며 옛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를 깨닳아야 한다고 말한다. ‘신동흔‘이라는 저자가 크게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의 주재료는 그림 형제의 동화와 우리나라의 전래 민담 그리고 세계 각지의 전설들이다. 이를 저자가 길떠남이라는 주제에 맞게 재구성하였다. 책은 매우 읽기 쉽고 현대적 재해석이라 할 정도로 이해하기 좋다. 다르지만 비슷한 면을 가진 책이 있다.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줄까>이다. 이 책 역시도 전래동화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한다. 책읽는 재미를 안겨주는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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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이 함께 성장하는 수업 - 동료 교사의 눈으로 수업을 새로 보다
서동석 외 지음 / 맘에드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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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수업을 통해 평가받는 존재 아닐까 한다. 즉 교사의 본질은 수업을 통해 드러나며 그 본질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적 현실에서 수업만을 준비하며 시간을 투자하기란 쉽지 않다. 해야 할 잡무와 많은 학생들과의 상담이 늘 기다리고 있다. 핑계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수업이 뒷전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만큼 못다한 수업에 대한 갈급함도 크게 남아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게을러질대로 게을러진 나를 반성해 본다. 책 내용의 주무대인 서울의 영림중이 어떤 곳인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그곳의 선생님들은 함께 수업을 준비하고 서로를 도와준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의지와 뜻 있는 사람들을 모아 함께 헤쳐 나가려는 마음가짐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좋은 사례를 배웠다.
      
수업은 학교 교육의 본질이자 교사가 지향해야 할 유일한 지점이다. 물론 상담도 있고 교육행정도 뒤따라야 하지만 그보다 수업은 우선이다. 오늘날 수업은 큰 변화의 물결 앞에 있다. 전통적인 강의식이 여전히 대세지만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증가하는 현실 앞에서 강의식만을 주장하기 힘들다. 따라서 적지 않는 교사들이 이 현실적 문제 앞에서 고민하고 힘들어 한다. 나 역시도 그렇고. 이런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수업 연수도 듣고 관련 책도 읽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수업의 주인공이 나라고 생각하며 지내왔다. 이런 사고가 깊어질수록 학생들과의 거리는 멀어지는 듯하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대의 학생들을 나의 세대로 강제로 끌고가는 듯한 인상을 받곤 한다. 특히 중학교에서. 이 지점에서 나의 변화를 절감하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느끼는 것은 혼자도 좋지만 함께 하는 연구가 모두에게 좋다는 점이다. 시행착오 할 수 있는 시간을 줄이고 타인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전문적학습공동체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만 현실적 제약에 어려움이 많다. 게다가 강요에 의한 활동도 무시 못하는 수준이다. 이에 관리자들의 격려와 교사 스스로의 자발적 연구모임이 필요하다. 꼭 금전적 요소가 아니어도 수업 변화를 꾀하는 교사들이 많기에 공간적, 시간적 여건만 주어진다면 많은 교사들이 참여할 것이다. 관리자와 교육청에서는 이점에 주목해주었으면 한다.

교사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수업 연구, 그런 교사들에 의한 교실 변화는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2019년에는 교실이 좀 더 열리고 변화가 일어나길 빈다. 물론 그 속에는 나의 적극적 참여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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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근대 - 100년 전 영국이 평가한 한국과 일본의 근대성
박지향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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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자의 의도가 너무 강하게 드러나 독자의 독서방향을 침해하지 않을까 지레 걱정되었다. 내용은 그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저자의 강한 성향? 자기 확신이 많이 드러나는 책임은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저자가 열심히 연구하고 확인한 결과인만큼 배울 게 많은 책인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일그러진 근대>는 비교사의 측면에서 100년 전의 한일관계를 다루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제국 영국의 눈으로 본 준제국 일본과 준식민지 조선을 설명한다. 오리엔탈리즘으로 삐뚤어진 제국의식은 그들을 동경하며 따르려는 일본을 비하하거나 경계한다. 영국은 근대화(혹은 서양화)에 어느정도 성공한 일본을 인정하며 제국의 반열에 끼워주려 하지만, 러일전쟁을 거치며 동아시아에서 자국의 이익을 침해받자 바로 본성을 드러낸다. 이런 점을 간파한 일본은 20세기 초반이 되면 반대로 영국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이에 비해 영국은 조선에 대해 시종일관 폄하하는 자세를 보인다. 부패하고 뒤쳐진 이 국가는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할 자격이 없기에 일본같은 문명국에서 지배받는게 낫다는 의견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문명화의 최일선에 서 있는 영국인이지만 조선을 바꾸려는 의지는 없어 보였다. 그보다 자신들을 대신해 조선에 지극히 관심을 보이던 일본이 눈에 들어왔다. 일본인에 대해 가졌던 긍정적인 생각이 점차 바뀌어도 영국인은 조선 문제를 일본이 처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조선은 영국인들의 눈에는 어찌할 수 없는 나라였다.

위와 같은 점들을 염두에 두고 느낀 점을 정리해 본다. 우선 이 책에서는 100년 전 스스로 1등 인종이라 생각하는 영국인들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은 문명화의 앞장선 우수 국민으로 자기의 역할을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고 착각한다. 당연히 그들이 남긴 기록은 거만하고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짐작 가능한 내용이지만 영국인 스스로 남긴 기록을 확인하니 화나면서도 눈길이 간다.

둘째, 일본을 이해하는 영국의 시선이 정부와 민간인 사이에 간격이 크다는 점이다. 즉 영국 정부는 내내 일본의 한국 정책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위에서 밝힌 바처럼 문명의 입장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는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외교적으로도 일본을 이해하련는 자세를 강하게 드러냈다. 반면 영국의 민간인들은 처음에는 정부와 비슷한 주장을 펼치다 제국 일본의 진면목을 확인한 뒤에는 일본은 비판하는 자세를 취한다. 오히려 한국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셋째,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기심은 예나 지금이나 믿을 수 없다. 자국의 이익 앞에서 어떠한 거짓과 가식도 서슴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영국도 일본도 마찬가지다. 약소국의 입장이나 그 나라 국민들에 대한 이해는 없다. 이용할 대상으로만 판단하고 자신들이 무엇을 해주었나만 강조한다. 시간 관념, 교통 시설, 건축물 등 드러내보일 수 있는 변화들을 통해 문명화의 역할을 다했다고 주장한다. 지금의 일본 우익 정치인들이 자주하는 망언들을 보면 여전히 이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확인할 수 있ㅆ다.

넷째, 저자 박지향은 100년 전의 조선에 대해 ‘조선‘이라 부르지 않는다. 대신 책 전체에서 한국이라고 썼다.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분명 지금의 한국과 과거의 조선은 다른 나라인데 왜 저자는 한국이라고만 썼는지. 연속성을 중요시했기 때문일까 궁금해진다.

아쉬운(?) 것은 저자가 뉴라이트 계열로 들어갔다는 점이다. 이 책은 역사전문 출판사인 푸른역사에서 출간되었지만 최근의 책들을 보면 우익 관련 책들을 전문으로 하는 기파랑에서 나오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색채가 강하고 박정희 시절을 옹호하며 MB 정부에 아부하던 그들과 손잡은 저자를 고운 눈으로 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이 책까지 엮어서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저자가 영국사 전문가임에는 틀림없으니까.

아무튼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의 독서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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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제3판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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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나무야나무야>와 <강의>를 읽었던 터였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 유명해서 일부러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다. 서점에서 몇 번이나 들었다 놓았는지 모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읽게 되었다. 어쩌면 신영복의 내면을 이제서야 비로소 접하게 된 듯하다.

책을 읽으면 동시에 나를 비추게 된다.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내가 감옥에 있다면, 내가 편지를 쓴다면, 내가 직접 펜으로 써야 한다면, 나를 면회 와 줄 사람은, 나는 감옥에서 무슨 책을 읽을까, 내가 감옥에서 글을 쓴다면 어떤 주제가 눈에 들어올까, 내게 형수와 계수가 있다면 그렇게 편지할 수 있을까, 나의 내면은 외부의 자극에 잘 견뎌낼까 등등 끊임없는 질문과 함께 책장을 넘겼다.

이렇게 읽자니 감옥에 있던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기 보다 그의 섬세한 시선이 무척이나 부러워졌다. 관조하는 듯한 눈길과 성실한 자세는 현실에 매몰되 살아가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엉뚱한 상상인지 모르겠지만, 신영복의 글을 읽는 내내 나는 장영희가 떠올랐다. 그녀의 수필들 역시 그녀가 가진 육체적 한계로인해 공간적 제약이 많지만 그대신 주변인과 세계를 무척이나 따뜻하게 관찰하고 시선을 나눈다. 결국 정상적 육체를 가진 내가 더 부끄러워지고 부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의 글은 그런 힘이 있었다. 신영복의 글 역시 그렇게 느껴졌다.

여기서 신영복의 약력을 읊을 필요는 없다. 이미 이 책이 세상에 나온지 30년이 된 시점에서 그런 일을 무의미해 보인다. 이 책은 분명 이제 서간문이라는 형식을 넘어 문학의 한 장르를 차지하고 있다. 강한 톤의 글이 아님에도 어느새 마음에 스며들어 그의 정신에 동화되어 버린 나를 발견한다.

살아가면서 언젠가 이런 글쓰기를 하고픈 욕구마저 든다. 펜으로 눌러쓴 아날로그식 글쓰기도 고프지만, 가족에게 편지 쓰고 일상을 눈여겨보는 생활을 게을리하면 안되겠구나 하는 반성도 하게 된다. 일본어투의 제목이 어색하지만 감옥에서의 사색이라는 개인적 경험이 자신을 넘어 사회에 어떤 자극을 주었는지 생각하면 후대인으로서 미안하면서도 고맙다. 이제 그를 조금 알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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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도서 구매 이력이란다.
책을 덜 샀다니 다행이다.
집이 좁아 더 놓을 곳도 없다.
이젠 비워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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