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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지기 전에 - 1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
김정섭 지음 / Mid(엠아이디) / 2017년 6월
평점 :
2014년은 제1차세계대전 발발 100주년, 내년은 제1차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이 된다. 지금 제1차세계대전이 주목 받는 이유 중 하나는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세력전이가 일어나려 하고 있다는 것이 당시 영국과 독일 사이의 관계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패권국과 도전국 사이의 전쟁이 벌어진다면, 발칸반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반도가 그 무대가 될지도 모른다.
1870년 통일에 성공한 독일은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비스마르크는 유럽 각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으며 프랑스를 고립시키려 했으나, 비스마르크가 퇴임한 이후 독일이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형국이 된다. 알자스-로렌을 빼앗긴 복수심을 잊지 못한 프랑스, 독일이 패권국으로서의 위치를 위협할지도 모른다 생각한 영국, 독일의 동맹국 오스트리아와 발칸반도를 둘러싸고 경쟁관계에 있던 러시아가 손을 잡으며 삼국협상이 성립된다. 유럽대륙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뭉친 삼국협상과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삼국동맹 사이의 양극체제로 재편된다.
1914년 세르비아의 암살자에게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오스트리아 vs. 세르비아의 전쟁은 오스트리아vs. 러시아의 전쟁으로 독일 vs. 프랑스, 러시아, 영국의 전쟁으로 비화되며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낙엽이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던 약속은 허무하게도 장장 4년여의 지루한 참호전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천만 명이 전사하고, 러시아제국, 오스만투르크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독일제국, 네 개의 제국이 붕괴했고, 승리한 영국도 미국에 패권을 물려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낙엽이 지기 전에>는 사라예보 암살사건부터 전쟁 발발까지 각국 지도부의 외교적, 군사적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다. 저자는 전쟁의 원인이 제국주의나 양대 동맹의 군비경쟁, 민족주의라는 기존의 통설을 부인한다. 그렇다고 특정 국가나 지도자의 침략 야욕이 부른 전쟁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 대신 지도부의 오판과 무능, 민군관계의 문제를 전쟁의 원인으로 지적한다. 당시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의 지도부들은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과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먼저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짜르의 표현대로 하면 "힘을 과시함으로써 평화를 지킨다"는 정책이었다. 문제는 모든 나라가 같은 생각으로 부딪혔다는 데 있었다. (중략) 위기의 먹구름이 모두의 시야를 가릴 때 절제의 용기를 보여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고, 유약하게 보이지 않기를 원했으며, 상대방이 굴복할 것이라는 환상에 매달렸다. (156)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이 말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어떤 나라가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준비한다 해도, 그 자체로 다른 나라에는 위협이 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전쟁을 준비하다가 결국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던 사건이 제1차세계대전이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외교부 장관이었던 그레이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을 일이킬 목적으로 준비하는 것과 전쟁에 대비하여 준비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차이가 분명하거나 확실치 않다." (322)
게임이론 중에서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가 있다.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고 상호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각각의 행위자가 자신에게 최선인 선택을 한 결과 전체적으로는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는 국제정치에서는 안보딜레마로 응용된다. 즉 "상대방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위협에 직면한 국가는 자구 노력을 기울이지 없는데, 이 자위적 조치가 불가피하게 상대방의 안보를 위협하는 딜레마 상황을 말한다." (320)
죄수의 딜레마 상황 아래선 선제공격이 상책이다. 예를 들어 미소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은 서로 상대방이 먼저 핵공격을 할 수 있다는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먼저 맞기 전에 먼저 때리는 것이 상책이다. 북핵문제도 마찬가지다. 한국, 미국, 일본은 "북한이 핵을 만들기 전에 선제공격을 하자"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법이 될 것이다. 북한 입장에서도 한미일의 생각을 알고 있다면 당연히 "선제공격 당하기 전에 핵을 써버리자"고 생각할 것이다. 미국과 소련은 제3차세계대전이 발발할지도 모른다는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도 자제력을 발휘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북한의 김정은과 미국의 트럼프는? 물론 둘 다 자신에게 가장 합리적 선택을 하겠지만, 그 합리적 선택의 결과가 우리가 생각하는 최선의 해법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느낀 교훈은 인간은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전쟁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