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김영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이 개봉했다. 제목에 나타난 대로 살인자가 영화의 주인공(들)이며, 직접적인 살인사건의 묘사가 등장한다. 남성에 대한 살인 장면과 함께 여성에 대한 살인 장면 또한 반복적으로 나온다. 내가 알기로는 아직까지 이 점에 대해 불편함을 토로하는 논조는 없는 것 같다. 앞서 개봉한 <V.I.P.>가 잔혹한 살인 묘사로 논란이 된 것과는 대조적이다(<살인자의 기억법>이 15세, <V.I.P.>가 청불인 만큼 두 작품의 수위에는 차이가 있다).

 

<V.I.P.>의 잔혹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두고 "여자 죽이는 영화"라고 요약한다. 이러한 요약은 세 가지 이유에서 부적절한 것 같다. 첫째로 <V.I.P.>에서는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죽는다. 수적으로 보면 남자가 더 많이 죽는다. 둘째로 영화의 러닝타임 중에서 여성에 대한 살인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은 대략 25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정확히 재 본 것은 아니다). "여자 죽이는 영화"가 아니라 "여자 죽이는 사이코패스를 둘러싸고 경찰, 국정원, CIA, 북한 간첩이 암투를 벌이는 영화"가 보다 적절한 요약이 될 것이다. 셋째, 이 영화를 "여자 죽이는 영화"라고 요약한다면 <양들의 침묵>도, <살인의 추억>도, <블랙 달리아>도 "여자 죽이는 영화"가 될 것이다.

 

"여자 시체" 역이 아홉 명이나 등장한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었지만, 영화에서 시체로 나오는 여성은 두세 명, 말그대로 시체로서 스쳐가듯이 등장할 뿐이다. 영화의 여성 피해자 중에서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묘사된 인물은 프롤로그의 여학생이다. 이 영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두고 "스너프 필름"과 다름없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본 바로는 이 장면이 관객의 성적 쾌감을 자극할 목적으로 찍힌 것이 아니라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폭력성을 나타낼 목적으로 찍힌 것이다. 영화 속에서의 해당 장면은 에로스보다는 타나토스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물론 <V.I.P.>에서처럼 살해 장면(영화에서 강간 장면은 없다)을 직접적으로 묘사할 필요가 있었냐는 비판은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보스턴에서 가톨릭 교회의 성추행 실화를 영화화한 <스포트라이트>가  실제 강간 장면을 넣지 않고도 묘사했다며 비교한다. 가톨릭 교회라는 추상적 구조와 싸우는 기자들을 그린 <스포트라이트>와 악마적 성격을 가진 사이코패스 살인마와의 대결을 그리는 <V.I.P.>는 장르도 다르고 지향하는 바도 다를 수밖에 없다.

 

<V.I.P.>와 관련된 논란에 대해 어떤 관계자는 자기검열 때문에 "디즈니 영화나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이 발언은 잘못된 것이다. 디즈니 영화는 아무나 만들 수 없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 많다. 그러나 전체관람가, 혹은 12세관람가 영화만이 좋은 영화인가라는 문제 제기는 유효할 것이다.

 

나는 <스포트라이트>, <더 테이블>, <원더우먼>, <아가씨>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영화가 그런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V.I.P.>가 좋은 영화인가 하면 그에 대해서는 개별적 작품에 대한 비평이 필요하다. 피해자 외에 여성 캐릭터가 전혀 없다는 부분은 "여성혐오"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페미니즘은 작품을 분석하는 데 있어 하나의 유용한 틀이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치스가 "퇴폐 예술"을 분류했듯이, 소련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반하는 반동 예술을 분류했듯이, 페미니즘 비평이 "여혐영화" 딱지를 붙이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야말로 페미니즘의 왜소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가 도덕적 선악의 개념으로 해석되어 '올바른 영화'와 '틀린 영화'로 구분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V.I.P.>를 보고 잔혹한 장면에 혐오감을 느끼는 관객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집에서 지상파 TV를 보다가 채널을 돌려 우연히 보게 되는 아침드라마가 아니다.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다. 영화를 보기 위해 돈과 시간을 소모해야 하는 관객이라면, 영화의 시놉시스는 1분만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더라도 영화와 관객의 미스매치가 일어날 수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하나는 <파이 이야기>를 보러 갔다가 호랑이가 동물들을 잡아먹는 장면을 보고 무서워서 극장을 뛰쳐나왔다고 한다. 그렇다고 <파이 이야기>가 나쁜 영화라는 의미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P.S. 이른바 "별점테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욕을 하려면 보고 욕하고, 보지 않았으면 욕하지 마라"는 전통적 견해에 근거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누구나(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어떤 작품에 대한 평가를 내릴 자유가 있다. 물론 영화에 대한 다른 사람의 감상평을 보고 비판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비판을 보고 쓴 비판을 보고 쓴 비판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아무도 영화를 보지 않은 채 영화에 대한 비판만 무한히 재생산되는 건 문제다. 실제 영화를 본 관람객이 내린 평점과 일반인이 내린 평점을 따로 표시되는 추세가 되고 있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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