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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혹은 그림자 - 호퍼의 그림에서 탄생한 빛과 어둠의 이야기
로런스 블록 외 지음, 로런스 블록 엮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평점 :
오늘날 미국이 전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라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건국으로부터 250년이 채 되지 않고, 식민지의 역사까지 합쳐도 400년 정도 되는 역사가 얕은 나라다. 정치와 경제에 있어 역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스페인 사람이 "우리나라가 수백년 전에는 세계 최강대국이었다"고 자랑해도 "그러시군요"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반면에 문화는 역사적 축적이 가지는 무게가 크다. 그리스 사람이 호메로스와 플라톤에 대한 자부심을 피력한다면 들어줄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미국은 수천년간 유럽과 아시아에 비해 문화적 변경에 있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문화 중에서도 문학은 미국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큰 분야다. 단테와 세브란테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오라가지는 못하더라도, 영어라는 언어적 자산을 공유하는 셰익스피어까지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미국문학만을 보더라도 호손과 포에서 폴 오스터와 커트 보네거트로 이어지는 계보는 다른 나라들에 결코 꿀리지 않는다. 사실 문학, 그 중에서도 소설이라는 장르는 역사가 짧다(소설을 뜻하는 영어 단어 novel은 '새롭다'는 뜻이다). 18세기에 처음 국가를 형성한 미국도 따라잡기가 어렵지 않은 분야였던 것이다.
미술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부터 피카소에 이르는 미술사의 계보에서 미국의 이름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물론 미국이 낳은 미술사의 거장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잭슨 폴록,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은 미국이 20세기 후반 현대미술을 이끌어나간 나라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루브르, 오르세, 에르미타쉬 미술관의 그림들이 걸어온 발자취에서 이들 거장들의 작품은 어딘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폴록, 워홀, 리히텐슈타인이 고흐, 고갱, 모네의 그림들보다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종류의 감수성을 요구하는 장르임은 틀림없다.
미국인들도 폴록, 워홀, 리히텐슈타인의 전위적이고 최첨단을 달리는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은 소수의 인텔리겐챠가 아니었을까?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한 화가는 따로 있었다. 이 책의 주인공 에드워드 호퍼(1882-1967)다. 그의 사실주의 작품들은 제1차세계대전, 대공황, 제2차세계대전이 세계를 휩쓸었던 20세기 전반을 그리고 있다. 비록 유럽의 화가들에 비하면 한국에서는 지명도가 떨어지겠지만, 미국에서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을 주제로 하여 <빛 혹은 그림자>라는 책까지 나왔다.
<빛 혹은 그림자>는 독특한 앤솔로지(anthology, 특정한 주제로 여러 작가들의 글을 모은 것)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17개을 모티프로 오늘날 미국의 작가 17명이 단편소설을 썼다. 과문하게도 나는 스티븐 킹과 조이스 캐럴 오츠의 이름밖에 모르겠지만 이들이 오늘날 미국문학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인물들임은 틀림없다. 에드워드 호퍼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여기에 실린 글들은 배경이 되는 시대도 다르고, 글의 장르나 스타일도 다르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작품(<11월 10일의 사건>이나 <밤을 새우는 사람들> 등)이 있는가 하면, 호퍼의 그림이 그리고 있는 장면의 뒷이야기를 그린 작품(<밤을 새우는 사람들>이나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 등)도 있기도 하고, 호퍼의 그림과 직간접적 연관이 없이 주제만을 따온 작품(<바닷가 방>과 <직업인의 자세> 등)도 있다.
하지만 각각 다른 이야기들임에도 불구하고 소설들에서 어떤 공통적인 정서가 느껴진다. 바로 폭력의 그림자다. <정물화 1931>에는 인종차별의 그림자, <사건의 전말>과 <11월 10일의 사건>에는 냉전의 그림자, <햇빛 속의 여인>에는 베트남전쟁의 그림자,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과 <음악의 방>에는 대공황의 그림자, <밤을 새우는 사람들>과 <영사기사>에는 가정폭력의 그림자, <푸른 저녁>과 <밤의 창문>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호퍼의 그림들은 단순명료한 선과 탁한 색의 대비가 특징적이다. 예외적으로 <바닷가 방>은 바닷가로부터 쏟아져내리는 빛이 중심이 되는 밝은 그림이지만, 여기서도 빛과 경계를 이루는 그림자가 그림을 완성시키는 요소다. 대공황 시기 미국의 우울한 사회상이 호퍼의 작품들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빛 혹은 그림자>지만, 역시 대부분의 소설들이 미국 역사에 드리워진 그림자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호퍼의 작품들은 미국적인, 너무나 미국적인 작품들이고, 이 점이 미국인들이 이 작가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생각된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과 <빛 혹은 그림자>에 수록된 소설들이 가장 좋은 교재가 되리라 생각한다.
앤솔로지라는 특성상, 옥석이 구분되지 않은 느낌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수록된 작품들 중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 <직업인의 자세>, <음악의 방>, <영사기사>, <창가의 여자>, <밤의 창문>,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을 수작으로 꼽고 싶다. 에드워드 호퍼 외에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들에 대해서도 같은 컨셉의 앤솔로지가 나왔다면 어땠을까? 잭슨 폴록이나 앤디 워홀의 작품들에 대해서 미국의 작가들이 앤솔로지를 냈다면? 그런 책도 읽어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