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강 제물론① : 나는 나를 잃었다

‘나(我)’를 잃어버린 ‘나(吾)’는 무엇인가. 무엇이 남는가. 이것이 제물론에서 장자가 던지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소요유 첫머리에서 던졌던 주제이기도 하다. (至人無己 / 神人無功 / 聖人無名) 문제의식이 계속 연결되고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는 자아라는 것이 어디 있는지 분석하려 한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온갖 종류의 소리 현상들 배후에 그 소리들이 일어나도록 주재하는 근원적이고 독립적인 주체가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나 묻기만 하고 대답은 없다. 그런 존재는 과연 있는가, 없는가. 이를 두고도 해석이 분분하지만 없다고 해석을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장자는 심리적 현상을 그냥 뭉뚱그려서 자아라고 하지 않고 그것들을 모아서 통일적으로 귀속시킬 수 있는 하나의 주체를 ‘나’라고 한다.

 

제6강 제물론② : 성심과 시비

자아라는 것을 찾기 시작하는 순간 자아는 없어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체는 어떤가. 모든 신체기관과 기능을 주관하는 주체라고 할 만한 것은 또 없다. 낱낱의 몸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마음이나 몸에는 그 배후에 진정한 주재자, 주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장자는 자유와 해방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전쟁터 같은 우리 인생의 피로함이라는 현실인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특히 우리 삶의 양상 중에서도 장자가 제물론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분석하고 있는 것은 시비지심이다. 누구나 문제가 생기거나 어떤 사태에 직면하게 되면,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려는 충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지(智)라고 하는 덕의 단초가 되는 마음이다. 그래서 맹자는 이 시비지심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이고 본래의 능력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런데 장자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장자는 시비지심을 결코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각자의 환경이나 상황이 다르다 보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상이한 결론을 내는 것이다. 장자는 그 관점을 성심(成心)이라고 한다. 성심은 자신의 기준에 집착해 유연성을 잃은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진 굳어진 마음을 뜻한다. 그는 누구나 다 옳다고 할 만한 절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시비를 가리는 것은 성심으로부터 유래하고 사람들이 저마다 주관적인 성심을 가지고 이야기하니 자연히 논쟁을 하면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대주의자에게 최선의 윤리적인 행동은 서로를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장자는 이런 의미에서의 상대주의자는 아니다. 장자의 관심은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 알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 관계를 맺으면서 한 사회 속에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소통을 통해 관계가 만들어지고 변화하고 상호 변화를 통해서 공통의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이 장자의 궁극적인 관심이다. 통일성은 관계를 맺고 상호 변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선험적인 기준으로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 장자의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다. 장자가 말하는 통일성은 어떤 만남을 통해서 서로가 변화하고 변화하면서 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장자는 상대주의를 넘어 새로운 종류의 사람들의 관계맺음을 이야기를 하고 장자가 말하는 도라는 것도 그것을 말한다.

 

제7강 제물론③ : 통위일 / 조삼모사 / 나비 꿈

일상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사태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원칙이나 방법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원칙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 용(庸)이다. 그때그때 닥치는 상황들의 특수성과 조건들, 입장들을 고려해 해결 방식을 이끌어내는 것이 용(庸)의 태도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민한 감수성, 개방성이 요구된다.

단서 없이 공존하는 것 요소들 사이에 통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실제적으로 하나의 공통된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이 조화다. 유가(儒家)에서 조화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각자의 일을 하며 전체 사회에 이바지 한다는 뜻이지만 장자의 화는 옳고 그름을 조화시켜서 하늘의 녹로에서 쉰다. 그것을 양쪽 다 가는 것(兩行)이라고 한다. 『열자』의 조삼모사도 『장자』를 보고 쓴 것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는 성인이 지혜를 써서 어리석은 이를 농락하는 모습이 저공 같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만약 원숭이들이 분노했을 때 저공의 마음속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비지심이 강하게 일어났다면 이런 결론을 가져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장자가 이야기한 하늘의 녹로는 빙빙 돌아가는 원판이다. 원의 중심처럼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 양쪽을 모두 가는 것, 양행(洋行)이다.

장주의 꿈이라는 사건을 전후로 해서 분석해보면 세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1. 꿈꾸기 전의 상태 - 자신이 장주인줄로만 알고 살아가는 사람

2. 꿈속의 상태 - 자신이 장주인 것을 잊고 나비인줄로만 앎

3. 꿈에서 깨어난 상태 - 자신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자각한 장주

꿈에서 깨어난 장자는 자신이 반드시 장주라는 하나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 꿈을 통해서 장주는 자기동일성, 장주라고 하는 인간적 동일성, 여기에 대한 집착을 깨고 급격하고 극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깨닫는 것이다. 장자와 나비는 엄격하게 구분되는 존재다. 그러나 장자가 이야기하는 구분은 영원하고 고정되어있어서 가로지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화(化)를 통해서 끊임없이 가로질러 가야 되고 그 경계를 허물어야 되는, 그런 제한적인 의미에서 전제 된다. 장자는 왜 나비라는 소재를 택했을까. 나비는 처음에는 못생기고 징그러운 번데기다. 그러다 변태의 과정을 거쳐 낡은 허물을 벗고 나비로 탄생하는 것이다. 나비라는 소재 자체가 이미 화(化)라는 주제를 모여주고 있은 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제3강 소요유① : 물고기, 새가 되다

환상적이고 신화적인 소요유를 통해서 장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화(化)’가 중요한 모티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붕의 이야기는 장자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이야기였다. 장자는 기존에 있던 신화적인 내용을 모티프로 해서 화(化)라는 요소를 넣은 것이다. 중국 신화에서 새는 흔히 태양을 상징한다.

 

제4강 소요유② : 무궁에서 노닐다

공자로부터 시작된 이 전통, 떠돌아다니는 지식인들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현상이 된다. 소요유의 遊도 당시의 사회적 현상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런 지식인들의 유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을 유세(遊說)한다고 한다. 그렇게 전국시대는 지식인들이 떠돌며 경쟁적으로 활동한 시대다. 장자는 사인들이 권력자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져 한 나라에 정착하고 거기에 만족하면서 현실에 적응해가는 현상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었다. 특히 장자는 遊가 현실을 창조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적응하는 모습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장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람은 이 천지가 드러내는 규칙성이나 항상성을 잘 파악하는 사람이다. 육기라고 하는 것은 우주의 변화나 운동을 일으키는 다양한 힘의 양상들을 열거한 것이다. 正과 반대되는 의미인 變은 일종의 변칙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예상 불가능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변화들로 이것을 잘 제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를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가치나 기준, 규범들로부터 벗어나서 창조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장자는 遊라고 한다. 무궁은 우리 앞에 닥친 한계를 돌파해간다는 의미가 강하다. 송영자처럼 세상 안에서만 몰두하거나 열자처럼 세상에 초연해서 세상 밖의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과 밖이라는 구분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하나의 대상에는 그 의미나 쓰임새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쓰는가에 따라 대상의 존재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목적이 없다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그 활동 자체를 향유할 수 있는 상태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목적, 삶의 기준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더 삶을 풍요롭게, 창조적으로 살 수 있다. 이것이 소요유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서양은 연금술의 목표가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는데 동양에서는 금도 만들지만 더 궁극적인 목적은 불로장생약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런 불로장생의 개념은 서양에서는 나중에 아랍 시대에 가서 처음 나오는데 그것은 아마도 중국에서 온 것 같다.

이집트의 금속기술하고 마술(magic), 바빌로니아의 점성술, 그리스도교 신학 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 볼 때 이교의 여러 신화들, 그 다음에 그노시스철학, 그 다음에 헬레니즘. 카발라는 또 다른 유대교.. 그렇지만 다 관련이 있다. 그 다음에 플라톤 이후에 헬레니즘 시대에 플로티노스를 중심으로 해서 다시 일어난 신플라톤주의 이런 게 섞여 있는 복잡한 것이 서양 연금술이다.

자비르 이븐 하얀은 만물이 황과 수은으로 되어 있다는 건데 이것은 4원소설의 축소판이다. 4원소의 불이 황이 되었고 그 다음에 물이 수은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공기하고 흙은 빼고 4원소를 둘로 줄여서 모든 것이 이 두 가지로 되어있다는 황수은설에 따르면 황과 수은이 가장 순수한 상태로 결합된 것이 금이나 은이고, 거기에 불순물이 섞이면 그것이 구리도 되고 철도 되고 납도 되고 이렇게 귀금속과 비금속이 구분된다. 그래서 아랍연금술에서는 뭔가 일을 할 때에도 실험을 할 때에도 자꾸 씻는다. 불순물을 없앤다 것이고 액체도 증류를 한다. 그게 일종의 정화작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증류라는 것이 아랍 연금술에서 아주 중요하고 이 사람들이 처음 증류주를 만든 것이다.

그 다음에 알라지al-Razi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의사이다. 연금술이 의학과 제대로 결합한 것이 바로 이 때라고 한다. 아랍의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별명이 붙은 사람으로 아리스토텔레스만큼 아비케나의 철학은 아주 방대하다. 이 사람은 연금술을 부정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물체는 변환이 안된다는 것이 아비케나의 주장이었다.

로버트 오브 체스터, 로저 베이컨, 알베르트 마그누스는 중세 연금술 이론가인데 간단하게 말해서 이 사람들의 연금술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 4원소설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물질변환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할 것인가 이것이 이 사람들의 목표였다. 금속의 변환이 연금술의 주목표였고 이 연금술은 신비주의와 과학이 섞여 있는 것인데 이걸 학자들이 ‘내적연금술’, ‘외적연금술’로 나누어서 외적연금술이 실제로 실험실에서 작업을 하면서 금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내적연금술은 정신의 순화 쪽으로 발전시킨 것이 칼 융이 있다. 이 신비주의, 과학,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게 연금술인데 거기에서 과학의 요소를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추적해 가면 화학으로 넘어오게 된다.

결국 연금술은 금을 만들려는 원래의 목표는 실패했지만 그것을 만들려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산물이 나와서 알콜도 만들었고 여러 가지 산도 만들었고 새로운 금속도 발견했고. 이것이 뜻하지 않았던 소득이라는 점에서 연금술이 그래도 헛일은 아니었다. 그런 작업이 근대 화학이 나오는 기초를 이루었다

파라켈수스는 스위스 바젤대학의 화학교수, 약학교수라 할 수 있고, 의사이기도 하고. 이 사람은 철학적으로는 경험론의 전통에 서있고 그래서 이 사람이 강의실에 갈레노스의 책과 아비케나의 책을 갖고 들어와서 강의하기 전에 그것에 대해 욕설을 퍼부으면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거나 불을 붙여 태워버리는 쇼를 하며 강의를 했다고 한다. 그건 뭐냐하면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을 갈레노스와 아비케나가 망쳐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는 이 사람들의 의학을 거부하고 다시 히포크라테스의 순수한 원시의학으로 돌아가게 할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루터가 부패한 카톨릭 교회를 거부하고 원시 그리스도교로 돌아가려고 했던 건데 그것을 자기가 화학이나 의학에서 한번 똑같은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파라켈수스를 ‘의학의 루터’ 아니면 ‘화학의 루터’라고도 부fms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어떤 도그마보다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믿은 사람으로 파라켈수스는 황수은설에 흙을 덧붙여서 황이 불이고 수은이 물이라면 여기에 흙을 합해서 이것이 3원리(tria prima)라는 것이고 이 3원리가 우주를 이루는 기본 물질이라는 것이다. 화학의 목적은 약을 만드는 데 있다, 이것이 파라켈수스의 주장이었고 갈레노스, 아비케나 모두 생약, 천연약을 썼는데 파라켈수스는 약을 화학적으로 합성해야한다고 해서 광물성 약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파라켈수스의 특징이고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1556년에 <금속에 관하여> 라는 유명한 책이 나오는데 이 책을 쓴 사람이 게오르크 바우어, 라틴이름은 게오르구스 아그리콜라이다. 아그리콜라는 원래 의사인데 이 사람이 광산에서 일을 해서 광부들이 일하는 과정을 늘 눈여겨 봤기 때문에 금속에 대해서 상당히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금속학, 금속 야금 장인들이 하는 일을 기록한 책이 지금도 영문 번역판이 계속 찍혀나올 정도로 평가를 받고 금속학의 온갖 정보가 집대성된 아주 유익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랑스의 화학사학자 엘렌느 메츠제가 화학의 기원을 첫째는 금속학, 둘째는 연금술, 그 다음에 의학 이렇게 세 가지를 기원로 보았다. 그런데 우리가 역사에서 보면 이 세 가지가 반드시 서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겹치는 부분이 많다. 연금술은 20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금속학과 의학이 처음부터 화학과 관련이 깊지만 16세기에 와서 근대화학이 나오기 직전에 큰 구실을 했다.

먼저 금속학의 전통에 대해서 보면, 인류문명에서 불의 발견이 큰 사건이었다. 특히 불을 가지고 금속을 벼리기 시작했을 때 문명의 불이 붙었다. 여러 가지 금속이 있는데 화학기호로 본다면 Cu, Au, Ag, Pb, Sn, Fe 뭐 이런 것들인데, 제일 먼저 많이 쓰인 것이 구리Cu다. 구리를 단단하게 하려고 한 합금의 대표적인 놋쇠는 구리하고 주석Sn하고 섞인 것이다. 그러니까 Copper하고 Tin하고 합해서 Bronze가 된다.

그 다음에 금하고 은이 섞이면 누렇던 금이 흰빛을 띠게 되는데 그걸 그 때는 백금이라고도 불렀다. white gold라고 부르는데 플래티늄하고는 다른 것이다. 진짜 백금은 플래티늄Pt이다. 고대의 금세공술이 굉장히 발달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도자기인데 처음에는 토기로 시작해서 유약이라는 화학 물질을 토기에 발라서 구우면 번들번들 빛이 나는 도기, 자기가 발달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유리를 발견하게 된다. 유리는 규소Si. 요새 말로 실리콘인데, 실리콘하고 모래하고 섞여 가지고 고열에 녹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아주 투명한 맑은 액체가 굳어가지고 유리가 나왔다. 경주박물관에 가면 유리제품들이 있는데 그게 페르시아에서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신라는 유리 공업을 발전시켜서 유리 제품을 많이 만들었다.

이런 것이 모두 화학에 관계된 것이고 그 밖에도 양조술(술 담그는 것), 천을 직조하면서 물들이는 것(염색), 이런 것이 모두 화학에 관계되는 고대의 성과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술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고 아직 과학이라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화학이 물질의 과학이니까 결국 물질이라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 그리스 자연철학에서는 처음에 우주의 본질이 무엇인가에서부터 출발했다. 철학의 시조라고 하는 탈레스는 아르케는 물이라고 했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고 했고 그 다음에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고 했다.

고대에도 물질이 아니라 상당히 추상적인 개념을 제시한 사람도 있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to apeiron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무한자다. unlimited 또는 boundless. 무언가 분명하게 결정할 수 없는 것, 무한한 존재 이것이 우주의 기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다음에 파르메니데스는 이것을 ‘존재being’라는 것으로 본다. 그 다음에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기본을 '수number'라고 했다. 이 경우의 수라는 것은 산술적인 수라기보다 기하학적인 점이 하나하나 쌓여서 마치 원자가 모여서 물질이 된 것처럼 우주가 이루어졌다는 것이 피타고라스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플라톤은 피타고라스부터 내려오는 우화를 빌려서 우주의 기원을 설명했는데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는 원초적인 물질이 대혼돈chaos 상태에 있는 것을 신demiurgos이 여기에 질서를 불어넣어서 질서정연한 우주kosmos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원초적인 상태에서의 재료가 된 4원소를 가지고 신demiurgos이 질서있는 우주를 만들 때 그것을 기하학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4원소 중에 흙은 고정되어 있는데 나머지 불, 공기, 물은 서로 합쳐서 딴 게 될 수도 있고 나눠져서 두 가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고 이렇게 상호가변적인 서로 왔다갔다할 수 있는 것이 된다. 플라톤은 피타고라스의 전통을 이어받아 우주를 완전히 기하학적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을 ‘기하학적인 연금술’이라고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물질에는 재료가 있고 그 재료를 지배하는 원리 같은 것이 그 속에 들어있다고 보았다. primary matter에 네 가지 성질이 부가되어서 그 원소가 결정된다고 했는데 네 가지 성질은 hot뜨거운 것, cold찬 것, dry마른 것, moist 습한 것으로 나뉘어진다. 붉, 흙, 물, 공기 그 다음에 뜨거운 것, 마른 것, 찬 것, 축축한 것. 이렇게 보면 어떤 원소는 primary matter를 기본으로 해서 네 가지 성질이 섞여 있는데 거기에서 적극적인 성질에서 하나, 소극적인 성질에서 하나가 다른 것보다 우세하다. 그런데 어느 것이 우세하냐에 따라 원소의 성질이 정해진다. 불은 제1질료의 네 가지 성질이 섞여 있는데 거기에서 뜨거운 성질과 마른 성질이 우세한 것이 불입니다. 그 다음에 흙은 뭐냐 하면 찬 성질과 마른 성질이 우세한 것이 흙이고, 물은 축축한 것과 찬 것이 우세한 것이 물이에요. 그럴 듯 하죠. 공기는 뜨거운 것과 축축한 것. 이런 식으로 된다. 이건 결국 우리가 어떤 외부에 조작을 가해서 성질의 비를 바꿀 수만 있다면 원소 자체가 바뀔 수가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플라톤의 경우에는 흙 하나는 고정이고 나머지 세 원소가 수학적인 원리로 서로 왔다갔다 할 수 있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 가면 흙을 포함한 4원소가 자유자재로 어떤 조작에 의해서 다른 원소로 바뀔 수 있게 된다. 이게 나중에 연금술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원자론에 오면 모든 것이 같은 원자라는 단위로 설명이 되고 차이는 양적인 차이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질이 같은 원자로 이루어진 우주이지만 이것이 양이 많으냐 적으냐 그 모양이 어떻게 결합했느냐에 따라서 삼라만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어떤 외부의 원인에 따라서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자는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어떤 원인에 따라서 운동을 한다. 따라서 원자의 운동에는 목적이 없고 제 멋대로 운동을 한다. 그 결과 그때그때 결합과 분리에 따라서 다른 세계가 나타나곤 한다. 그래서 과거도 그렇고 앞으로의 세계도 원자의 결합분리가 어떻게 될 것인가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떻게 보면 불안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원자론의 기본 입장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될 것은 이런 물질이론이 경험적인 어떤 연구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변적인, 머리 속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물론 경험하고 아주 관계없는 것은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헬리가 뉴턴을 찾아가서 ‘어떤 행성이 행성과 태양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이 거리의 제곱에 따라서 줄어든다면 그 궤도는 어떤 것이냐’하고 물으니까 뉴턴이 그 자리에서 ‘그건 타원이다’ 했다. 헬리가 출판비용까지 자기가 대겠다고 해서 억지로 우겨서 결국 쓰게 된 게 프린키피아다.

뉴턴 역학의 가장 중요한 것이 ‘중력’인데 중력은 거리가 떨어진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에 따르면 물체의 운동은 강제운동이다. 강제운동의 경우는 힘과 물체가 접촉해 있어야 밀거나 끌 때 운동이 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접촉물리학’이라고 한다. 결국 뉴턴은 지상의 운동하는 물체에 적용되는 물리학이 바로 천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줘서 아리스토텔레스이래 달을 중심으로 해서 천상계와 지상계가 전혀 다른 세계로 나뉘어있었는데 이 둘을 통일했다.

직선적인 관성을 발견한 것이 데카르트이고 데카르트는 뛰어난 직관으로 이것을 발견했다는데 뉴턴은 이것을 수학적으로 정식화했다. 뉴턴은 완전히 경험을 무시하고 끝까지 수학적인 추론을 해서 결국 직선적인 관성을 수학적으로 정식화하는데 성공했고 이런 점에서 갈릴레오 비슷하게 이성과 경험을 조화시키고 종합했으면서도 더 완벽한 경지까지 갈 수 있었다.

광학책은 주로 경험적인 방법에 의존한 책이고 프린키피아는 수학적인 방법에 의존했고 그래서 융통성 있게 경우에 따라서 그 둘을 자유자재로 쓴 것이 뉴턴이라고 볼 수 있다. 옵틱스에서 “Hypothesis non fingo(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 는 말을 했다. 데카르트 같이 경험으로 진위가 판명될 수 없는 허황된 가설, 그런 가설은 안 만든다, 가설 일반을 부정하는 얘기가 아니라 데카르트류의 가설은 곤란하다는 얘기다.

18세기 계몽철학자들이 대개 뉴턴과 로크가 영웅이다. 뉴턴 물리학을 모든 학문에 적용하려고 한 것이 이 사람들의 꿈이었다. 18세기 말에 가면 화학에서 라봐지에가 뉴턴의 물리학을 화학에 적용하려 그랬고 19세기에 가면 뵈퐁, 다윈도 결국 뉴턴 물리학을 생물학에 적용한 사람들이다. 광학에서는 19세기에 가서야 가령 파동설 같은 것이 나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