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일류의 조건
사이토 다카시 지음, 정현 옮김 / 필름(Feelm)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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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말하는 일류란 특정한 분야의 일류가 아니라 모든 일에 숙달에 이르는 보편적 원리를 적용할 수 있는 일류를 말한다. 숙달의 보편적 원리란 기본기를 다져주는 세 가지 힘을 활용하여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것이다. 세 가지 힘이란 훔치는 힘(모방)’, ‘추진하는 힘(실행력·추진력·기획력)’, ‘요약하는 힘(요약·질문력 포함)’이다.

이 책은 숙달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에 놓고 관련된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다소 난삽한 느낌이다. 그만큼 압축적이고 밀도가 높다고 할 수도 있다. 저자가 숙달을 키워드로 내세운 이유는 에너지의 연소라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불완전 연소된 에너지가 분노 발작 같은 많은 심리적 사회적 문제를 낳는 원인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에너지가 완전 연소되어야 기분 좋은 피로감을 느끼며 숙면을 취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좋은 삶과 좋은 죽음도 가능해진다. 에너지의 완전 연소에 숙달만큼 좋은 과정은 없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다. 숙달에 이르는 과정에 의해 경제 생활은 물론이고 삶의 의미까지 충족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미덕은 많은 사례를 통해 설명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 자신은 스포츠 훈련과 숙달 원리를 일과 공부에 적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 한 권만으로 내가 어떤 일에 숙달될 수 있을까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다. 가장 먼저 할 일은 내가 본받고 싶은 스타일을 정하고 훈련 계획을 세부적으로 세워서 지속적 의식적으로 훈련을 수행하는 것인데 아직은 모든 게 막연하다. 이 책을 여러 번 읽든지, 저자의 다른 책을 읽어 보든지 해야 윤곽이 좀 잡힐 것 같다.

자신에게 필요한 과제를 명확히 하고, 본인의 생활 전반에 걸쳐 있는 신체적 특성을 고려하여 해당 과제를 수행하는 것. 이것이 스타일 구축의 기본적인 원칙이며, 본격적으로 숙달의 보편적 원리를 터득하는 방법이다. 본인의 신체적 특성을 무시한 채 그 영역의 고유한 기술을 몸에 익히면, 막상 영역이 달라지거나 상황이 바뀌었을 때 애써 익힌 그 기술을 직접적으로 활용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신체성을 고려하여, 본인의 방식대로 일관된 변형(스타일)을 통해 제대로 익혀두면, 그 변형은 다른 영역의 일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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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9
최명희 지음 / 매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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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 <범죄도시>를 보고 참 한국적이라고 생각했다. 배우들도 그렇고 연출도 그렇고 우직하면서도 코믹하고 인간적인 예의와 배려를 놓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느꼈을까를 이번에 혼불 9권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토록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힘 속에 우리네 근원적 심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 사대부가의 자제로서 동경 유학생인 강호가 호성암 스님 도환과 함께 사천왕을 비롯한 불교의 세계와 단군 신화가 맞닿는 지점으로 안내한다. 절의 천왕문에 모셔진 사천왕의 조상은 그 무시무시한 위세에 질려서라도 그냥 지나치기 일쑤인데, 예로부터 사천왕 불사를 하는 이유가 호법과 호국에 있었음을 새삼 일깨우면서 일제 말기 명맥을 이어가던 저항 운동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받았을 때 대장경 불사를 일으키고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지어 민족의식을 고취해 국난을 극복하려 했던 것처럼 도환 역시 사천왕 신앙과 단군 신화의 연결을 통해 민중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내려는 것이다.

도환의 설명에 따르면, 제석천은 환인이고 사천왕은 환웅이고 인간은 단군왕검이 된다. 천계에서도 인간계와 가장 가까운 사천왕천을 다스리는 사천왕(환웅)은 도리천을 다스리는 제석천(환인)의 아들로서 인간계(조선)에 직접 내려와 인간(단군왕검)을 낳고 지상천국을 건설한다. 그만큼 하늘과 가까운 나라가 조선이고 하늘의 꿈을 간직한 사람이 조선 사람이다. 그래서 사천왕의 모습에는 어질고 바른 조선 사람의 심성과 얼이 투영되어 있다. 무시무시한 사천왕상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산천을 닮은 푸근한 익살과 해학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어우르는 넉넉함이라고나 할까.

마음은 몸의 바탕이고, 몸은 정신활동의 바탕이고, 정신활동 자체가 곧 신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에서 불계에 이르는 열 가지 단계인 십계가 모두 하나의 마음 작용이란 의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제석천과 아수라의 전쟁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듯이 일본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는 조선의 힘 역시 조선의 마음을 되찾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돌멩이 하나에도 깃들어 있고, 사천왕상을 빚은 장인의 손길에도 어려있는 다른 듯 닮은 우리의 마음을 바로 알아 보아야 우리의 땅과 문화를 사랑하고 지킬 수 있다고 강호와 도환을 통해서 작가 최명희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무섭고 사나워도 어질고 귀여우며, 조악해도 어리숙한 이 사천왕과 악귀 죄인 형상들의 달라도 닮은 해학이 눈물겨워, 강호는 한바탕 이들을 끌어안고 창자가 훑이도록 웃음을 터뜨리며 뒹굴고 싶어진다.
알겠다……알겠다……내 이제 알겠다.
알아본 마음을 하염없이 저 묵묵한 흙덩이 가슴에 문지르며 울고도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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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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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우스는 모험을 떠났고 떠났던 공동체로 다시 돌아온 인간이다. 젊은 시절 모험의 여정을 통해 성장해야 하며, 성숙한 어른으로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모범적 인간상인 셈이다. 한 개인의 삶 역시 고통을 통한 성숙과 타인을 위한 희생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가 돌아와서 그의 살림을 축내고 아들 텔레마코스를 살해할 음모를 꾸미고 왕권을 노린 무도한 구혼자 무리와 주인을 배신한 불충한 하인들을 남김없이 사살한 것은 공동체의 윤리를 세우기 위한 필연적인 응징이고, 구혼자 무리의 가족들이 복수의 무기를 들었을 때 신들이 나서서 화해의 맹약을 맺게 한 것 또한 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필연적인 중재였다.

그리스 사회의 성숙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해결하지 못한 사회의 모순은 끝내 그리스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현대 사회 역시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대인들 또한 오뒷세우스처럼 성숙을 위한 여정을 떠나고 다시 돌아와 공동체의 성숙을 도모할 수 있다. 더이상 신들이 직접 나서서 중재해 주지 않으며, 정치인들이 대신할 수도 없다. 각자가 오뒷세우스처럼 각자의 여정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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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유의 기원
장 피에르 베르낭 지음, 김재홍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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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흥미로운 책이지만, 읽어 나가기가 만만치 않은 책이기도 하다. 그리스 사유란 것이 마치 현대 과학적 이성의 시초이기나 한 듯이 생각하기 쉽지만, 저자가 밝히려고 하는 것은 사실상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그리스의 정치 제도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간파했듯이 정치적 인간이란 정치적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고 이성이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잘 알다시피 그리스는 폴리스들의 연합이었다. 전제 왕권에 의한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던 그리스는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은 신화적 설화와 제의가 결합된 군주권 개념에서 일찌감치 벗어났다. 해상 무역에 의한 교역이 확대됨에 따라 빈부의 격차와 갈등이 생기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절제의 덕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폴리스에서 요구된 것은 바로 부자와 빈자의 중간적 위치에 있는 계급이었고, 양자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는 그들의 중심적(중립적) 위치야말로 폴리스에 평형과 조화(코스모스)를 가져오는 진정한 힘이었다.

폴리스의 정치적 실험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평등의 이상에 맞추어서 제도를 만들 정도였으니 참으로 정치적이지 않은가! 개인과 시민을 따로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인들에게 공동체의 조화와 질서야말로 중요했고, 그런 정치적 개혁은 자연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의 사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물론 파르메니데스 이후의 그리스 철학은 전혀 다른 길을 갔지만.

그리스 사유의 기원은 폴리스의 정치적 공간이었고, 그 공간은 기하학적 공간이기도 했다. 기하학과 정치학, 교육과 수사학의 그리스였던 셈이다. 그러나 정치적 실험과 함께 사유의 실험도 멈추었을 때 그리스는 몰락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인간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명저라고 생각한다.

헬라스적 이성은 자연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신중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인간에 대해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는 바로 그 이성이었던 것이다. 그 사유의 혁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 한계에 있어서도 이성은 도시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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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8
최명희 지음 / 매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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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희 작가는 전주라는 땅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땅이야말로 사람의 몸과 혼을 키우는 터전이라고 한다. 그래서 꽃심을 지닌 땅, 전주는 백제라는 나라와 문화를 키워냈으며, 백제는 비록 망했지만 죽어도 죽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런가. 이성계의 시조 조상 이한 공으로부터 사대조 목조 이안사까지 전주 토호였기 때문이다. 이안사가 고향을 등지고 정착한 곳은 연변 혹은 간도였다. 전주 이씨에게 전주와 간도는 조상의 묘가 있는 곳인 셈이다. 어찌 보면 조선은 백제와 고구려의 맥을 잇는다 할까.

꽃심이란 뭘까. 고갱이 정신 같은 것일 것이다. 그 정신은 전주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는데, 한마디로 완전하고 원만하고 광대한 삶을 의미한다. 그만큼 자연의 넉넉한 품 안에서 평화롭고 풍요롭게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터무니없이 짓밟히고 빼앗겼을 때 어찌 원통하고 억울하고 분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 땅의 백성들은 후백제의 견훤을 '완산의 아들'로 추앙했고 백제의 회복을 염원했다.

그러나 승자인 고려는 그 백제 유민들의 저항 정신을 꺾어 놓기 위해 철저하게 역사를 왜곡하여 견훤은 잔인 무도한 왕으로 기록에 남았다. 게다가 그 땅을 저주하여 전라도 인들은 억울하게 차별 냉대를 받아야했다. 그런 통분의 세월을 해원한 이가 바로 태조 이성계였다. 왕을 낳은 땅이 된 전주는 승격되고 숭앙받았다. 그러니 백제는 죽어도 죽지 않은 것이다. 그 백제는 곧 백성이기도 하다.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백성들의 꿈, 꽃심을 지닌 땅 전주는 지금도 역사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지향이 아닐까.

물론 그것은 전라도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일 수도 있다. 나로부터 역사를 바라본다면, 비록 한순간 살다가 죽는 찰라의 인생일지라도,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역사를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나의 관점과 행동에 의해 후손들의 삶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면 역사란 업보이고 운명인 셈이다. 개인의 역사든 국가의 역사든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업보는 갚아야 하고 운명은 감당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점점 나아지지 않을까.

이씨 조선은 망했다. 백제와 고구려의 꿈도 다시 좌절되었다. 국토가 분단되고 나라 이름도 둘이 되었지만, 나라 이름이 바뀌어도 민족의 꿈까지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백제가 신라가 되고 고려가 되고 조선이 되고 대한민국이 되어도 국파산하재, 땅은 그대로이듯 말이다.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나 역시 한반도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 땅의 기운을 받은 이상, 그 자연과 문화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이을 것은 잇고 버릴 것은 버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1942년 여전히 망한 조선을 부여안고 변한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하며 기득권을 놓으려 하지 않는 종가 어른 앞에서 신세대 조카는 이렇게 말한다. 경천동지할 소리였을 것이다.

“贖良을 하십시오. 집안 노복 종들을 모두 면천을 시켜 주세요. 더 늦기 전에 지금 풀어 주시지요. 세상은 이미 옛날의 세상이 아닙니다.”

만약 그때라도 그렇게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은 또 어떤가. 항상 만시지탄을 하게 되는 건 아닌지. 그래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기 전에 조짐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조짐을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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