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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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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제국주의의 탐욕과 환상 속에서 서서히 무너져간 인물, 커츠의 몰락을 그린다. 음악과 그림을 사랑하고, 글을 쓰는 감수성까지 지닌 만능 재주꾼 커츠는 왜 아프리카 콩고에 이르게 되었을까? 그의 약혼녀 집안은 커츠의 재력에 만족하지 않았고, 그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콩고에서 부를 쌓고자 했다. 그러나 그 여정은 곧 광기의 나락으로 이어졌다.

커츠를 데려오기 위해 파견된 선장 말로 또한 콩고를 향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품어온 그 꿈은 사실 제국주의가 심어놓은 환상이었을 뿐이다. 그가 실제로 콩고의 밀림 깊숙이 들어갔을 때, 느낀 두려움은 커츠가 직면했던 공포와 다르지 않았다. 커츠가 죽기 직전 외친 말—"공포다, 공포!"—는 단순한 죽음의 외침이 아닌, 절대적 공허에 대한 통찰이었다. 말로 역시 그 말의 깊이를 직감했다.

그러나 커츠의 약혼녀를 찾아간 말로는 마지막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커츠가 죽기 전 남긴 말이 그녀의 이름이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것은 진정 그녀를 위한 배려였을까? 아니면 말로 자신도 여전히 제국주의적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까?

커츠는 애초에 글을 쓰는 음악가, 그림 그리는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받아들였고, 결국 자신을 잃었다. 원시의 밀림은 그가 절대적이라 믿었던 가치들이 얼마나 허무한 것이었는지를 가차 없이 드러냈다. 벗어나려 할수록 더 깊이 침잠하는 공허감—그 무게는 상상 이상이다. 게다가 원주민들조차 커츠의 광기를 신격화함으로써, 그는 두 겹의 공허에 갇히게 되었다.

『암흑의 핵심』은 이야기꾼 말로의 시선을 따라가며, 커츠라는 인물에 투영된 제국주의의 광기와 어둠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낸다. 그 충격은 독자의 내면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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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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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30여 년 만에 다시 읽은 책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최근에 읽은 책처럼 내용이 낯설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쩌면 당시 원서로 읽으며 감상문을 빼곡하게 적어두었던 덕분일까. 그때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글을 썼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다시 펼친 지금, 새롭게 떠오른 감상은 분명하다.

이번에 읽으며 깨달은 것은, 데미안과 에바 부인이 단순한 등장인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싱클레어의 내면에 존재하는 자아와 운명을 형상화한 존재들이다. 마치 꿈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실제 인물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의 다른 모습일 수 있듯이 말이다.

현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사건들이 모두 꿈일 수 있다는 생각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꿈과 현실의 경계가 생각보다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린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싱클레어가 어떤 형상 때문에 괴로워하던 순간이다. 그는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거기에는 알을 깨고 나오는 새와 에바 부인이 함께 있었다. 마치 피그말리온이 조각한 이상적인 여인이 생명을 얻은 것처럼, 싱클레어 역시 자신이 그린 여인을 현실에서, 데미안의 집에서 만나게 된다. 에바 부인을 사랑하게 된 것은 결국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게 된 것과 같은 의미였다.

데미안이 더 이상 자신을 찾아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면은, 싱클레어가 이제 스스로 설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이제 그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밖을 바라볼 필요 없이 내면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이미 자기 안에 존재하는, 자신보다 훨씬 현명하고 강인한 자아의 목소리를 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더는 누군가에게 구원을 요청할 필요가 없다.

데미안과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의 내면을 강렬하게 형상화한 존재들이다. 이 형상화는 그들에게 놀라운 생명력을 부여했고, 독자들의 마음에도 깊이 각인되었다. 그렇게 소설 속 데미안과 에바 부인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자아와 운명의 모델이 된다.

나 또한 생각해본다. 나의 데미안과 에바 부인은 어떤 형상을 하고 있을까. 내 안에서 아직 끄집어내지 못한, 그러나 언젠가 만나게 될 그 형상은 무엇일까. 자연과 야생, 생명의 외침처럼 거칠고 순수한 무엇, 바로 그 형상을 나도 만나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이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始原)의 점액과 알껍데기를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인간이 되기를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가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풀이를 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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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락 알베르 카뮈 전집 개정판 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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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독백체로 쓰인 소설이다. 희극적인 동시에 에세이 같기도 하다. 장르의 경계를 흐리는 것처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카뮈의 매력일지도 모른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암스테르담의 짙은 안개처럼, 의미는 늘 흩어지고 포착되지 않는다.

주인공 장 바티스트 클라망스. 이름부터 세례 요한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마치 광야에서 외치듯 고백하고, 독백한다. 그의 메시지는 단 하나, "회개하라." 하지만 왜? 클라망스에 따르면, 회개란 남을 심판할 수 있는 자격을 얻기 위한 선행 조건이다. 그는 자신의 허물을 솔직히 고백함으로써, 듣는 자가 자신의 죄를 되돌아보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진정한 목적일까?

그의 목적은 회개의 보편적 가치에 있지 않다. 그는 상대가 자신을 심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상대에게 먼저 회개를 요구한다. 타인의 우위에 서기 위해 스스로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모순적이지만, 인간 존재 자체가 모순이 아니던가. 우리는 모두 죄를 짓는다. 언제나, 그리고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게.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회개할 수밖에 없다. 이 숙명, 남들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 누구보다 먼저 공개적으로 회개하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이 방법을 택한 자가 있었다. 예수다. 그는 가장 먼저 회개함으로써, 인간이 서로를 심판하는 행위를 멈추게 하고자 했다. 그리고 십자가를 선택했다. 하지만 복음서의 저자 누가는 이를 방해했다. 그는 예수가 마지막 순간에 남긴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라는 절망의 외침을 지웠다. 그리하여 예수는 신이 되었고, 그의 회개는 무의미해졌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받아들였다면, 세상은 덜 타락했을까? 인간은 서로를 심판하는 것을 멈출 수 있었을까?

그러나 클라망스는 여전히 안개 낀 암스테르담의 선술집 ‘멕시코시티’에서 사람들을 기다린다. 그는 더 이상 법정에서 변호 놀이를 하지 않는다. 대신 고백 놀이를 한다. 거울 놀이를 한다. 타인의 죄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변호하기 위해. 그가 비추는 거울 속에는 우리가 있다. 그는 예수가 실패한 꿈을 대신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죄는 자신만이 변호하고 심판할 수 있다는.

<전락>에서 말을 하고 있는 남자는 계산된 고백에 몰두한다. 운하와 싸늘한 빛이 가득한 도시 암스테르담에 물러나 은자 혹은 예언자 노릇을 하며 살아가는 이 전직 변호사는 어느 수상한 바에서 자기의 말에 호의적으로 귀를 기울여 줄 말 상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는 현대적인 마음의 소유자다. 다시 말해서 남에게 심판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자기 자신을 비판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들을 더 마음껏 심판할 수 있기 위해서다. 그는 자기 모습을 비춰보던 거울을 결국 다른 사람들 얼굴 앞으로 내민다.
어디서부터가 고백이고 어디서부터가 고발인가? 이 책에서 화자는 자신의 재판을 벌이는 것인가 자기 시대의 재판을 벌이는 것인가? 그는 예외적 인물인가 아니면 우리 시대의 주인공인가? 어찌 되었든, 이 용의주도한 거울 놀이에서 단 한 가지 진실은 다름 아닌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이 약속하는 미래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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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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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반 만에 완독했다. 신화와 영웅담이 숨 쉬는 그리스에서, 문학과 맞닿은 역사가 태어났다. 철학까지 아우르며 인문학의 정수를 꽃피운 이 땅답게, 이 책은 단순한 역사 기록을 넘어 교훈과 재미를 담아냈다. 물론, 잔혹하리만치 극적인 장면들도 곳곳에 등장했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인간이 빚어낸 장대한 서사가 펼쳐진다. 헤로도토스가 아니었다면, 이 모든 위대한 순간들은 잊히고 사라졌을 것이다.

가장 압도적인 장면은 페르시아 원정대의 규모였다. 지나가는 곳마다 초토화시킬 만큼 방대한 병력, 전쟁을 벌이기도 전에 그 자체로 승리를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허세만으로는 일당백의 전력을 갖춘 그리스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 제국의 위력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그리스 동맹군. 그들의 용기와 전술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인상 깊었던 것은, 그리스군이 전쟁을 앞두고 항상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전조를 살폈다는 점이다. 그만큼 그들은 신중했고, 전쟁의 승패가 신의 뜻에 달려 있음을 믿었다. 수많은 도시국가가 하나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은 공통된 언어와 문화 덕분이었다. 반면,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진 페르시아군은 그 틈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리스의 전략회의는 공론의 장이었고,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자유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물러설 곳도 없었다. 페르시아가 패해도 제국은 건재하지만, 그리스가 패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싸움이었다.

이 책에는 수많은 민족의 관습이 등장한다. 헤로도토스는 이를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존중해야 할 다양성으로 보았다. 그는 “관습이 왕이다”라는 말로 각 문화의 고유함을 인정했다. 인간의 삶은 지형과 기후에 따라 만들어지고, 그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그 다양성이 사라지는 순간, 생존력 또한 약해질 것이다.

결국,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전쟁 속에서 서로 다른 관습과 문화가 만나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세계를 만들어왔다. 끝없는 도륙 속에서도 삶은 이어졌다. 예속을 거부하는 한, 침략과 방어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며, 그리스 동맹군이 남긴 승리의 기록도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페르시아 학자들에 따르면, 헬라스인들과 비헬라스인들이 반목하게 된 것은 포이니케인들 탓이라고 한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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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03-16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독하셨다니 경의를 표합니다. 대학시절 읽었던 도서인데, 정말 지루햇어요.
 
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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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은유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풀리지 않는 숙제를 마주한다. 그 난제 속에서 문득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카뮈는 그것이 바로 인생의 의미라고 말한다.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남은 것은 리유의 어머니의 '침묵'과 리유의 인생 스승인 '가난'이다. 여기서 가난은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풍요이며, 침묵 또한 차가움이 아니라 다사로움이었다. 어떻게 침묵이 따스함이 되고, 가난이 풍요가 되는가. 그것은 침묵과 가난의 세계야말로 인류의 진정한 조국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국은 어머니이며, 어머니는 가난하고 침묵하는 존재다. 그리고 가난하고 침묵하는 존재는 곧 자연이다.

자연 속에서 인생의 지혜를 깨달았던 고대인들처럼, 의사 리유는 페스트로 봉쇄된 도시 오랑 너머의 바다와 하늘을 향한다. 바다를 등진 채 서 있는 도시 오랑과 그 시민들은, 결국 자연을 등진 현대 문명과 현대인을 상징한다. 페스트는 오랑 시민들에게 늘 가까이 있다고 믿었던 바다와 사랑하는 이들과의 갑작스러운 단절을 가져왔다. 그 고통은 뼛속 깊이 각인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격리와 거리두기를 경험한 우리는 그 고통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우리를 변화시켰다.

코로나 시국을 지나며 나는 줌을 통해 독서와 토론 모임을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부업을 중단했고, 함께 읽은 책들이 한 권, 두 권 쌓이면서 인생 후반기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침묵'과 '가난'이 의미하는 따스한 지혜를 발견했다. 그것은 내 인생 후반기를 밝혀 줄 등불이 될 것이다. 부산스럽던 삶의 궤적들이 결국 무엇을 향하고 있었는지를 이제야 깨닫는다.

그렇다, 모든 사람들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하나같이 괴로운 휴가, 도리 없는 귀양살이, 결코 채울 길 없는 갈증으로 다 함께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그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 운명이라고 불러 마땅한 경고, 공포에 떨면서 맴도는 제자리걸음, 그들의 마음속에 치밀어 오르던 무서운 반항, 이러한 모든 것들의 틈바구니에서도 하나의 거대한 기운이 결코 그치지 않은 채 누비고 다니면서 공포에 싸여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진정한 조국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경고하듯이 말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모두에게 있어서, 진정한 조국은 그 질식해 있는 시가의 담 저 너머에 있었다. 그 조국은 언덕 위의 그 향기로운 덤불 속에, 바다 속에, 자유로운 고장들과 따뜻한 사랑의 무게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 조국을 향해서, 그 행복을 향해서 돌아가고 싶었으며, 그 밖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 P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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