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강 제물론① : 나는 나를 잃었다

‘나(我)’를 잃어버린 ‘나(吾)’는 무엇인가. 무엇이 남는가. 이것이 제물론에서 장자가 던지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소요유 첫머리에서 던졌던 주제이기도 하다. (至人無己 / 神人無功 / 聖人無名) 문제의식이 계속 연결되고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는 자아라는 것이 어디 있는지 분석하려 한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온갖 종류의 소리 현상들 배후에 그 소리들이 일어나도록 주재하는 근원적이고 독립적인 주체가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나 묻기만 하고 대답은 없다. 그런 존재는 과연 있는가, 없는가. 이를 두고도 해석이 분분하지만 없다고 해석을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장자는 심리적 현상을 그냥 뭉뚱그려서 자아라고 하지 않고 그것들을 모아서 통일적으로 귀속시킬 수 있는 하나의 주체를 ‘나’라고 한다.

 

제6강 제물론② : 성심과 시비

자아라는 것을 찾기 시작하는 순간 자아는 없어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체는 어떤가. 모든 신체기관과 기능을 주관하는 주체라고 할 만한 것은 또 없다. 낱낱의 몸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마음이나 몸에는 그 배후에 진정한 주재자, 주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장자는 자유와 해방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전쟁터 같은 우리 인생의 피로함이라는 현실인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특히 우리 삶의 양상 중에서도 장자가 제물론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분석하고 있는 것은 시비지심이다. 누구나 문제가 생기거나 어떤 사태에 직면하게 되면,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려는 충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지(智)라고 하는 덕의 단초가 되는 마음이다. 그래서 맹자는 이 시비지심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이고 본래의 능력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런데 장자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장자는 시비지심을 결코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각자의 환경이나 상황이 다르다 보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상이한 결론을 내는 것이다. 장자는 그 관점을 성심(成心)이라고 한다. 성심은 자신의 기준에 집착해 유연성을 잃은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진 굳어진 마음을 뜻한다. 그는 누구나 다 옳다고 할 만한 절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시비를 가리는 것은 성심으로부터 유래하고 사람들이 저마다 주관적인 성심을 가지고 이야기하니 자연히 논쟁을 하면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대주의자에게 최선의 윤리적인 행동은 서로를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장자는 이런 의미에서의 상대주의자는 아니다. 장자의 관심은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 알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 관계를 맺으면서 한 사회 속에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소통을 통해 관계가 만들어지고 변화하고 상호 변화를 통해서 공통의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이 장자의 궁극적인 관심이다. 통일성은 관계를 맺고 상호 변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선험적인 기준으로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 장자의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다. 장자가 말하는 통일성은 어떤 만남을 통해서 서로가 변화하고 변화하면서 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장자는 상대주의를 넘어 새로운 종류의 사람들의 관계맺음을 이야기를 하고 장자가 말하는 도라는 것도 그것을 말한다.

 

제7강 제물론③ : 통위일 / 조삼모사 / 나비 꿈

일상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사태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원칙이나 방법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원칙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 용(庸)이다. 그때그때 닥치는 상황들의 특수성과 조건들, 입장들을 고려해 해결 방식을 이끌어내는 것이 용(庸)의 태도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민한 감수성, 개방성이 요구된다.

단서 없이 공존하는 것 요소들 사이에 통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실제적으로 하나의 공통된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이 조화다. 유가(儒家)에서 조화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각자의 일을 하며 전체 사회에 이바지 한다는 뜻이지만 장자의 화는 옳고 그름을 조화시켜서 하늘의 녹로에서 쉰다. 그것을 양쪽 다 가는 것(兩行)이라고 한다. 『열자』의 조삼모사도 『장자』를 보고 쓴 것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는 성인이 지혜를 써서 어리석은 이를 농락하는 모습이 저공 같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만약 원숭이들이 분노했을 때 저공의 마음속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비지심이 강하게 일어났다면 이런 결론을 가져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장자가 이야기한 하늘의 녹로는 빙빙 돌아가는 원판이다. 원의 중심처럼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 양쪽을 모두 가는 것, 양행(洋行)이다.

장주의 꿈이라는 사건을 전후로 해서 분석해보면 세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1. 꿈꾸기 전의 상태 - 자신이 장주인줄로만 알고 살아가는 사람

2. 꿈속의 상태 - 자신이 장주인 것을 잊고 나비인줄로만 앎

3. 꿈에서 깨어난 상태 - 자신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자각한 장주

꿈에서 깨어난 장자는 자신이 반드시 장주라는 하나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 꿈을 통해서 장주는 자기동일성, 장주라고 하는 인간적 동일성, 여기에 대한 집착을 깨고 급격하고 극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깨닫는 것이다. 장자와 나비는 엄격하게 구분되는 존재다. 그러나 장자가 이야기하는 구분은 영원하고 고정되어있어서 가로지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화(化)를 통해서 끊임없이 가로질러 가야 되고 그 경계를 허물어야 되는, 그런 제한적인 의미에서 전제 된다. 장자는 왜 나비라는 소재를 택했을까. 나비는 처음에는 못생기고 징그러운 번데기다. 그러다 변태의 과정을 거쳐 낡은 허물을 벗고 나비로 탄생하는 것이다. 나비라는 소재 자체가 이미 화(化)라는 주제를 모여주고 있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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