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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강 덕충부 · 대종사① : 죽음 - 조화의 작용

장자는 세상과 함께 살면서도 세상의 지배적인 논리에 따르지 않고 사는 방법을 추구했다.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방법, 세상 자체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고민한 사람이다. 장자가 자기변화를 강조한다든가 이질적인 존재들의 소통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목적 때문이다.

장자는 죽음의 문제와 죽음이 주는 공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깊이 생각한다. 장자는 죽음을 더 이상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 나의 존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라고 본다. 하나의 존재방식이 사라지고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방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화(化)는 하나의 유기체가 다른 종류의 유기체로 바뀌는, 단순히 대체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유기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들이 완전히 탈유기화해서 각자 독자적인 방식으로 다양하게 변화하는 것을 화(化)라고 표현하고 있다.

음양은 기의 두 가지 양태로 기는 우주를 구성하는 원초적인 힘이다. 어떤 생명체든 기가 모여 이루어지고 기가 흩어지면 존재도 해체된다는 것이 장자와 그 계승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개체가 해체가 될 때, 그것을 구성했던 기가 흩어지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와 상호작용해서 다른 개체를 만드는데 참여하게 된다. 그래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한 개체의 차원에서는 끝을 의미하지만 기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모습을 바꾸는 데 지나지 않는다. 변화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죽음을 긍정하는 것을 장자는 삶에 대한 태도로까지 밀고나간다.

신체의 훼손은 우리에게 결여, 죽음을 환기시킨다. 이런 외모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는커녕 기피대상이 되는데 장자는 특유의 우화적 방식으로 이것을 뒤집어 얘기한다. 그들은 화(化)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로 표현되는데 장자는 공자 등을 등장시켜 그들을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 인물로 묘사한다.

 

제11강 덕충부 · 대종사② : 앉아서 유목하기

장자는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고 죽음을 변화로 봄으로 해서 삶의 변화의 과정으로 만든다.일반적으로 망각이나 의식하지 못함은 능력의 결핍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장자는 반대로 망각은 능력이 증대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장자에게 소통과 조화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다양한 관계들을 통해서 이뤄내야 되는 궁극적인 가치들이다. 나와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를 통해 전에 없던 공통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대통이다. 대통은 내가 가지고 있는 완고한 상(象)이나 애착 등을 버려야 가능하다. 그리고 이 운동을 통해 나도 변하고 상대방도 변하는 것이다. 신분과 계층,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이 만남을 통해 소통을 이루고 그래서 맺어지는 관계를 장자는 덕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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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소극적인 방식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위험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생각한다. 장자는 무당이 신과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해서 지켜야 되는 방법들을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기 위해 가져야 되는 절차로 변형하고 있다. 누구를 대하든 간에 자신이 옳고 우월하다는 생각, 선입견, 이해득실을 따지는 마음 등을 깨끗하게 비운 상태에서 대해야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라고 한다. 귀로 듣는 것은 청각적인 소리일 뿐이다. 상대방을 헤아리려면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나를 제한하던 기준들이 없어지면 오히려 우리는 당면해 있는 순간의 흐름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세상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만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심재를 단지 고요하기만 한 수동적인 상태가 아닌, 비웠기 때문에 더 큰 활동력을 가질 수 있는 상태로 봐야겠다.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하는 능력을 장자는 기(氣)로 명명한다. 기는 한마디로 힘(energy, force)이다. 나를 구성하는 기는 내 속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외부와 내부를 오가는 흐름 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그럴 수 있을 만큼 스스로 변화하라는 것이다. 장자뿐 아니라 많은 고대 중국의 사상가들은 남을 바로잡기 전에 자신을 수양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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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에게 삶, 생(生)은 개체가 갖는 생물학적 생명보다 훨씬 포괄적인 개념으로 신체의 생명활동 뿐 아니라 정신적 활동, 사회문화적인 활동, 정치적 활동, 인간관계 등을 아우른다. 양생은 오래 산다거나 하는 양형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삶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생명을 개체의 통일성이 잘 유지되는 차원에서만 생각하게 되면 자기 보전이 양생의 중요한 문제가 되겠지만 실제로 타인과의 관계들이 나의 삶을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장자에게 중요한 문제는 매 순간 내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들, 대상들과 어떻게 하면 조화로운 흐름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예를 표현한다고 해버리면 사실 그 때 신체는 어떤 자연적이고 어떤 물리적인 신체가 되는 게 아니라 이것은 신체 자체가 고도의 제약성을 갖는 언어가 되어 버린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특권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언어가 중요한 소통수단이 되는 것이다. 장자는 언어적인 수단, 그 이상을 생각한다. 『장자』에 보면 백정이나 목수, 매미를 잡는 사람 등 특이한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장자는 자연을 강제로 변형하는 기술자는 폄하하지만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장인이라면 그는 단순히 실용적 목적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기술에 대해서 알려주는 사람들로 그린다. 특히 장자가 중요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를 비워내는 수행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매순간 내 앞에 있는 상황들에 성공적으로 자신을 투입하기 위해서는 이 장인들처럼 성심(成心)을 버리고 자연, 세계의 결, 흐름에 자신을 결합시켜야 된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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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강 제물론① : 나는 나를 잃었다

‘나(我)’를 잃어버린 ‘나(吾)’는 무엇인가. 무엇이 남는가. 이것이 제물론에서 장자가 던지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소요유 첫머리에서 던졌던 주제이기도 하다. (至人無己 / 神人無功 / 聖人無名) 문제의식이 계속 연결되고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는 자아라는 것이 어디 있는지 분석하려 한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온갖 종류의 소리 현상들 배후에 그 소리들이 일어나도록 주재하는 근원적이고 독립적인 주체가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나 묻기만 하고 대답은 없다. 그런 존재는 과연 있는가, 없는가. 이를 두고도 해석이 분분하지만 없다고 해석을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장자는 심리적 현상을 그냥 뭉뚱그려서 자아라고 하지 않고 그것들을 모아서 통일적으로 귀속시킬 수 있는 하나의 주체를 ‘나’라고 한다.

 

제6강 제물론② : 성심과 시비

자아라는 것을 찾기 시작하는 순간 자아는 없어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체는 어떤가. 모든 신체기관과 기능을 주관하는 주체라고 할 만한 것은 또 없다. 낱낱의 몸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마음이나 몸에는 그 배후에 진정한 주재자, 주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장자는 자유와 해방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전쟁터 같은 우리 인생의 피로함이라는 현실인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특히 우리 삶의 양상 중에서도 장자가 제물론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분석하고 있는 것은 시비지심이다. 누구나 문제가 생기거나 어떤 사태에 직면하게 되면,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따지려는 충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지(智)라고 하는 덕의 단초가 되는 마음이다. 그래서 맹자는 이 시비지심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이고 본래의 능력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런데 장자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장자는 시비지심을 결코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각자의 환경이나 상황이 다르다 보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상이한 결론을 내는 것이다. 장자는 그 관점을 성심(成心)이라고 한다. 성심은 자신의 기준에 집착해 유연성을 잃은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진 굳어진 마음을 뜻한다. 그는 누구나 다 옳다고 할 만한 절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시비를 가리는 것은 성심으로부터 유래하고 사람들이 저마다 주관적인 성심을 가지고 이야기하니 자연히 논쟁을 하면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대주의자에게 최선의 윤리적인 행동은 서로를 존중하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장자는 이런 의미에서의 상대주의자는 아니다. 장자의 관심은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 알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 관계를 맺으면서 한 사회 속에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소통을 통해 관계가 만들어지고 변화하고 상호 변화를 통해서 공통의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이 장자의 궁극적인 관심이다. 통일성은 관계를 맺고 상호 변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선험적인 기준으로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 장자의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다. 장자가 말하는 통일성은 어떤 만남을 통해서 서로가 변화하고 변화하면서 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장자는 상대주의를 넘어 새로운 종류의 사람들의 관계맺음을 이야기를 하고 장자가 말하는 도라는 것도 그것을 말한다.

 

제7강 제물론③ : 통위일 / 조삼모사 / 나비 꿈

일상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사태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원칙이나 방법은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원칙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 용(庸)이다. 그때그때 닥치는 상황들의 특수성과 조건들, 입장들을 고려해 해결 방식을 이끌어내는 것이 용(庸)의 태도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민한 감수성, 개방성이 요구된다.

단서 없이 공존하는 것 요소들 사이에 통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실제적으로 하나의 공통된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이 조화다. 유가(儒家)에서 조화는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각자의 일을 하며 전체 사회에 이바지 한다는 뜻이지만 장자의 화는 옳고 그름을 조화시켜서 하늘의 녹로에서 쉰다. 그것을 양쪽 다 가는 것(兩行)이라고 한다. 『열자』의 조삼모사도 『장자』를 보고 쓴 것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는 성인이 지혜를 써서 어리석은 이를 농락하는 모습이 저공 같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만약 원숭이들이 분노했을 때 저공의 마음속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비지심이 강하게 일어났다면 이런 결론을 가져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장자가 이야기한 하늘의 녹로는 빙빙 돌아가는 원판이다. 원의 중심처럼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 양쪽을 모두 가는 것, 양행(洋行)이다.

장주의 꿈이라는 사건을 전후로 해서 분석해보면 세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1. 꿈꾸기 전의 상태 - 자신이 장주인줄로만 알고 살아가는 사람

2. 꿈속의 상태 - 자신이 장주인 것을 잊고 나비인줄로만 앎

3. 꿈에서 깨어난 상태 - 자신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자각한 장주

꿈에서 깨어난 장자는 자신이 반드시 장주라는 하나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 꿈을 통해서 장주는 자기동일성, 장주라고 하는 인간적 동일성, 여기에 대한 집착을 깨고 급격하고 극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깨닫는 것이다. 장자와 나비는 엄격하게 구분되는 존재다. 그러나 장자가 이야기하는 구분은 영원하고 고정되어있어서 가로지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화(化)를 통해서 끊임없이 가로질러 가야 되고 그 경계를 허물어야 되는, 그런 제한적인 의미에서 전제 된다. 장자는 왜 나비라는 소재를 택했을까. 나비는 처음에는 못생기고 징그러운 번데기다. 그러다 변태의 과정을 거쳐 낡은 허물을 벗고 나비로 탄생하는 것이다. 나비라는 소재 자체가 이미 화(化)라는 주제를 모여주고 있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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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소요유① : 물고기, 새가 되다

환상적이고 신화적인 소요유를 통해서 장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화(化)’가 중요한 모티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붕의 이야기는 장자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이야기였다. 장자는 기존에 있던 신화적인 내용을 모티프로 해서 화(化)라는 요소를 넣은 것이다. 중국 신화에서 새는 흔히 태양을 상징한다.

 

제4강 소요유② : 무궁에서 노닐다

공자로부터 시작된 이 전통, 떠돌아다니는 지식인들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현상이 된다. 소요유의 遊도 당시의 사회적 현상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런 지식인들의 유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을 유세(遊說)한다고 한다. 그렇게 전국시대는 지식인들이 떠돌며 경쟁적으로 활동한 시대다. 장자는 사인들이 권력자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져 한 나라에 정착하고 거기에 만족하면서 현실에 적응해가는 현상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었다. 특히 장자는 遊가 현실을 창조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적응하는 모습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장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람은 이 천지가 드러내는 규칙성이나 항상성을 잘 파악하는 사람이다. 육기라고 하는 것은 우주의 변화나 운동을 일으키는 다양한 힘의 양상들을 열거한 것이다. 正과 반대되는 의미인 變은 일종의 변칙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예상 불가능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변화들로 이것을 잘 제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를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가치나 기준, 규범들로부터 벗어나서 창조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장자는 遊라고 한다. 무궁은 우리 앞에 닥친 한계를 돌파해간다는 의미가 강하다. 송영자처럼 세상 안에서만 몰두하거나 열자처럼 세상에 초연해서 세상 밖의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과 밖이라는 구분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하나의 대상에는 그 의미나 쓰임새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쓰는가에 따라 대상의 존재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목적이 없다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그 활동 자체를 향유할 수 있는 상태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목적, 삶의 기준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더 삶을 풍요롭게, 창조적으로 살 수 있다. 이것이 소요유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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