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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흉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데뷔 이후 현재까지 20년 동안 무려 60권이 넘는 단행본을 발표함으로써 1년에 평균 3~4편 꼴이라는 다작을 하고 있고, 그중 대부분이 대중적인 추리나 SF 장르의 소설로 분류되면서 상당 수가 영화와 드라마로 앞다투어 제작된 가장 대중친화적인 소설가인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처럼 녹록치 않은 평가를 동시에 얻고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엄청난 다작과 방대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일정한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는 균일하게 높은 작품성의 성취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눠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는 휴머니즘적인 감정이 중심이 된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오락적인 재미에 치중한 작품이다. 동일한 사회성 짙은 내용과 추리나 스릴러 소설, 혹은 연애 소설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작가가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 전체적인 느낌은 크게 달라지는데, 문학적인 평가는 물론 전자 쪽이 훨씬 더 높은 편이다(가장 대표적인 예로 나오키상 수상작인 [ 용의자 X의 헌신 ]을 들 수 있다). 

오사카 부립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약력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작품에는 과학계의 최신 동향이나 이론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 많은데, 성전환을 소재로 한 [ 아내를 사랑한 여자 ]이나 뇌이식을 다룬 [ 변신 ], 인간 복제를 테마로 한 [ 레몬 ], 물리학을 전면에 내세운 [ 탐정 갈릴레오 ] 등이 대표적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1992년에 발표한 [ 아름다운 흉기 ] 역시 스포츠 과학과 도핑이라는 다분히 과학적인 소재를 채택한 작품이다. 

소설은 첫 도입부에서 일찌감치 사건의 전말을 보여주며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복수자를 모두 드러냄으로써 일반적인 추리 소설보다는 스릴러 소설에 훨씬 더 가까운 형태로 진행되어 나간다. 

자신들이 금지된 약물을 사용하여 기록을 높이고 명성을 얻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술자인 센도의 집에 침투하여 그를 죽이고 집을 불태운 과거의 유명 스포츠 선수 4명에게 센도가 스포츠 과학 기술을 집약시켜 육성한 여성 철인 7종 경기 선수인 타란툴라(본명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지만, 사실 이것은 입국 기록만 조사해 보면 금방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의 복수가 소설의 뼈대를 구성하고 있다.

처음부터 사건의 전모와 범인들의 정체가 낱낱이 밝혀지며 시작되는 만큼 소설은 불필요한 설명이나 군더더기가 없는 빠른 템포로 4명의 가해자들을 차례로 응징하는 복수의 과정을 직선적인 구성으로 그려나간다. 두드러진 신체적 특징에 일본어를 읽을 수 없고 지리에 무지하다는 치명적인 약점들을 지닌 타란툴라가 오직 탁월한 육체적인 능력과 인내심만으로 가해자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살해하는 집요함과 대담함이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불필요한 묘사를 배제한 치밀하면서도 간결한 필체를 타고 역동적으로 그려진다.

 
 

전체적인 전개 과정이 뻔히 예상되는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매 단락마다 몰두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필력이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탁월함인데, 액션과 감정의 클라이맥스를 지나 외견상 사건이 일단락지어진 것처럼 보이는 대목에서 갑작스럽게 제시되는 뜻밖의 반전과 속이 후련해 지는 권선징악의 엔딩은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찬탄을 금할 수 없게끔 만든다. 

운동 선수의 신체적 능력을 자연적인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사용되는 스포츠 과학의 여러 가지 방법들에 대한 서술은 하나의 소재를 선정하면 매우 치밀하게 사전 조사를 하여 흥미롭게 풀어놓는 작가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인데, 여성이 임신을 하면 그 직후부터 태내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육체적인 근력이 급격하게 늘어난다는 점에 착안해 임신과 유산을 인위적으로 반복하게 만들어 임신을 단순한 육체적 능력 강화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장면과 최후의 순간에 보여지는 타란튤라의 모성 본능은 독자들에게 엄청난 정서적인 충격을 안겨주면서 안타까움에 눈물짓게 만든다. 

 

 비교적 단순한 줄거리와 예측 가능한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잘 짜여진 세부 설정과 긴박감과 속도감이 넘쳐나는 전개는 400쪽에 달하는 책을 단 하룻 밤 만에 독파하게 할 정도로 압도적인 재미로 가득 차 있다. 추리적인 요소가 적다는 점에서 호불호가 갈리기는 할 테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 중에서 읽는 재미에 있어서는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수작이다. 

hajin

최근에 발간된 한 일본 순정 만화에서 문학 동호회에 가입한 여주인공에게 선배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나쓰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아니면 히가시노 게이고?’하며 거장급 작가들의 이름을 쭉 나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히가시노 게이고의 위치는 단순한 인기 대중 작가의 범주를 넘어 순수 문학도들 사이에서도 결코 무시하지 못할 만큼 상당히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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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페리움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4 로마사 트릴로지 1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근대 이후에 씌여진 역사서들 중에서 누구나 최고의 역작이자 필독서라고 첫 손에 꼽는 에드워드 기번의 [ 로마 제국 쇠망사 ]가 90년대 초에 간행되었던 까치의 번역본 이래 무려 26년 만에, 제대로 된 완역본으로는 사실상 처음으로 지난 달에 국내에 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대형 서점 사이트들에서는 별다른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은 현재 우리나라 독서계가 처해있는 극도로 열악한 상황을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해 보여주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 풍경이다.

아시모프에서부터 조지 루카스까지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을 매료시켰던 기번의 이 역작이 정작 권위있는 영문학자나 역사학자의 공들인 번역으로 발간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번 번역본의 번역자들은 대학원생과 강사들이어서 번역의 신뢰성에 적지않은 불안감을 던지고 있다)은 우리나라 역사학계와 영문학계의 심각한 직무 유기라고까지 할 수 있는데, 그나마 이 대작의 출판조차 기번에 비하자면 권위나 신뢰성에 있어서는 한참 떨어지고 국내에서는 사실상 기번의 대중화 버전이나 대안으로 읽혀왔던 시오노 나나미의 [ 로마인 이야기 ]의 성공에 힘입어 이루어진 것이라는 뒷 이야기는 본말이 한참이나 전도된 우리의 빈약한 인문학적 토양을 개탄케 할 정도이다. 

 

아직 시오노 나나미만큼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작가적 역량이나 작품의 균일한 완성도, 소설적인 재미, 그리고 팬들의 한결같은 충성도에 있어서는 가히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인 로버트 해리스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새로운 역사 소설 3부작의 첫 번째 대목인 [ 임페리움 ]이 출간된 시기가 공교롭게도 기번의 명저와 비슷한 때라는 절묘한 우연은 로버트 해리스의 필력을 알고있는 팬들에게 상당한 기대와 즐거움, 그리고 비교의 묘미를 선사한다.

2차 세계 대전 전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 대체 역사 장르에 속하는 [ 당신들의 조국 ]과 [ 이니그마 ], 그리고 [ 아크엔젤 ]의 세 작품을 발표한 후에 로버트 해리스는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시대인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 폼페이 ]와 [ 임페리엄 ] 두 작품과 현대의 영국과 미국을 배경으로 한 [ 고스트라이터 ]라는 무려 2000년이라는 긴 세월의 양 끝에 놓여있는 전혀 다른 경향의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함으로써 작가 스스로 앞으로의 작품 전개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들 중 가장 최근인 2008년에 발표된 [ 고스트라이터 ]는 현재의 영국과 국제 정치계의 부패하고 어두운 면을 직접적인 비유를 통해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어서 그의 작품으로는 다소 어조가 직설적이다는 생각을 안겨 주었는데, 아마도 이는 작가가 현실 정치에 대한 분노와 우려를 자신의 글에 고스란히 담아 동시대적인 관점에서 독자들에게 고발한 측면이 크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에 비해 [ 폼페이 ]는 로마 시대의 수도교를 중심으로 한 도시와 생활의 정교하고도 생생한 묘사가 후반부의 화산 폭발의 충격적인 표현과 함께 놀랄만큼 압도적인 느낌을 줌으로써 작가가 로마 시대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매우 방대하고 충실하게 했구나 하는 감탄을 안겨주어 로버트 해리스에 의한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또다른 작품을 기대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예상과 기대에 부응하듯 해리스는 로마 시대를 무대로 한 [ 임페리움 ]을 [ 폼페이 ]를 발간한 이듬 해인 2006년에 발표함으로써 [ 폼페이 ]를 준비하면서 습득한 고대 로마 사회에 대한 방대한 자료들을 정교하게 재구성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강대하고 화려했던 로마 제국의 사회와 정치를 본격적으로 파헤쳐 나간다는 야심찬 계획을 본격화하고, 2008년 11월에 발간될 차기작 역시 로마를 배경으로 한 [ Conspiracy(Conspirata) ](기존에 [ 타이탄 ]으로 알려진)이라고 밝힘으로써 2차 대전사에 이은 로마사 3부작의 완성을 일찌감치 예고하고 있다.

A.D 79년에 발생했던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화산 폭발을 중심 사건으로 삼음으로써 수도 로마가 아닌 이탈리아 남동부 변방에서 발생한 대규모 재난 드라마적인 플롯에 중점을 두었던 [ 폼페이 ]와는 달리 [ 임페리움 ]은 제국의 중심부인 로마를 공간적 배경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 폼페이 ]보다 150년 전인 B.C 7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1000년에 걸친 로마 역사상 가장 격변하고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던 공화정이 제정으로 넘어가던 시기를 배경으로 삼음으로써 로마사의 가장 격동적이었던 순간의 한복판으로 과감하게 뛰어들었다(시오노 나나미의 [ 로마인 이야기 ] 3권 후반부인 ‘폼페이우스 시대’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 시기를 로마 역사상 최고의 웅변가이자 문장가, 그리고 변호사이자 정치인, 철학자였던 키케로를 중심으로 하고(작중 화자는 키케로의 개인 비서이자 속기술의 창안자인 자유 노예 티로로 설정하였다), 그 주위에 1차 과두정의 두 거인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그리고 막 로마 원로원에 발을 들인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배치함으로써 그 이름들만으로도 눈이 부신 초호화 캐스팅을 구성하였다.

소설은 27세의 키케로가 웅변과 변론술, 그리고 철학을 공부한 후 30대 초반의 나이에 막 원로원에 발을 디딘 정치 신인인 시절부터 시작된다.  

두 부분으로 나눠진 소설의 1부에서는 키케로가 속주의 총독이었던 베레스가 임기 중에 저지른 폭정과 살인, 가혹한 착취를 고발하여 귀족 계급의 온갖 방해와 회유를 물리치고 마침내 그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일약 로마의 유명 인사가 되는 계기가 된 사건을 중심으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같은 당대의 집정관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들을 법정 소설 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2부는 1부에서 거둔 성공을 토대로 조영관과 법무관을 차례로 역임한 키케로가 고전적인 공화정을 붕괴시키고 향후에 결국 제정으로 가게되는 과도기인 과두정을 기도하는 폼페이우스를 돕고, 험란한 과정을 거쳐 로마 정계의 정상인 집정관에 당선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이 해리스의 기존 대체 역사물들과 가장 크게 차이나는 점은 이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주요 사건이나 인물들이 대부분 실제로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이고,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 역시 역사적인 기록과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해리스는 이 작품에서 가공의 대체 역사를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들을 기록과 자료에 근거하여 치밀하게 복원해 내고 그 사이사이의 공백 부분들을 유추가능한 논리적인 추론에 근거하여 보완함으로써 2000년 전의 역사를 완벽하게 재현해 놓은 것이다. 가공의 역사가 아닌 실제로 그랬을 인과성이 높은 역사를 기록과 논리에 근거하여 정교하게 짜맞춰 재구성해 내는 이러한 시도는 대체 역사보다도 훨씬 더 가치있는 창작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6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관통하여 독자를 단숨에 사로잡는 것은 바로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시기인 B.C 70년 경의 로마에 거주하였던 키케로를 비롯한 역사적인 인물들의 생활 풍경을 마치 직접 TV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그려낸 사실적인 모습들이다. 이 책보다 2배 이상 더 두꺼운 한 세대 전의 노벨상 수상작인 솅키에비치의 [ 쿼 바디스 ]나 루 월레스의 [ 벤 허 ]가 그려냈던 것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생동감과 사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데에는 바로 20세기 후반부에 급격하게 발전된 고대사 연구 결과들을 전폭적으로 반영하고, 거기에 로버트 해리스 특유의 역사 속의 유물들을 살아 숨쉬게 만드는 활기찬 필력이 더해진 이상적인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노골적으로 카이사르 추종자를 자처하는 시오노 나나미의 왜곡된 시선으로 인해 지나치게 신격화, 정당화되고 있는 카이사르의 권력욕과 그 반대편에서 공화정의 이상을 수호하려는 키케로의 역사적 무게를 제대로 균형잡아 그려낸 점이 인상적이고, 로마의 정치 체계가 안고있는 구조적인 문제점이 현대 미국의 그것과 유사한 점도 주목할 만 하다. 

2000년 전 고대 로마의 가장 긴박하고 흥미진진했던 한 시기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로마사 최고의 영웅들의 모습을 마치 [ 글라디에이터 ]나 [ 롬 ]을 보듯이 눈 앞에 살아 숨쉬는 모습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로마와 인류의 역사를 극적으로 전환시킨 드라마틱한 사건 전개 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를 현재에 완벽하게 살려내었다는 점에서 [ 로마인 이야기 ]보다도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로마 매니아’로 끌어들인 가능성이 크다고 할 것이다. 

 

로버트 해리스의 차기작인 [ Conspiracy(Conspirata) ]는 아마도 이번 책에서는 아직 본격적으로 활동하지 않은 카토와 카틸리나가 로마 역사의 중대한 사건에 중심 인물들로 등장하고, 카이사르가 삼두정치를 거쳐 집정관에 취임하는 ‘영웅 시대’를 그려낼 것으로 예상되므로 [ 임페리움 ]을 다 읽은 독자들은 로버트 해리스의 다음 책을 학수고대하는 마음으로 목놓아 기다릴 것이 분명하다. 

 

ha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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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더미의 유산 - 한국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세계 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
팀 와이너 지음, 이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중세의 프리메이슨에서부터 현대의 빌더버그 그룹까지 수 백년의 내력을 지니고 긴 시간 동안 두텁게 쌓아온 방대한 인맥과 막대한 지금, 그리고 치밀한 정보력을 토대로 세계 주요 국가들의 정재계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세계사의 주요 사건들을 막후에서 조작하며 실질적으로 세계 정부를 주무르고 있다는 ‘그림자 정부’에 대한 음모론은 지난 수 세기 동안 재야 역사학자들과 음모론주의자들로부터 끊임없는 관심와 호응을 받으며 끈질기게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그 실체를 분명하게 입증할 수 없는 그림자 정부론보다도 훨씬 더 노골적이고 분명하게 20세기 전체에 걸쳐 전세계의 정치와 경제에 어두운 검은 손을 뻗쳤던 거대한 음습한 국제적인 규모의 조직이 실존하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미국의 CIA이다. 

20세기 후반부 전체에 걸쳐 CIA가 케네디 암살에서부터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 조작까지 미국 국내 정치에 어두운 손길을 드리웠던 것은 물론이고, 남미와 중동, 아시아는 물론 유럽의 정치에까지 노골적인 형태로 개입하여 암살과 파괴, 유괴, 협박, 심지어는 무력을 동원한 정부 전복까지 자행했다는 사실은 다른 나라들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우리에게까지도 이제는 의심의 여지조차 없이 폭로되어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세계 경찰’을 자임하며 2차 대전 이후 세계 최대의 강대국으로, 그리고 최근 20년 동안에는 유일무이한 초강대국으로 군림해 온 미국의 가장 방대한 촉수이자 강력한 실천 수단이었던 CIA의 성립 과정과 연혁, 내부 구조와 의사 결정 시스템, CIA가 반 세기 동안 전지구적 규모로 자행해 온 정보 공작 정치의 구체적인 사건과 형태들, 그리고 그 입안 및 전개 과정의 실상과 내막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서적은 이상하게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에서 출간된 [ 잿더미의 유산 ]은 그러한 CIA에 대한 궁금증과 의혹들을 단숨에 해소시켜 줄 만한 내용들을 1,0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속에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채워놓아서 가히 ‘CIA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라고 자신있게 단언할 수 있을 정도이다.

< 뉴욕 타임스 >의 기자인 팀 와이너는 20여년 동안 미국 정보 기관에 대한 기사와 글들을 지속적으로 써왔으며, 1988년에는 미 국방부의 비자금을 파헤친 기사로 퓰리쳐상을 수상함으로써 국가 안보와 정보 기관의 비밀 공작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로 평가받고 있는 저널리스트이다. 

이 책은 그가 수 년 간에 걸쳐 10여 명의 전, 현직 CIA 국장들과 300여 명의 요원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5만 건이 넘는 문서들과 2000건이 넘는 증언 자료들, 그리고 수 차례에 걸친 세계 각지의 현장 답사 기록들을 종합하여 정리해 낸 방대한 결과물이다. 저자는 이 책의 모든 내용들은 자신의 신분을 실명으로 밝힌 사람이 직접 말로 하거나 글로 쓴 신뢰성 높은 자료들로만 구성되었기 때문에 익명의 정보 제공자로부터 제공받은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이나 추측들로 채워진 기존의 책들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1차 보고서와 자료들만을 바탕으로 작성된 ‘최초의 CIA 역사서’라고 밝히고 있다. 

저자가 이처럼 이 책의 기초 자료들과 증인 및 증언들에 대한 신뢰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CIA의 본 모습이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실망스럽기 때문이다. 저자는 CIA의 태동 자체부터가 2차 대전 이후 새롭게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세계 전체 규모의 정보를 조정하고 통제하기 위해 체계적이고 치밀하게 조직된 것이 아니라, 2차 대전 중 수많은 실수와 실패를 저질렀던 OSS의 인물과 조직을 그대로 이어받은 토대 위에서 무원칙하고 계획성없이 임의로 창설되었고, 그후로도 조직적이거나 효율적인 운영과는 거리가 멀고 전문성에 있어서는 더더군다나 떨어지는 취약한 정보 기관으로 유지, 운영되어 왔다고 폭로하고 있다. 

설립 초기부터 영국이나 러시아의 첩보 기관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전문성이 부족하고 훈련이나 운영도 허술하여 수많은 요원들을 무의미하게 희생시켜 온 CIA는 철의 장막 내에 정보원을 침투시키려던 공작에 모두 실패하고, 냉전 이후 처음으로 CIA의 역량을 시험받은 무대가 된 한국 전쟁에서도 전쟁의 발발과 중국의 참전을 전혀 예측해내지 못했으며, 설상가상으로 한국 전쟁 당시에 북한에 침투시킨 수 천명의 한국인 요원들을 모두 잃는 무능력함을 노출시켰다. 한국인 요원들을 통해 입수한 정보들도 모두 거짓이거나 가짜였음을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되었고, 심지어는 실수로 이승만을 죽일 뻔 하여 화가 난 이승만으로부터 강제 출국 명령까지 받는 등 무기력하고 무능함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말았다. 

현지의 언어를 말할 줄 알거나 이해하는 전문 요원 하나 없음은 물론 현지 인사들의 신상 명세나 전력, 심지어는 현지 지도조차 갖추고 있지 않은 상식 이하의 비전문성으로 점철된 CIA의 해외 공작은 이란과 시리아의 쿠데타 지원과 과테말라와 인도네시아 정부 전복 기도 등이 모두 처참한 실패로 돌아가고, 이라크와 쿠바에서도 미국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음으로써 정보와 실행 모두에서 능력이 없음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말았다. 이 시기 CIA의 유일한 성공 사례로는 막대한 창당 자금 지원으로 일본의 자민당을 매수한 것 정도 뿐이었다.

케네디 시대에 접어들면서 CIA는 쿠바 침공을 계획하여 피그스만 작전과 카스트로 암살을 실행했으나 역시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쿠바 사태의 해결 역시 케네디가 터키에 있는 미군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면 그 교환 조건으로 소련이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겠다는 흐루시초프의 타협안을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는 새로운 사실도 이 책을 통해 폭로된다.

CIA는 한국과 쿠바에서의 실패 이후 베트남에서도 여전히 실수를 반복하는데, 고 딘 디엠을 제거하는 쿠데타 세력을 앞뒤 가리지 않고 지원함으로써 고 딘 디엠과 고딘 누를 자살로까지 몰고가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베트남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만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내내 지속된 CIA의 잘못되거나 왜곡된 정보들은 결국 미국을 베트남이라는 수렁 속으로 깊숙이 밀어넣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CIA는 케네디 암살 사건 때도 오스왈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FBI와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은폐함으로써 이후 암살 계획의 배후로 지목받는 원인을 스스로 만들었다.



닉슨 시대에 접어들자 CIA는 미국 정치인과 일반 국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찰과 감청을 자행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워터게이트 사건을 통해 폭로됨으로써 CIA의 위상에 치명적인 타격과 불명예를 안겨주었다. 결국 CIA는 캄보디아 폭격과 칠레의 아예데 정권을 전복시키는 악명을 뒤집어 쓴 상태로 닉슨과 포드, 카터 대통령에 의해 백안시되고 영향력이 대폭 축소된다. 

레이건과 부시의 공화당 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다시 CIA는 이란에 대한 공작을 시행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이란 콘트라 사건으로 공개적으로 곤경에 처하게 되고, 소련의 붕괴를 사전에 예측하지 못함으로써 정보 수집과 분석에서 무능력함을 만천하에 노출시킨 데다가, 9.11역시 사전에 예측하거나 방지하지 못함은 물론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존재한다는 잘못된 정보를 입증하지 못함으로써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결국 역할이 대폭 축소된 뒤 주요 기능이 국토안보국에 넘어감으로써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밝게 되었다.

50여년에 걸쳐 세계 최강대국의 강력한 검은 손으로 세계의 정보를 좌우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적대국은 물론 우방국의 정치에까지 깊숙이 개입하여 조종을 획책하고, 자신들의 자의적인 필요에 따라 쿠데타 모의나 지원, 군사 개입, 심지어는 암살 시도까지도 서슴치 않는 등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시행함으로써 전세계로부터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된 CIA이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정보 기관으로써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들조차 거의 충족시키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의 기반인 정보의 부실함이 미국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결국 그 부실한 정보 수집과 분석 능력이 CIA 자신의 목을 조여 조직의 붕괴를 초래하게 되었음을 저자는 CIA가 50년 동안 자행해 온 굵직굵직한 정치 공작의 내막과 실상을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CIA 내부 인사의 증언을 토대로 생생하고 자세하게 재생해 보여준다. 

이 책이 권위있는 상들을 수상하고 수많은 매체들로부터 절찬을 받은 것은 바로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CIA라는 20세기 후반 세계 정치계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정보 집단의 성립에서부터 몰락까지의 과정과 주요 사건들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폭로함으로써 ‘CIA라는 거대한 검은 세력의 모든 것’을 밝혀내 보여주고, 그동안 20세기 현대사의 중요한 대목들마다 해명되지 않고 남아있던 수수께끼들을 풀어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독자나 연구자라면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필독서이다.
 

ha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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