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페리움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4 로마사 트릴로지 1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근대 이후에 씌여진 역사서들 중에서 누구나 최고의 역작이자 필독서라고 첫 손에 꼽는 에드워드 기번의 [ 로마 제국 쇠망사 ]가 90년대 초에 간행되었던 까치의 번역본 이래 무려 26년 만에, 제대로 된 완역본으로는 사실상 처음으로 지난 달에 국내에 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대형 서점 사이트들에서는 별다른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은 현재 우리나라 독서계가 처해있는 극도로 열악한 상황을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해 보여주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 풍경이다.

아시모프에서부터 조지 루카스까지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을 매료시켰던 기번의 이 역작이 정작 권위있는 영문학자나 역사학자의 공들인 번역으로 발간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번 번역본의 번역자들은 대학원생과 강사들이어서 번역의 신뢰성에 적지않은 불안감을 던지고 있다)은 우리나라 역사학계와 영문학계의 심각한 직무 유기라고까지 할 수 있는데, 그나마 이 대작의 출판조차 기번에 비하자면 권위나 신뢰성에 있어서는 한참 떨어지고 국내에서는 사실상 기번의 대중화 버전이나 대안으로 읽혀왔던 시오노 나나미의 [ 로마인 이야기 ]의 성공에 힘입어 이루어진 것이라는 뒷 이야기는 본말이 한참이나 전도된 우리의 빈약한 인문학적 토양을 개탄케 할 정도이다. 

 

아직 시오노 나나미만큼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작가적 역량이나 작품의 균일한 완성도, 소설적인 재미, 그리고 팬들의 한결같은 충성도에 있어서는 가히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인 로버트 해리스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새로운 역사 소설 3부작의 첫 번째 대목인 [ 임페리움 ]이 출간된 시기가 공교롭게도 기번의 명저와 비슷한 때라는 절묘한 우연은 로버트 해리스의 필력을 알고있는 팬들에게 상당한 기대와 즐거움, 그리고 비교의 묘미를 선사한다.

2차 세계 대전 전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 대체 역사 장르에 속하는 [ 당신들의 조국 ]과 [ 이니그마 ], 그리고 [ 아크엔젤 ]의 세 작품을 발표한 후에 로버트 해리스는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시대인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 폼페이 ]와 [ 임페리엄 ] 두 작품과 현대의 영국과 미국을 배경으로 한 [ 고스트라이터 ]라는 무려 2000년이라는 긴 세월의 양 끝에 놓여있는 전혀 다른 경향의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함으로써 작가 스스로 앞으로의 작품 전개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이들 중 가장 최근인 2008년에 발표된 [ 고스트라이터 ]는 현재의 영국과 국제 정치계의 부패하고 어두운 면을 직접적인 비유를 통해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어서 그의 작품으로는 다소 어조가 직설적이다는 생각을 안겨 주었는데, 아마도 이는 작가가 현실 정치에 대한 분노와 우려를 자신의 글에 고스란히 담아 동시대적인 관점에서 독자들에게 고발한 측면이 크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에 비해 [ 폼페이 ]는 로마 시대의 수도교를 중심으로 한 도시와 생활의 정교하고도 생생한 묘사가 후반부의 화산 폭발의 충격적인 표현과 함께 놀랄만큼 압도적인 느낌을 줌으로써 작가가 로마 시대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매우 방대하고 충실하게 했구나 하는 감탄을 안겨주어 로버트 해리스에 의한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또다른 작품을 기대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예상과 기대에 부응하듯 해리스는 로마 시대를 무대로 한 [ 임페리움 ]을 [ 폼페이 ]를 발간한 이듬 해인 2006년에 발표함으로써 [ 폼페이 ]를 준비하면서 습득한 고대 로마 사회에 대한 방대한 자료들을 정교하게 재구성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강대하고 화려했던 로마 제국의 사회와 정치를 본격적으로 파헤쳐 나간다는 야심찬 계획을 본격화하고, 2008년 11월에 발간될 차기작 역시 로마를 배경으로 한 [ Conspiracy(Conspirata) ](기존에 [ 타이탄 ]으로 알려진)이라고 밝힘으로써 2차 대전사에 이은 로마사 3부작의 완성을 일찌감치 예고하고 있다.

A.D 79년에 발생했던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화산 폭발을 중심 사건으로 삼음으로써 수도 로마가 아닌 이탈리아 남동부 변방에서 발생한 대규모 재난 드라마적인 플롯에 중점을 두었던 [ 폼페이 ]와는 달리 [ 임페리움 ]은 제국의 중심부인 로마를 공간적 배경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 폼페이 ]보다 150년 전인 B.C 7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1000년에 걸친 로마 역사상 가장 격변하고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던 공화정이 제정으로 넘어가던 시기를 배경으로 삼음으로써 로마사의 가장 격동적이었던 순간의 한복판으로 과감하게 뛰어들었다(시오노 나나미의 [ 로마인 이야기 ] 3권 후반부인 ‘폼페이우스 시대’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 시기를 로마 역사상 최고의 웅변가이자 문장가, 그리고 변호사이자 정치인, 철학자였던 키케로를 중심으로 하고(작중 화자는 키케로의 개인 비서이자 속기술의 창안자인 자유 노예 티로로 설정하였다), 그 주위에 1차 과두정의 두 거인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그리고 막 로마 원로원에 발을 들인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배치함으로써 그 이름들만으로도 눈이 부신 초호화 캐스팅을 구성하였다.

소설은 27세의 키케로가 웅변과 변론술, 그리고 철학을 공부한 후 30대 초반의 나이에 막 원로원에 발을 디딘 정치 신인인 시절부터 시작된다.  

두 부분으로 나눠진 소설의 1부에서는 키케로가 속주의 총독이었던 베레스가 임기 중에 저지른 폭정과 살인, 가혹한 착취를 고발하여 귀족 계급의 온갖 방해와 회유를 물리치고 마침내 그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일약 로마의 유명 인사가 되는 계기가 된 사건을 중심으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같은 당대의 집정관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들을 법정 소설 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2부는 1부에서 거둔 성공을 토대로 조영관과 법무관을 차례로 역임한 키케로가 고전적인 공화정을 붕괴시키고 향후에 결국 제정으로 가게되는 과도기인 과두정을 기도하는 폼페이우스를 돕고, 험란한 과정을 거쳐 로마 정계의 정상인 집정관에 당선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이 해리스의 기존 대체 역사물들과 가장 크게 차이나는 점은 이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주요 사건이나 인물들이 대부분 실제로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이고,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 역시 역사적인 기록과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해리스는 이 작품에서 가공의 대체 역사를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들을 기록과 자료에 근거하여 치밀하게 복원해 내고 그 사이사이의 공백 부분들을 유추가능한 논리적인 추론에 근거하여 보완함으로써 2000년 전의 역사를 완벽하게 재현해 놓은 것이다. 가공의 역사가 아닌 실제로 그랬을 인과성이 높은 역사를 기록과 논리에 근거하여 정교하게 짜맞춰 재구성해 내는 이러한 시도는 대체 역사보다도 훨씬 더 가치있는 창작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6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관통하여 독자를 단숨에 사로잡는 것은 바로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시기인 B.C 70년 경의 로마에 거주하였던 키케로를 비롯한 역사적인 인물들의 생활 풍경을 마치 직접 TV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그려낸 사실적인 모습들이다. 이 책보다 2배 이상 더 두꺼운 한 세대 전의 노벨상 수상작인 솅키에비치의 [ 쿼 바디스 ]나 루 월레스의 [ 벤 허 ]가 그려냈던 것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생동감과 사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데에는 바로 20세기 후반부에 급격하게 발전된 고대사 연구 결과들을 전폭적으로 반영하고, 거기에 로버트 해리스 특유의 역사 속의 유물들을 살아 숨쉬게 만드는 활기찬 필력이 더해진 이상적인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노골적으로 카이사르 추종자를 자처하는 시오노 나나미의 왜곡된 시선으로 인해 지나치게 신격화, 정당화되고 있는 카이사르의 권력욕과 그 반대편에서 공화정의 이상을 수호하려는 키케로의 역사적 무게를 제대로 균형잡아 그려낸 점이 인상적이고, 로마의 정치 체계가 안고있는 구조적인 문제점이 현대 미국의 그것과 유사한 점도 주목할 만 하다. 

2000년 전 고대 로마의 가장 긴박하고 흥미진진했던 한 시기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로마사 최고의 영웅들의 모습을 마치 [ 글라디에이터 ]나 [ 롬 ]을 보듯이 눈 앞에 살아 숨쉬는 모습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로마와 인류의 역사를 극적으로 전환시킨 드라마틱한 사건 전개 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를 현재에 완벽하게 살려내었다는 점에서 [ 로마인 이야기 ]보다도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로마 매니아’로 끌어들인 가능성이 크다고 할 것이다. 

 

로버트 해리스의 차기작인 [ Conspiracy(Conspirata) ]는 아마도 이번 책에서는 아직 본격적으로 활동하지 않은 카토와 카틸리나가 로마 역사의 중대한 사건에 중심 인물들로 등장하고, 카이사르가 삼두정치를 거쳐 집정관에 취임하는 ‘영웅 시대’를 그려낼 것으로 예상되므로 [ 임페리움 ]을 다 읽은 독자들은 로버트 해리스의 다음 책을 학수고대하는 마음으로 목놓아 기다릴 것이 분명하다. 

 

ha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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