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흉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데뷔 이후 현재까지 20년 동안 무려 60권이 넘는 단행본을 발표함으로써 1년에 평균 3~4편 꼴이라는 다작을 하고 있고, 그중 대부분이 대중적인 추리나 SF 장르의 소설로 분류되면서 상당 수가 영화와 드라마로 앞다투어 제작된 가장 대중친화적인 소설가인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처럼 녹록치 않은 평가를 동시에 얻고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엄청난 다작과 방대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일정한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는 균일하게 높은 작품성의 성취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눠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는 휴머니즘적인 감정이 중심이 된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오락적인 재미에 치중한 작품이다. 동일한 사회성 짙은 내용과 추리나 스릴러 소설, 혹은 연애 소설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작가가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 전체적인 느낌은 크게 달라지는데, 문학적인 평가는 물론 전자 쪽이 훨씬 더 높은 편이다(가장 대표적인 예로 나오키상 수상작인 [ 용의자 X의 헌신 ]을 들 수 있다). 

오사카 부립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약력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작품에는 과학계의 최신 동향이나 이론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 많은데, 성전환을 소재로 한 [ 아내를 사랑한 여자 ]이나 뇌이식을 다룬 [ 변신 ], 인간 복제를 테마로 한 [ 레몬 ], 물리학을 전면에 내세운 [ 탐정 갈릴레오 ] 등이 대표적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1992년에 발표한 [ 아름다운 흉기 ] 역시 스포츠 과학과 도핑이라는 다분히 과학적인 소재를 채택한 작품이다. 

소설은 첫 도입부에서 일찌감치 사건의 전말을 보여주며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복수자를 모두 드러냄으로써 일반적인 추리 소설보다는 스릴러 소설에 훨씬 더 가까운 형태로 진행되어 나간다. 

자신들이 금지된 약물을 사용하여 기록을 높이고 명성을 얻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술자인 센도의 집에 침투하여 그를 죽이고 집을 불태운 과거의 유명 스포츠 선수 4명에게 센도가 스포츠 과학 기술을 집약시켜 육성한 여성 철인 7종 경기 선수인 타란툴라(본명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지만, 사실 이것은 입국 기록만 조사해 보면 금방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의 복수가 소설의 뼈대를 구성하고 있다.

처음부터 사건의 전모와 범인들의 정체가 낱낱이 밝혀지며 시작되는 만큼 소설은 불필요한 설명이나 군더더기가 없는 빠른 템포로 4명의 가해자들을 차례로 응징하는 복수의 과정을 직선적인 구성으로 그려나간다. 두드러진 신체적 특징에 일본어를 읽을 수 없고 지리에 무지하다는 치명적인 약점들을 지닌 타란툴라가 오직 탁월한 육체적인 능력과 인내심만으로 가해자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살해하는 집요함과 대담함이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불필요한 묘사를 배제한 치밀하면서도 간결한 필체를 타고 역동적으로 그려진다.

 
 

전체적인 전개 과정이 뻔히 예상되는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매 단락마다 몰두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필력이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탁월함인데, 액션과 감정의 클라이맥스를 지나 외견상 사건이 일단락지어진 것처럼 보이는 대목에서 갑작스럽게 제시되는 뜻밖의 반전과 속이 후련해 지는 권선징악의 엔딩은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찬탄을 금할 수 없게끔 만든다. 

운동 선수의 신체적 능력을 자연적인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사용되는 스포츠 과학의 여러 가지 방법들에 대한 서술은 하나의 소재를 선정하면 매우 치밀하게 사전 조사를 하여 흥미롭게 풀어놓는 작가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인데, 여성이 임신을 하면 그 직후부터 태내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육체적인 근력이 급격하게 늘어난다는 점에 착안해 임신과 유산을 인위적으로 반복하게 만들어 임신을 단순한 육체적 능력 강화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장면과 최후의 순간에 보여지는 타란튤라의 모성 본능은 독자들에게 엄청난 정서적인 충격을 안겨주면서 안타까움에 눈물짓게 만든다. 

 

 비교적 단순한 줄거리와 예측 가능한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잘 짜여진 세부 설정과 긴박감과 속도감이 넘쳐나는 전개는 400쪽에 달하는 책을 단 하룻 밤 만에 독파하게 할 정도로 압도적인 재미로 가득 차 있다. 추리적인 요소가 적다는 점에서 호불호가 갈리기는 할 테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 중에서 읽는 재미에 있어서는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수작이다. 

hajin

최근에 발간된 한 일본 순정 만화에서 문학 동호회에 가입한 여주인공에게 선배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나쓰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아니면 히가시노 게이고?’하며 거장급 작가들의 이름을 쭉 나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히가시노 게이고의 위치는 단순한 인기 대중 작가의 범주를 넘어 순수 문학도들 사이에서도 결코 무시하지 못할 만큼 상당히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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