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전 클림트가 그린 호수의 고요한 물빛을 보며 마음을 다스리자. 구테 나흐트!

Attersee, 1900 - Gustav Klimt - WikiArt.org



Island in the Attersee, 1902 - Gustav Klimt - WikiArt.org


Attersee (lake) -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Attersee_(lake)




아터 호수(2020년 8월) 사진: UnsplashFabian Kühne


클림트의 풍경화로 제작한 내년 달력 발견.






그는 여름마다 대도시 빈의 소음을 떠나 이 한적한 호숫가로 휴가를 왔다. 1900년부터 1916년까지 16년이나 아터 호수를 찾아왔던 클림트는 호숫가의 풍경을 그린 50점 이상의 풍경화를 남겼다. 이 정도면 클림트가 그린 그림의 4분의 1 분량이다. 재미있게도 그의 초상화에는 결코 배경으로 풍경이 등장하는 법이 없고, 반대로 그의 풍경화에는 사람이 등장하는 법이 없다.

신비로운 에메랄드빛의 물빛은 빙하가 녹아서 이 호수를 채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신비로운 물색 때문에 클림트 외에도 빈의 예술가들이 이곳을 ‘천사의 호수’라고 부르며 즐겨 찾아왔다. - 07 풍경화, 클림트 이면의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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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4-10-22 0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마지막 사진 뛰어들고 싶네요(수영을 못합니다만..모양이 좀 빠지더라도 구명조끼를 빌려서^^)

서곡 2024-10-22 10:48   좋아요 1 | URL
저 호수 근처에 클림트 센터가 생겼대요 거기서 커피 한 잔 하고 호수바람 쐬며 멍때리면 근사하겠죠 물멍......ㅋㅋㅋ 어제 월욜은 갔고 또 오늘 화욜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오스트리아 빈 망명 시절 사진 두 장을 가져왔다.

트로츠키 1910




트로츠키 1912








오스트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법률을 연구하듯이 마르크스 이론의 이런저런 부분을 배우고 《자본론》이 낳는 이자로 먹고살았기 때문에 너무나 자주 속물적인 근성을 드러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유서깊은 수도 빈, 이 계층적인데다가 허황되고 알맹이 없는 도시에서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일종의 짜릿한 말초적 기쁨을 느끼며 서로를 ‘박사님(HerrDoktor)’으로 부르고 있었다. 노동자들도 흔히 그들을 ‘박사 동지(Genosse Herr Doktor)’로 불렀다. - 제16장 두 번째 망명과 독일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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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 자서전 '나의 생애(상)'로부터 옮긴 아래 글 속 사람들은 빈 망명 시절에 만난 오스트리아 지식인과 정치인들이다.


빈 2019 Café Central By rboed* - CC BY 2.0







그들은 교양이 높은 사람들로 다양한 문제에 대한 지식이 나보다 많았다. 나는 관심을 갖고 아주 열심히, 그리고 거의 다음과 같이 말해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공손한 태도로 카페 ‘첸트랄’에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나는 곧 당황했다. 이 사람들은 혁명가가 아니었다.

내가 발견하고 크게 놀란 것은, 이 교양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큰 정치 문제, 특히 혁명적 변혁의 문제에 이르자마자 마르크스의 방법론을 전혀 적용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끼리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눌 경우에는 논문을 쓰거나 연설할 때보다 훨씬 더 솔직하게 본심을 드러냈다. 즉 때로는 쇼비니즘〔맹목적인 애국심〕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때로는 쥐꼬리만한 재산을 자랑하고, 때로는 경찰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나타내고, 때로는 여성에 대한 비열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종종 나는 깜짝 놀라며 마음 속으로 이렇게 소리쳤다. "정말 대단한 혁명가들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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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 자서전 '나의 생애(상)'중 '제16장 두 번째 망명과 독일 사회주의'로부터 

1907년 By K. Ledermann, Wien - Ansichtskarte, Public Domain


트로츠키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2t3972b 1907년에 오스트리아 빈으로 갔다고 한다.






다른 모든 망명자가 스위스나 파리에 집결하고 있을 때, 우리는 어째서 빈을 선택했을까? 그 당시에 내가 가장 밀접하게 접촉하고 있었던 것은 독일의 정치 생활이었지만 경찰 때문에 베를린에 정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빈에서 살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7년 내내 쳇바퀴 속의 다람쥐를 너무나 많이 상기시키는 오스트리아의 정치생활보다도 독일의 그것을 더 주의깊게 지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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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의 비엔나 편으로부터


카페 센트럴 - 사진: UnsplashRikin Katyal


[같은 시공간을 산 츠바이크·프로이트·요제프 1세·히틀러·스탈린·트로츠키… ] https://www.segye.com/newsView/20210329513365?OutUrl=daum 아래 발췌글에 등장하는 카페 센트럴 이야기이다.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가 하는 일도 없이 시간을 보내곤 했다는 ‘카페 센트랄’조차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분위기는 제법 있었다. 둥근 천장과 대리석 탁자, 피아니스트도 있었다. 그러나 커피 한 잔에 34실링이나 하는 데다가 서비스는 무관심 수준이었다.

그래도 센트랄에 앉아 정치를 논하던 두 명의 비엔나 사람에 관한 우스갯소리는 재미있다. 두 사람 중 하나는 모스크바에서 갓 돌아와, 러시아에 곧 혁명이 닥칠 거라고 예견했다.

"오, 그래?"

다른 한 사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심드렁하게 물은 후, 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트로츠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혁명을 누가 주도하는데? 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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