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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통권 104호 - 2009년 1.2월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녹색평론>104호, 2009년 1-2월호
단 한 권의 책만을 고르라고 한다면 이젠 당연 <녹색평론>이다. 예전엔 그 원칙주의 앞에 주눅 들어 피하고만 싶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그나마 대안이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김종철 선생님의 ‘책을 펴내며’ 제목이 ‘희망을 위한 보이콧’이다. 제목만 봐도 대략 알겠다. 나도 이젠 그 정도의 내공은 생긴 셈이다. 근데 문제는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몸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 그래도 차근차근 준비를 한다. 자립을 위한 준비. 기존의 이 체제에서 벗어나려면, 보이콧을 하려면 자립, 자급자족을 어느 정도는 해야 한다. 그 일환으로 이 책도 읽는다.
김종철 선생님의 글에서 이 자유주의 경제가 무엇이지 말한다. “말이 좋아서 자유주의지, 이것은 노골적인 양육강식을 합리화하는 극히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논리”라고 한다. 그 놈의 자유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되풀이하면서 실은 기업의 자유를 위한 규제철폐를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규제철폐 혹은 규제완화 요구는 결국 막대한 자금력을 가진 기업이나 자본가가 돈벌이를 위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하든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뜻”이며 “신자유주의자들의 가장 큰 죄악은 늘 ‘자유’를 부르짖으면서도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자유’에 대해서는 한 번도 진지한 고려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국가와 자본의 영향력 바깥에서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의 창조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을 위한 구체적 방법은 다양한 형태의 소규모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그 틀 속에서 우애와 상호부조의 원리에 입각한 협동과 자치의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차례 언급했고 공부했던 올바른 아나키즘이다.
마침 최종수 신부님이 방문한 어느 공동체 이야기도 실려 있어서 좋았다. 공동체가 사실 쉽지는 않다. 한계 많은 인간이라서 그렇다. 그러니 신앙이 실려 있는 곳은 다르다. “신앙의 삶에는 두려워할 실패도, 자랑할 성공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하다 중단되더라도 그만큼 성공한 거지요. 성공과 실패에 연연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공동체 밖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아요.”
이런 삶이 될 때 서정홍 시인의 글에서처럼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게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밥을 먹고 숨을 쉽니다”라는 꼴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여기서 내 삶을 돌아본다. 이제 교사로서의 인생은 사실 실패했다. 애들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월급타러 학교에 간다. 비참한 꼬라지다. 벗어나야 한다.
이민철 광주자유대학 일꾼의 글에서처럼 “자격증 따서 돈 벌 목적이 아니라면 대학에 갈 필요를 못” 느낄 수도 있어야 한다. 학자가 되어 일을 할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니 좋은 대학 안가도, 아니 좋은 대학 가려고 청춘을 허비하지 않을 때 자기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 독립의 출발점이라는 데 공감한다.
사실 이번 호에서 가장 공감한 글은 장성익의 글이다. 환경운동의 과오를 지적한 글이다. 단적으로 ‘최열 사태’를 보면 안다. 아프지만 꼴 필요한 글이라 장황하게 옮긴다.
“돈의 논리와 조직의 성장 논리에 무비판적·무반성적으로 매몰되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운동의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단에 규모도 빠르게 커졌고, 그렇게 비대해진 몸뚱어리를 건사하는 데 휘둘려 운동 본연의 목적·지향·가치 등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확인과 성찰적 경신 작업은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다. 그 결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조직을 위한 조직, 사업을 위한 사업, 돈을 위한 돈이라는 타성적인 악순환 고리에 빠져들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장을 하니까 자연스레 거대 상근 구조로 상징되는 많은 인력을 거느리게 됐고, 그 인력을 유지·확대하기 위해 조직을 더 키워야 했으며, 이를 위해 돈을 더 많이 끌어 모아야 했고, 이를 위해 또다시 더 많은 프로젝트를 끌어와야 하는 악성 연쇄고리가 관성적으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중략) 조직운용과 활동 방식이 이런 식으로 이뤄지다보니 회원이나 개별적 시민 후원자들이 내는 다수 성격의 회비와 후원금에 의존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하고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대신 한번에 뭉텅이 돈이 들어오는 정부 지원금이나 기업 후원금 확보 위주의 프로젝트 사업에 알게 모르게 경도되지 않았을까? 결국 환경운동의 주요 비판대상인 성장주의, 물량주의, 규모주의, 속도주의, 효율주의, 편의주의 따위의 함정에 역설적이게도 환경단체 스스로 빠져들었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간 형국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돈이 없으면 활동이 중단되거나 축소되는 조직, 돈을 핵심 기준으로 사업이나 활동을 계획·배치·평가하는 조직, 성장 자체가 마치 조직의 목적이 되어버린 조직이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언젠가는 문제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중략) 유독 언론의 조명이 비추는 자리를 선호한다든가, 유명 인사를 불러 모으고 행사장을 다니면서 축사하고 시상식하고 사진 찍고 악수 나누는 일에 몰두한다든가, 환경운동의 커진 영향력과 높아진 지명도가 무분별하게 기업의 후원이나 정부의 예산 지원 확보에 활용된다든가, 그 연장선에서 설사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 하더라도 신중한 문제의식 없이 기업 등으로부터 함부로 돈을 받는다든가, 현장의 풀뿌리 주민과 민중보다는 정치인, 관료, 기업체 인사, 기자 등 ‘힘 있는 자’들을 상대하는 것을 더 중시한다는가 하는 모습들은 그 구체적 양상이다.”
너무도 소중한 지적이다. 성찰, 그 구체적 기준들이다. 누구를 만나는가. 이웃을 만나고 있는가 아니면 기자든, 공무원이든, 경제인사든 뭔가 힘 있는 자들을 만나고 있는가 성찰할 일이다. 나의 뿌리, 운동의 뿌리가 무엇인지 다시 볼 일이다.
그 외 가슴에 다가왔던 글들. 더글러스 러미스의 말 “오늘날 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은 정치적 독재가 아니라 맹목적 경제성장이다.” 맞다. 지금 나라 꼴이 이런 것도 국민들이 ‘독재라도 좋다. 돈만 벌면 된다’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파티 비롤의 말, “석유가 우리를 떠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석유를 떠나야 한다.”
“서울과 수도권의 환경운동가들이 식민지(지방) 휴양지 훼손을 걱정하는 제국의 백성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녹색평론>, 희미해져가는 내 의식을 언제나 선방의 죽비처럼 내려치는 책.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책을 기다린다. 아니 올해는 최소 3명에게 선물을 해 주어야겠다. 1년 정기 구독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