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속의 인간 성서와 인간 8
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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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 시리즈 9편이다. 제목만 봤을 때는 인간관계 전반을 신앙 차원에서 다루는 글인 줄 알았다. 근데 보니 부부관계에 국한되어 있다. 구구절절히 옳은 이야기. 

특히 재미 있었던 부분은 창세기 아담과 이브 창조 이야기에서 남녀 차별, 남녀 불평등이 아니라 남녀 평등을 적극적으로 해설한 부분이다. 이를 테면 이브가 아담보다 늦게 그리고 아담의 몸을 재료로 해서 태어났으므로 남성보다 여성이 열등하다는 기존의 견해에 대해, 늦게 만든 것은 그 만큼 완결품이라고 한다. 하느님이 인간보다 하늘과 땅, 동물을 먼저 만들었는데, 선후관계에서 앞의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면 다른 동물이 인간보다 더 귀한 존재인가라며 반문한다. 

재료 문제 역시 흙으로 아담을 빚었지만, 이브는 더욱 완성된 재료인 인간으로 빚었기 때문에 더 귀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핵심은 부부 사이의 문제이다. 결혼 후 다툼이 큰 부부가 무려 40%를 넘는다고 한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그런 경우가 있다. 여기서 송신부님은 "하지만 부부가 자녀에게 첫째로 줄 것은 부부 사이의 사랑이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자녀들 편에서도 부모 서로간의 사랑을 통하여 사랑을 받는 것이지, 부모끼리 서로 소원(疏遠)하다면 자녀들은 제대로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자녀 사랑의 기본은 부부간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부부가 불화하면서 자녀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당히 부족하다.  

그러면 어떻게 부부 사이의 간극을 좁힐 것인가. 먼저 다름, 차이를 인정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차이에 감사하라고 말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 차이 때문에 힘들어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차이는 내가 갖지 못한 상대방의 장점일 수 있다. 그러기에 감사해야 한다. 테살로니카 1서 5장 16-18절 말씀에 나온 것처럼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삶, 항상 기뻐하는 삶, 항상 기도하는 삶이면 부부관계도 모두 원만하리라. 

아 그리고, 사랑의 3단계도 재미 있게 읽은 구절이다. 1단계가 로맨서의 단계. 2단계는 권력다춤의 단계 그리고 3단계가 협동과 공동 창조의 단계라고 한다. 그냥 머리가 끄덕여진다. 부부 사이에서 권력을 휘둘러 봐야 무슨 필요가 있는가를 깨닫고 나면 자연스럽게 협동과 공동창조로 이어진다. 다만 그 무의미한 권력다툼에서 어느 만큼 빨리 벗어나는가가 중요한 관건 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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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통권 104호 - 2009년 1.2월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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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녹색평론>104호, 2009년 1-2월호




단 한 권의 책만을 고르라고 한다면 이젠 당연 <녹색평론>이다. 예전엔 그 원칙주의 앞에 주눅 들어 피하고만 싶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그나마 대안이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김종철 선생님의 ‘책을 펴내며’ 제목이 ‘희망을 위한 보이콧’이다. 제목만 봐도 대략 알겠다. 나도 이젠 그 정도의 내공은 생긴 셈이다. 근데 문제는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몸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 그래도 차근차근 준비를 한다. 자립을 위한 준비. 기존의 이 체제에서 벗어나려면, 보이콧을 하려면 자립, 자급자족을 어느 정도는 해야 한다. 그 일환으로 이 책도 읽는다.

김종철 선생님의 글에서 이 자유주의 경제가 무엇이지 말한다. “말이 좋아서 자유주의지, 이것은 노골적인 양육강식을 합리화하는 극히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논리”라고 한다. 그 놈의 자유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되풀이하면서 실은 기업의 자유를 위한 규제철폐를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규제철폐 혹은 규제완화 요구는 결국 막대한 자금력을 가진 기업이나 자본가가 돈벌이를 위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하든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뜻”이며 “신자유주의자들의 가장 큰 죄악은 늘 ‘자유’를 부르짖으면서도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자유’에 대해서는 한 번도 진지한 고려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국가와 자본의 영향력 바깥에서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의 창조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을 위한 구체적 방법은 다양한 형태의 소규모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그 틀 속에서 우애와 상호부조의 원리에 입각한 협동과 자치의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차례 언급했고 공부했던 올바른 아나키즘이다.

마침 최종수 신부님이 방문한 어느 공동체 이야기도 실려 있어서 좋았다. 공동체가 사실 쉽지는 않다. 한계 많은 인간이라서 그렇다. 그러니 신앙이 실려 있는 곳은 다르다. “신앙의 삶에는 두려워할 실패도, 자랑할 성공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하다 중단되더라도 그만큼 성공한 거지요. 성공과 실패에 연연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공동체 밖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아요.”

이런 삶이 될 때 서정홍 시인의 글에서처럼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게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밥을 먹고 숨을 쉽니다”라는 꼴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여기서 내 삶을 돌아본다. 이제 교사로서의 인생은 사실 실패했다. 애들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월급타러 학교에 간다. 비참한 꼬라지다. 벗어나야 한다.

이민철 광주자유대학 일꾼의 글에서처럼 “자격증 따서 돈 벌 목적이 아니라면 대학에 갈 필요를 못” 느낄 수도 있어야 한다. 학자가 되어 일을 할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니 좋은 대학 안가도, 아니 좋은 대학 가려고 청춘을 허비하지 않을 때 자기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 독립의 출발점이라는 데 공감한다.




사실 이번 호에서 가장 공감한 글은 장성익의 글이다. 환경운동의 과오를 지적한 글이다. 단적으로 ‘최열 사태’를 보면 안다. 아프지만 꼴 필요한 글이라 장황하게 옮긴다.

“돈의 논리와 조직의 성장 논리에 무비판적·무반성적으로 매몰되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운동의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단에 규모도 빠르게 커졌고, 그렇게 비대해진 몸뚱어리를 건사하는 데 휘둘려 운동 본연의 목적·지향·가치 등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확인과 성찰적 경신 작업은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다. 그 결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조직을 위한 조직, 사업을 위한 사업, 돈을 위한 돈이라는 타성적인 악순환 고리에 빠져들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장을 하니까 자연스레 거대 상근 구조로 상징되는 많은 인력을 거느리게 됐고, 그 인력을 유지·확대하기 위해 조직을 더 키워야 했으며, 이를 위해 돈을 더 많이 끌어 모아야 했고, 이를 위해 또다시 더 많은 프로젝트를 끌어와야 하는 악성 연쇄고리가 관성적으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중략) 조직운용과 활동 방식이 이런 식으로 이뤄지다보니 회원이나 개별적 시민 후원자들이 내는 다수 성격의 회비와 후원금에 의존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하고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대신 한번에 뭉텅이 돈이 들어오는 정부 지원금이나 기업 후원금 확보 위주의 프로젝트 사업에 알게 모르게 경도되지 않았을까? 결국 환경운동의 주요 비판대상인 성장주의, 물량주의, 규모주의, 속도주의, 효율주의, 편의주의 따위의 함정에 역설적이게도 환경단체 스스로 빠져들었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간 형국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돈이 없으면 활동이 중단되거나 축소되는 조직, 돈을 핵심 기준으로 사업이나 활동을 계획·배치·평가하는 조직, 성장 자체가 마치 조직의 목적이 되어버린 조직이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언젠가는 문제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중략) 유독 언론의 조명이 비추는 자리를 선호한다든가, 유명 인사를 불러 모으고 행사장을 다니면서 축사하고 시상식하고 사진 찍고 악수 나누는 일에 몰두한다든가, 환경운동의 커진 영향력과 높아진 지명도가 무분별하게 기업의 후원이나 정부의 예산 지원 확보에 활용된다든가, 그 연장선에서 설사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 하더라도 신중한 문제의식 없이 기업 등으로부터 함부로 돈을 받는다든가, 현장의 풀뿌리 주민과 민중보다는 정치인, 관료, 기업체 인사, 기자 등 ‘힘 있는 자’들을 상대하는 것을 더 중시한다는가 하는 모습들은 그 구체적 양상이다.”

너무도 소중한 지적이다. 성찰, 그 구체적 기준들이다. 누구를 만나는가. 이웃을 만나고 있는가 아니면 기자든, 공무원이든, 경제인사든 뭔가 힘 있는 자들을 만나고 있는가 성찰할 일이다. 나의 뿌리, 운동의 뿌리가 무엇인지 다시 볼 일이다.







그 외 가슴에 다가왔던 글들. 더글러스 러미스의 말 “오늘날 민주주의의 진정한 적은 정치적 독재가 아니라 맹목적 경제성장이다.” 맞다. 지금 나라 꼴이 이런 것도 국민들이 ‘독재라도 좋다. 돈만 벌면 된다’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파티 비롤의 말, “석유가 우리를 떠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석유를 떠나야 한다.”

“서울과 수도권의 환경운동가들이 식민지(지방) 휴양지 훼손을 걱정하는 제국의 백성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녹색평론>, 희미해져가는 내 의식을 언제나 선방의 죽비처럼 내려치는 책.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책을 기다린다. 아니 올해는 최소 3명에게 선물을 해 주어야겠다. 1년 정기 구독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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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즐거움 - 우리시대 공부달인 30인이 공부의 즐거움을 말하다
김열규.김태길.윤구병.장영희 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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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다. 이 책에 실린 공부 달인 30명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나도 공부하고 싶다. 이붙들처럼. 나는 공부를 잘 못한다. 바뻐서? 핑계다. 아파서? 그건 좀 말이 된다. 그리고 생계가 급해서? 그것도 이유가 조금 되긴 된다. 암튼 나도 공부하고 싶다.

 

이 책에 실린 공부 달인 30명을 읽노라면, 우선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 그리고 다들 좋은 말이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강명관, 고미숙, 박홍규, 이유미, 이희수, 장영희, 장회익의 글은 언제 보아도 좋다. 이분들의 다른 책도 좋지만.

 

30명이 쓴 책이라 30가지 테마를 다 쓸 순 없겠고. 그래서 이유미와 이희수의 공통점으로 쓴다. 이들이 택한 길은 당시로서는 아웃사이더의 길이다. 미래에 대한 보장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곳으로 갔다. 나도 다시 태어난다면 그러고 싶다. 이유미의 말, "그때나 지금이나 난 남들이 많이 몰리는 데 기웃거리는 것을 싫어한다." 동감. 그러나 동감하면서도 생업은 그렇게 하질 못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두려워서 안전빵을 택했다. 패기가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이희수 역시 터키로 유학을 갔다. 이슬람을 연구했던 것이다. 근데 요즘은 이 양반 시간이 없다. 너무 바쁘다. 이슬람 전공자가 없어서 그렇다. 그러기에 진작,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갔어야 했다.

 

그건 그렇고. 이 공부 고수들이 정의한 공부란? 공부란 양심선언이다. 공부란 원초적 본능이다. 공부란 즐거운 창조다. 좋다. 하지만 박홍규가 말한 것처럼 그 공부는 우리나라 제도권 공부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 제도권 공부는 죽음이다. 그래서 참담하다.

여기 박홍규의 말을 옮기며 그 즐거운 공부가 죽음의 공부로 변한 현실을 개탄한다.

"공부 공화국, 공부로 시작해 공부로 끝나는 나라, 태어나면서부터 공부하라는 말만 듣고 어른이 되어서도 다시 그 말만 하다가 죽는 사람들의 나라. 세상이 온통 학교와 학원으로 뒤덮인 나라. 교육에 돈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들의 나라.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결코 착하지도, 성실하지도, 창조적이지도 않은 나라. 특히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더 그렇지 않은 나라."

이런 제기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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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데레사 나의 빛이 되어라
브라이언 콜로디척 신부 엮음, 허진 옮김 / 오래된미래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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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아주 좋아 하는 마더 데레사. 이 분에 관한 책이라면 주저 없이 산다. 이 책도 그랬다. 다만 사 놓고도 안 읽는 버릇은 나의 게으름이다. 새해 시작하면서 그래도 뭔가 영적인 도움을 얻고 싶어 이 책을 책장에서 꺼냈다. 확실히 소득이 많다. 일단 책 내용은 별도로 하고, 읽다가 아, 그래, 올해는 이렇게 살아야지 싶었던 게 몇 있다.

 

우선 올해는 우리 맏이 마르첼리나가 첫 성체 하는 해다. 마더 데레사의 경우,아니 그 때의 이름은 마더 데레사가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에 살던 소녀 곤히야다. 그가 첫 영성체 하던 날 각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한다. 그 구절 읽으면서 매일 기도에서 우리 맏이 마르첼리나의  첫 영성체를 위해 기도해야되겠다 싶었다.

다음으로 마더 데레사와 같이 있던 수녀님들 평이 마더 데레사는 불평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나는 반대다. 근데 불평했다고 문제가 풀리지는 않았다. 그럼 바보짓 한 게 틀림 없다. 건강한 비판은, 정당한 통로를 통해서 겸허하고 진솔하게 할 것이지만, 전혀 도움되지 않는 불평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올 해 이 책 보면 결심했다.

그리고 세 번째, 마더 데레사는 과도한 일 속에서도 늘 새벽 4시 40분이면 일어나 성체조배를 했다고 한다. 십자가에 입맞춤하고. 이건 못하겠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 기도는 빠뜨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결심했다.

네 번째, 성체조배 때 생각나는 얼굴이 있으면 그를 위해 기도해준다는 것이다. 이건 따라할 수 있겠다. 이 네 가지만으로도 이 책 읽고 건진 소득이다.

 

근데 사실 책의 중심은 그게 아닐 것이다. 책 광고에 보면 마더 데레사가 하는 말 중에"내 안에는 끔찍한 어둠이 있습니다"라는 게 있다. 이게 뭘까. 마귀?

그건 아니다. 그가 어릴 때부터 사적 서원을 하고 실제 하느님을 만나 '사랑의 수도원' 건립을 계시받고 그랬는데, 그렇게 해서 막상 빈민을 위한 사랑의 실천을 시작했는데, 정작 그 이후로는 하느님을 전혀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말 하느님 부재까지 느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삶과 언어의 역설이다. 이걸 이해하지 못한 천박한 언론인들에 의해 '마더 데레사가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했다. 하느님을 믿지 않은 순간이 있었다'라는 식의 보도를 해 댔다. 나도 처음에 언론에서 읽었을 땐 놀랐다. 근데 이 책을 읽어보니 그것은 대단한 신비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은 마치 바오로의 가시와 같은 것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바오로 사도 역시 그 가시를 빼어달라고 여러 차례 기도했건만 하느님은 응하지 않았다. 그 가시가 있어야만 바오로 사도가 교만에 빠지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더 데레사가 하느님 부재의 영적 어둠에 놓여 있지 않고, 늘 하느님과 대화하고 일치하고 있었다면 어쩌면 교만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어둠에 놓여 있었기에, 즉 자신은 완전히 비어지고,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처지에 놓여 있었기에 그는 항상 교만하지 않고,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어떤 신앙체험을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더니, 부러워 한다. 크게 쓰시려고 그런다고까지 했다.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근데, 그 이후론 맹맹하다. 왜 그런가 했더니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그런 말 천박하게 함부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만큼 더 낮아져야 하는데, 나는 항상 높아지려고 했다. 비워야 했는데, 채우려고만 했다. 그러니 당연한 결과다. 이게 나 같은 한심한 인간하고 데레사 같은 성인의 차이일 것이다.

그렇게 내적 어둠이 있었기에 그는 가난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게 마더 데레사가  50년 동안이나 겪은 어둠의 실체이고, 그 어둠을 통한, 다시 말하면 완전한 비움을 통한 영성일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가 50년간이나 그런 하느님 부재를 느꼈다면 나는 완전히 망가졌을 것이다. 그러니 차이가 있다. 그의 삶과 내 삶에는. 하긴 하느님도 나 같은 인간에겐 그런 단련을 주지도 않으실 것이다. 왜? 견디어 내지 못할 것을 아시니까. 그릇 차이. 이걸 하느님은 잘 아신다.

 

근데 사실 마더 데레사도 견디기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외로움. 예수님이 겟세마니 동산에서 흘리신 피땀과 또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외치던 절망적 목소리 역시 그 외로움일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은 그 외로움, 그 不在를 통해 일을 '완성'하신다. 슈퍼맨처럼 나타나 일을 '짜잔'하고 해결하지 않으신다. 그 완전한 비움, 그 완전한 없음을 통해 구원 사업을 하신 것이다. 채움이 아니라 비움이다. 왜냐면 예수님은 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되지 않고서는, 죄가 되지 않고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니 신적 능력으로의 해결이 아니라 인간적 절망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마더 데레사 역시 그랬다. 가장 낮은 곳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과 소통하고 있다는 과시욕이 아니라,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는 자부심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자각 속에서 이뤄질 수 있는 일이다.

모든 것을 내려 놓음. 그 내려놓을 수 있는 근거였던 아버지 하느님마저 현존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가질 만큼, 곧 기댈 언덕조차 없어보이는 그 절박함에서 기적은 이뤄진다. 이게 신앙의 신비다.

 

그건 그렇고. 나는 마더 데레사의 그 겸손에 매번 놀란다. 그는 남들로부터 칭찬 받은 것에 대해 그것은 모두 십자가일 뿐일고 한다.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거꾸로 그는 남들로부터 잊혀지기를, 무시당하기를, 경멸당하기를 오히려 수용한다. 그래야 하느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굴욕은 저에게 가장 달콤한 과자랍니다" 이렇게 말한다. 또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무시다아며, 어떤 인정도 받지 않기를 열심히 기도했습니다"라고 한다. 머리로는 이게 이해가 되는데, 난 도저히 몸으론 안 된다. 나는 오늘도 남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삶을 사는 것 같다. 그러니 항상 내 중심이 아니고 남 중심이 된다. 내 인생인데, 남의 평가를 따라 가는 인생이 된다. 한심한지고.

난 언제면 '굴욕을 가장 달콤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긴 그렇게 해야 나는 작아지고 하느님은 커지실 것이고, 허세는 사라지고 본질만 남을 것일 텐데. 알긴 아는데 실천이 어렵다. 쓸데 없는 자존심. 이걸 어떻게 극복하나. 그래, 이런 책 자주 읽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도움이 될 터이지. 작아지자. 작아지자.
또 하나. 그렇게 내가 작아지면 마더 데레사처럼 '작은 사랑, 작은 희생, 작은 내적 금욕'을 말하게 될 것인가. 그 분은 "큰일을 찾지 말고,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을 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이게 맞다. 사실 나는 큰 그릇이 못된다. 그러니 작은 일이라도 잘해야 한다. 근데, 격에 안 맞게 큰 일을 좋아한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주면 너무 좋다. 그분은 그것을 십자가라고 하는데....... 그래도 항상 떠올리자. 내가 주변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는 '이건 나의 십자가임을'

그리고 또 '특별한 시련'을 '더 큰 사랑 실천의 기회'로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이건 제대로 된 신앙인이라면 항상 가져야 할 자세다. 어려워서 그렇지, 머리로는 나도 안다. 그래도 자주 연습하자. 시련은 사랑실천의 기회임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소. 그냥 미소가 아니라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달라고 항상 기도하세요 라고 하신다. 그렇게 기도해야겠다. 어린아이 같은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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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으로 살아가는 인간
송봉모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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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시리즈 7권이다. 포켓북이라 들고 다니기도 편하다. 분량도 짧다. 그런데도 송신부님 책을 읽고 나서 메모를 하려면 종이가 부족하다. 그러니 자연 게을러진다. 쓸 게 너무 많다. 책 전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절반은 그대로 옮겨 놓고 싶다. 그 만큼 놓치기 싫은 글들이다.

 

그래도 나의 게으름 때문에 내 눈에 콱 박힌 문장들을 중심으로 옮긴다. 이 책은 '야훼는 나의 목자'로 시작하는, 그래서 나도 자주 들은, 그 만큼 유명한 시편 23을 묵상한 글이다. 성당에서 성가로 자주 불렀던 구절인데 송봉모 신부님의 묵상을 읽으니, 그게 그렇게 쉽게 노래할 내용이 아님을 느낀다.

 

'훼 하느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언제나 바른 길'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사실 우리는 삶에서 상당히 힘든 길을 걷는다. 하느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도 불구하고. 왜일까? 신부님은 광야 40년 삶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익숙했던 이집트의 생활을 완전히 씻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정화, 단련되는 시간이라면 설명하신다.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에. 안락함만이 전부는 아니기에. 그래서 하느님은 '곡선으로 직선을 그리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라엘이 빙빙 돌아갔다고 생각했던 광야의 길은 그들을 하느님 백서으로 양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길이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덜 준비된 채 서둘러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준비되어 들어가기를 원하셨다."

 

나의 신앙체험을 생각할 때 이 비유는 딱 들어 맞는다. 지난 2년 간 겪은 고통이 아니었다면 나는 하느님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삶의 참 의미와도 거리가 먼 삶을 고집했을 것이다. 그때는 고통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그것이 축복이었음을 깨닫는다. 단련의 시기가 맞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를 고생시키는 것 같아도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신다면 그 길은 우리에게 선이 되는 '바른 '이다. 때로 앞이 보이지 않고 혼란스럽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면 그 길은 우리에게 가장 맞는 길, '바른 길'이다."

그런 나의 체험을 사람들은 심리현상이라고 한다. 우울증이라고 한다. 한계다. 신앙은 인간 이해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걸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나 역시 그랬다. 강한 그 체험이 없기까지만 해도 신앙 운운하는 사람들을 나는 비웃었다. 그러니 그 고통을 겪고도 단순히 안락함을 구하는 값싼 신앙을 원한 게 아니라 참 신앙을 찾고 싶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이 나를 인도하고 계시고 돌보고 계심을 확신하는 것, 이것 말이다.

 

사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은총이 있으면 시련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사식은 성스러움을 가르쳐 주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우린 이것을 깨닫지 못했기에 어둠이 닥치면 쉽게 좌절하고 만다. 신이 어디 있냐며 불평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밤과 낮은 한 짝이다. 빛과 어둠은 세트다. 근데 우리는 하나만을 추구한다. 이건 절름발이 신앙, 어린이 투정의 신앙이다. 고통을 축복으로 받아들일 때 낮과 밤이 있음에 고마워하게 된다. 왜냐하면 바로 그 고통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죽음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목숨을 하느님이 주셨으니 하느님이 가져가셨을 뿐이다. 이게 자연스러운 것이고 성스러운 것이다.
물론 영혼의 어둠 밤은 견디기 힘들 것이다. 다음에 읽은 <마더 데레사, 나의 빛이 되어라>에서도 마더 데레사가 겉에 드러난 것과는 달리 50년 동안이나 어둠에서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하느님 현존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버림 받았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읽어 보진 않았지만 이 대목에서 자주 인용되는 게 '십자가의 성요한'이다. '어둠', 말이 쉽지 정말 끔찍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둠 자체가 바로 하느님 현존의 다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 부재를 통해서 증명되는 하느님의 현존'이라고나 할까. 그 어둠은 바로 나를 단련시키는 하느님의 또 하나의 수단일 것이다.

그래서 송봉모 신부님은 "어둔 밤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굳이 그것을 물리치려 하지 말라. 그들은 안다. 별을 보려면 어두뭄은 꼭 필요하다는 것을."이라고 말한다.

근데 실제 그 어둠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질병, 고통, 실직, 가까운 이의 죽음, 경제적 곤란, 배신, 스트레스 등. 근데 신부님은 다음의 글로 나를 위안하신다.

"영성 중에서 가장 보배로운 영성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신하는 것이다." 아, 임마누엘. 언제부터인가 사회운동하면서 영혼의 고갈을 느꼈고, 그러면서 유행하는 화두처럼 사람들 입에선 '영성'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그런데 그 영성 중에 최고가 바로 임마누엘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는 항상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만 가지면 되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신부님은 화살기도를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하신다. 아, 맞다. 그거 좋겠다. 그냥 생각날 때마다 화살기도. 좋은 방법이다.

그럼 매일의 삶이 성스러운 삶이 될 수 있겠다. 그래서 영성은 꼭 수도원이나 면벽 수도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정 한복판,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발견된다는 것.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을 찾고, 이 자리에서 고통과 기쁨을 겪으며 살아가면서 영성생활을 해 나가는 것" 이것이구나.

구체적 나의 일상. 그 안에서 참된 나를 찾아가는 것.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 그래서 사람이 복되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기에 복되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구나. 별난 존재라서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의 하느님 현존', '지금 이 순간의 성스러움' 이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만사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을 통해 만사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나의 모든 행동이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찰 때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다. 어떤 행위를 하든지, 그 행위에 충실하고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길 생각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고생을 하든, 괴로워하든, 휴식을 취하든,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영광을 위한 것이기에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 하며 살면 될 것이다. 모든 일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들 드리십시오(골로 3, 17)라는 말씀처럼 말이다.

 

신앙 생활이 쉬운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일상의 도를 닦는 것이다. 만물에서, 만사에서 하느님을 느끼며 지금 이 자리에서 항상 임마누엘적 삶을 살아간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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