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으로 살아가는 인간
송봉모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9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송봉모 신부님의 '성서와 인간'시리즈 7권이다. 포켓북이라 들고 다니기도 편하다. 분량도 짧다. 그런데도 송신부님 책을 읽고 나서 메모를 하려면 종이가 부족하다. 그러니 자연 게을러진다. 쓸 게 너무 많다. 책 전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절반은 그대로 옮겨 놓고 싶다. 그 만큼 놓치기 싫은 글들이다.

 

그래도 나의 게으름 때문에 내 눈에 콱 박힌 문장들을 중심으로 옮긴다. 이 책은 '야훼는 나의 목자'로 시작하는, 그래서 나도 자주 들은, 그 만큼 유명한 시편 23을 묵상한 글이다. 성당에서 성가로 자주 불렀던 구절인데 송봉모 신부님의 묵상을 읽으니, 그게 그렇게 쉽게 노래할 내용이 아님을 느낀다.

 

'훼 하느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언제나 바른 길'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사실 우리는 삶에서 상당히 힘든 길을 걷는다. 하느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도 불구하고. 왜일까? 신부님은 광야 40년 삶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익숙했던 이집트의 생활을 완전히 씻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정화, 단련되는 시간이라면 설명하신다.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에. 안락함만이 전부는 아니기에. 그래서 하느님은 '곡선으로 직선을 그리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라엘이 빙빙 돌아갔다고 생각했던 광야의 길은 그들을 하느님 백서으로 양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길이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덜 준비된 채 서둘러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준비되어 들어가기를 원하셨다."

 

나의 신앙체험을 생각할 때 이 비유는 딱 들어 맞는다. 지난 2년 간 겪은 고통이 아니었다면 나는 하느님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삶의 참 의미와도 거리가 먼 삶을 고집했을 것이다. 그때는 고통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그것이 축복이었음을 깨닫는다. 단련의 시기가 맞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께서 우리를 고생시키는 것 같아도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신다면 그 길은 우리에게 선이 되는 '바른 '이다. 때로 앞이 보이지 않고 혼란스럽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면 그 길은 우리에게 가장 맞는 길, '바른 길'이다."

그런 나의 체험을 사람들은 심리현상이라고 한다. 우울증이라고 한다. 한계다. 신앙은 인간 이해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걸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나 역시 그랬다. 강한 그 체험이 없기까지만 해도 신앙 운운하는 사람들을 나는 비웃었다. 그러니 그 고통을 겪고도 단순히 안락함을 구하는 값싼 신앙을 원한 게 아니라 참 신앙을 찾고 싶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이 나를 인도하고 계시고 돌보고 계심을 확신하는 것, 이것 말이다.

 

사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은총이 있으면 시련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사식은 성스러움을 가르쳐 주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우린 이것을 깨닫지 못했기에 어둠이 닥치면 쉽게 좌절하고 만다. 신이 어디 있냐며 불평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밤과 낮은 한 짝이다. 빛과 어둠은 세트다. 근데 우리는 하나만을 추구한다. 이건 절름발이 신앙, 어린이 투정의 신앙이다. 고통을 축복으로 받아들일 때 낮과 밤이 있음에 고마워하게 된다. 왜냐하면 바로 그 고통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죽음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목숨을 하느님이 주셨으니 하느님이 가져가셨을 뿐이다. 이게 자연스러운 것이고 성스러운 것이다.
물론 영혼의 어둠 밤은 견디기 힘들 것이다. 다음에 읽은 <마더 데레사, 나의 빛이 되어라>에서도 마더 데레사가 겉에 드러난 것과는 달리 50년 동안이나 어둠에서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하느님 현존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버림 받았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읽어 보진 않았지만 이 대목에서 자주 인용되는 게 '십자가의 성요한'이다. '어둠', 말이 쉽지 정말 끔찍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둠 자체가 바로 하느님 현존의 다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 부재를 통해서 증명되는 하느님의 현존'이라고나 할까. 그 어둠은 바로 나를 단련시키는 하느님의 또 하나의 수단일 것이다.

그래서 송봉모 신부님은 "어둔 밤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굳이 그것을 물리치려 하지 말라. 그들은 안다. 별을 보려면 어두뭄은 꼭 필요하다는 것을."이라고 말한다.

근데 실제 그 어둠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질병, 고통, 실직, 가까운 이의 죽음, 경제적 곤란, 배신, 스트레스 등. 근데 신부님은 다음의 글로 나를 위안하신다.

"영성 중에서 가장 보배로운 영성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신하는 것이다." 아, 임마누엘. 언제부터인가 사회운동하면서 영혼의 고갈을 느꼈고, 그러면서 유행하는 화두처럼 사람들 입에선 '영성'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그런데 그 영성 중에 최고가 바로 임마누엘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는 항상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만 가지면 되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신부님은 화살기도를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하신다. 아, 맞다. 그거 좋겠다. 그냥 생각날 때마다 화살기도. 좋은 방법이다.

그럼 매일의 삶이 성스러운 삶이 될 수 있겠다. 그래서 영성은 꼭 수도원이나 면벽 수도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겠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정 한복판,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발견된다는 것.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을 찾고, 이 자리에서 고통과 기쁨을 겪으며 살아가면서 영성생활을 해 나가는 것" 이것이구나.

구체적 나의 일상. 그 안에서 참된 나를 찾아가는 것.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 그래서 사람이 복되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기에 복되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구나. 별난 존재라서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의 하느님 현존', '지금 이 순간의 성스러움' 이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만사에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을 통해 만사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나의 모든 행동이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찰 때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다. 어떤 행위를 하든지, 그 행위에 충실하고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길 생각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고생을 하든, 괴로워하든, 휴식을 취하든,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영광을 위한 것이기에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 하며 살면 될 것이다. 모든 일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들 드리십시오(골로 3, 17)라는 말씀처럼 말이다.

 

신앙 생활이 쉬운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일상의 도를 닦는 것이다. 만물에서, 만사에서 하느님을 느끼며 지금 이 자리에서 항상 임마누엘적 삶을 살아간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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