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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평점 :
정민, <미쳐야 미친다-조선 지식인의 내면 읽기>, 푸른역사, 2004.
"그저 주는 눈길에 사물은 결코 제 비밀을 열어 보이지 않는다. 볼 줄 아는 눈, 들을 줄 아는 귀가 없이는 나는 본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다. 워낙 환한 조명 속에 살다 보니 이제 우리는 좀체로 제 그림자조차 보기가 어렵다. 도시의 밝은 불빛 속에는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는 삶이 빚어내는 그늘이다. 그림자가 없는 삶에는 그늘이 없다. 녹슬 줄 모르는 스테인리스처럼, 언제나 웃고 있는 마네킹처럼, 0과 1 사이를 끊임없이 깜빡거리는 디지털처럼 그늘이 없다. 덧없는 시간 속에 덧없는 인생들이 덧없는 생각을 하다가 덧없이 스러져 간다. 도처에 바빠 죽겠다는 아우성뿐이다." 279쪽
올해 봄이었나, 이 책이 나왔다는 소개를 보고는 일단 외면했다. 책 제목이 너무 상업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둔 건데, 며칠 전 한겨레 책 이야기 쪽을 읽다보니 인문서로서는 감히 넘어보기 어려운 6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확실히 상업적 성공을 거둔 책이다. 그렇다면 나는 더욱 외면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책을 구입했다. 미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불혹이라고 하는 40에 와서 혼돈이다. 분명 연초에는 확실히 불혹이구나 하면서 흔들리지 않은 그 무엇인가가 잡힌듯 싶었다. 그러나 왠 걸, 봄 이후에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최악이다. 시사칼럼 문제로 시작된 게 송성대 교수가 나를 형사고발한 것까지 겹쳐져서 그랬나, 세상에 대한 환멸이 커졌고, 그러나가 염세, 그리고 정신수양에로의 관심 이전, 하지만 그러면서도 중심을 잡지 못했다. 그리고 예전에 공부하던 역사에 대한 미련은 크게 남았다.
그러니 불혹은 저리가고 더 커다란 흔들림만 남았다.
물론 흔들리지 않고서 꽃이 필수 없다던가(도종환의 시에 있는 말이던가), 더 큰 도약을 위해 지금의 시련이 있긴하겠지만, 어쨌거나 힘들었고, 그래서 확실히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갈구하고 있었다. 몰입할 게 필요했다. 그것도 단순히 시간 때우는 몰입이 아니라 이젠 정말 인생을 걸어야 할 그 무엇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자각 말이다.
물론 그래봐야 예전에 살아오던 궤도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궤도에 힘을 싣는 일이다. 그 힘을 얻기 위해 조선 선비들, 그 중에서도 미친 조선 선비들의 이야기를 찾았다.
그러나 사실 나의 그런 바램을 이 책에서 찾을 순 없었다. 우선은 내 잘못이다. 본시 불성은 내게도 있거늘 밖에서 찾으려고 시도한 내가 어리석었던 것이다. 특히 조선 선비들의 이야기라면 옛 리듬과 속도로 읽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쓸데 없이 분주한 나의 마음으론 이 책이 전하는 울림을 온전히 받아 안을 수 없었다.
저자는 계속해서 느림의 이야기를 한다. 미친 사람, 자기 분야에 확실히 미친 사람 이야기보다 오히려 중심없이 바삐 돌아가는 현대사회를 욕하기에 더 바쁘다. 물론 그 욕을 먹어야 할 대상 중에는 나도 포함된다.
"정보의 바다는 오히려 우리를 더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할 뿐이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나는 없고 정보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소유한 정보의 양이 늘어갈수록 내면의 공허는 커져만 간다. 주체의 확립이 없는 정보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그만 시련 앞에서도 쉽게 스스로를 허문다. 거품 경제 속에서 장밋빛 미래를 꿈꾸다 갑자기 닥친 잿빛 현실 속에서 그들의 절망은 너무도 빠르고 신속하다." 82쪽
저자의 입장이 이렇게 느리게 관조하면서 읽으라는 것이니, 나의 성급한 욕심 채우기에는 당연히 부족한 책이다. 그러나 사실은 느림이 핵심은 아니다. 느림은 진정한 메시지를 찾아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렇다면 글의 핵은 뭘까? 바로 '주체의 확립'이다. 이게 있어야 미칠 수 있고, 또 그렇게 미쳐야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 일이란 없다. 학문도 예술도 사랑도 나를 온전히 잊는 몰두 속에서만 빛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 한 시대를 열광케 한 지적, 예술적 성취 속에는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광기와 열정이 깔려 있다."(서문에서)
"절망 속에서 성실과 노력으로 자신의 세계에 우뚝 세워올린 노력가들, 삶이 곧 예술이 되고, 예술이 그 자체로 삶이었던 예술가들,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세워 한 시대의 앙가슴과 만나려 했던 마니아들의 삶 속에서 나를 비춰보는 일은, 본받을 만한 사표(師表)도 뚜렷한 지향도 없어 스산하기 짝이 없는 이 시대를 건너가는 데 작은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서문에서)
그런데 사실 나는 그 '미침'을 책 속에서 보다는 제주의 사진작가 김영갑에게서 보았다. 며칠전 나는 그를 다시 만났다.
"이 선생님, 지난 10여 년 동안 제주도나 그 외 관공서에서 어디 저의 사진 한 장 쓴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나를 철저히 외면했어요. 저가 이런 작업을 시작할 때 그들이 나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미친 놈 소리를 했지요. 그러나 지금도 그럽니까? 아닙니다. 이젠 저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 없습니다."
"이 선생님, 멀리 보고 작업하세요. 100년은 아니더라도 30-40년 앞은 내다보고 일을 하셔야 합니다. 시류에 영합하지 마십시요. 외롭더라도 견디어야 합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길은 시작되는 것이니까, 지금부터라도 다시 시작하세요." 내겐 대단한 위안이었다.
미친(狂) 사람 김영갑, 가족도, 건강도 모두 던졌다. 자신의 작업을 위해. 그리고는 일가를 이루었다. 진정 미친(及) 사람이다. 주체가 확고한 사람이다.
계속해서 이 책에서 남는 구절들을 남겨 둔다.
"얻고 잃음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26쪽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출세에 보탬이 되는 말든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신이다."18쪽
"잊는다(忘)는 것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해서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될지, 출세에 보탬이 될지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냥 무조건 좋아서,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한다는 말이다."30쪽
"세상는 재주 있는 자를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홍길주가 <김영 전>에서 썼다는 말. 50쪽
"능력 있는 사람이 손가락질당하는 세상, 모자란 것들이 작당을 지어 욕을 하고 주먹질을 해대는 사회"
"대거 사람은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는 데서 뜻이 꺾이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느라 학업을 성취하지 못하며, 마구잡이로 얻으려는 데서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만다"66쪽
-풀어서 저자가 붙인말- 함부로 몸을 굴리고,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청춘을 탕진한다. 무엇이 좀 잘된다 싶으면 너나없이 물밀 듯 우루루 몰려갔다가, 아닌 듯 싶으면 썰물 지듯 빠져나간다.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싫은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어하고 칭찬만 원한다. 그 뜻은 물러터져 중심을 잡지 못하고, 지킴은 확고하지 못해 우왕좌왕한다. 작은 것을 모아 큰 것을 이루려 하지 않고"
-그렇다면 나는 여전히 한 물 한 한국현대사를 죽을 때까지 하라는 말이다. 그 중에서 제주현대사를. 근데 사실 할 건 많을 것이다. 내가 아둔해서 그렇지. 그 아둔함을 이 책에선 김득신의 예를 들면 다시 걱정 말라고 한다.
"기웃대지 않고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성실한 둔재"
"끝까지 가는 노력가는 만나보기 힘들다. 세상이 갈수록 경박해지는 이유다."67쪽
마지막으로 허균이 꿈꾸었던 집을 묘사한 대목이 마음에 와 닿아(아니 내가 나중엔 꼭 그런 집을 가지고 싶어서) 옮긴다.
"넓지는 않지만, 방문을 열면 한낮 해가 제 마음대로 들어와 놀다가는 방, 환한 햇살이 물밀듯 들어와 삶의 그늘을 지워주는 방. 별다른 장식이 없어도 내 읽고 싶은 책은 갖춰두고, 사랑하는 아내와 차를 마시며 독서에 열중할 수 있는 방"136쪽
미치려면(及) 미쳐야(狂) 하고, 그러러면 무엇보다 주체가 확고해야 한다. 근네 난 뭐냐? 불혹에 이리 저리 흔들리는 꼴이라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