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비소리 - 나를 깨우는 우리 문장 120
정민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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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민, <죽비소리>, 마음산책, 2005.



올해 초 서울 갔다가 시백 형을 만났다. 이젠 팔팔했던 그 청춘의 20대는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반갑고, 또 삶의 그 밑뿌리서부터 올라오는 힘을 느낀다. 그건 온전히 순수한 열정으로 청춘을 살아본 사람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에너지다.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다. 정의를 외치던 그 시절과는 다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뿌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표출방식만 다를 뿐이다.
형은 만화를 그린다. 그리고 나는 글을 쓴다. 하긴 형이야 전업으로 그리는 것이고 나는 취미 삼아 쓰는 것이니 그 절박함이 다르다. 그런 만큼 내뿜는 내공도 다르다. 그런 형과의 대화에서 나는 건방을 떨었다. '요새 잘 나간다는 놈들 글 봐도 별 게 아니더라. 상업적 기회를 잘 탓을 뿐, 그 정도는 나도 할 것 같더라.' 뭐 대충 이런 건방을 떨었던 것이다. 그 건방의 이야기 중에 '요새 잘 나가는 놈' 중의 하나로 꼽은 게 정민이다.
솔직히 그랬다. 특히 그의 책 <미쳐야 미친다>는 어려운 경기, 청년 실업이 한창인 요즘, 무엇엔가 철저히 몰두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교훈으로 일관된 책에 불과하다. 심하게 말하면 약간 고급스런 처세술 책에 불과하다고 평하고 싶었다. 그 만큼 요즘 내가 많이 철없어진 것이다. 빨간 띠 매고 검은 띠에게 껍죽댄 그런 모양세였다.
그걸 느끼게 한 게 정민의 다음 책 <죽비소리>다. '나를 깨우는 우리 문장 120'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여기서도 그의 상업성은 돋보였다. 시대 분위기를 잘 읽는다.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무엇인가 용기를 주는 글. 그러면서도 고전에서 끌어내는 멋스러움.
물론 그것을 끌어낼 정도의 한문 실력 등의 내공이 바탕이 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긴 하다. 난 그것은 보지 않고 그냥 그를 시류를 잘 읽는 얄팍한 사람 취급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보니 그게 아니다. 한 수 위가 아니라 열 수는 위겠다.
한문 실력만이 아니다. 우리말 실력도 한참이나 뛰어나다. 문장을 다루는 기술도 나름의 경지를 갖추고 있다. 단타로 끊어치는 힘, 그의 글이 가진 매력이다. 짧으면서도 울림이 있다. 여기서 나는 분명코 반성을 한다.
그가 골라낸 120 문장도 괜찮다. 좋은 글 뽑아낸 그가 고맙다. 물론 그냥 맹맹한 글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나의 낮은 수준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부턴 좋았던 부분들을 옮긴다. 나의 건방을 반성하면서.

"난초 하나 바위 하나가 별을 따기보다 어렵더군요"
얼마나 정성을 들였으면 별 따기 보다 어렵다고 했을까. 그러나 "그러다가 문득 마음이 환하게 열리면, 컴퓨터의 속도가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신명을 따라잡지 못한다. 몇 날, 혹은 몇 달을 답답하게 꽉 막혀 있던 생각의 봇물이 한꺼번에 터져나와 자신도 주체할 수 없게 된다. 예술을 한다는 것, 학문을 한다는 것, 인생을 산다는 것은 불현듯 다가오는 그 짧은 격정의 순간을 위한 기다림이기도 하다." 그 짧은 격정의 순간, 나 역시 기다리는 바이다.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툭 터진 허공은 철옹성보다 더 뚫기가 어렵다." 자를 수는 있어도 모으긴 힘들다. 허공과의 싸움은 확산이 아니라 수렴이다. 이것 저것 욕심 벌여 놓기만 하는 나, 수렴이 필요하다.

"나는 공부하며 놀고, 누구는 노래하며 놀며, 누구는 돈을 세며 논다." 각자의 기준과 관심이 다름을 말하고 있다. 각자의 가치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나는 공부하며 논다는 말에서 동질감 혹은 부럼움을 느낀다.

"나는 무엇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될까?" 정말 그렇네. 나는?

"자기를 온전히 잊는 몰두가 없이 이룰 수 없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잊는다는 것은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자체로 좋아서,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서 한다는 말이다." "미치지 않고는 안 된다. 적당히 해서는 이룰 수가 없다. 남들 하는 대로 해서는 희망이 없다."

"병법에는 불가기(不可欺), 즉 속일 수 없는 지장(智將)과 불인기(不忍欺), 곧 차마 못 속이는 덕장(德將)가 불감기(不敢欺) 즉 감히 못 속이는 맹장(猛將)으로 지휘관을 나눈다. .....너무도 똘똘해서 속여먹을래야 속일 수가 없었다던 유성룡보다 차마 속이지 못하는 이원익에게 자꾸 정이 간다."

"하나 하나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뜨리는 것은 한 순간이다. 선행을 쌓아 덕망을 갖추기는 쉽지 않지만, 한순간의 실수는 평생 이룬 것을 한꺼번에 무너뜨린다."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내일도 없고 다름도 없다. 다만 오늘과 지금 여기가 있을 뿐이다. 그러자면 손가락질과 질시가 따른다. 뼈에 새기는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그 손가락질, 그 질시를 달게 받을망정 아까운 시간을 허송하는 것만은 견딜 수가 없다. 공부는 이런 마음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갈 길이 바쁜데, 남의 일에 공연히 기웃거릴 시간이 없다. 목숨 걸고 해도 될까말까한데 느긋하게 되는 대로란 참을 수 없다."

결국 뭐냐? 우리 고전에서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을 골라낸 것인가? 아니 내가 그런 처지여서 그런 구절들만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참 나이 먹어서 이렇게 공부하면 살 줄이야 생각이나 해 봤겠나.
죽비 소리까지는 못 되어도 그래도 행복한 글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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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허스님의 차 - 아무도 말하지 않은 한국전통차의 참모습
지허 스님 지음 / 김영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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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허 스님, <지허스님의 차>, 김영사, 2003.


내가 차를 접한 것은 요가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물론 그 전에도 녹차를 마시긴 했지만 습관적으로 마신 건 5년전 부터다. 그런데 그 차는 중국의 보이차가 주종이다.

그런데 한국의 전통 차는 그게 아니란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보이차가 좋았다. 아니 어쩌면 계속 그럴 것 같다. 이 책에서 말하는 한국의 전통차라는 게 만들어내는 과정이 너무도 많은 공이 드는 것이라 대중화는 힘들 것 같고, 그렇다면 나같은 서민과 거리가 있을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것은 알아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여러 유익한 정보를 내게 주었다. 우선 차의 종류다. 차는 동백나무과 상록수로서 원산지에 따라 인도의 앗삼종과 중국의 대엽종, 소엽종이 있으며 일본에서 품종을 개량한 야부기다 종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에서 흔히 전통차라고 알려진 것이 사실은 일본의 개량종 야부기다 종이라는 것이다. 이게 왜 문제냐 하면 빨리 그리고 많이 재배하기 위해 비료 농약을 쓰다보니 영 맛이 갔다는 것이다. 본래 차는 파종한 후 8년이 지나야 수확이 가능하다고 한다. 뿌리가 몸체보다 3배가 긴 직근이다. 길게 밑으로 뻗었다는 말이다. 그런 것인데 비료를 주다보니 뿌리가 옆으로 뻗는 횡근이 된 것이다. 실제 국내에서 전통 녹차라고 하는 것의 85%가 이 야부기다 종이며 10%가 비료에 의해 변종된 것이고, 고작 5%만이 순수 자생차나무라 한다.

그리고 녹차라는 것도 말이 안된다 한다. 본시 우리차는 다갈색을 띠며 녹색을 띠면 차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본의 영향 속에 이런 황당한 색을 쫓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흔히 다도라고 하는 형식이다. 이것 역시 일본에서 무분별하게 들여온 것인데, 본시 다도는 편하게 마시면 되는 것이지 특별한 형식이 없다 한다. 이게 참 마음에 든다.
"어떤 수행자가 선원에서 좌선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노스님이 그 앞에 와서 토방돌에 기왓장을 갈았다.
좌선하던 스님이 나와서 왜 기왓장을 가느냐고 물었다.
노스님은 거울을 만들려고 그런다고 했다.
좌선하던 스님이 그래서 거울이 되느냐고 물었다.
노스님은 좌선을 한다고 부처가 되냐고 했다.

이는 좌선하는 것과 부처가 되는 것은 다르다는 뜻이다. 좌선은 형식이요, 부처는 내용이다. 충실한 내용만 있으면 형식은 그때 그때의 여건에 맞추면 되는 것이만 요란하고 찬란한 형식을 다 갖추었더라고 내용이 없으면 너절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어떠한 형식을 취하고 마는 것이 다도가 아니라 차의 근본과 나의 성품을 밝혀서 알아가는 것이 다도이다."

"초의선사는 <茶神傳>에서 우리 조상들의 다도를 정리하여 간단 명료하게 '정조결(精燥潔)이면 다도진의(茶道盡矣)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만들 때 정성을 다하고 저장할 때 건조하게 하며 마실 때 청결하게 하면 다도는 완성된다는 뜻이다."


이왕 초의선사의 <다신전>을 인용할 것이라면 다음의 구절도 기억해두는 것도 좋겠다.
"혼자 마시는 차를 신(神)이라 했으니 신비의 경지에 이른다는 뜻이고, 두 사람이 마주앉아 차를 마시면 승(勝)하다 하여 더 이상 좋을 수 없다고 했다. 또 서너 사람이 모여 마시면 그냥 차가 좋아서 마시는 것이고, 대여섯 이상이 모여 마시면 평범한 음료수를 베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외 차에 관한 이야기들:
다산 정약용: "飮茶興 飮酒亡(음다흥 음주망)

지금처럼 여사무원이나 비서실에서 커피나 녹차를 날라주어 권하기보다 손님이 내방했을 때 주인이 팽주가 되어 손수 도자기 잔에 차를 따라 주어 주객이 같이 마신다면 더없는 최고의 대접이 된다. "

강우방; '만일 내가 차 맛을 안다면 秋史처럼 不二의 禪境에 들었다고 능히 말할 性情을 지니고 있지만,

등의 표현들이 재미 있었다.

어쨌든 차에 대한 이해를 조금은 넓혔으니 소득이 있다. 앞으로 이쪽에 많이 관심을 가지고 싶긴 한데.......

조주 선사의 '끽다거(喫茶去)'화두가 새삼 떠오른다.

"차나 한 잔 하고 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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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 7색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인터뷰 특강 시리즈 1
홍세화,박노자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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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없음'을 격파하는 유쾌한 교양

박노자 외,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한겨레신문사, 2004.




보고 싶은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뤘다. 워낙 스타 필진이 깔려 있어서 보고 싶었던 것이지만, 또한 똑 같은 이유 때문에 미뤘던 것이다. 뻔히 다 아는 이야기이지 않겠느냐는 그런 게으름이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들에게선 배울 게 많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도 그렇지만 그들의 삶 그 자체도 내겐 중요한 영감을 주는 소재였다.

먼저 박노자, <한겨레21> 고경태 기자가 쓴 필진들에 대한 소개에서 고경태는 박노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술은 단 한잔도 입에 못 댄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쾌락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아이 보는 일과 산책 이외의 시간엔 오로지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벌레, 연구벌레다.

연구벌레의 글이어서 그런가. 이 책에 실린 다른 글보다 전하는 게 컸다. 아니 사실은 지금의 내 관심에 가장 부합한다고 말하는 게 옳겠다. 홍세화의 물질적 이기심에 대한 질타나 하종강이 전하는 참된 삶의 의미, 한홍구의 희망의 역사 등도 모두 그 깊은 맛이 있었으나 박노자의 그것이 오늘의 내게는 가장 커다란 관심이었다. 그래서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고구러가 강대국이어서가 아니라 개방과 다양성을 띤 나라라서 좋다는 박노자, 그는 근대 이후에 중앙집권적 국가 권력 강화를 위해 만들어진 '민족'의 허상을 밝힌다. 그러면서 근대와 전근대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시정하려 노력한다.
흔히 우리는 전근대를 모자란 것으로 근대를 모범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다 보니 근대를 빨리 이룬 서구의 가치관이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박노자는 이에 의문을 제기한다. 한국사회 학교.군대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폭력은 전근대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조선시대에서 이어온 악습이 아니라 19세기 말 독일 군대의 훈육방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화되었다가 다시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라는 말이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접대문화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확립된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전근대에 죄를 돌릴 것이 아니라, 근대의 문제부터 들춰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일본의 천황 숭배도 메이지유신의 작품이다. 2600년 전부터 신무천황의 황통을 받았다고 말해지고 있으나 이것은 허구인 것과 마찬가지다. 신문, 군대, 학교 등의 기제가 이런 조작을 강화한다.

열린민족주의에 대한 질문에 대해 그는 동남아 노동자들에게 단 1주일만이라도 입국 자유화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런 민족주의는 진실성을 가질 것이라고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을 질타하기도 한다. 복제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할까.

그의 마지막 인사는 매천 황현의 글에서 따왔다. 원문은 생략하고 번역문만 싣는다.
"고고한 현직을 원하지 말고 가난을 싫어하지 마라
그리고 아름다운 나라를 마음대로 거닐면서 계속 천진한 마음을 가져라."

다음으로는 우리시대의 구라, 한홍구.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마음을 가진 국민들이 이라크 파병에 찬성하는 모순을 아프게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얼마나 기억하느냐, 얼마나 많은 실천이 더해지느냐에 따라 역사는 달라진다"고 희망의 역사를 피력한다.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용기와 실천"
"여러분들의 작은 기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고, 더 확실한 것은 여러분들이 기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죽었다 깨나도 안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홍세화, 아름다운 사람 홍세화 선생의 글이 이어진다.
"사회문화적 소양을 높이기 위한 긴장보다는 물질적 욕구에 일차적 관심을 갖고 있는"한국사회에 대한 아픈 지적. 그러기에 "물신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의 항체를 갖추"라고 말한다. 공화국에 살면서도 전혀 공(PUBLIC)하지 못한 한국사회, 공공적 요구를 내세우면 곧바로 '빨갱이' 매도가 이어지는 한국사회.
그러나 홍세화는 "진보는 느린 걸음"이라며 계속해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죽기 전에 무상의료, 무상교육은 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후배들이 부끄러워지는 대목이다.
그런 세상을 만들려면, 경쟁과 물신주의 대신 연대의식이 자리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소수가 아무리 혁명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다수의 생각을 조금 바꾸는 것보다 혁명적이지 않다"는 그람시의 말을 인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결국 각자는 자기의 존재 미학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삶들을 살길 그는 희망한다.

'너희가 노동문제를 아느냐'며 질타하는 하종강.
그의 말대로 나는 노동문제를 잘 몰랐다. 시민법과 사회법의 충돌에서 제대로 된 사회라면 사회법이 앞서야 하는데도 우리사회는 약육강식의 시민법만이 절대진리인양 춤을 춘다.

"남사당패에서 줄 타는 광대가 부채 하나만 들고 줄에 올라갑니다. 광대의 부채는 언제나 몸이 기울어지는 반대 방향으로 펼쳐져야 해요. 중립을 지켜야 할 것 아니냐, 똑똑한 척 하고 부채를 가운데로 들면 바로 떨어집니다. 그게 양비론입니다.
자신이 하는 말이 얼마나 옳은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우리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 하는 겁니다. 자신의 부채를 어느 쪽으로 펼쳐야 할지 항상 고민하면서 살자는 겁니다. 나는 권력과 자본 그리고 노동자 사이에서 공정하게 중립을 유지할 거야. 이런 건 우리사회에서 불가능합니다. 어느 것이 가치 있는 삶이겠어요?"

정문태, 솔직히 나는 이 사람 이름을 처음 들었다. 국제 분쟁지역 전문기자라고 한다. 전쟁지역을 쫓아다니며 오랜 시간 취재를 했던 사람인 모양이다. 국익을 따라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입장에서 기사를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종군기자'아 아니라 '전쟁지 기자'가 맞는 것 같다.

뒤에 영화배우 오지혜와 팔레스타인 출신 미국인 다우드 쿠탑의 글이 이어진다. "살람" 그 말 뜻은 평화다.
'살람'으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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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의 등은 누가 닦아 드렸을까 - 시골집배원의 섬마을 이야기
함성주 지음 / 월간말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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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주, <내 어머니의 등은 누가 닦아드렸을까>, 월간 말, 2004.




이 달 <말>지가 배달된 시기는 무척 바쁜 때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잡지는 시간이 허할 때 읽는다. 이번 <말> 10월호도 당연히 그랬다. 하지만 일단 배달되면 스르륵 속내용을 훑기는 한다.

그러다가 내 시선이 멈춘 곳은 어떤 기사에서가 아니라 책 광고에서였다.'함성주', 맞다. 이 사람, 얼마 전에 <말>지에 시골집배원의 섬마을 이야기라고 하는 글을 연재하던 그 사람이다. 아, 그 사람 책이 나왔구나!

<말>에서 그의 글을 처음 봤을 때, 이렇게 글을 맛나게 쓰는 사람이 다 있구나 싶었다. 진솔함, 아련한 그 옛 적에의 추억, 현재 시골 어르신들의 생활과 회한. 그러저러한 소재를 묘사하는 그의 세밀함에 여러 차례 감탄을 했었다.

그 능력이 어디서 온 것일까? 그건 단순히 재주가 아니다. 삶의 진솔한 체험과 애정, 거기에서 왔을 것이다. 여유와 낙천이 있으면서도 현재의 자본주의 물질문명에 계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그 스스로 소개하기를 '생태적 자급자족'을 꿈꾸는 자라 하지 않았는가. "내 손으로 집을 짓고, 농사짓고, 나무 심으며, 지구에게 해 끼치지 않고 살다가 흔적 없이 조용하게 죽고 싶"다는 그. 그런 그였기에 이와 같이 아름다운 글이 써낼 수 있는 것 같다.

비유한다면 몇 년 전에 보았던 조선희 선배의 <마흔에 밭을 일구다>를 떠올림직도 하다. 그 분위기가 살아있으면서도 오리지널 토종 시골 출신임이 조선희 선배의 글보다 더 찐한 감동을 준다.

책 제목 그대로 "내 어머니의 등은 누가 닦아드렸을까"처럼 애틋하게 다가오는 글들도 많다. 우리 시대의 어느 어머니가 그런 어려움 없이 살아왔을까 만은 함성주의 글은 그 애틋한 사연을 더욱 실감나게 만들었다. 이건 비단 함성주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모든 어머니에 해당되는 이야기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단순히 자연적 어머니만은 아닐 것이다. 사라져 가는 것들, 물질문명의 편리함 뒤에서 사라져 가는 진정한 가치들에 대한 그리움이리라. "나의 편리함이 가장 중요한 이기적인 나로 인해서" 다른 것들이 죽어 가는 모습들.


"똥 냄새가 난들 어떻습니까. 옷에 똥국물이 좀 튀기면 어떻습니까.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고상해졌고,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거만해졌습니까. 좀 더럽더라도, 좀 냄새가 나더라도, 좀 불편하더라도, 좀 느리더라도 삶의 선택권을 후손들에게 넘겨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다 해먹으려들지 말고 말입니다."

"아까시나무나 엄나무처럼 가시가 많은 나무들은, 다른 동물이나 사람이 손대지 못하게 하려고 날카로운 가시들을 열심히 만들어 댑니다. 그런데 혹시 이것 아시나요? 그런 나무는 사람이나 동물이 닿지 않는 높이까지 자라면 거짓말같이 가시를 만들지 않습니다. 힘들여 가시를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많이 가져 거만한 사람도, 가지지 못해 아픈 사람도, 다투지 않고 더불어 사는 평화로운 고향 땅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런 그다. 평화로운 고향 땅에서 살고 싶어하는 그 사람. 그가 책 날개에 써 놓은 감사의 말 또한 가슴을 울린다.

"내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과 존경하는 지수엄마, 미안한 지수, 새 식구가 된 맑은샘이에게 표하는 감사와 사랑을 이 비좁고 작은 자리에 하는 것이 미안합니다.
당신이 지구의 희망입니다."

자기 마누라에게 '존경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사람, 결코 상투적이거나 가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건, 그의 글을 통해 어느 정도 그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정말 함성주, 당신이야말로 지구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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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친다 - 조선 지식인의 내면읽기
정민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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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미쳐야 미친다-조선 지식인의 내면 읽기>, 푸른역사, 2004.

"그저 주는 눈길에 사물은 결코 제 비밀을 열어 보이지 않는다. 볼 줄 아는 눈, 들을 줄 아는 귀가 없이는 나는 본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다. 워낙 환한 조명 속에 살다 보니 이제 우리는 좀체로 제 그림자조차 보기가 어렵다. 도시의 밝은 불빛 속에는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는 삶이 빚어내는 그늘이다. 그림자가 없는 삶에는 그늘이 없다. 녹슬 줄 모르는 스테인리스처럼, 언제나 웃고 있는 마네킹처럼, 0과 1 사이를 끊임없이 깜빡거리는 디지털처럼 그늘이 없다. 덧없는 시간 속에 덧없는 인생들이 덧없는 생각을 하다가 덧없이 스러져 간다. 도처에 바빠 죽겠다는 아우성뿐이다." 279쪽


올해 봄이었나, 이 책이 나왔다는 소개를 보고는 일단 외면했다. 책 제목이 너무 상업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둔 건데, 며칠 전 한겨레 책 이야기 쪽을 읽다보니 인문서로서는 감히 넘어보기 어려운 6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확실히 상업적 성공을 거둔 책이다. 그렇다면 나는 더욱 외면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책을 구입했다. 미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불혹이라고 하는 40에 와서 혼돈이다. 분명 연초에는 확실히 불혹이구나 하면서 흔들리지 않은 그 무엇인가가 잡힌듯 싶었다. 그러나 왠 걸, 봄 이후에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최악이다. 시사칼럼 문제로 시작된 게 송성대 교수가 나를 형사고발한 것까지 겹쳐져서 그랬나, 세상에 대한 환멸이 커졌고, 그러나가 염세, 그리고 정신수양에로의 관심 이전, 하지만 그러면서도 중심을 잡지 못했다. 그리고 예전에 공부하던 역사에 대한 미련은 크게 남았다.
그러니 불혹은 저리가고 더 커다란 흔들림만 남았다.

물론 흔들리지 않고서 꽃이 필수 없다던가(도종환의 시에 있는 말이던가), 더 큰 도약을 위해 지금의 시련이 있긴하겠지만, 어쨌거나 힘들었고, 그래서 확실히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갈구하고 있었다. 몰입할 게 필요했다. 그것도 단순히 시간 때우는 몰입이 아니라 이젠 정말 인생을 걸어야 할 그 무엇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자각 말이다.

물론 그래봐야 예전에 살아오던 궤도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궤도에 힘을 싣는 일이다. 그 힘을 얻기 위해 조선 선비들, 그 중에서도 미친 조선 선비들의 이야기를 찾았다.

그러나 사실 나의 그런 바램을 이 책에서 찾을 순 없었다. 우선은 내 잘못이다. 본시 불성은 내게도 있거늘 밖에서 찾으려고 시도한 내가 어리석었던 것이다. 특히 조선 선비들의 이야기라면 옛 리듬과 속도로 읽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쓸데 없이 분주한 나의 마음으론 이 책이 전하는 울림을 온전히 받아 안을 수 없었다.

저자는 계속해서 느림의 이야기를 한다. 미친 사람, 자기 분야에 확실히 미친 사람 이야기보다 오히려 중심없이 바삐 돌아가는 현대사회를 욕하기에 더 바쁘다. 물론 그 욕을 먹어야 할 대상 중에는 나도 포함된다.

"정보의 바다는 오히려 우리를 더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할 뿐이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나는 없고 정보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소유한 정보의 양이 늘어갈수록 내면의 공허는 커져만 간다. 주체의 확립이 없는 정보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그만 시련 앞에서도 쉽게 스스로를 허문다. 거품 경제 속에서 장밋빛 미래를 꿈꾸다 갑자기 닥친 잿빛 현실 속에서 그들의 절망은 너무도 빠르고 신속하다." 82쪽

저자의 입장이 이렇게 느리게 관조하면서 읽으라는 것이니, 나의 성급한 욕심 채우기에는 당연히 부족한 책이다. 그러나 사실은 느림이 핵심은 아니다. 느림은 진정한 메시지를 찾아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렇다면 글의 핵은 뭘까? 바로 '주체의 확립'이다. 이게 있어야 미칠 수 있고, 또 그렇게 미쳐야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 일이란 없다. 학문도 예술도 사랑도 나를 온전히 잊는 몰두 속에서만 빛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 한 시대를 열광케 한 지적, 예술적 성취 속에는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광기와 열정이 깔려 있다."(서문에서)
"절망 속에서 성실과 노력으로 자신의 세계에 우뚝 세워올린 노력가들, 삶이 곧 예술이 되고, 예술이 그 자체로 삶이었던 예술가들,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세워 한 시대의 앙가슴과 만나려 했던 마니아들의 삶 속에서 나를 비춰보는 일은, 본받을 만한 사표(師表)도 뚜렷한 지향도 없어 스산하기 짝이 없는 이 시대를 건너가는 데 작은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서문에서)

그런데 사실 나는 그 '미침'을 책 속에서 보다는 제주의 사진작가 김영갑에게서 보았다. 며칠전 나는 그를 다시 만났다.
"이 선생님, 지난 10여 년 동안 제주도나 그 외 관공서에서 어디 저의 사진 한 장 쓴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나를 철저히 외면했어요. 저가 이런 작업을 시작할 때 그들이 나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미친 놈 소리를 했지요. 그러나 지금도 그럽니까? 아닙니다. 이젠 저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 없습니다."
"이 선생님, 멀리 보고 작업하세요. 100년은 아니더라도 30-40년 앞은 내다보고 일을 하셔야 합니다. 시류에 영합하지 마십시요. 외롭더라도 견디어야 합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길은 시작되는 것이니까, 지금부터라도 다시 시작하세요." 내겐 대단한 위안이었다.
미친(狂) 사람 김영갑, 가족도, 건강도 모두 던졌다. 자신의 작업을 위해. 그리고는 일가를 이루었다. 진정 미친(及) 사람이다. 주체가 확고한 사람이다.

계속해서 이 책에서 남는 구절들을 남겨 둔다.
"얻고 잃음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26쪽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출세에 보탬이 되는 말든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신이다."18쪽
"잊는다(忘)는 것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해서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될지, 출세에 보탬이 될지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냥 무조건 좋아서,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한다는 말이다."30쪽

"세상는 재주 있는 자를 결코 사랑하지 않는다"-홍길주가 <김영 전>에서 썼다는 말. 50쪽
"능력 있는 사람이 손가락질당하는 세상, 모자란 것들이 작당을 지어 욕을 하고 주먹질을 해대는 사회"

"대거 사람은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는 데서 뜻이 꺾이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느라 학업을 성취하지 못하며, 마구잡이로 얻으려는 데서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만다"66쪽
-풀어서 저자가 붙인말- 함부로 몸을 굴리고,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청춘을 탕진한다. 무엇이 좀 잘된다 싶으면 너나없이 물밀 듯 우루루 몰려갔다가, 아닌 듯 싶으면 썰물 지듯 빠져나간다.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싫은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어하고 칭찬만 원한다. 그 뜻은 물러터져 중심을 잡지 못하고, 지킴은 확고하지 못해 우왕좌왕한다. 작은 것을 모아 큰 것을 이루려 하지 않고"

-그렇다면 나는 여전히 한 물 한 한국현대사를 죽을 때까지 하라는 말이다. 그 중에서 제주현대사를. 근데 사실 할 건 많을 것이다. 내가 아둔해서 그렇지. 그 아둔함을 이 책에선 김득신의 예를 들면 다시 걱정 말라고 한다.
"기웃대지 않고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성실한 둔재"
"끝까지 가는 노력가는 만나보기 힘들다. 세상이 갈수록 경박해지는 이유다."67쪽


마지막으로 허균이 꿈꾸었던 집을 묘사한 대목이 마음에 와 닿아(아니 내가 나중엔 꼭 그런 집을 가지고 싶어서) 옮긴다.
"넓지는 않지만, 방문을 열면 한낮 해가 제 마음대로 들어와 놀다가는 방, 환한 햇살이 물밀듯 들어와 삶의 그늘을 지워주는 방. 별다른 장식이 없어도 내 읽고 싶은 책은 갖춰두고, 사랑하는 아내와 차를 마시며 독서에 열중할 수 있는 방"136쪽

미치려면(及) 미쳐야(狂) 하고, 그러러면 무엇보다 주체가 확고해야 한다. 근네 난 뭐냐? 불혹에 이리 저리 흔들리는 꼴이라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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