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학과 평화학
토다 키요시 지음, 김원식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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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토다 키요시 지음, 김원식 옮김, <환경학과 평화학>, 녹색평론사, 2003.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내는 <역사교육> 편집진의 집요한 요구에 못이겨, 얼마 전 나는 나를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 응했다. 근데 그걸 보고 전남의 김남철 선생님이 우리 모임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근데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좀 황당했다. 김선생님은 내 인터뷰를 보고 갑자기 먹먹해졌다는 것이다. 내공이 어떻고, 또 무슨 꼴통 등의 표현이 있었는데, 암튼 많이 놀랐다는 것 같다.

나는 오히려 김남철 선생님을 볼 때마다 항상 놀라고, 부럽고, 존경스러워 하는데. 그가 나를 보며 충격이었다니 나는 그게 좀 납득이 안 된다. 아마 나의 사고가 아나키스트의 철학을 담고 있다는 것에서 조금 쇼크였던 모양이다.

요사이 부쩍 더 아나키즘을 생각한다. 도대체 국가란 놈이 무엇인가. 이 생각을 하면 그렇다. 맑스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국가는 유산자들의 위원회일 뿐이다. 그들이 어떻게 하면 적절하게 사회의 부와 권력을 자기들끼리 나누어 먹는가 하는 것을 의논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국민의 동의는 매스컴을 통해 만들어진 조작된 여론과 강제 자발적 동의를 기초로 한 헤게모니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니 그건 진정한 여론도 국민의 의사도 아니다. 다만 기득권 층의 이익을 추수하는 것일 뿐이다.

논의되고 있는 한미자유무역협정도, 군사기지 건설도, 국민을 위한 게 아니다. 국가 안에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나머진 들러리다. 그러니 국가에 무얼 기대하겠는가. 그러니 아나키즘의 정당함은 뚜렷해진다.

'평화', 요즘엔 이 단어가 '사랑'이라는 말처럼 유행가 가사 이상으로 흔해져 버렸다. 진정 무엇이 평화인지도 모르는 채 사용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 평화를 아주 상업적으로 이용해먹는 놈들도 많다. 솔직히 제주도가 평화의 섬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전혀 없다. 장식일 뿐이다. 그래서였나, 나는 한동안 이 좋은 단어를 의도적으로 멀리하기도 했다. 천박해 보여서였다. 그러나 이제 좀 진지하게 다가가고 싶다. 그래서 이 책을 골랐다. 책 제목 그 자체가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은 책이다.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선 '평화'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 개념적으로라도 정리할 수 있었다. 종래 평화의 대립 개념을 전쟁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1968년 인도의 스가타 다스굽타가 <비평화와 악개발>이라는 논문에서 전쟁이 없는 것만 가지고서는 평화라고 할 수 없으며 기아, 빈곤, 질병, 영양실조, 더러움을 특징으로 하는 고난과 궁핍을 비평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뒤 노르웨이의 요한 갈퉁이 1969년에 <폭력, 평화, 평화 연구>라는 논문에서 폭력과 평화를 재정의했다고 한다. "폭력이란 폭력이 눈앞에 있다는 것으로 인해 인간존재가 어떤 영향을 받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신체적, 정신적 실현이 잠재적 실현 이하에 있는 것과 같은 때이다."라고 했다 한다. 다시 말해 "건강, 생명, 행복, 미, 지성 등에서 자기 실현이 방해받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자기 실현을 방해하고 있는 요인 중에서 피할 수 있는 것이 폭력이"라는 것이다.

갈퉁에 의하면 폭력은 '직접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으로 나뉜다. 직접적 폭력이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며, 구조적 폭력은 사회 제도, 관습, 경제적 상태나 법률, 개발 등에 의해 천천히 나타나는 폭력을 말한다. 이건 전쟁이 아닌 상태에서 저질러진다. 환경오염에 의해서, 식량 제재에 의해서 등이다.
그리고 그는 '전쟁 부재로서의 평화'를 '소극적 평화'라고 했고, 그에 반해서 '행복이나 복지나 번영이 보장된다는 의미에서의 평화'를 '적극적 평화'라고 했다. 다시 말해 적극적 평화는 '사회정의의 실현이자 인권의 옹호와 확대이며 고난과 궁핍에서의 해방이다."

그래서 이젠 '전쟁과 평화'가 아니라 '폭력과 평화'라는 표현이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 사실 아프리카 어는 국가에서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것, 이것 역시 분명한 폭력이다. 세계 인구의 20%가 세계자원의 80%를 소비하는 것, 역시 분명한 폭력이다. 물론 그 소비자들에게는 가해 의사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의 소비는 누군가에게 가해의 행위가 되고 만다. 그게 바로 구조적 폭력이면 적극적 평화의 결여이다.

이렇게 평화에 대한 개념 정의를 얻은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물론 중요한 건 실천이다. 그래서인가 이 책의 저자 토다 키요시나 번역자이신 김원식 선생님은 그 구체적 실천을 말한다. 특히 번역자이신 김원식 선생은 1923년 생이다. 그 연세에 여전히 평화, 환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계신다. 살아있는 스승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평화실현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 가능한 것인가. '민주주의와 군대는 모순된다'라는 말에 답이 있다. 이 말은 오다 마코토의 말이다. 어쨌든 이들은 철저히 군대를 부정한다. 군대 그 자체가 폭력의 가능성일 뿐만 아니라 폭력 그 자체라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해 "미국 군대의 개입은 대기업의 이권 확보를 위해서 감행되었다." 이것은 앞서 국가가 가진자들의 위원회라고 했던 데에서 미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한 폭력일 뿐이다. 문제는 그것이 베버가 말한 것처럼 국가만이 그 폭력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다. 국가는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위해 세계 최대의 살인행위를 과감히 저질렀던 것이다.

사람들이 테러는 비난하지만 전쟁은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전은 대부분 테러이다. 1차 대전에선 군인 사망자가 90%였다지만 베트남전만해도 민간인 사망자가 95%였다. 전략적 폭격 때문이다. 군인만 골라서 공격하는 게 아니라 도시 자체를 파괴해버린다. 그러면 민간인의 피해가 극심해진다. 이건 테러다. 전쟁이 아니다. 때문에 국가는 합법적 테러 기구를 보유한 권력인 것이다. 물론 저자는 군대 말고 또 사형제와 담배 판배를 국가에 의해 저질러지는 테러로 규정하고 있다.

최근 미군이 개입하는 대부분의 전쟁은 미국 산업체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미국 역시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저자 서문에 있는 표현대로라면 "지구사회의 불평등을 유지하기 위해서 강력한 군대가 필요하다"라는 것이다. 모두가 미국만큼의 소비를 유지할 순 없다. 그러려면 지구가 대 여섯 개가 더 필요할 것이다. 그럼 미국은 자기들만이라도 그런 소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만을 억압하기 위해 군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말이 좋아 국토 방위이지, 사실은 기득권자들의 자기 이권 유지가 군대 설치의 목적일 뿐이다. 우리 남한 군대는? 뻔하다. 언제 한 번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 철저히 미군에 종속적이다. 아니, 광주 때처럼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해 자국민을 살해하는 경우가 있다. 역시 본질은 하나다. 군대는 국민의 군대가 아니라 권력자의 군대일 뿐이다.

군대가 없는 국가. 꿈이 아니다. 코스타리카는 1871년에 사형제를 폐지했고, 1949년에 군대를 폐지했다. 19세기에 사형제 폐지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서구 선진국 중엔 미국과 일본만이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다. 변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21세기엔 전세계적 차원에서 군대 폐지도 꿈꿔볼 만 하다. 군대가 없는 사회.

간디가 "지구는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에는 충분한 크기이지만, 탐욕을 채우기에는 지나치게 작다" 라고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린다. "단순하고 윤택한 삶", "즐거운 불편"은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허위의 풍요로움을 버린다면 못이룰 것도 아니다. 그럴 때 군대없는 지구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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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근대 망령으로부터의 탈주,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위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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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박노자,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한겨레출판, 2007.



박노자의 글. 내가 좋아하는 글이다. 박학다식 앞에서는 주눅들 수밖에 없지만,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선 고마움을 느낀다. 사상적으로 분명 나는 그에게서도 영향을 받고 있다. 민족을 넘어, 국가라는 족쇄를 넘어, 평화적 아나키스트임이 분명한 그.
그의 그런 시선 때문인가 동아시아가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 특히 근현대사에 대해선 나도 한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전혀 아니다. 관점이 달라지니 전혀 몰랐던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제목부터가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다. 한국사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역사까지 훤히 꿰뚫는다.
특히 티베트의 역사, 달라이 라마와 미국 부시와의 관계 등을 읽을 땐 완전히 뒤통수 맞은 기분이었다. 티베트는 오리엔탈리즘으로 활용하기에 딱이다. 그의 말 그대로 “이슬람권과 달리 유럽과 경쟁한 역사도, 유럽의 본격적인 식민 지배를 받은 적도 없는 그야말로 ‘경계선 밖의 오지’, ‘우리’에게 저항한 적이 없는 ‘그들’을 영적 스승으로 받아들이기에 별로 거리낄 게 없었다. 근대성에 회의를 느낀 지식인들이 신좌파 등 ‘불온사상’에 빠지는 걸 막으려했던 미국 등지의 주류 보수주의자 입장에서도, 1959년부터 망명하여 대중국 독립투쟁에 나서면서 미 정부의 지원에 의존해야 하는 달라이 라마가 서구 지성계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미 중앙정보국이 티베트를 활용하며 중국을 견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불교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다시 결심하게 된 건 김명식이다. 그의 말대로 1930년대 최고의 논객인데도 좌파 지식인들마저 무관심하다. 그에 대한 평전도 그리고 전집도 없는 게 현실이다. 다시 생각해도 그건 말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건 해야 한다. 살아 있는 후손의 의무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책무다.
우장춘에 대한 이야기도 신선하게 읽었다. 일본인 어머니. 그래 우리 사회는 지독히도 인종적 차별이 심하다.
그가 건져낸 여성의 역사도 눈여겨 볼만하다. 여성을 다룬다고 다 여성사가 아니다. 관점이 달라야 여성사다.
그의 기본적 관점, 민족, 국가를 넘어 계급으로 사회를 보는 시선, 그렇다. 붉은 악마의 그 열정이 다 사그라지고 나면, 남는 건, 여전히 청년실업이다. 양극화의 극대화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라니.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 ‘우리’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인왕경>에서 이야기하는 ‘호국’이 “승려의 참전이 아니라 왕이 삼보를 받들고 계율을 지킨다면 나라는 불·보살의 가피력으로 저절로 지켜진다는 의미”라는 해석도 신선했다.
글 속에 피가 섞여 있지 않으면 문학의 성립되지 않는다는 니체의 이야길 인용한 것도 심장을 때렸다. 요즘은 대부분 그렇다. 피가 섞이기는커녕 돈을 쫓는 얄팍함만이 풍긴다.
어쨌거나 “각종 규율로 우리의 내외면을 구속하는 한편, ‘소비’라는 달콤한 당근과 ‘대중문화’라는 신종 아편으로 우리를 부단히 유혹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순치되어 주체적 인간의 뿌리인 ‘반란성’을 상실한 동아시아인으로서 우리가 새롭게 지향해야 할 ‘반란자적 모습’을 찾기” 위해서도 그의 뼈아픈 지적을 아로 새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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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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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그린비, 2007.



웬만해서는 책의 타이틀을 그대로 내 글의 제목으로 삼진 않는다. 자존심이 있지. 그런데 이번엔 그대로 달았다. 고미숙 선배의 내공 한 방에 그대로 내가 쓰러졌기 때문이다. 직접 만나보고 가르침을 받고 싶은 선배다. 무림의 고수. 그건 수유+너머 사람들이 즐겨 쓰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암튼 그의 내공에 대해서 한 초식 배워야겠다.
책 분량이 그리 많지도 않다. 가볍다. 그래서 만만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웬걸. 책의 모든 쪽마다 줄을 그으며 읽어야 했다. 접어놓은 곳이 너무 많아 너덜거릴 정도다. 쉬우면서도 ‘알기’가 박힌 책. 내가 원하는 책이다.
공부를 왜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공부가 무엇인지, 공부가 왜 삶을 행복하게 하는지를 질리지 않게 풀어간다. 그의 말 그대로 강요가 아니다. 계몽과 훈육이 아니다. 단지 ‘촉발’이며 ‘전염’일 뿐이다. 그의 공부 태도와 실력도 본받고 싶지만 그가 꾸리는 그 ‘앎의 코뮌’도 너무 너무 부럽다. 내가 꿈꾸는 공부하는 공동체의 본보기다. 서울이라서 가능했던 일일까. 제주에선 그 비슷한 흉내를 문화포럼에서 내긴 하는데, 아무래도 아니다. 문화포럼은 다양하고 역량이 있긴 하지만 ‘알기’가 없다. 폐부를 찌르는 그 긴장이 없다. 밋밋하다. 그래서 내가 적당한 거리를 둘 수밖에. 하긴 그것만으로도 부럽긴 하다.
언젠가 나 역시 고미숙이 말하는 그런 코뮌을 꾸리고 싶다. 우리 역사교사모임이 아마 바탕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기 전에 먼저 그런 코뮌을 만들려면 공부부터 해야 한다. 왜? 공부가 전부이니까.
현직교사인 내가 공부를 말하는 건 이유가 달리 있지 않다. 고미숙도 지적하듯 한국의 학교엔 공부가 없다. 다만 성적이 있을 뿐이다. 출세와 돈을 위해, 논술고사를 위해 머리를 쓰는 건 공부가 아니다. 그건 그저 천한 노역일 뿐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연애와 고시 외엔 관심이 없고, 교수들은 수당 적잖이 주는 회의와 프로젝트 외엔 관심이 없다.” 그러니 그런 대학에도 공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미숙은 현재 애들이 하는 공부의 본질을 정확히 집어낸다. 그러면서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까지 깨우쳐 준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출세를 못해서 안달하는지 아니? 다 외로워서 그런 거야. 사람들 ‘속에서’ 폼 나게 살고 싶으니까 돈이나 권력으로 사람들을 계속 자기 옆에 묶어두려고 하는 거야. 헌데, 실제론 출세를 하면 할수록 더더욱 ‘왕따’가 된다는 게 문제란 말이야. 그건 또 왠 줄 아니? 열심히 돈과 권력을 좇아 살다 보니, 친구들의 존재를 홀라당 까먹어 버린 거야.” “호모 쿵푸스가 되면 출세를 위해 안달할 필요가 없어. 돈과 권력 따위는 오히려 걸림돌일 뿐이지. 인생과 우주에 대한 진검승부를 펼칠 수 있는데, 그따위가 무는 소용이 있겠어.” 차원이 다르다. 생활인은 아둥바둥 돈을 좇아가는데, 고미숙은 그 차원을 우주까지 확대한다. 허풍? 그럴 수도 있겠다. 고수가 되기 전까진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논리대로라면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네 德不孤必有隣”라는 공자님의 말씀과 같다. 돈과 권력으로 외로움을 극복하려다가 오히려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된다. 덕으로 공부로 쌓아갈 때 외로움은 사라진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그의 말대로 “먹고 번식하는 일이야, 뭐 박테리아도 하지 않는가. 적어도 공부라고 하면 존재 자체가 특별한 단계에 도달하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파트를 예로 든 것도 적절하다. 그 고품격의 아파트. 하지만 실제 그 아파트에 사람이 지내는 시간은 아주 짧다. 잠 자는 시간 빼면 하루에 얼마 안 된다. 그러하면 럭셔리한 가구를 모셔두는 공간에 불과해진다. 이렇게 우린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가 말하는 진짜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란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미숙은 홍대용의 글을 인용한다. “크게 의심하는 바가 없으면, 큰 깨달음이 없다.” 다시 고미숙의 말, “고로 질문의 크기가 곧 내 삶의 크기를 결정한다.” 그 큰 질문을 가지고 이 책을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1장은 학교 공부에 대한 비판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성적과 경쟁, 성공의 신화만이 판치는 정글에 내몰린 채, 끝없이 이지는 철인 5종 경기를 방불케 하는 각종 장애물 넘기를 강요받지 않는가. 방법은 오직 하나. 정글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뿐.”
사실 1장의 핵심 내용이 새로운 건 아니다. 설득력 있게 글을 썼을 뿐. “오로지 경제적 가치 외에는 아무 것도 사유하지 못하는 지적 주체들을 길러내고” 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그의 말대로 “공부는 무엇보다 자유에의 도정이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 나아가 습속의 굴레에서 벗어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그게 진짜 공부인 것이다. 백 번 맞는 소리. 그러니 공부는 “그 자체로 존재의 기쁨이자 능동적 표현”이다.
그러면 어떤 자세라야 하는가.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 꾸준히 밀고 가는 恒心과 늘 처음으로 돌아가 배움의 태세를 갖추는 下心, 공부에 필요한 건 오직 이 두 가지뿐이다.”
물론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뒤에서 고미숙이 말하듯이 스승과 도반이 있어야 한다. 스승, 도반, 청정한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코뮌'. 그 속에서 진정한 스승은 도반이 된다. 그래서 그의 표현 그대로 그에게 있어서 연암 박지원은 師友가 된다. 師友라. 내겐 그런 존재가 있나. 다시 또 부럽다.
근데 현실에선 엉터리 공부들이 횡행한다. 다이제스트판 공부. 이건 내공을 쌓지 못한다. 그냥 무늬만을 만들 뿐이다. 앞에선 폼이 날지라도 금세 탄로 난다. 그러면 믿음은 더 떨어진다. 그러니 결국 이건 헛짓. “책을 통해 탐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터넷에 떠다니는 검색 다발일 뿐”인 공부는 공부가 아니다. 이렇게 스스로 질문하지 못하니 겉은 화려해도 속은 빈다. 그 결과 “자립적 활동력을 상실한 채 제도에 길들여진 노예”가 된다.
이걸 이겨내려면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강도 높은 학습과 토론이 있어야 한다. 학습 없는 토론은 “아주 유치한 수준에서 헛바퀴만 돌 따름이다. 대학에서는 이런 문제가 이미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중략) 지금의 대학생들은 삶과 사회에 대한 물음이 없다.” 얄팍해져서 그렇다. 그러기에 “신체를 육박해 들어오는 절박한 질문이 없다면 그저 값비싼 레저를 즐긴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에 많은 공감을 보낸다.
그럼 어떤 책을 읽어야 하나. 하긴 요새 내가 우리 학생들 책 읽으라 닦달했더니 그저 해리 포터 수준이다. 한심. 고미숙도 지적한다. “일단 나보다 훨씬 폭넓게, 강렬하게 살았던 분들이 쓴 책” “생명의 역동성이 살아 숨쉬는 책, 생사를 가로지르는 원대한 비전이 담긴 책”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는 책, 한 시대의 통념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한 책, 마주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책”이다.
고미숙이 처음 대학원 다닐 때 선배들에게서 들었던 조언도 음미할 만 하다. 먼저 ‘차이를 구성하라.’ 즉 너 자신의 눈으로 보라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 텍스트와 온몸으로 마주해야 한다. 과녁을 향해 달려가는 화살처럼.
다음엔 논리적 일관성이다.
그리고 자기 비움이다. 그가 늦게 서야 맑스를 받아들였던 때의 심경을 쓴 부분은 군더더기 없이 생생하다. “적을 공격할 때는 폐부를 찌르듯 예리하고, 프롤레타리아의 현실을 폭로할 땐 눈물겹게 애절했으며, 혁명의 파토스를 고양시킬 땐 말할 수 없이 힘찼다.” 그게 맑스의 글이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의 철학, 그 한 대목을 소개한 것도 유익했다.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에게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그래서 “누구나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고. 공부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공부하는 순간, 공부와 공부 사이에 행복이 있는 것이지, 미래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이자 이유, 그래서 그의 표현대로 “공부는 존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기에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라는 기막힌 선동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공부라야 소외가 없다. 노동도 마찬가지다. “노동해방이란 중산층처럼 사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이다. 소외된 노동이 아닌 자유로운 활동을 능동적으로 창안할 수 있는 노동, 그것과 같은 공부, 이건 ‘자율적 존재’가 할 수 있는 공부다. ‘중산층적 안락’을 위해 ‘삶으로부터의 소외’를 겪는다는 건 억울하다. 물질을 누리기보다 섬기는 짓,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삶을 산다는 건 정말 억울하지 않은가. 공부도 마찬가지다. 자본을 위한 공부는 이미 공부가 아니다. 삶의 궁극을 묻는 게 진짜 공부다.
또 최고의 좋은 운세는 “운명을 사랑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그 ‘계몽’과 ‘훈육’을 거부한다. “계몽이 아니라 촉발, 훈육이 아니라 감염” 말은 쉽지 실제는 어렵다. 그래도 이게 정답이다. “성인이란 남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존재가 아니라 남보다 앞서 부지런히 배우는 존재”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공부는 위아래 없이 서로 감염시키며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말대로 “왜 가족 간의 사랑과 화목은 늘 스키장이나 화려한 외출, 해외여행 따위로 표현되는가?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부모 자식 혹은 친척들이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왜 상상조차 하지 않는가?”모르겠다. “가장 싸게 가장 밀도 있게 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스승이란 따로 있지 않다. 스승이란 “가장 열심히 배우는 이다.”
그런 것 말고, 읽어가다 예전에 나도 그리 생각했던 걸, 고미숙이 썼기에 공감하며 옮긴다. “‘섹시하다’는 건 ‘난 너한테 성욕을 느껴’, ‘난 너랑 자고 싶어’ 이런 표현이 아닌가. 대놓고 이렇게 말하면 성희롱이 될 수 있는 말이다. 헌데 모든 매체에서 이 괴상한 낱말을 시도 때도 없이 밥 먹듯 써대고 있다. 게다가 듣는 이들은 수치심은커녕 오히려 최고의 찬사로 받아들인다.(중략) 섹시미의 무한질주? 그럼, 서로가 서로에게 성욕만을 느끼는 시대가 도래할 것인가” 삶은 사라지고 몸만 남는 시대, 성찰이 없어서 그렇다.
몇 가지 덧붙이는 생각. 수유+너머의 중요한 강사 한 분이 정화 스님이라 그런다. 예전에 곁에서 항상 뵐 때 한 초식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어찌하다 그냥 보냈을까. 그 분의 책만 받아 놓고 그냥 있다. 어려운 책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게 때가 있는 법. 인연을 그냥 흘러 보낼 수밖에 없었던 건 내 그릇의 크기가 그만큼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일 터.
또 하나. 수유+너머의 식생활이 채식이라고 한다. 반가움. 더 설명 안 해도 채식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느낌이 닿는다. 토요 서당 때 애들 밥 먹이고 나서 빵 한 조각 주고는 자신의 쟁반을 다시 닦아 먹게 한단다. 좋은 방법이다. 빵으로 닦아 먹는 발우 공양, 시도해 볼 일이다.
그렇게 나는 언제가 언젠가 이룰 '앎의 코뮌'을 꿈꾼다. 그 꿈만으로도 행복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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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3-30 16:55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마흔에서 아흔까지 - 행복한 노년을 위한 인생지도
유경 지음 / 서해문집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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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진 자리

유경, <마흔에서 아흔까지>, 서해문집, 2005.



어쩌다 이 책을 손에 들었을까. 아마 <녹색평론>을 읽다가 그곳에서 인용된 어느 구절, 그것 때문에 읽게 된 것 같다. 어떤 내용인지 거의 몰랐다. 그냥 좋은 책일 것이라는 느낌 뿐. 그런데 막상 책을 대하니 내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어느 아나운서 출신의 노인복지 전문가가 쓴 ‘행복한 노년을 위한 인생지도’다. 내용에 흠 잡을 건 없다. 다만 내가 아직 이 책을 읽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
그래서인가 솔직히 가슴에 팍팍 와 닿은 건 아니다. 그래도 생각을 많이 하게 했다. 본래 의도야 ‘내가 나이 들어가면서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 가’라는 데 있었지만, 그것보다 나의 부모님을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초점이 모아졌다. 별 다른 게 아니다. 마음 다하여 부모님 한 번 더 찾아뵙는 것. 그것이면 다다.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다. 알면서도 못했다.
더구나 어제 재일교포 2세 양영희 감독의 <디어평양>을 보고나서 더욱 심해졌다. 부모와 나와의 관계. 그리고 늙어간다는 것. 말보다 생각, 생각보다 몸으로 부모님 찾아 뵈야 하겠다. 그런 것만으로도 이 책 읽기가 내게 준 선물은 값지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하지만 그래도 좋은 구절 몇 옮기는 작업도 같이 하고 싶다.
“그러나 어디 나무가 꽃으로만 존재하는가.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으며 가지가 있고 잎이 있어 나무 아니던가. 겨우내 숨죽이고 있던 나무에서 갖가지 색깔과 모양의 꽃이 피면 그때서야 사람들은 나무에 눈길을 돌리고 한없는 사랑과 경탄의 헌사를 바친다. 그러나 꽃이 지고나면 그뿐, 나무는 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사람들의 눈과 기억의 뒤편으로 물러앉는다. 아니, 나무는 늘 그 자리에 있는데 다만 사람들이 꽃 진 나무에 더 이상 관심과 눈길을 보내지 않는 것. 그러니 꽃 진 나무가 더 푸른 것을 알지 못한다.”
“꽃이 아닌 잎을 통해 푸름을 얻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꽃 피는 청춘의 때에 지나지 못한 것을 비로소 얻게 되는 나이 듦의 선물을 우리는 애써 무시하며”
‘나의 듦의 선물’이라. ‘꽃 진 자리’라. 곰곰이 생각하며 준비할 일이다.
건강 문제도 그렇다. 다 아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제 내 나이면 준비해야 한다. 치료가 아닌 예방을. ‘우리는 늘 잃음을 통해서야 무언가를 얻는 어리석은 존재’이다. 내가 그렇다. 걷기, 올바른 식습관, 금연, 정기적인 건강검진, 숙면. 여기서 나는 걷기, 숙면, 식습관 이것 특별히 잘해야지 싶다. 바탕은 물론 웃음과 감사하는 마음.
버려야 할 것으론 물질에 대한 욕심, 자녀에 대한 집착, 지나간 젊음에 대한 향수라 한다. 아직 내 이야긴 아니다. 하지만 더불어 생각할 일이다. 최고의 노년 준비가 ‘자원봉사’라고 하는데, 슬슬 이 문제도 고민해 둬야겠다.
청소년 이야기도 나온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휘둘러 굴복시키는 일은 자신에게 처참한 일이고 또한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비열한 행동을 하는 법”이라고 한다. 나도 평소에 애들한테 하는 말이다.
죽음에 대해서. “죽음 준비가 전혀 안 되어서 끝까지 발버둥치느라 살아오며 쌓은 덕을 다 망가뜨리고 마는 불안하고 불행한 죽음도 많다. 또한 떠난 뒤의 빈자리가 말끔하지 못하고 흉할 때도 있다. 준비된 죽음은 깨끗하며 인간의 존엄을 느끼게 한다. 죽음의 모습은 먼저 떠나는 사람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선물이므로 반드시 미리 준비해야 한다.”
아름다운 노년을 위해 갖춰야 할 덕목들. 분별력, 원숙함에 바탕을 둔 충고, 지혜, 풍부한 경험 그리고 영적인 성숙까지. 어렵다. 어찌 이런 걸 다.
근데 며칠 전 무슨 회의에 갔다가 유명한 원로와 식사를 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기 자랑. 원로이기에 모든 문제에 있어서 자신이 진리다. 근데 가만히 보니 주변 어르신들이 대부분 그랬다. 아, 이거다. 간디가 말한 “티끌만큼 작아져라”라는 가르침과 달리 자꾸만 부풀리는 게 노년의 특징인 것 같다. 살아온 삶에 대한 긍정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리라. 자기 긍정을 하지 않으면 너무도 괴로울 것이기에. 그러나 진정한 큼은 그게 아니다. 간디처럼 ‘티끌’이 될 때 아름다운 노년이 될 것이다. 이 점 명심하고 또 명심할 지이다.
자주 안 써서 까먹는 나이 이름. 회갑(60), 古稀(70), 喜壽(77), 傘壽(80), 米壽(88), 卒壽(90), 白壽(99), 이런 상식도 다시 확인해 둔다.
저자가 노인대학에서 한다는 말과 노년준비교육에서 한다는 말 두 이야기를 인용하며 마친다.
“자녀는 선물입니다. 어려서 예쁜 짓을 할 때 이미 평생 효도 다 받으셨으니까 호의호식시켜달라 바라지 마시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주면 그게 효도다 생각하십시오.”
“부모님께서 이 세상에 존재하시는 것 자체가 선물입니다. 세상에 단 한 분, 우리를 낳아 길러주신 어머니와 아버지만은 대신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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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낱말편 2
김경원.김철호 지음, 최진혁 그림 / 유토피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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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감만 깊게 한 국밥

김경원·김철호,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유토피아, 2006.



디자인이 재미있다.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는 제목도 그렇지만 그 제목 중에 ‘국’자와 ‘밥’자만을 크게 키워 얼핏 보면 ‘국밥’처럼 읽힌다. 국밥, 재미있다. 부제는 ‘글이 좋아지고 생각이 깊어지는 한국어 연습장’이다. 이 책을 읽고 정말 그리 된다면 좋겠다. 추천사도 화려하고 많다. 그 만큼 좋은 책이란 말이겠다. 서평도 여기 저기 실렸다. 여러 평이 다 좋다. 그렇게 좋은 책을 내가 마다할 이유가 없다. 특히 “상황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표현력을 기르고 싶은 사람, 문맥에 딱 들어맞는 단어를 구사하고 싶은 사람”을 위한 지침서라는데······.
이 책은 ‘단어편’이다. 나중엔 문장편도 나온다고 한다. 이 단어편에서 다루는 것은 대부분 유사한 의미를 가진 단어를 비교하며 가장 적절하게 쓸 것을 권하고 있다. 예를 들면, 속와 안, 끝과 마지막, 기쁨과 즐거움, 껍데기와 껍질 등등. 아 그러고 보니 이 원고는 예전에 한겨레에 연재가 되었던 것 같다. 맞다. 그 때 많이 도움이 된다 생각하긴 했지만 꾸준히 보질 못했다. 왜냐고? 어려워서.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내가 문제를 풀면 반도 못 맞추기에 짜증이 나서. 그래서 ‘에이, 대충 쓰지 뭐. 뜻만 통하면 될 거 아냐, 내가 뭐 문필가도 아니고, 그냥 연구자인데’ 하는 생각에서였다. 좌절감 때문에 말이다.
이 책 역시 그랬다. 매번 문제부터 시작한다. 맞춰보라는 것이다. 이번에도 여전이 반 맞추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은근히 부아가 난다. 내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 아닌가. 그래도 참고 봤다. 내 실력 향상을 위해서.
근데, 문제는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헷갈린다는 것이다. 어쩌랴.
이제 다시 마음먹는다. 좌절하지 말자. 평소엔 그냥 쓰다가 혹시 생각이 나면 찾아보자. 찾아보는 사전처럼 활용하면 된다. 이걸 내가 항상 암기하고 있거나 언제든지 바르게 쓸 것에 대해 강박적 생각을 하지 말자. 그냥 편히 생각하다가 찾아보자. 이렇게 정리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암튼 대단한 내공들이다. 이런 비슷비슷한 말들을 어찌 그렇게도 똑 부러지게 분류하고 설득력 있게 해설해 놓았는가. 글쟁이는 이런 사람들이다. 아니, 사상적으로 옳고 그러면서 또한 이런 저자들처럼 어휘를 정확히 골라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난 멀었다. 그래도 정진, 정진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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